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의 포플러가 보내온 행운의 엽서 / 정한아

정한아 작년의 포플러가 보내온 행운의 엽서 허리가 풍만한 여자를 보았네 짧은 흰 셔츠 밑으로 청바지 위에 둥글게 걸린 팽팽한 허리살 그녀는 가슴도 풍만하지만 팽팽한 둥근 허리살 때문에 나는 그녀와 사랑에 빠졌지 팽팽한 둥근 허리살은 윤이 났네 내 그림자 가지 끝이 움켜쥐고 싶어 야단이 났지 그녀는 햇살 속을 풋풋풋 웃으며 걸어가네 비탈길을 빙글 돌아 때로 한 찰나가 영원을 잡아먹는 그런 사랑 허리가 풍만한 여자를 보았네 그녀는 중세 회화처럼 우아하지 풍만한 상체를 살랑살랑 흔들며 걷는 그녀의 발목을 나는 사랑했네 그러나 그건 아까 전의 일 그녀는 비탈길을 빙글 돌아가고 지금은 다만 따가운 햇살이[…]

작년의 포플러가 보내온 행운의 엽서
정한아 / 2007-08-31
사랑니 / 정양

정 양 사랑니 환갑 진갑 다 지나서 어쩌자고 사랑니가 난다 새로 나는 게 아니고 숨어 있던 게 드러나는갑다고 치과의사는 잠시 어이없고 나는 뭘 들킨 것처럼  욱신거리는 것도 계면쩍다 사랑니는 죽어서도 난다지만 이 늙발에 어쩌자고 드러나는가 눈물은 슬픔은 가슴에 묻어 두면 별이 되어 밤마다 글썽거릴 테지만 숨기고 감추고 묻어 두어도 사랑은 이렇게 욱신거리며 드러나는 건가 어차피 드러나도 이제는 괜찮은 건가 남이야 늙발에 욱신거리든 계면쩍든 야속하든 허망하든 말든 사랑니 그거 아무 쓸모없는 거라며 가끔씩 말썽만 피우는 거라 마침내는 뽑아 버려야 한다며 덤덤히 처방전을 뽑는 젊은 의사는 이 세상에 드러날 게 전혀 없나[…]

사랑니
정양 / 2007-08-31
내가 불리울 이름은 / 정기복

 정기복 내가 불리울 이름은 내가 불리울 이름은 정기복이 아니라 앉은황소, 점박이독수리, 용감한새, 곰이노래해, 검은고라니…… 내가 부를 이름은 강신대, 방민호, 신동호, 김주대, 박성식이 아닌 구르는천둥, 푸른천둥, 붉은구름, 검은달, 검은솥단지…… 해 할아버지와 지구 어머니와 물과 불로 빚은 생명 누리에 붙박힌 온갖 나무와 풀과 꽃에 깃든 정령이 부여해 준 이름으로 부르고 불리고 싶다 나뭇잎에 반짝이는 햇살 한줌 초록 햇살을 흔들고 지나는 바람 호수에 흩뿌리는 비가 그려내는 동그라미와 함께 죽음이 다가 아니듯, 죽은 자와 산 자, 살아갈 자를 잇는 몇날 며칠 먹지도 잠들지도 않는 태양춤의 춤사위이고 싶다 도시문명의 잡식성과 갖은 욕망에 찌든 자의 헛된[…]

내가 불리울 이름은
정기복 / 2007-08-31
몽유도원도 51 / 장경린

장경린 몽유도원도 51 인질들과 족구를 하는 동안 날이 저물자 소리 없이 인질을 살해하고 마을로 내려가는 어린 저항군들처럼 그녀의 가슴은 바라보는 자의 뒤를 돌아보게 하는 자동차 백미러처럼 생긴 그녀의 가슴은 산은 산이고 산은 산이 아니다 라고 말하듯 너울대는 가야금 병창을 들으며 음악적 틀을 깨고 나와 실컷 분탕질 치다가 틀 밖 세상을 조용히 틀 속으로 끌고 들어가는 선율처럼 아프가니스탄에서 소말리아에서 명동에서 강화도에서 시에서 시가 아닌 모든 것에서 몽유도원도 53 멀리 구급차 달려오는 소리 무리지어 달리는 카젤 영양들 그 사이를 비집고 올라오는 롯데관광 사파리 광고 그 전광판 아래 유모차를 밀고 가는 앳된 남자[…]

몽유도원도 51
장경린 / 2007-08-31
첫여름 / 이세기

이세기 첫여름 1 쪽사리인데 대낮에 사람이라고는 보이지 않는다 갯고랑이 보이는 끄트머리 서너 채 함석집 할매들이 바지락을 캐어다 뭍배가 오면 내어다 팔기도 하고 돌톳을 햇볕에 말렸다가 팔기도 하는 늙수그레한 몸에는 갯내가 났다 2 함석집에는 목침이 있고 이불을 올려놓은 선반이 있고 장판이  누렇게 누른 아랫목은 시꺼멓게 먹밤처럼 늙었다 밤이 오면 반딧불이 날아다니고 손전등 불빛들이 갯바위 틈새에서 새어 나왔다 3 유성이 떨어지는 깊은 밤에는 해안가 샘골에서 물 흐르는 소리가 어두운 방으로 들어오고 골짜기에서는 치성을 드리는지 주문이 들려왔다 그러다가 다시 저녁밥 때가 오면 기력은 곡식에서 생긴다며 고봉밥이 최고다 삼시세끼 제때 먹는 것이 몸에 화를[…]

첫여름
이세기 / 2007-08-31
물바닥 / 위선환

위선환 물바닥  주산지, 고인 물이 거울 같다. 물에서 버드나무가 자란다. 버드나무의, 마른 지 오래된 우듬지도, 물바닥에 거꾸로 비친 우듬지도 조용하다. 목이 긴 새가 앉아 있다. 물 위로, 우듬지 끝에 앉아 있는 저 새와 물 아래로, 우듬지 끝에 비친 저 새가 대칭점이 되는 저간의 거리가 하나인 새가, 목이 긴 한 새와 목이 긴 또 한 새로 마주 비치며 목이 가늘어지는 만큼…… 아득하다. 마주 비치는 것들 사이로 빗발 내리치고 물거품 일고 물안개 피어오른 다음에는 순한 빛이 깔리던 아까부터일 것이다. 지금은 너무 조용해서 아뜩한 두 우듬지 끝에서 ! 와 ! , 목 길게[…]

물바닥
위선환 / 2007-08-31
흰 나비 떼 / 송종규

송종규 흰 나비 떼 소금꽃 같은 흰나비들이 파밭에 앉아 있다   하늘은 온통 난장판, 흰나비들에게 어깨를 빌려 준 두 평 반 파밭이 튀밥처럼 가벼워진다 불청객처럼 들어와 앉은 쇠비름풀 하나의 그림자도 흘리지 않으려고 햇살은 두 손을 받쳐 들고 앉아 있다 쇠비름풀맛의 비리고 물컹하던 기억처럼 사람의 한 생애 또한 비릿한 맛, 머리가 허연 노인은 꽃잎과 고요 속으로 숨고 세상의 가장 후미진 곳에 호미 한 자루가 코를 박고 엎드려 있다       햇빛과 바람과 흰나비들이 쏘아 올린 들숨으로 세상은 찰랑거린다, 자욱해진다, 소금꽃 같은 흰나비들이 내 방에 앉아 있다 이상한 기억 동그란 스탠드 건너 당신은 앉아[…]

흰 나비 떼
송종규 / 2007-08-31
聲배호 / 박라연

박라연 聲배호                        약수터에서 물마시듯 공짜로  그의 영혼 마신 일 미안해서 한 잔 꿈틀거리는 내 四肢, 감사해서 한 잔 그의 불우 속에 내 몫까지 껴들어 간 것 속죄하며 한 잔 울음 석 잔을 무덤에 뿌려 드리니 온 몸에 불이 난 양 열창하는 가수 배호  경기도 양주군 신세계全공원묘지가 덩달아 ‘돌아가는 삼각지’를 부른다 세상의 모든 아픈 것들이 몰려와 따라 부른다 탑을 돌듯 무덤을 돌다가 누에가 뽕잎을 먹듯 묘지를 먹기 시작했다 비문에 새겨진 사연까지 다 먹었다 사라진 무덤을 내려다보는 풀꽃 한 송이 사람이 애써 가꾼 난초보다 귀골이다 허공에 멈춰선 푸른 나비 그의 진화처럼![…]

聲배호
박라연 / 2007-08-31
김애란의 <달려라, 아비> 중에서 / 고인환

  최아영화자에겐 아버지가 없다. 아버지는 ‘어머니의 부풀어오르는 배를 보고 얼굴이 점점 하얘지다가’, 화자가 태어나기 전날 집을 나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하지만 아버지는 딸의 ‘상상’ 속에서 계속 뛰고 있다. 한편, 어머니는 ‘농담’으로 화자를 키웠다. 그래서 화자에게 아버지는 금기의 대상이 아니었다. 이를테면, 다음과 같은 식이다. 아버지에 대해 묻는 딸에게, 어머니는 “내가 느이 아버지 얘기 몇 번이나 해준 거 알아 몰라?”라고 쏘아붙인다. 화자는 주눅이 들어 “알지……”라고 대답한다. 그러면 어머니는 시큰둥하게 “알지는 털 없는 자지가 알지고.”라며 혼자서 마구 웃어댄다. 이렇듯, 어머니가 화자에게 물려준 가장 큰 유산은 자신을 연민하지 않는 법이었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없는 딸에게 미안한[…]

김애란의 <달려라, 아비> 중에서
고인환 / 2007-08-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