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자 / 이상인

 이상인 유자  주먹만한 노란 향주머니들 반짝인다. 가을의 무게만큼 휘늘어진 모습이 풍성하고 탄력이 넘친다. 유자나무가 유자 한 알을 내게 건넨다. 유자나무도 봄부터 천천히, 아주 천천히 누군가에게 받았을 것이다. 그동안 천수(千手)에 매달아 놓고 즙과 향기가 진하게 배어들도록 한 번도 편히 앉거나 누워보지 못한 채 서서 기도하며 공을 들였던 것인데 무엇인가를 받는다는 일은 가꾸는 정성과 다시 전해야 할 책임과 의무가 필요한 것 유자차를 담그려고 껍질을 벗기면 처음 건네준 분의 향기가 진동한다. 노란 맨살에서 쏴아 쏟아지는 말씀들 재어 놓았다가 차를 내면 한 번도 본 적 없는 그 분의 마음이 혀끝을 통해 온몸으로 퍼진다. 나도[…]

유자
이상인 / 2007-10-29
두물머리에 와서 보다 / 이승하

이승하  두물머리에 와서 보다       이렇게 합쳐지는 물도 있는 것이다 어디서 발원한 물이기에 저 상류에서는 강의 모습이 부모한테 버림받은 포대기 속 아기같이 처량했는데 여기에 와서 늙은 어머니의 넉넉한 품이 되는구나 옷을 벗으면 등짝에 흉터가 덕지덕지 남아 있는 사내 젊은 날을 탄광에서 보내고 이제는 질통을 짊어지고 있는 저 사내가 술 마시고 눈 오줌이 강물 속에 섞여 있지 않다고 당신은 말할 수 있는가 그 사내의 에미가 가슴을 치며 흘린 눈물이 그 사내에게 술 따르던 여인이 흘린 눈물이 저 강물 속에 섞여 있지 않다고 당신은 말할 수 있는가 장맛비 지겹게 내리는데 술[…]

두물머리에 와서 보다
이승하 / 2007-10-29
슬리퍼 / 이용한

 이용한 슬리퍼 얼어붙은 입을 간신히 열고 너는 슬리퍼, 라고 말한다 이건 우연도 아니고, 더욱 악몽도 아니다 추워서 입을 뗄 수 없는 현실, 걸어서 다리가 아픈 저녁, 슬리퍼의 주인과는 무관하게 느닷없이 사라진 골목과 발자국의 홀연함 둥둥 떠서 어디론가 가 버린 무중력의 단서들 그것은 분명 구두나 운동화가 아닌 슬리퍼라는 것이고, 슬리퍼가 내다 버린 어떤 고백인 것이다 슬리퍼를 벗어던진 맨발은 이쯤에서 갑자기 증발해 버린 듯 불 꺼진 얼굴만 눈가에 나뒹구는 것이다 슬리퍼를 신고 여기까지 마중했거나 슬리퍼를 팽개치고 도망한 이따위 슬리퍼처럼 뒹굴어도 상관없는 이미 식어 버린 입술과 바람은 골목에 그득하다 차가움이 더 차가워서 얼음이[…]

슬리퍼
이용한 / 2007-10-29
시한폭탄 / 이종수

 이종수 시한폭탄                                     학교 문구점 앞에서 어떤 아저씨가 병아리, 메추리, 오리를 팔았다 병아리는 2천원 오리는 3천원 메추리는 2천원 알 낳으려면 먹으려고 메추리를 샀다 그런데 문구점 앞에서 사는 건 오래 못 산다는 건 안다 병아리가 그랬고 햄스터가 그랬듯이 메추리 안에도 시한폭탄이 들어 있다는 걸 안다 날치알에 밥 비벼 먹다                                                목포에서 제주까지 여섯 시간 걸리는 배 밑바닥에서 더 토할 것 없는 배를 난간에 걸쳤을 때 날치를 보았고 가파도 가는 비 오는 고깃배에서도 날치를 보았다 다시 마라도 가는 유람선에서도 날치를 보았다 날치알에 밥 비벼 먹으며 그 먹먹한 바다를 씹은 듯 혼자만의 밥상[…]

시한폭탄
이종수 / 2007-10-29
괴뢰희(傀儡戱) / 조인호

  조인호  괴뢰희(傀儡戱) 방독면을 뒤집어쓴 채 잠에서 깼네 뭉게뭉게 사람들을 잡아먹는 연기들 꿈속에서 본 사람들 얼굴이 군화 같은 검은 연기 뭉치에 밟혀 뭉개지고 있었네 불은 붉은 튤립 꽃다발처럼 잔인한 총천연색이었네 바닥을 기던 꼬리 달린 연기가 뱀인 양 발목을 물고 달아났네 색을 빨린 사람들은 흑백의 재로 변한 채 스스스 주저앉아 버렸네 바람에 풀풀풀 날렸네 나는 방독면 안에서 풀무질하듯 거친 숨을 쉬었네 불은 활활활 사나워졌네 꿈밖으로 뛰쳐나오기 위해 사람들이 눈꺼풀의 닫힌 문을 탕탕탕 두드리며 울부짖고 있을 사이 훼훼훼 나만 홀로 자물쇠 같은 방독면 안에서 안전했네 방독면에 철컥, 잠긴 얼굴은 그 누구도 알아챌[…]

괴뢰희(傀儡戱)
조인호 / 2007-10-29
풍장(風葬) / 한길수

한길수 풍장(風葬)  빵집이 있는 상가 주차장에 새들이 날아든다 시동 건 자동차가 후진으로 빵조각 쪼던 새를 밟고  빈자리 찾아 들어오던 자동차 그 몸을 눌러 버리더니 더위로 깃털만 남은 형체 옷 벗고 지상에 누웠다  파열된 내장에 앉아 배 채우기 바쁜 파리 떼, 성큼 다가가자 문상객 대하듯 머뭇머뭇 맴돌다 앉아 이내 육신 더듬거리며 단벌 새털로 수의(壽衣)를 잰다 놀라 움찔하게 눈에 들어온 것은 다리에 묶인 끈 누군가 어린 시절부터 옭아매 삶을 잡아둔 흔적이다 몸부림으로 다리의 혈관 눌러 얼마나 절뚝거렸을까  흥겹게 들리는 새소리가 통증이라는 걸 몰랐겠지 옆자리 있던 자동차가 빠져나가며 바람이 일자 매캐한 살 냄새가[…]

풍장(風葬)
한길수 / 2007-10-29
2007 문학나눔콘서트 관람신청 해주세요~! /

2007년 문학나눔콘서트가 오는 11/6(화)에 양재동 현대자동차 사옥 2층 아트홀에서 열립니다.  이번 문학나눔콘서트는 현대 기아자동차 그룹의 후원으로 이루어졌으며,'문학, 자동차와 통하다'란 주제로 열리게 됩니다.  시인, 소설가를 비롯하여 많은 예술인들이 출연하게 되며, 노래, 춤, 인형극 등 다채로운 공연 무대가 펼쳐질 예정입니다.  관람하고 싶으신 분들은 이곳에 댓글로 관람 신청해 주시기 바라며,추첨을 통해 200명을 정하여 초청할 계획입니다.참가 신청은 3인 이하 복수로 가능하며,동행인 인원수와 이름을 표기해 주시기 바랍니다.  (신청하실 때 회원정보의 연락처는 반드시, 연락이 가능한 것으로 고쳐주시기 바랍니다) 기타 상세한 문의는 02)760-4784, 또는 이메일(munjang@arko.or.kr)로 해주시기 바랍니다. 문학나눔콘서트를 기다려 오셨던 회원 여러분들의 많은 참여를 바랍니다.   ● 공연제목 : 2007 문학나눔콘서트[…]

2007 문학나눔콘서트 관람신청 해주세요~!
/ 2007-10-22
윤성희의 <누군가 문을 두드리다> 중에서 / 고인환

    최아영 윤성희의 소설은 삶의 고통을 견디는 독특한 방식을 보여준다.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일상을 묵묵하게 견딘다. 작가는 삶의 고통스러움(무거움)을 드라이한 문체(가벼움)로 말린다. 이 무거움과 가벼움 사이의 경계를 응시하는 시선에 의해 윤성희의 작품은 빛을 발한다.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한결같이 고독하다. 이 고독은 그의 작품에 독특한 문양을 주조하고 있는데, 거의가 가족 관계의 단절에 의해 발생한다. 윤성희의 작품에 드러나는 가족의 상실로 인한 고통은, 삶의 고통과 본질에 대한 깊이 있는 천착을 가능하게 함과 동시에 우리 시대의 황폐한 삶을 생생하게 재현하는 데 기여하고 있다. 소설의 인물들은 나지막한 목소리를 낸다.[…]

윤성희의 <누군가 문을 두드리다> 중에서
고인환 / 2007-10-18
전성태의 <강을 건너는 사람들> 중에서 / 고인환

    이현용 탈북자들의 삶을 다룬 소설은, 늘 마음 한구석을 불편하게 한다. 가슴 속에 꾹꾹 눌러두고, 끄집어내기 싫은 그 무엇을 소환하기 때문이다. 어느 사회에서나 ‘인간답게’ 살기는 어렵다. 사람은 누구나 허위의 가면을 쓰고 살아가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탈북자 소설에서 인간의 ‘맨얼굴’을 만난다. 이를테면, ‘미국-한국(남한)-중국(조선족)-북한’ 순으로 서열화되는 문명의 야만 같은 것 말이다. 문명·문화 나아가 인간의 존엄성(다양성)조차 집어삼키는 근대의 괴물 앞에 어찌할 바를 몰라 바르르 떠는 나약한 인간의 내면을 만날 때 우리는 슬쩍 눈길을 돌린다. 이 때문에 마음이 편치 않은 것일까? 필자는 최근의 북한 소설을 접해 볼 기회가 여러 번 있었는데, 북측의 관점에서[…]

전성태의 <강을 건너는 사람들> 중에서
고인환 / 2007-1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