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전한 사랑 / 박철

 박철 온전한 사랑 내가 처음부터 그녀의 몸을 볼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방에 들어설 때 이미 두 눈은 가리어져 있었으며 그저 앞에 벗은 여자가 하나 있으니 그리 알라고 깊이 상상조차 하지 말라고 거칠게 다짐이 주어졌을 뿐이다 몇 해 지나 나를 지키던 이와 조금 통정이 된 후에 나는 겨우 두 눈을 풀 수 있었으니, 아름다웠다 여인의 몸은 미로의 비너스상과 비슷해 보였다 상체는 약간 부실하였으나 참숯처럼 빛나는 검은 피부와 가슴 한가운데 사람이 품은 정이 차돌처럼 박혀 있었다 가지런한 양쪽 팔뚝과 화장기 없는 얼굴 몸심이 드러나는 쇄골미인이었다 하체엔 윤기가 흐르고 있었다 살진 엉덩이가[…]

온전한 사랑
박철 / 2007-12-28
비문 / 안효희

 안효희 비문  그 출입문 한쪽은 앞으로 밀게 되어 있고 다른  한쪽은 뒤로 당기게 되어 있다 때로는 나의 마음이 앞쪽으로 밀어서 문을  열었고 때로는 나의 마음이 뒤쪽으로 당겨서 문을 열었다 바람 한 점 없는 숲 미동도 하지 않는 나무 곁에서  비문은 오랫동안 정지해 있었다 함부로 열어 보일 수 없는 그늘, 약이 되기도 하고 독이 되기도 하는 시간이었다 단단하던 몸, 또렷하던  눈빛 그가 흐물흐물해지기 시작했다 사랑해 미안해 그 말과 말로써 다하는 사랑 마지막 문을 열고 닫았다 혼자서 돌아가는 집, 수백 개의 창문이  덜컹거렸다 뭉게뭉게 구름이 흘러간다 날아가는 것 아니라   멀리 달아나는 것[…]

비문
안효희 / 2007-12-28
초대 / 여태천

 여태천 초대 멀리서 찾아온 당신에게 두 손을 높이 들고 환영합니다. 촛불을 켠다는 걸 잊었네요. 늘 이렇진 않습니다.  당신은 귀여운 맨발이시군요. 겨울입니다. 싸락눈만큼의 부끄러움이 내리는 여기는 가난해서가 아니라 먼 곳이라 너무나도 오래된 곳이라 그렇습니다. 아무것도 내어 드릴 게 없습니다. 당신이 찾아올 오늘은 어제보다 어둡고 당신의 발은 시릴지도 모르고 불안은 고드름처럼 자라 이야기는 끝이 없습니다. 굴뚝과 굴뚝이 꽁꽁 얼어붙은 겨울입니다. 손을 잡아도 될까요. 가지고 오신 약속을 보관할 만한 자루를 찾아 보겠습니다. 이제 그 손은 내려놓아도 좋습니다. 빨개진 코가 드러나지 않도록 왼쪽으로 조금만 고개를 숙여도 그렇습니다. 얼굴이 낯설어지는 여기는 겨울입니다. 신발의 힘 신발을[…]

초대
여태천 / 2007-12-28
건망증, 놓아 주다 / 유안진

 유안진 건망증, 놓아 주다 빈 종이컵과 가고 있는 손목시계와 반쯤 빈 담배 갑과 라이터가 벽돌 위에 모여 앉아 비를 맞고 있다 시멘트벽을 치솟은 철근 한 끝에 누런 타월이 젖은 깃발처럼 늘어져 있다 간이사무실에는 뿔테안경 혼자 긴 나무책상 위에 누워 낮잠을 자고 있다 작업모 하나가 외벽에 매달린 채 빗줄기 사이로 공사장을 내다본다 자갈더미에 개다리 주차한 트럭 문짝에 열쇠 한 꾸러미가 매달려 찬비를 맞고 있다 입구의 가로수 발치에는 설해용 모래주머니들이 비속에서도 서로 기대어 누워 있다 3.1절 오후, 건망증이 놓아 준 다가구주택 공사장이다. 나무의 지느러미 나무의 몸 속에는 세상의 바람이란 바람이 다 들어[…]

건망증, 놓아 주다
유안진 / 2007-12-28
/ 이성부

 이성부 산 더 높이 오르려는 뜻은 맑게 눈 씻어 더 멀리를 바라보기 위함이다 멀리 첩첩산 굽이에서라야 나는 내가 잘 보인다 깔딱고개 내 몸의 무거움을 비로소 알게 하는 길입니다 서둘지 말고 천천히 느리게 올라오라고 산이 나를 내려다보며 말합니다 우리가 사는 동안 이리 고되고 숨가쁜 것 피해갈 수는 없으므로 이것들을 다독거려 보듬고 가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나무둥치를 붙잡고 잠시 멈추어 섭니다 내가 올라왔던 길 되돌아보니 눈부시게 아름다워 나는 그만 어지럽습니다 이 고비를 넘기면 산길은 마침내 드러누워 나를 감싸안을 것이니 내가 지금 길에 얽매이지 않고 길을 거느리거나 다스려서 올라가야 합니다 곧추선 길을 마음으로 눌러앉혀[…]

이성부 / 2007-12-28
돌아와요 거북이 / 이현승

 이현승 돌아와요 거북이 브라질의 해변에서 거북이들이 산란을 할 때 해안가의 집들은 기꺼이 어두워진다 타마르 타마르* 거북이들이 사랑을 나누고 따뜻한 모래 틈에 알을 낳을 때 사람들이 어둠 속에서 고요해지거나 서로의 몸을 더듬는다면 그건 좋은 일 딱히 할 일이 없어서 사랑했다면 그래서 아이들이 학교에서 놀게 되었다면 거북이가 헤엄치는 바다에서 같이 느리게 헤엄칠 수 있다면 그건 확실히 좋은 일 모래와 거북이알과 아이들은 해변에서 서로의 심장이 고동치는 소리를 듣고 엄마와 아빠가 가깝게 집과 학교와 바다가 가깝게 약탈자들은 보호자가 되고 해변의 고요를 감시한다는 것은 멋진 일 그건 거북이가 돌아오는 가장 빠른 길 * 타마르 프로젝트[…]

돌아와요 거북이
이현승 / 2007-12-28
몽야간(夢野間) / 최정진

 최정진 몽야간(夢野間) 네가 꾸는 꿈속으로 들어가려고 네 잠꼬대에게 길을 물은 적이 있다. 시린 몸을 뒤척여서 네가 덮은 것이 이불이 아니라 강줄기임을 알았다. 감은 네 눈거풀 아래로 꽃잎도 아니고 금붕어도 아니고 새의 깃털로 채워진 강줄기가 흘러들고 있었다. 혹여라도 너와 닮은 여자를 볼 때면 나는 그 여자가 안 보일 때까지 몸이 얼어붙는 기후에 속해 있어야만 했다. 불어간 바람을 따라 허공이 한 줄기 파였고 바람 소리가 석순으로 자라났다. 환한 빛에 이끌려 동굴의 입구로 나오면 추위 속에서 떨어 온 나무의 시간만큼 나뭇가지마다 꽃송이가 발자국으로 피어나 있었다.   내가 뒤쫓던 네 흔적은 떠나온 지 오래[…]

몽야간(夢野間)
최정진 / 2007-12-28
세편의 희곡을 통해서 본 ‘과학기술 사회’의 의미 / 김용규

과학기술이 발달하면 개인이 행복해지고 사회가 발전할까요? 얼핏 생각하면 분명 그럴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 문제에는 긍정론에 못지않게 부정론도 팽팽히 맞서 있답니다. 간단히, 황우석 사태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생명공학을 한번 생각해보시죠. 생명공학이 각종 난치병과 불치병들을 치료하여 개인적으로는 삶의 질을 향상시킬 수 있을 뿐 아니라 사회를 발전시킬 수 있으리라는 기대와 믿음들이 있습니다. 반면에 생명공학은 도덕적 가치와 공공의 선을 거스를 뿐 아니라 자칫 심각한 부작용을 낳아 돌이킬 수 없는 결과들을 가져올 수 있다는 우려와 비판들도 역시 거셉니다. 어디 생명공학만 그렇겠습니까? 오늘날 첨단 과학기술들 가운데 상당수는 마치 야누스의 두 얼굴처럼 유익과 유해라는 두 가지[…]

세편의 희곡을 통해서 본 ‘과학기술 사회’의 의미
김용규 / 2007-12-20
아리랑 연구자 김연갑 선생님과의 만남 / 이기인(시인)

            그 누구에게 배운 일이 없음에도 우리는 아리랑이라는 노래를 가끔 흥얼거린다. 또 그 노래가 어딘가에서 흘러나오면 자신도 모르게 흥얼흥얼 따라 부르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아리랑이야말로 우리가 몸으로 들어서 배우고 익혀 또 다시 누군가에게 불러주는 자장가와 같은 존재가 아닐까 싶다. 이처럼 아리랑은 노래이면서, 아쉬움이면서, 따뜻함이면서 미련이 한데 어우러진 우리들 속의 한 노래가 아닌가 싶다. 이것이 아리랑에 대한 이제까지의 내 생각이었다. 이런 아리랑을 나는 과연 어데서 불러본 적이 있을까? 아직은 아리랑을 목 놓아 부를 만한 어떤 계기가 나에겐 특별히 없었던 듯하다. 그렇게 오래된 노래를 어찌 내가 한 순간에 알아차릴 수[…]

아리랑 연구자 김연갑 선생님과의 만남
이기인(시인) / 2007-1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