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과 ‘슬픔이 담긴 조그만 유리球’ 수집가 / 유형진

 ‘달’과 ‘슬픔이 담긴 조그만 유리球’ 수집가 유형진 취미에 대한 원고를 써 보란 이야기를 받아 놓고도 한참 만에 이 글을 쓰게 된다. 이렇다고 말할 만한 취미가 없는 이에게 ‘취미’에 대한 글을 써야 하는 건 무척 공교로운 일인 것이다. 나는 세간의 취미에 대해선 관심도 없고 취미를 생활에 끌어와 ‘취미생활’을 할 만큼 여유롭지도 못하다. 게다가 나에게 ‘취미’라는 말은 이런 인상을 준다. 어색하게 처음 만난 남녀가 어두컴컴한 카페 조명 아래 홀짝홀짝 다 마신 커피 잔을 만지작거리며 딱히 더 이상 이어 나갈 대화 꺼리가 없을 때 건네는 멘트. “취미가 뭐예요?”    그래서 한심하게도 인터넷 검색[…]

‘달’과 ‘슬픔이 담긴 조그만 유리球’ 수집가
유형진 / 2008-03-31
불빛을 보며 걷는다 / 김을해

  불빛을 보며 걷는다 김을해   불빛을 보며 걷는다. 모두들 서둘지 말았으면. 안과 밖의 구분은 중요하지 않다. 하늘, 땅, 그 사이의 공기, 그리고 세상 처음부터 깜박이던 불빛 같은 것들이 먼저다. 인생은 비밀 투성이라고, 어떤 날은 불빛이 말해 주기도 한다. 그것을 깨달은 사람들 눈에는 저 공기 끄트머리로부터의 바람이 보인다. 한 번이라도 이 기류를 느껴본 사람들 발걸음은 대부분 느리다. 그들 평생의 꿈은 발밑에 숨겨진 태고의 퇴적층을 발견하는 것이기 때문에.   도영도 그런 사람을 알고 있다. 바람을 보았다는 순간에 대해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밤바다를 향해 혼자 걸어 들어가는 기분, 그런 기분이었어요.” 그는 궁금한 것들을[…]

불빛을 보며 걷는다
김을해 / 2008-03-31
우리 집 / 박경철

우리 집 박경철 차가 시 외곽을 벗어나 산자락을 타고 십 여분쯤 달렸을 때 멀리 계곡 중턱에 들어선 하얀 5층짜리 건물을 아내가 손가락으로 가리켜 보였다. 노인 요양 시설이라서 풍광이 좋은 곳에 들어섰구나, 라는 말에 아내는 고개를 갸웃했다. 저것도 일종의 혐오시설이라서 민원에 시달리다 결국은 고립된 지역에 위치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란다. 한적한 시골 산간의 봄경치가 갑자기 을씨년스럽게 여겨진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 떨떠름한 느낌은 아내의 휴대전화가 울릴 때까지 이어졌다. 아내가 차의 속도를 낮추라는 신호를 보내왔다.   “잘못하단 오늘 못 가게 될지도 모르겠는 걸.” 찜찜한 표정으로 전화기 폴더를 접으며 아내가 말했다. “오늘 우리가 모시고 가기로[…]

우리 집
박경철 / 2008-03-31
Delete / 정길연

  Delete 정길연 1 남자는 횡단보도 앞에 서 있다. 붉은 신호등이 초록색 보행 신호로 바뀌기를 기다리는 중이다. 횡단보도를 건너 백여 미터쯤 걸어가다가 지하도를 한 번 더 건너야 한다. 그러고도 5분은 걸어가야 목적지에 닿을 테고. 택시를 탈 걸 그랬나? 사실 약속시간보다 일찍 도착하게 될 것이 싫었다. 예식이 시작될 때까지 참석자들의 눈 밖에 나지 않으려고 어색한 미소를 짓고 있어야 할 걸 생각하면 남자는 등짝이 서늘하다. 그런데 꽉 막힌 도로를 보니 택시를 타는 쪽이 걷는 것보다 시간이 많이 걸리겠다. 그럼 둘러대기 좋을 텐데. 접촉 사고라도 났는지 차들이 꼼짝을 해야 말이죠.   쓴웃음이 나온다. 알다가도[…]

Delete
정길연 / 2008-03-31
첫사랑 / 최용탁

  첫사랑 최용탁 “가다가 출생신고 하고 가지.” 부스스한 얼굴로 미역국을 뜨던 연옥이 기어들어 가는 소리를 냈다. 나가려던 해봉이 돌아서서 잠시 멀뚱히 바라보자, 연옥은 잊었던 일이 생각나기라도 한 듯 옆에 앉아 밥을 먹는 둘째 은영이의 턱에서 밥알을 떼어 제 입에 넣는다. 그러나 정작 팅팅하니 부기가 오른 제 입 꼬리에도 밥풀이 붙어 있다. 해봉은 저도 모르게 짜증이 인다.   “애 이름도 안 지었는데 무슨 출생신고여?” “지난번에 지어논 거 있었잖어유.” 연옥의 목소리가 더욱 기어들어 갔다. 말끝을 올렸다 내렸다 하는 건 늘 하는 말본새지만 오늘따라 짜증을 더했다. “그기 아들 이름이었지, 딸아 이름이었나?” “그럼 아무거나 지어서[…]

첫사랑
최용탁 / 2008-03-31
꽃싸움 / 최두석

 최두석  꽃싸움 봄 숲을 휘황하게 수놓는 현호색과 얼레지는 서로 마주 보고 필 때 가장 선연하다 함께 군락을 이루고 기세 싸움 벌일 때 현호색은 더욱 푸른 보랏빛으로 생생하고 얼레지는 더욱 붉은 자줏빛으로 도발적이다 일종의 꽃싸움 서로 아름다워지려는 싸움이다 자신의 피를 맑게 하고 세상을 더욱 다채롭고 생동하게 하는 싸움이다 친구여, 우리 꽃싸움 하자 위로와 격려로 적당히 다독이거나 추어주지 말고 혼신의 힘으로 꽃대궁 밀어 올려 제대로 한번 겨뤄 보자. 백록담 사슴아 흰 사슴아 나직이 불러 보는데 흰 사슴은 보이지 않고 구름만 자욱이 몰려왔다 흩어지네     조밭을 일구거나 물질을 하는 섬사람들의 꿈속에 나타나 하늘[…]

꽃싸움
최두석 / 2008-03-31
만수 형과 치마저고리 / 장철문

 장철문 만수 형과 치마저고리 만수 형이 개울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흰 치마저고리를 나풀거리는 아가씨가 개울 건너에서 손가락질을 했다 은근슬쩍 마음에 회가 돌아서 수작을 걸어보았지만, 대답이 없었다 대꾸 없이 자꾸 손가락질만 했다 나라고 못할 줄 알고! 만수 형도 똑같이 그 짓을 하기 시작했다 누가 이기나 보자, 온종일 버티고 서서 끝까지 했다 해가 뉘엿뉘엿 슬쩍 본전 생각이 나서 한눈을 팔았다 바람 살랑! 눈에 들어온 것은 뜻밖에 개울 건너 미루나무였다 지나간 장마에 밑동이 넘어간 미루나무 등걸이었다 비닐 뒤집어쓴 마른 뿌리였다 만수 형은 그대로 그 자리에 나자빠져 혼절하고 말았다 날이 까무룩 저물어서야 돌부리나 차며[…]

만수 형과 치마저고리
장철문 / 2008-03-31
흑산도 홍어 / 이재무

 이재무 흑산도 홍어 목포에 가면 흑산도 산 홍어를 먹을 수 있지 묵은 김장 김치 한 장 넓게 펴서  푹 삶은 돼지고기에다가 거름더미에 삭힌 홍어 한 점 얹혀 한 입 크게 삼켜 소가 여물을 먹듯 우적우적 씹다 보면 생활에 막힌 코가 뻥, 뚫리면서 머릿속 하얗게 비워진다네 빈 속 싸하게 저릿저릿 적셔 가며 주거니 받거니 탁 배기 한 순배 돌리다 보면 절로 입에서 남도 창 한 자락 흘러나와 앉은 자리 흥을 더욱 돋기도 하지만 까닭 없이 목은 꽉 메면서 매캐한 설움 굴뚝 빠져나오는 연기처럼 폴폴 새어나와 콧잔등 얼큰, 시큰하게도 하지 사투리가 구성진[…]

흑산도 홍어
이재무 / 2008-03-31
정미소처럼 늙어라 / 유강희

 유강희 정미소처럼 늙어라 나 늙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으리 아직은 늙음을 사랑할 순 없지만 언젠가 사랑하게 되리 하루하루가 다소곳하게 조금은 수줍은 영혼으로 늙기를 바라네 어느 날 쭈글쭈글한 주름 찾아오면 높은 산에 올라 채취한 나물처럼 그 속에 한없는 겸손과 한 번도 가져본 적 없는 하늘의 열매 같은 그런 따사로운 빛이 내 파리한 손바닥 한 귀퉁이에도 아주 조금은 남아 있길 바라네 언젠가 어느 시골 마을을 지나다 잠깐 들어가 본 오래 된 정미소처럼 그렇게 늙어 가길 바라네 그 많은 곡식의 알갱이들 밥으로 고스란히 돌려주었으면서도 정작 자신은 식은 왕겨 몇 줌만으로 소리 없이 늙어 가는[…]

정미소처럼 늙어라
유강희 / 2008-03-31
우리가 소년 소녀였을 때 / 심보선

  심보선 우리가 소년 소녀였을 때 우리에게 그 어떤 명예가 남았는가 그림자 속의 검은 매듭들 몇 개가 남았는가 기억하는가 우리가 소년 소녀였을 때 주말의 동물원은 문전성시 야광처럼 빛나던 코끼리와 낙타의 더딘 행진과 시간의 빠른 진행 팔 끝에 주먹이라는 결실이 맺히던 뇌성벽력처럼 터지던 잔기침의 시절 우리가 소년 소녀였을 때 곁눈질로 서로의 반쪽을 탐하던 꽃그늘에 연모지정을 절이던 바보,라 부르면 바보,라 화답하던 때 기억하는가 기억한다면 소리 내어 웃어 보시게 입천장에 박힌 황금빛 뿔을 쑥 뽑아 보시게 그것은 오랜 침묵이 만든 두 번째 혀 그러니 잘 아시겠지 그 웃음, 소리는 크지만 냄새는 무척 나쁘다는[…]

우리가 소년 소녀였을 때
심보선 / 2008-03-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