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선물은 피를 요구한다 / 최치언

  최치언 어떤 선물은 피를 요구한다 우리는 모두 우측으로 걷고 있었다. 그때 좌측에서 소리가 들렸다  듣지 마라 소리는 계속해서 우리들의 귓전을 때렸다 귓속에서 시뻘건 태양이 타오르는 것 같았다 좌측은 연필의 힘을 믿는다 나무의 치졸함을 믿고  의사당의 순결을 믿는다 좌측은 형제들의 오만을 믿는다 그러므로 좌측은 아무것도 믿지 않는다 우리가 늙는다는 것도 너희들이 여자이었다가 남자가 되고 그리고 여자로 사랑하는 나약한 방식을 믿는다  귀를 도려내라 그리고 우리는 귀 없이 계속 걸었다. 그때 좌측에서 움직였다 보지 마라 움직임은 계속해서 우리들의 눈꼬리를 끌어당기고 있었다 담장의 덩굴이 눈알을 휘감아 낚아채는 것 같았다 그러나.  우리는 계속해서 걸었다[…]

어떤 선물은 피를 요구한다
최치언 / 2008-02-29
너의 거울 / 채호기

 채호기 너의 거울 ― 세기말의 자화상 너는 갇혀 있다. 너만 바라볼 수 있는 너의 거울 안에 너는 갇혀 있다. 네가 잠드는 집과 출근하는 회사, 네가 말하는 언어의 벽들이 너를 감금하고 있다. 무엇보다 그 감옥 안에서 너는 안락함을 느끼고 있기 때문에 도저히 탈출할 수 없다. 아무도 너를 갇혀 있다고 생각하지 않고 너조차도 네가 자유롭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너는 거의 포박되어 있다. ―자기 자신의 감옥, 모국어의 감옥, 자각할 수조차 없는 거울의 감옥! 새 봄이 오면 새 풀들이 자란다. 너의 머리에도 머리카락이 자라고 새로운 언어들이 거품처럼 일어난다. 날아갈 듯 파닥거리는 거품은 희망인가? 비눗방울들은 터지고[…]

너의 거울
채호기 / 2008-02-29
기념일 / 이장욱

 이장욱 기념일 식도에서 소장까지 기념하고 싶은 것들이 많아서 우리는 꼭꼭 씹어 먹는다 위를 기념하고 쓸개를 기념하고 무엇이든 녹이는 침을 기념하고 오늘도 누군가의 기일이며 전쟁이 있었던 날 창밖의 구름은 지난해의 농담을 닮았고 농담에는 피가 부족하다 어제까지 어머니였던 이가 오늘은 생물이라고 할 수 없고 아이는 하루 종일 거짓말에만 흥미를 느끼고 식물들의 인내심은 놀라워 이빨을 드러낼 수 있는 것들에게는 반드시 식도가 있고 외로움이 있을 것이다 지구의 공전이 계속되자 지난해의 농담들이 잊혀졌다 흰 떡 위에 수많은 이빨이 돋아나고 우리는 무엇이든 꼭꼭 씹어 먹고 모두들 별의 속도를 천천히 이해했다 삐라가 있는 골목 소문들은 꾸준히 낡아가[…]

기념일
이장욱 / 2008-02-29
김미선 / 송기역

 송기역 김미선 우편함에 나에게 온 편지는 없고 김미선에게 보낸 편지가 놓여 있다 어느 날부턴가 우편함을 열어 볼 때마다 나는 김미선을 찾고 있었다 몇 해 전 내 집에 살았던 흔하디흔한 성과 이름의 여자 이삿날 보았던 눈보다 주근깨가 먼저 보이던 여자 편지가 이른 날이면 나와 함께 밤을 뒤척이는 여자 마음 다칠까 열어 보지 못한 편지는 어둑한 우편함 속에 며칠씩 잠들다 사라지곤 했다 그런 밤이면 나는 비어 있는 외풍 든 방 한 칸을 김미선이라 불렀다 불이 들지 않는 그녀를 생각하곤 내 방도 불이 꺼지곤 했다 기울임체로 새겨진 편지는 김미선을 찾아 한 달에 한두[…]

김미선
송기역 / 2008-02-29
/ 박형준

 박형준 밤  눈길 위 수목들이 알코올을 뿜어대는 밤이었다 나이테에서 입김을 내뿜으며 달려간 말발굽들 별이 된 밤이었다 공중에 홀려서 수목들은 밤하늘로 잠겨들고 있는 밤이었다 하늘의 얼음장을 깨뜨리는 수목에서 노래가 떨어지는 밤이었다 너무도 살고 싶은 밤이었다 수목 속에서 작은 손가락이 힘줄을 튕겨서 나는 소리 적막한 눈길에 나무가 우는 소리 내 슬픔 하나하나가 당신을 위한 찬양인 밤이었다 불에 타는 은행나무 그녀를 휠체어에 태우고 요양원 복도 끝에 다다랐다 창밖에 은행잎이 불타올랐다 은행잎 속에서 불에 쫓기는 짐승들이 울부짖는 소리가 났다 그 은행나무는 노란 불꽃을 일으키면서도 타지 않았다 뒤에서 휠체어를 밀던 내가 다시 병실로 방향을 바꾸려는[…]

박형준 / 2008-02-29
산수박 / 박형권

 박형권 산수박 할머니는 손자에게 일 시키지 않고 산 아래 밭까지 꽁지 물고 따라오는 것 대견해하시지 털매미 노래가 지글지글 고기 굽는 소리로 들리고 멀리 바다에는 통통통통 전마선 한 척 게으르게 지나가지 혹시 부산에 신발공장에 일 나간 엄마가 고기 한 근 끊어 올지도 모르는 신작로 옆구리엔 땀이 삐질삐질, 배꼽시계가 정오를 가리키지 꼬르륵 꼬르륵 눈치 없게시리 배 안에서는 개구리가 울고 할머니 호미날에는 감자알만한 돌멩이가 이마를 잡고 데굴데굴 구르지 이 꿩 저 꿩 이 산 저 산 구운 콩은 다 먹고 사르르 잠이 찾아오는 묵정밭 길어진 밭이랑을 참다 참다 할머니 산그늘에 들어가 쉬이 소피를[…]

산수박
박형권 / 2008-02-29
영등포 풍경 / 문충성

 문충성    영등포 풍경    서울 시민들 낯선 팔도 잡동사니 시, 군, 면, 이민들 삶을 좇아 유행 찾아   싸구려 몇 푼 일제히 오가는 백화점들 건방지게 살고 있었네 자그만 쓰레기 더미나 무덤처럼 여기저기   누워 있었네 앉아 있었네 하느님 곁에   잠자는 게 꿈꾸는 날 같은 날 전철도 지하철도 오가지 않던 날 이름도 잊혀진 채 깊은 밤 텅 비어 있었네 영등포역은                       방어의 노래       모슬포 앞 가파도로 마라도로 이어지는 바다 거기서 살았네 크고 작은 태풍들 휘몰아쳐도 새파랗게 우리 삶은 축복이었네 왼통 빛이었네 하늘과 바다가 하나였네   어쩌다 가난뱅이 어부 손에 잡혀 시시하게 어디쯤일까 7천 원씩에 팔려 가네 안 팔려 가는 우리는 하얀 배 드러낸 채 나란히 등 깔고 누워 숨 죽여 가네 하나마트 수족관   부연 물속에서 죽음과 죽음 이웃해 눈 뜨고 만리 밖 고향 바다[…]

영등포 풍경
문충성 / 2008-02-29
안전한 배달 / 김주대

 김주대 안전한 배달 늦은 밤 빈 바구니를 실은 배달용 오토바이가 멈추어 서자 ‘파랑새어린이집’에서 오줌을 쌌다는 아이가 울며 걸어 나온다. 오토바이사내를 보고 더 서럽게 우는 아이. 모르는 척 사내는 시동을 걸고 시트에 앉아 중심을 잡는다. 작은 배낭을 멘 아이는 등산하듯 오토바이에 기어 올라가 노란 바구니 속으로 들어간다. 잠깐의 침묵. 오토바이가 움직이고 그제야 아이는 바구니를 움켜잡더니 아빠-아, 하며 헤죽헤죽 웃는다. 사내는 가장 급한 마음으로 그러나 가장 안전한 배달을 위해 따뜻한 밥상이 기다리는 배달처로 삼가 어둠을 달린다. 사내와 아이의 웃음이 골목길에 홱홱 뿌려진다. 결정적 순간 ―정범태 님의 사진집에서    5.16 군사 쿠데타 직후[…]

안전한 배달
김주대 / 2008-02-29
목동, 차차와 함께 배우는 프리미어리그 / 김산

 김산 목동, 차차와 함께 배우는 프리미어리그 나는 소를 키우는 목동, 차차예요 주식으로 리버풀을 먹이지요 아침이면 강가에 방목해서 키워요 유기농 소들은 해외 각지에서 24시간 생중계로 시청도 가능해요 워이, 부르면 전후좌우 멀티플레이를 하며 목책을 뛰어넘는 소, 넘어져도 울지 않고 벌떡 일어나 조직적으로 대열을 맞추는 소, 우리 목장의 슬로건이죠   얼마 전엔 양대 햄공장인 토튼햄과 웨스트햄에서 견학을 오기도 했어요 겨울에 자란 뿔은 할아버지 때부터 가보로 내려온 아스날로 전지해요 여름에는 더위에 지친 소들에게 팥으로 만든 드록바를 먹이기도 하지요 또한 소의 육질을 쫀득쫀득하게 하기 위해 발락을 틀어 주기도 해요 흥에 겨운 암소가 고맙다며 주는 맨유는 후후! 그야말로 고소하고 향긋해요   그런데[…]

목동, 차차와 함께 배우는 프리미어리그
김산 / 2008-02-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