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정거래를 위한 지침서 / 서유미

 공정거래를 위한 지침서 서유미 봄이지만 햇빛이 쨍하고 바람이 불지 않아서 한여름 날씨 같다. 놀이공원에 도착한 모준과 민지는 화창한 날씨와 끝이 보이지 않는 사람들의 행렬에 탄성을 질렀다.  “사람 정말 많다. 오늘 너무 신날 것 같아.” 선글라스를 쓴 민지는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에 맞춰 어깨를 들썩거렸다. “오늘 놀이기구 아주 질릴 때까지 타고 가자.” 모준은 민지의 어깨에 슬쩍 팔을 둘렀다. 가만히 있는 걸 보니 싫지 않은 눈치였다. 모준은 두른 팔에 살짝 힘을 주었다.   놀이공원은 봄나들이 나온 가족들과 연인들, 친구들로 북적거렸다. 모든 놀이기구에 줄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어디에 가도 사람이 넘쳐났다. 모두 놀이공원에 몰려와서 도시가[…]

공정거래를 위한 지침서
서유미 / 2008-01-31
가족사진 / 이은조

 가족사진     이은조     아버지는 감색 양복에 아메바 무늬 넥타이를 맸다. 큰언니가 벨벳 정장을 입고 나왔을 때 나는 아버지를 이해할 수 있었다. 아버지도 가장 아끼는 옷이 양복일지도 몰랐다. 오빠는 회색 점퍼와 청바지 차림이었다. 학원에 갈 때와 다른 점이 있다면 점퍼의 지퍼를 채우지 않았고 무스를 발라 머리카락을 뾰족하게 세웠다는 것이다. 엄마는 남대문 시장에서 산 검은 폴리에스텔 바지를 입고 거울 앞에 섰다. 그 바지는 세 번이나 바꿔온 거였다. 남대문 상인은 바지 팔아 봐야 점심값도 나오지 않는다고 투덜댔지만 엄마는 왕복 차비를 내놓으라고 맞섰다.   엄마가 꽃분홍색 점퍼까지 걸치고 나왔을 때 나는 눈에 힘을[…]

가족사진
이은조 / 2008-01-31
능소화 / 윤재철

  윤재철    능소화 발을 사랑하기로 했다 갈 때는 그냥 살짝 가면 돼 마음능소화 어둠 속에서 담배를 핀다 칠흑 같은 바다의 어둠과 침묵 그리고 소멸하는 시간 속에서 살아오는 허무의 꽃 꿈인지도 모른다 꿈의 꿈인지도 모른다 몽환의 화려한 꽃불 꽃가지 언제부터인가 눈에서 귀에서 검은 입속에서 피어오르는 따뜻한 꽃 웃음의 끝 울음의 끝에서 환히 피어오르는 허무의 꽃 가슴 저 끝에 뿌리박은 듯 뻗어 올라 가슴 가득 뒤덮은 능소화 푸른 잎 속에 피어오르는 주황빛 저 꽃 발을 사랑하기로 했다 발길 닿는 대로 간다 할 때에도 늘 생각이 앞장서 갔다 너무나 오래 걸어 발이 부르터 터질 때도 발보다는[…]

능소화
윤재철 / 2008-01-31
겨울, 압록강 / 정도상

  겨울, 압록강 정도상 집안(集安)에 가서 여자를 찾아야만 했다. 영하 25도의 아침이었다. 칠보산 호텔 주변을 산책하는데, 만주 봉천의 칼바람이 옷자락을 마구 헤집고 들어왔다. 귀는 떨어져 나갈 듯이 아팠고, 코끝은 빨갛게 얼어 따끔거렸다. 아직 행사가 끝나지 않은 것이 가시처럼 마음을 쿡쿡 찔렀다. 어제 밤, 단골 안마사인 미나한테 말만 꺼내지 않았어도 좋았을 걸. 언제나 깊이 생각하지 않고 입이 먼저 방정을 떠는 것이 문제였다. 크게 기대하지 않았는데 미나가 덜컥 같이 가겠다고 해버렸다. 아차 싶었지만 주워 담기에는 자존심이 상했다. 키도 작고 몸매도 가녀린 미나는 집안이 고향인 조선족 처녀였다.   곧 미나가 호텔 앞으로 올 시간이었다. 서둘러[…]

겨울, 압록강
정도상 / 2008-01-31
젖은 신발 / 최명진

 최명진 젖은 신발   문 속을 들어가는 문 속에 들어앉은 때로는 문 속에서 그저 망망대해 문 속에 잠긴 노크 문 속에 잠긴 허밍 문 속에 잠긴 달빛, 캄캄한 하루를 쏟아내는 메마른 장작이 타듯 빗소리로 걸어간 가지런히 놓여진 고요하게 어떤 시간을 말리는 돌 둥그런 여인 둥그런 아버지 둥그런 말하자면 그런 직선들 소금쟁이의 기다란 발끝에서 둥글게 맴돌다 가라앉는 소리 낮은 곳으로 모여드는 흙투성이 눈물 안으로 스며드는 밖으로 얼룩진 하루 이틀 무수한 비로소 뭉클하게 뭉쳐진 안심하고 차일 수 있는

젖은 신발
최명진 / 2008-01-31
그리운 짐승 / 정호승

 정호승 그리운 짐승 나의 폐사지에 살았던 착하고 순한 짐승 부러진 부처님 발가락을 찾아 길을 떠난 이제는 아무리 기다려도 돌아오지 않는 내 그리운 짐승 사람은 죽을 때에 그 말이 착해진다는데 나는 죽을 때에 내 말이 착해지겠느냐 오늘 아침 나의 쓸쓸한 폐사지에 제비꽃은 피는데 배가 고파도 착하고 순했던 그리운 짐승 결빙  결빙의 순간은 뜨겁다 꽝꽝 얼어붙은 겨울강에 가 보아라 흐르는 강물조차 일생에 한 번은 모든 흐름을 멈추고 한 몸을 이루어 밤새워 서로 뜨겁게 사랑하는 순간 고요하다

그리운 짐승
정호승 / 2008-01-31
까치발 세우고 / 전동균

 전동균 까치발 세우고 한창 익어가는 모과나무 아래 떨어져 썩어가는 모과들을 보면 희한한 일이지, 내 혼은  비쳐오는 양광(陽光)처럼 투명해지나니 모과가 떨어진 자리의  모과가 떨어진 만큼 위로 치켜진 나뭇가지들을 향해 까치발을 세우고 쑤욱 손을 뻗치면 아슬아슬한 허공이 무너지기 직전에 잠깐 손끝에 와 닿는 것들, 이것들이 혹 사랑이나 죽음이나 신(神) 같은 것들의 숨결이거나 그림자는 아닐까, 궁금해 하면서 연인의 속살인 듯 황홀하게 더듬으면서 나는 또 생각하지 일찍 떨어진 모과들이 걸어 가야할 먼 길과 아직 끝나지 않은 세상과의 싸움 용서를 빌기에는 너무 이른 가을하늘의 쾌청과 그 속에서 출렁출렁 흔들리는 올가미들을  나는 바보가 되네 올해 갓[…]

까치발 세우고
전동균 / 2008-01-31
푸른 서리 / 장옥관

 장옥관      푸른 서리                                           꽃샘추위 찾아온 아침 거친 피부에 발라 놓은 가루분처럼 흙바닥이 푸석푸석하다. 흙에도 살갗이 있는지 한 겹 길바닥이 얇게 들떠 있다. 성성한 서릿발 재미삼아 밟다가 문득 속이 궁금하여 쪼그리고 들여다보니 광섬유 다발처럼 희고 투명한 유리 기둥이 촘촘 하늘로 뻗쳐 있다. 악다문 옥니 같다. 쇠창살 같다. 누가 이 흙바닥을 달뜨게 만들었을까. 공기의 입술이 밤새 애무하였으리라. 피부가 벗겨지는 줄도 모르고 흙바닥은 가쁜 숨결 몰아쉬며 한기를 받아들였으리라. 하지만 지금은 화농의 아침 환멸 속에 질척하게 흙바닥은 조금씩 녹아내리고 서른하나에 혼자가 된 내 어머니의 공규(空閨)가 또한 그러하여 어머니, 날마다 감옥이었겠구나. 악다문 철창이었겠구나.[…]

푸른 서리
장옥관 / 2008-01-31
내 눈물 속에서 탱고를 / 이은림

 이은림  내 눈물 속에서 탱고를 처음 보는 물고기들이 눈앞을 지나가는군요. 이상할 건 없습니다. 실컷 울고 난 저녁이니까요. 내 안에 있을 땐 분명 내 것이었던 눈물들. 하지만 몰랐어요. 이렇게 많은 물고기들까지 쏟아져 나올 줄은. 취향 참 독특한가 봐요, 내 눈물 따위에 갇혀 살다니. 좀 전까지 펑펑 울어댔던 일은 까맣게 잊고 하늘하늘, 뻐끔뻐끔, 지나가는 물고기들을 봅니다. 때마침 흘러나오는 탱고음악. 햐, 놀랍도록 작위적이네요. 탱고! 한 번도 배워본 적 없는 이국의 춤. 근데 어째서 내 팔다리는 이리도 리드미컬한 걸까요? 지느러미처럼 우아하게 우아하게. 밤새 물고기들은 달빛을 물고 기막힌 턴을 해댑니다. 내 스텝은 달빛만큼이나 가볍고요. 테라스는[…]

내 눈물 속에서 탱고를
이은림 / 2008-01-31
안녕, 치킨 / 이명윤

 이명윤 안녕, 치킨  이번엔 불닭집이 문을 열었다 닭 초상이 활활 타오르는 사각 화장지가 집집마다 배달되었다 더 이상 느끼한 입맛을 방치하지 않겠습니다 공익적 문구를 실은 행사용 트럭이 학교 입구에서 닭튀김 한 조각씩 나눠 주었다 아이들은 불닭집 주인의 화끈한 기대를 와와, 맛깔나게 뜯어 먹는다 삽시간에 매운바람이 불고 꿈은 이리저리 뜬구름으로 떠다닌다 낙엽, 전단지처럼 어지럽게 쌓여가는 십일월 벌써 여러 치킨 집들이 문을 닫았다 패션쇼 같은 동네였다 가게는 부지런히 새 간판을 걸었고 새 주인은 늘 친절했고 건강한 모험심이 가득했으므로 동네 입맛은 자주 바뀌어 갔다 다음은 어느 집 차례 다음은 어느 집 차례 질문이 꼬리를[…]

안녕, 치킨
이명윤 / 2008-01-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