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기울어져도 외 3편 / 김해자

  김해자    저는 기울어져도 살 축제 불을 피우다  저는 기울어져도 강 속으로 처박힐 듯 비틀린 포플러 나무, 반쯤 드러난 허연 가랑이 사이로 산뽕나무 몇 줄기 푸르다 곧다 애초에 벼랑에 뿌리내리진 않았겠지 댐이 생기면서 강물은 불어 오르고 흙이 무너져 내리며 발 닿을 길 없는 허공 중 허둥대다 바둥거리다 차츰 물가로 기울어졌겠지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리어, 산다는 건 때로 목까지 차오르는 물살을 견디는 일 무량한 강물 위로 몸의 반쪽 엎어지고 포개지며 수많은 낮과 밤을 홀로 버티는 일      그러던 어느 날 산뽕나무 씨알 하나 날아왔을 테지 하고많은 땅 다 두고 하필이면 거기에 떨어졌겠지 산다는 건,[…]

저는 기울어져도 외 3편
김해자 / 2007-11-30
겨울, 진실의 따뜻한 옷 / 신용목

  겨울, 진실의 따뜻한 옷 신용목 세월은 그 처음부터 한덩어리 한무리로 흘러가고 있을 뿐, 연대와 날짜와 시간을 새긴 것은 숫자를 휘두르는 인간의 어리석음 때문이겠지요. 그로부터 과거와 현재가 생겨나고 안과 밖이 구분되고 거짓과 진실이 태어났는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그저 오래 함께 살아온 땅에 밴 살내를 일러 나라라고 부를 뿐, 특정 연대와 산천을 잘라 국가를 구획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광고와 선전을 통해 희망을 전달하지 않았고, 대리점이나 상점에서 사랑을 사지 않았습니다. 다만 기억 밑바닥에 웅크린 허기를 함께 아파하고 쓰다듬고 나누었을 뿐입니다. 내가 먼 당신에게 다가갈 수 있는 것은 마음의 미끄럼틀 덕분입니다. 푸줏간의 고기처럼 썰리기 전,[…]

겨울, 진실의 따뜻한 옷
신용목 / 2007-11-28
미나리꽝 / 김병언

 미나리꽝 김병언 희규 형이 시집을 냈다. 제목이 ‘미나리꽝’이었다. 나는 실소를 금치 못했다. ‘미나리꽝’이라니! 역시 희규 형다운 발상이었다. 속표지에 적힌 헌사를 보곤 어깨가 들먹이도록 웃었다. 웃다가 눈물이 비어져 나왔다. ‘나의 진정한 벗들, 가련한 그녀들에게 이 시집을 바친다’라고 그는 말하고 있었다. 진심에서 우러나온 말일 것이다. 나는 그 사실을 안다. 그에게 ‘미나리꽝’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에 대해 내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좀더 까발리자면, 그와 나는 ‘미나리꽝’의 어떤 경험을 공유하고 있다.   그 때문에 그와 내가 만났을 때, 어쩌다 누구의 입에선가 ‘미나리꽝’이란 낱말이 흘러나올라치면 둘 다 처음엔 실소를 터뜨리다가 이윽고[…]

미나리꽝
김병언 / 2007-11-28
흑문조 / 김숨

 흑문조 김숨 1 이태 전 남편과 나는 집을 한 채 장만했다. 1980년대 초에 지은 단층 양옥이었다. 그 집을 장만하기 위해 대전의 부모님에게 이천사백만 원의 빚을 져야만 했다. 부모님의 간이나 심장, 폐라도 내다 판 심정이었다. 9월에 그 집으로 이사를 하였다. 이사하던 날 대전의 부모님은 올라오지 않았다. 집 대문과 현관문은 걱정이 될 만큼 낡고 허술했다. 대문은 그렇다 치고 현관문이라도 새로 바꾸어 달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현관문 열쇠만 새로 바꾸었다. 먼저 부모님에게 진 빚부터 갚아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전에 살던 사람들은 거울과 식칼을 버리고 갔다. 밤이 되어도 집이 낯설어 깊이 잠들지 못했다. 사방천지가[…]

흑문조
김숨 / 2007-11-28
누가 죽었어요? / 김하경

  누가 죽었어요?   김하경 1 이순구와 윤상렬, 그리고 김기태는 경기도 이천의 한 마을에서 태어나 함께 자란 초등학교 동창 생이다. 어린 시절부터 단짝이었던 세 친구는 중고등학교와 대학교 등을 거치는 동안 뿔뿔이 흩어져 소식이 끊어졌다가, 결혼을 하게 되면서 연락이 닿게 되었다. 스무 살 후반에 만나 다시 뭉치기 시작한 세 친구는 마흔 뒷줄에 접어든 오늘날까지 한결 같은 우정을 지켜 왔다.   그런데 얼마 전 순구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셔서 이천 고향에서 장례를 치르고 돌아오던 길에 그만 교통사고가 났다. 순구와 상렬은 가벼운 찰과상으로 그쳤지만, 기태는 깨어나지 않아 급히 서울의 종합병원으로 후송했으나 일주일이 넘도록 의식도 없이 코에[…]

누가 죽었어요?
김하경 / 2007-11-28
몽타주 / 배지영

 몽타주  ― 슬로셔터 no.2 배지영 501호 문이 열렸다가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문 앞을 지나는 발자국 소리가 멀어질 무렵 눈을 감았다. 드디어 소리가 사라졌다. 낯선 침묵이 방안을 메웠다. 몸이 눅진하게 녹아드는 듯했다. 옆집 남자가 집을 나간 다음에야 잠을 청할 수 있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또 다른 소리가 신경을 자극할 때까지 얕은 잠에 빠져 있었다. 누군가 문을 두드리고 초인종을 눌러댔다. 내가 안에 있다는 걸 알고 있는 듯했다. 어지간히 끈질겼다.    “누구요?” 불쾌함을 담고 인터폰을 들었다. 모니터 위로 낯선 남자의 얼굴이 떠올랐다. “경찰입니다. 말씀 좀 여쭙겠습니다.” 문을 열었다. 플래시가 터졌다. 눈이 부셨다. 나는 놀라서 얼른[…]

몽타주
배지영 / 2007-11-28
슬픈 호사(豪奢) / 고영

 고 영 슬픈 호사(豪奢) 홍수에 휩쓸려 온 1톤 타이탄 한 대가 다리 난간에 걸쳐 있다. 일방통행 강물에 전복된 저 트럭, 주인만 황급히 피신 시킨 채로, 문짝이 떨어진 채로, 쓰레기더미를 뒤집어쓴 채로, 속력을 잃은 바퀴가 속절없이 급류의 속력을 견디고 있다. 바퀴마저 남아 있지 않았다면 한낱 고철덩어리로 보였을 저 트럭,   수많은 이삿짐과 건축 자재들을 싣고도 위풍당당하게 도로 위를 질주하던 저 트럭, 참으로 황당했겠다, 어안이 벙벙했겠다.  적재정량보다 몇 배나 많은 짐을 싣고도 군말 한 번 없이, 묵묵히, 오직 제 몸뚱어리에 의지해 겨우 건사하던 운명이, 타고난 시지프스의 빌어먹을 운명이  별안간, 정말 본의 아니게[…]

슬픈 호사(豪奢)
고영 / 2007-11-27
먼지 행성의 주민들 / 김언

 김언 먼지 행성의 주민들 우리는 혁명적인 모래사장을 가지고 태어났다 똥을 참아가며 그 연설을 듣는다 어디가 틀렸고 어디가 어색한지 맞춤법을 모르는 소년은 바닷물에 빠져서 허우적댄다 인파를 관리하는 관리는 두 번의 승진을 거친 후에 가족들에게 돌아가는 새끼고양이의 장래를 어루만지고 싶다 조금 더 고통스러운 설문조사가 필요하다고 설득하는 우리들의 낯뜨거운 태양 아래 숨죽이고 하품하는 먼지 속의 유권자 한 명이 살해당하고 돌아왔다 기상 캐스터는 태풍이 오는 것처럼 호들갑스럽다 보이지도 않는데 제주도 남쪽은 벌써 하얗다 머리까지 하얗다 눈썹에도 흰 눈이 내려 백두산을 다 보고 왔다는 사실을 어떻게든 믿으라는 눈치를 나만 모른다고 외면할 수 없는 겨울이다 여름이[…]

먼지 행성의 주민들
김언 / 2007-11-27
마술 피리 / 맹문재

 맹문재 마술 피리 문방구에 붓을 사러 갔다 강원도 태백에서 단식 투쟁을 벌이고 있는 진폐 재해자들의 이름이며 울분이며 외침을 먹을 묻혀 붓으로 꾹꾹 눌러쓰면서 고통을 가져 보려는 생각이었다 문방구 주인은 나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 좋은 일을 한다며 피리 하나를 건넸다 답답한 마음에는 피리를 부는 것이 제일 좋다고 요즘에 나온 것은 기능이 아주 뛰어나 연주 기술도 필요 없고 내고 싶은 소리를 크게 불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었다 나는 주인의 말을 선뜻 믿을 수 없었지만 호의가 고마워 얼른 값을 치르고 라라라, 집으로 왔다 나는 붓글씨 쓰는 것은 미뤄 두고 즉시 피리를 꺼내 나의 울분이며[…]

마술 피리
맹문재 / 2007-11-27
불꽃 / 신달자

 신달자 불꽃 나뭇잎 다 지고 뼈로 선 나무에 왜 불꽃이 보이는지 푸른 피 다 거두어 가고 늙은 갈색으로 삭은 잔디밭 위에 왜 불꽃이 지나가는지 추수 다 끝나고 서리 묻은 지푸라기들 날리는 들판에 왜 불꽃이 타고 있는지 야간 근무를 하고 새벽 귀가하는 이국 젊은이의 졸린 눈에 왜 불꽃이 붙고 있는지 길 좌판에 홍시 몇 개 놓고 짓무르고 있는 할머니 얼굴에 왜 불꽃이 익고 있는지 안녕이라고 이 악물며 돌아서는 여자의 손에 왜 불꽃이 활활 통곡하는지. 송전탑 탄천 강변길 걷다 우뚝 선 송전탑에게 등을 기대면 두 팔까지 쭉 뻗어 내리며 푹 안기란다 하늘까지[…]

불꽃
신달자 / 2007-11-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