인식認識과 억견臆見 / 조경란

  인식認識과 억견臆見 조경란 연일 광화문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들을, 멀리서 혹은 가까이서 지켜보면서 나는 진보인가 보수인가? 하는 질문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진보적이다’ 혹은 ‘진보주의’라는 말은 사회 모순을 변혁하려는 전진적인 사상이나 또는 그렇게 점차 발달하고 있는 모양을 가리키지요. 반면 ‘보수적이다’ 혹은 ‘보수주의’라는 말은 있던 그대로의 습관이나 전통을 중요시하여 그것을 지키려는 경향을 뜻합니다. 얼핏 들으면 둘 다 그럴 듯하여 어느 한쪽을 선택하기가 어려운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래서 이제 이 질문을 진보와 보수의 목적은 무엇일까? 하는 것으로 바꾸어봅니다. 어떤 사람은 진보를, 어떤 사람은 보수의 성향을 선택할 수 있겠지요. 그러나 어느 쪽을[…]

인식認識과 억견臆見
조경란 / 2008-06-30
사순절의 나날 / 신동옥

  신동옥    사순절의 나날 심금心琴 악공, Anarchist Guitar 요들링 사순절의 나날 너는 먼지이니 먼지로 돌아가리라 늙은 신부가 종려나뭇단을 태우며 저녁 미사를 집전한다. 너는 먼지이니 먼지로 돌아가리라 늦눈 사이로 구약처럼 떨기나무 재는 신부의 이마에 내려앉는다. 가시덤불과 엉겅퀴의 식탁 너머로 여자의 붉은 눈이 자꾸만 커간다. 엉덩이로 찬장서랍을 밀어 닫는 버릇은 불운을 가져와요 얼음으로 틀어막힌 부뚜막 틈새로 푸른 연기가 핀다. 실을 잣던 당신의 손은 천 마리의 벌레가 되어 배추 속을 헤집어 놓을 거예요 죽은 새를 든 사냥꾼은 찬 등으로 문을 닫는다. 늦은 밤 칼을 갈던 소리는 커단 폭풍을 몰아올 거예요 아이들은 썰매를 버리고 모두가 사육제의 가면을[…]

사순절의 나날
신동옥 / 2008-06-30
미안해요, 두더지놀이 한 일 / 이규리

  미안해요, 두더지놀이 한 일 이규리 문방구 앞, 500원짜리 동전을 넣고 쏙쏙 올라오는 두더지 대가리를 두들길 때, 가장 순발력 있게 때려잡은 사람이 평론가 김양헌이다. 어떤 사람은 소리만 컸지 두더지가 도망가도록 허탕을 쳤고 또 다른 사람은 어둔하게 방망이질을 했음에도 운 좋게 기본점수를 냈는가 하면 그런 거 잘 못해도 살아가는 데 전혀 지장 없다 위로한 사람도 있었다. 나는 뒤에서 그런 개구쟁이 짓을 보며 내심 점수를 매기고 있었는데, 한 가지 분명한 건 남자들이 뭔가 때려잡는 걸 좋아한다는 사실. 그렇게 낄낄거리며 즐거워하던 모습이라니. 그러던 그, 김양헌의 몸에서 종양이 발견되어 정말 두더지를 잡는 일이 시작되었다.[…]

미안해요, 두더지놀이 한 일
이규리 / 2008-06-30
식탁, 세계화되는 몸의 현장 / 김수이

  식탁, 세계화되는 몸의 현장 김수이 2008년 현재, ‘나폴리Napoli’와 ‘토트네스Totness’는 정확히 반대말이다. 나폴리는 오랜 역사를 지닌 세계 제일의 미항에서 악취 나는 거대한 쓰레기장으로 전락했다. 토트네스는 산업혁명의 한 발상지에서 세계에서 가장 깨끗한 자연주의 마을로 거듭났다. 나폴리는 맹독성 폐기물을 마구 버린 마피아의 쓰레기 사업이 철퇴를 맞으면서 시스템이 마비돼 도시 가득 쓰레기가 쌓여 방화가 잇따르고 있다. 토트네스는 대량 기계와 화학물을 쓰지 않고 자급자족하면서 평화로운 자연의 천국을 이룩하고 있다. 세계적 명성의 나폴리 치즈는 다이옥신이 검출돼 수출길이 막혔고, 나폴리의 관광객은 10분의 1로 줄었다. 토트네스는 빵과 맥주, 옷과 신발 등 유기농 수제(手製) 생산물이 세계인의 사랑을 받으면서[…]

식탁, 세계화되는 몸의 현장
김수이 / 2008-06-30
허구와 진실 / 권리

  허구와 진실 – 남미 여행기(5) 권리 한국인이 남미 여행을 떠날 때 반드시 준비해야 할 물건이 있다. 그것은 ‘중국인 아님’이란 팻말이다. 그것을 큰 가방에 붙이는 것이다. 그럼 아무도 ‘치노 혹은 치나(Chino(a), 중국인)?’ 라는 말을 걸어 귀찮게 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콜롬비아를 여행할 때만은 예외로 해도 좋을 것이다. 왜냐하면 콜롬비아 사람들은 주로 ‘코레아?’라고 먼저 물어 오기 때문이다. ‘치나(China, 중국)?’ ‘하폰(Japon, 일본)?’이란 물음이 건네진 이후에 고개를 저으며 ‘코레아’라고 대답할 필요가 전혀 없단 뜻이다. 그들이 왜 친 한국 성향을 띠는지는 모르겠다. 더 이상한 일이 하나 있는데, 내가 만난 두 명의 타이완 여자들은 거리를[…]

허구와 진실
권리 / 2008-06-30
목격자 / 김휘

 목격자 김 휘 그 놈이다. 나를 쏘아보는 눈. 갈고리 모양으로 긋고 올라간 입술. 놈은 웃는 건지 조롱하는 건지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정말이지 미칠 노릇은 얼굴은 물론 왜소한 체격과 키까지 나와 똑같다는 사실이다. 우체국 마감 시간에 밀려든 사람들로 북적거려 잘못 봤단 생각은 놈을 본 순간 내동댕이쳤다. 손끝에 달린 우편 봉투가 파르르 떨렸다. 봉투 안에 든 위조 주민등록증에 생각이 미친 것이다.   그제 주문 이메일이 왔다. 첨부된 사진 파일을 열었을 때, 나는 기겁했다. 사진 속의 얼굴은 꼭 나였다. 선수금이 입금된 뒤라, 사진을 트집 잡아 주문 취소를 요구할 수는 없었다. 닮은 사람일[…]

목격자
김휘 / 2008-06-30
자전거 / 송하춘

 자전거 송하춘 1 탱자나무 울타리 사이로 내비친 건물은 이층짜리 벽돌집이었다. 시멘트 벽돌집에 탱자나무 울타리가 둘러 쳐진 걸 보면, 원래 오래된 낡은 동네가 한 차례 도시 흉내를 낸다고 낸 것이 이런 모양이다. 그나마 가시 울타리는 그 집 한 군데뿐이다. 다른 데는 말짱 다 블록 담장이거나, 가시 철망이거나, 양기와 지붕 집이다. 가시 울타리고, 블록 담장이고 할 것 없이 오월의 붉은 장미가 지천으로 피어 있었다.   넝쿨져 내리는 꽃줄기마다 정육점 육고기 같은 살점들을 뚝뚝 뱉어 내고, 이런 날일수록 문단속들이나 잘해야 할 텐데, 아닌 게 아니라 탱자나무 골목에서는 방금 정체불명의 두 사내가 수상한 자전거를 끌고[…]

자전거
송하춘 / 2008-06-30
눈빛 / 문인수

 문인수 눈빛 ― 공책      한 소년이 붉은 벽돌 담장에 기대어 땅바닥에 앉아 있다.   해바라기 중엔 베낄 것이, 그려 넣을 것이 마음에 더 잘 보인다.   가느다란 나무 지팡이가 여윈 몸에 하얗게 구불텅 길게 걸쳐져, 어린 소경이 지금 세세히 매만져 머금는 길이다. 외나무다리 내 하나 건너, 고개 둘 넘는 길목마다 아득한 꽃향기에 피어나는 이마가 희다. 근심을 말려 공책으로 쓰는 거다. 자갈 물소리 잎새 새소리, 속눈썹 움직여 또 적고 있다.  하늘타리 “날 잡지 마라, 잡지 마라.” 미역 널다가도 저 파도소리에 실려 한참씩 넋을 놓곤 했다. 섬에서 보낸 일평생, 이제는 다만 지팡이[…]

눈빛
문인수 / 2008-06-30
흙 위를 맨발로 걷는다 / 박경원

 박경원 흙 위를 맨발로 걷는다 일부러 따뜻한 시선을 갖고 싶지는 않군 왠지 거짓 표정은 짓고 싶지 않군 좋은 일만 내 일로 만들고 싶지는 않군 지나치는 당신들을 처음 본 척하고 싶지는 않군 재미로 쓴 시 아름다운 사람의 노래 소리는 노래가 귀가 되어 그 노래를 듣는다 개천에는 흐르는 물 돌멩이의 귀 사람들 입은 옷엔 주머니의 귀 나무 나무 뻗친 가지엔 바람의 귀 아름다운 사람의 노래 소리는 노래가 귀가 되어 그 노래를 듣는다

흙 위를 맨발로 걷는다
박경원 / 2008-06-30
송아지 / 손택수

  손택수 송아지 구들방 윗목 헌 가마니때기에선 두엄 냄새가 났다 두엄 속 씨고구마에 물을 주던 밤이었다 처마 밑 고드름이 한 자쯤 더 길어진 밤 할아버지 옆에선 송아지가 새근거리고 있었다 어미 뱃속에서 툭 떨어질 때 숨을 쉬지 못해 인공호흡을 시켰던 송아지 예정보다 일찍 나온 송아지는 유난히 야위어서, 방에서 사흘 낮밤을 꼬박 곤하게 새근거렸는데 어미 냄새가 아직 가시지 않은 젖먹이 그 보드라운 털에 볼을 부비고 있으려면, 씨고구마 자줏빛 싹 올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저 고구마 싹처럼 송아지 머리에도 머잖아 뿔이 돋겠지 뿔이 돋으면 그도 어미소처럼 사흘갈이 고구마 밭을 매러 가야 하겠지 눈꺼풀을 쓸어내리며[…]

송아지
손택수 / 2008-06-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