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끝으로 지구를 돌리다 / 신정민

 신정민 발끝으로 지구를 돌리다 낡은 토슈즈를 신은 거리의 무용수 발끝으로 지구를 돌린다 호두까기 인형이 왕자로 변할 때까지 힘을 준 발끝이 돌아간다 무용수의 몸이 돈다 지구가 돈다 더러워진 날개옷 여기저기 올은 흩어지고 틀어 올린 머리 밑으로 목이 길다 검은 눈 화장 아래 지젤의 이름이 새겨진 하얀 십자가 가볍게, 란 말이 한 바퀴 두 바퀴 어지러운 턴 아웃 스텝을 돌린다 점점 느려지는 춤 지상에 한 점, 발끝으로 서서 돈다 지구가 느릿느릿 돈다 사라진 머리들 필요 없다, 생선손질 하면서 물고기의 머리를 쳐낸다 이제 바다는 더 이상 하늘이 아니다 목구멍 끝까지 올라온 말들 연기로[…]

발끝으로 지구를 돌리다
신정민 / 2007-11-27
세뇌(洗腦) / 양정자

 양정자 세뇌(洗腦)  11월의 북한산은 너무 아름다워 처연했다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곱게 물든 잎새들이 바람에 흩날려 어느새 발밑에 수북수북 쌓이고 있었다 바스락바스락 미끄러운 잎새들을 헤쳐 나가며 우리 장난스런 여러 산악회원들 입에서 자연스레 구르몽의 싯구절이 쏟아져 나왔다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 언제 어디서 우리는 이 시를 익혔던가 교과서에서였던가  자신도 모르게 어느새 이 싯귀에 오랫동안 점령당해 버렸던 우리들 낙엽 진 숲속에선 늘 아무 다른 생각할 여유도 없이 마음속이 온통 이 싯귀로 법석임은 한편 즐겁고도 한편 무서운 일이다 진짜 시인 넓은 평수의 서울 아파트에 살고 있고 경기도 근교에 큰 밭을 가지고 있는[…]

세뇌(洗腦)
양정자 / 2007-11-27
마로니에 / 이근화

 이근화 마로니에 귀청이 찢어질 듯 크게 음악을 틀어 놓아도 귀는 모양을 바꾸지 않는다 무서운 속도로 달려도 오래된 습관들은 나를 떠나질 않고 나무들은 꺾이지 않고 도로 위의 아침은 도로 위의 밤을 벗어난다 응 애 응 애 정확히 우는 아이들도 자라면 모호한 눈물을 흘릴까 울다가 시시해져 시뻘건 눈을 비비며 사과를 먹고 또 사과를 먹고…… 가로등에 부딪히는 나방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읽기에 좋은 간판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우리는 충돌하지 않겠지만 우리는 아무것도 흘리지 않겠지만 우리는 버스의 속도를 이해하겠지만 우리가 매긴 순위를 의심하며 떠오르는 비둘기들 낮과 밤을 날아서 비둘기가 다녀온 곳에서 이곳까지 마로니에 중국인의[…]

마로니에
이근화 / 2007-11-27
달님은 자신을 주머니에 넣고 걷고 있었다. / 이창기

 이창기 달님은 자신을 주머니에 넣고 걷고 있었다.* 전자 모기향의 붉은 눈빛이 나의 불면을 신중하게 지키는 한밤중 잠 깨는 일이 잦다 비스듬히 누운 채로 유리창 우하귀에 드리워진 나무 그림자를 낡은 액자 속의 가훈인 양 바라본다 필경 오래된 책 속에 뿌리를 두고 가지를 뻗은 여백 많은 장자(長子)의 꿈 같은 적막한 먹 그림자 그 품에서  누군가 방금 뛰어내렸는지 나뭇잎 하나가 한숨 쉬듯 흔들린다   언제부턴가 나는     고갯마루 전봇대에 걸린 외등 불빛에 불면의 이유를 댔고 그때마다  달님은 자신을 주머니에 넣고 걷고 있었다.  *일본의 동화 작가 이나가키 아시호(稻垣足穗)의, 『一千一秒 이야기』중에서 따옴.          가슴이 붉은 딱새[…]

달님은 자신을 주머니에 넣고 걷고 있었다.
이창기 / 2007-11-27
푸른 그리움 / 정남식

 정남식         푸른 그리움 저 넓은 그리움을 어떻게 바라본단 말인가 저 넓은 푸른 그리움을 아무리 붉은 혀의 울음으로 울어도 바다는 푸르기만 하다 푸름이 나를 절로 설레게 한다 이 푸름은 빛과 시간을 바꿔 가며 제 빛깔을 바꾼다 바다를 바라보면 볼수록 그리움의 그림자는 오, 사라지지도 않지, 수많은 겹의 물살을 치고 있다 물결의 살내를 저미는 갈매기가 이 바다를 다 볼 수 없듯 이 그리움을 다 그리워할 수 없다 그리움의 끝이 어떻게 지워질 것인가 서녘 해거름에 눈빛 빨갛게 물들어 마침내 별빛에 쏘이다가 어둠으로 푸른 어둠으로 내가 지워지기 전까지         젖는 뿌리 뿌리가 젖는다 오래오래[…]

푸른 그리움
정남식 / 2007-11-27
서러운 힘 / 한영옥

 한영옥 서러운 힘 고립무원, 하늘 얕은 날  초가삼간 방 한 칸에서    끈적이는 장마 기운 떨치려 고추장찌개 칼칼하게 끓여 밥 한 술 겨우 뜨는데 호박 건져 먹다가  감자 건져 먹는데 갑자기 혀끝에서 설컹거리는, 아릿한 당신 이 험한 곳까지 들르실 리 없다고 머리칼도 입성도 후줄근한 채로   이 산봉우리 저 산봉우리만 보다가  장대비 속으로 스며 오신 당신 냄새 겨자씨만큼 맡으니, 서러운 힘 솟는다.   이러했다       자정 넘긴 3시쯤, 열어 두었던 창으로 날카로운 서슬 한 줄기 뻗쳐 와   몸 뒤적거리다 찌지직 방전된다  가슴을 쏘아대며 피어오르는 화염  느닷없이 쏘아대는 이 바깥의  이와 같이[…]

서러운 힘
한영옥 / 2007-11-27
모두 아름다운 목숨이다 / 김해화

 모두 아름다운 목숨이다 김해화 고마리는 마디풀과의 덩굴성 한해살이풀로 물가에 흔하게 난다. 어린 순은 나물로도 먹을 수 있는 매우 향기로운 풀이다. 가을에 희거나 연한 붉은색 꽃을 피운다. 고마리는 수질 정화 능력이 뛰어나서 물 속의 유기질은 물론 색소까지도 정화시킨다고 한다. 어릴 때 내가 살던 마을에는 통시암이라고 하는 마을 공동우물이 있었다. 먹는 물은 물론 빨래며 목욕까지 그 우물에서 다 이루어지고 있었으니 흘러나가는 생활 폐수가 적지 않았을 것이다. 그 물은 30m쯤 되는 좁은 도랑을 거쳐 마을 앞 들판으로 흘러들어 갔다. 그 도랑에 고마리가 빽빽하게 들어차 있어서 가끔 물길 청소를 한다고 도랑을 치우다 보면 도랑[…]

모두 아름다운 목숨이다
김해화 / 2007-11-27
기억과 일상 / 신철하

   이동하는 1967년 상자한 그의 첫 장편 『우울한 귀향』에서 자신의 문학적 생애를 지배할 만한 주요한 키워드를 화두처럼 던지고 있다. 아이가 하나, 들길을 울며 간다. 환한 대낮이다. 나는 걸음을 멈춘다. 웬일일까? 저 아이의 젖은 얼굴은……. 문득 떠오르는 기억이 있다. 그렇다. 나도 저렇게 울고 있었다. 언제였던가? 나의 여행이 언제나 피로한 저녁으로 끝나 버리는 것을, 친구여, 아직은 좀더 용서해 주어야겠다. 아침마다 불안을 느낀다. 내 까칠한 이마로 밀려드는, 그 끈끈한 하루의 무게를 타액처럼 느끼며 나는 애써 몸을 일으켜 보지만, 불면(不眠)과 지나친 흡연으로 해서 오그라든 폐가 푸들푸들 경련을 한다. 지금도 나는 생각한다. 저 어린 날의 기억처럼[…]

기억과 일상
신철하 / 2007-11-27
사막 / 장유정

  사막   장유정 <등장인물> 서(逝)우진 – 男, 30대 초반 정(情)연   – 女, 20대 후반 김(金)제인 – 女, 30대 초반 도(逃)석환 – 男, 40대 초반 동(童)재천 – 男, 40대 중반 성(惺)라경 – 女, 10대 후반 <시간> 아무 시기. 아무 때. 거꾸로 돌아가는 하루.  <공간> Text상의 배경은 몽골의 고비 사막이나 굳이 사실적일 이유는 없다. 다만 이 공연에는 최소 3개의 독자적인 공간이 필요하며 각 공간은 서로 연결되어 있어야 한다. 조명으로 구획을 나누어도 좋고, 정삼각형(무대) 안에 역삼각형(객석)을 넣어 세 개의 작은 삼각형을 연기 공간으로 사용하는 것도 좋다.  끝-1 <한밤1> 동재천과 김제인 ; 김제인의 공간[…]

사막
장유정 / 2007-11-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