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의 이야기 / 이재웅

L의 이야기 이재웅 몇 주 전이었다. 나는 P형에게서 전화를 받았다. 자기 집에서 술자리가 벌어졌고, 또 박 모며, 김 모 등도 함께 있으니 시간이 나면 자신의 집에 들러 술 한 잔 하고 가라는 것이었다. 우리는 평소에도 그런 일로 서로의 집을 왕래하곤 했었다. 나는 마땅히 할 일이 없던 참이었다. 그러겠노라고 했다. 나는 옷을 갖춰 입었고, 슬리퍼를 꿰찬 다음 현관을 나섰다. 시간은 밤 열 시를 막 넘어서고 있었다. 둥근 달이 떠 있었고, 주인집의 개가 그 달을 보고 짖다가 멈췄다가 다시 짖곤 했다. 마당의 잔디는 검게 젖어 있었다. 간간이 팔월의 후텁지근한 바람이 얼굴을 덮어[…]

L의 이야기
이재웅 / 2007-10-31
산란탑 / 이우현

 산란탑 ―채금조합 1 이우현 태훈은 핸드폰을 들었다. 두 시였다. 애인의 번호가 저장된 단축번호를 눌렀다. 아무런 신호음도 들리지 않았다. 모를 일이었다. 통화권 이탈인가 싶어 김의 것을 빌렸는데도 마찬가지였다. 담배를 한 대 피우고 술이 두어 순 돈 후에 태훈은 다시 시간을 확인했다. 두 시였다. 뭔가 이상하게 일이 진행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자 더는 술을 마실 수 없었다. 김과 택시 기사는 접대부를 끌어안고 웃어대고 있었다. 태훈은 김에게 술을 그만 하라고 넌지시 말하고는 조심스럽게 일어나 룸 밖으로 나왔다.   여자는 기다렸다는 듯 태훈을 맞았다. 이전과 달리 그녀의 표정에는 웃음이 사라지고 없었다. 말없이 서로의 눈만 바라볼 뿐이었다.[…]

산란탑
이우현 / 2007-10-30
포옹 외 3편 / 정호승

  정호승    포옹 허물 나팔꽃 군고구마 굽는 청년 포옹 뼈로 만든 낚시 바늘로 고기잡이하며 평화롭게 살았던 신석기 시대의 한 부부가 여수항에서 뱃길로 한 시간 남짓 떨어진 한 섬에서 서로 꼭 껴안은 채 뼈만 남은 몸으로 발굴되었다 그들 부부는 사람들이 자꾸 찾아와 사진을 찍자 푸른 하늘 아래 뼈만 남은 알몸을 드러내는 일이 너무 부끄러워 수평선 쪽으로 슬며시 모로 돌아눕기도 하고 서로 꼭 껴안은 팔에 더욱더 힘을 주곤 하였으나 사람들은 아무도 그들이 부끄러워하는 줄 알지 못하고 자꾸 사진만 찍고 돌아가고 부부가 손목에 차고 있던 조가비 장신구만 안타까워 바닷가로 달려가 파도에 몸을 적시고 돌아오곤 하였다 허물  느티나무[…]

포옹 외 3편
정호승 / 2007-10-30
처용 강정 / 김소연

 처용 강정 김소연 나는 강정의 고향집 남해에서 잠을 잔 적이 있다. 강정의 부모님이 쓰시던 안방에서. 오른 편에는 장롱이 있었고 머리맡에는 문갑이 있었고 왼편 위쪽에는 누군가의 시가 쓰인 붓글씨 액자가 걸려 있었고, 소설 쓰는 선배와 후배 사이에 내가 누워 있었다. 보송보송하게 비누 냄새가 나는 정갈한 이불을 덮고 누워서, 강정이 쏙 빼닮은 강정 엄마의 음식 솜씨에 대해 감탄하다가 스르르 잠이 들었다. 우리는 밤새도록 강정 고향집 목욕탕 욕조 안에 있던, 강정 엄마가 담그신 술을 야금야금 빼냈다. 화수분처럼 끝없이 이어지는 산해진미를 다 음미하려면 그 수밖에는 없었다. 강정이 어릴 때 쓰던 방에서 어릴 때 읽던[…]

처용 강정
김소연 / 2007-10-30
너는 언제 외로우냐? / 송영

  너는 언제 외로우냐? 송 영 비브리오체카 이미나레니나 역. 이 지하철역 이름을 제대로 발음할 때쯤 되면 모스크바 지하철 이용법을 완전하게 터득하게 될 거다. 몇 번 들어도 번번이 철자 하나를 빼 먹거나 발음을 틀리게 한다. 역 근처에 시내에서 규모가 가장 큰 레닌도서관이 있어서 이런 이름이 붙은 것인데 이곳에 올 때마다 나는 역 이름을 다시 기억에 새겨 두곤 했다. 시내 도심부를 횡단하는 깔조라는 이름의 환성선 중심부에 역이 자리 잡고 있어서 낮에는 언제나 플랫폼은 서로 어깨가 부딪힐 정도로 사람들로 붐빈다. 객차 밖으로 나온 나는 직사각형 기둥들 사이를 천천히 지나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청바지에 검은색[…]

너는 언제 외로우냐?
송영 / 2007-10-30
아빠, 유령, 문법 / 김주희

아빠, 유령, 문법 김주희 1 파란 원숭이는 멸종했다. 하지만 옛날에는 이 원숭이를 행운의 신으로 섬긴 부족국가도 있었다. 원래 부족 사람들은 왕을 신으로 섬겼다. 누가 심장마비로 죽으면 왕이 저주를 내렸다고 생각했다. 어느 날 왕도 심장마비로 죽었다. 사람들은 신의 아들이 신이 되어 줄 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한밤중 신의 아들, 왕자는 산속으로 달아났다. 나는 도대체 누구를 위해서 살아 있는 것일까, 생각하면서. 그러던 어느 순간 왕자는 숲속에서 길을 잃었다. 세상의 모든 어둠이 온갖 출구를 막아 버린 듯한 밤의 숲. 산짐승의 울음 소리가 들렸다. 왕자는 고개를 들어 밤하늘에 반짝이는 무수한 별들을 바라보았다. 왕자가 고개를 숙였을[…]

아빠, 유령, 문법
김주희 / 2007-10-29
검정고무신 / 김태수

김태수  검정고무신 초등학교 친구가 보냈다 까만 사진 속 비뚤게 쓴 동기생 넷의 모자에는 교표(校標)가 없었다 물 잘 빠지던 무명지 검정색 교복엔 단추 한 두 개씩 보이지 않았다 한결같이 기차표 통고무신, 검정고무신을 신고 긴긴 오십 년을 그렇게 서 있었다 읍내 국민학교 웅덩이에 가물치가 살았다 물 위로 드리운 버드나무 긴 머릿결보다 더 굵은 소나기 흩뿌리던 운동장의 저녁 무렵 곧잘 튀어 오르던 너무 커 까만 가물치 한 마리 조심조심 밀어 넣었다 검정고무신 교실 빈 터 시멘트 허방 고인 물 퍼내 살찐 붕어들을 잡기도 했다 거름 가득 채운 똥장군을 긴 막대기에 꿴 채 마디호박밭,[…]

검정고무신
김태수 / 2007-10-29
단물 / 성기완

 성기완 단물 당신이 선녀탕을 나와 무화과나무 속으로 사라졌어요 나는 얼른 물쿵뎅이 신발을 꺾어 신고 당신을 따라 갔죠 어디 계세요 어른어른 푸른 이파리 사이로 당신 흰 다리가 널을 뛰더니 붉게 익어 흐드러지기 직전의 무화과가 당신 치마폭에 하나 가득 당신이 씹두덩 같은 그걸 쭉 찢어주자 나는 오돌오돌 치모 끝 돌기 같은 씨가 징그럽게 촘촘히 박힌 그 속살을 입술에 즙 묻히며 받아먹어요 아 밍밍하고 지려 맛없어 투덜거리자 하나 더 먹어봐 이게 달콤하지 않니 당신이 그렇게 말하며 이번엔 아예 헤벌어지도록 익은 그걸 내 입에 대주자 나는 숨이 막혀요 이로 씹을 틈도 없이 혀끝에서 녹아드는[…]

단물
성기완 / 2007-10-29
흰색 셔츠 한장 / 신현림

신현림 흰색 셔츠 한장 흰색 셔츠 한 장이 바람에 날아간다 아아, 셔츠 안에서 울리던 청춘의 심장 소리도 날아가고 괴로울 때마다 해를 그리워하며 내뻗던 손길도 어른거리고 어깨선에서 미끄러지던 옛 사랑의 손이 날아간다 지금보다 젊은 몸 셔츠 속 세미누드의 이미지가 펄럭이다 사라진다 서른 살 가을 마지막 날 떨어지던 낙엽도 휘날리던 눈보라도 소용돌이치며 간다 마악 달려가  잡았다 셔츠 속에 묻힌 열정과 혼을 사라지는 것들의 우울한 힘을 의자  겨자색 꽃망울을 터뜨리는 산수유를 보니 목이 메입니다 지금이 아니면 맛볼 수 없는 감동이죠 죽을 때 진정 하고 싶은 일로써 행복했노라, 진심으로 참 많이 사랑했었노라 말하면 좋겠어요[…]

흰색 셔츠 한장
신현림 / 2007-10-29
나무의자 / 이나명

 이나명       나무의자 베란다에 나무의자 하나 내다 놓았다 가끔씩 나가 앉아 어두운 밤 풍경을 내다보았다 밤의 불빛들이 우는 벌레들처럼 꿈틀거렸다 어둠의 속살이 발긋발긋 물어뜯기는 걸 보았다 아침 거실에서 보니 베란다에 나무의자 혼자 앉아 있다 차가운 타일 바닥에 네 가닥 무릎을 곧게 세우고 머리는 텅 비운 채 이상한 듯 훤해진 아침 속에서 간밤에 울던 어둠속 벌레들은 다 어디로 갔는지 어둠의 상처들은 다 어디에 감췄는지 먼 산은 여전히 먼 곳이고 하늘 아래 집 지붕들은 여전히 높낮이가 다르고 베란다의 화초가 떨어뜨린 물색 고운 슬픔은 금세 말라 바닥에서 뒹굴고 아침 창문에 햇빛들이 날벌레들처럼 와[…]

나무의자
이나명 / 2007-10-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