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약의 지점 / 조경란

  도약의 지점 조경란 철 지난 관광지에 와 있습니다. 혼자 여행을 하게 되면 가방 속에 챙겨왔던 책들도 어쩐지 열심히 안 읽게 되고 밥도 맛이 없어지고 주량에 턱없이 못 미치는 술을 마셔도 금세 취기가 오릅니다. 그리곤 숙소 발코니에 나가서 멍하게 생각에 잠기게 되는 것이죠. 이 ‘생각’이란 걸 잠시 하지 말자, 하고 떠나온 여행인데도 말입니다. 지난 한 달간은 우리 사회에 참 여러 가지 일들이 있었지요. 두 사람을 잃긴 했지만 아프가니스탄 탈레반 무장세력에 억류되어 있던 우리 인질 열아홉 명이 모두 무사히 돌아오게 된 건 정말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유명인사의 허위 학력[…]

도약의 지점
조경란 / 2007-08-31
책벌레 손홍규 / 김종광

  책벌레 손홍규 김종광  나는 처음엔 그를 두려워했다. 싸움을 잘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생긴 모습도 하는 짓도 옛날 시골 부잣집의 머슴 ‘마당쇠’ 같다는 말이 너무나도 잘 어울리는 그는, 당연히 주먹도 좀 쓸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말로는 잘 싸워도 주먹은 휘두를 줄 모르며 눈물이 많은 청년이었다. 나는 그가 형님이라고 말해도 좋을, 나이 차이 별로 안 나는 선배들은 물론, 선생님이라고 불러야 마땅할 나이 차이 엔간한 선배들에게마저도 과감하게 덤비는 광경을 여러 차례 목격했다. 문단 초짜가 저리도 용감할 수 있다니! 그는 선배들의 말이 틀리다고 생각하면 속으로 꿍쳐두고 삭히는 법이 없었다. 정면 논쟁을[…]

책벌레 손홍규
김종광 / 2007-08-31
내일도 문학소녀, 시에 순정을 바치다 / 천양희 & 박성우

  내일도 문학소녀, 시에 순정을 바치다 대담 천양희(시인) 진행?정리 박성우(시인)  intro 별 보고 나간 기차, 시인이 되다 아빠시인, 오빠시인 그리고 사슴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바람과 함께 오다 시야, 넌 내 목숨에 대한 반성문이야 내일도 문학소녀, 시에 순정을 바치다 비단주머니와 사각 벼랑 구르는 돌은 둥글다 망원경과 현미경 사당파와 죽란시사 애정, 아끼니까 미워 할 거야 그거 알아 괴로운 기쁨 풍경, 팽팽팽 도는 풍경  박성우  제가 마로니에에 나와 있는데요. 오늘은 마로니에와 잘 어울릴 것 같은 천양희 선생님을 만나 뵙겠습니다. 선생님을 만나서 문학소녀 시절에 어떤 가슴앓이를 했는지, 시에 대해 어떤 열망을 꿈꾸었는지, 문학 외에[…]

내일도 문학소녀, 시에 순정을 바치다
천양희 & 박성우 / 2007-08-31
킬리만자로의 눈[目] / 함정임

 킬리만자로의 눈[目] 함정임 저기! 그녀의 목소리가 화살처럼 솟구쳐서는 포물선을 그리며 아득하게 울렸다. 뒤꽁무니에 신기루처럼 먼지를 매달고 일제 사파리 차는 거침없이 아프리카 사바나를 달렸다. 앞차가 일으킨 회오리 먼지로 시계(視界)가 불투명했다. P는 그녀가 가리키는 쪽으로 눈을 돌렸다. 시야를 좁혀 멀리까지 바라보아도 거대한 먼지 기둥들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온갖 희귀한 새들부터 얼룩말과 누떼들, 톰슨가젤들을 열심히 찾아 주던 시력 좋은 운전수 폴은 이번에도 새로운 무엇을 감지했는지 창밖을 두리번거리더니 빠르게 뒤를 보라고 소리쳤다. 서쪽 하늘 아래 휘장처럼 길게 펼쳐진 보라색 구름 사이로 석류빛 노을이 지고 있었다. 해는 하루 운행의 막바지에 이르러 위태롭게 흔들리며 금세라도 초원[…]

킬리만자로의 눈[目]
함정임 / 2007-08-31
개밥바라기 / 이화경

  개밥바라기 이화경 오전에 일과 관련된 몇 사람을 만난 뒤에도 이런저런 일에 시달렸던 그는 사무실에 놓인 소파에 웅크리고 두 시간 가까이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오후 다섯 시쯤, 몸을 일으키고 나서도 한동안 의자에 꼼짝 못하고 앉아 있다가 산보라도 할 요량으로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마감은 돌아와서 하면 될 정도로 정리는 해 놓은 상태였다. 그는 회사의 현관 로비를 걸어 나와 회전식 출입문을 밀었다. 네 칸으로 된 출입문의 한 칸에 들어설 때마다, 그는 경미한 폐쇄공포증을 느끼곤 했다. 20년 가까이 들고났던 회사의 출입문에 갇혀 영원히 빠져나오지 못하고 뱅뱅 도는 것을 두려워한다는 게 스스로도 한심한 노릇이었지만 그는[…]

개밥바라기
이화경 / 2007-08-31
와인 한 상자 / 이상운

  와인 한 상자 이상운 구월 십칠일 오후 세시, 몇 년 전에 내 프로필 사진을 찍어준 적이 있는 서른네 살의 사진작가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들어줄 사람이 없다면서 나를 찾아왔다. 나는 아파트 단지 상가의 외환은행 앞에서 그를 만났으며, 그가 밖에 있고 싶다고 하여 한강 지류를 따라 만들어 놓은 조깅 코스로 그를 안내했다. 사진작가는 강둑에 서서 이미 아래로 내려와 있는 나를 모르는 사람을 보는 듯한 눈빛으로 바라보더니 조심조심 계단을 내려 왔다. 그리고 나란히 서서 천천히 걷게 되자, 내가 어떤 감정 반응을 보여야 할지 알 수 없는 기묘한 얘기를 늘어 놓기 시작했다.[…]

와인 한 상자
이상운 / 2007-08-31
눈빛 / 원종국

 눈빛 원종국 받지 말걸 그랬나? 베개에 얼굴을 묻고 쿨룩쿨룩 기침을 하는 동안 낡은 철제 침대가 삐걱삐걱 괴성을 지르며 흔들거렸다. 배가 고프고 목이 아팠다. 나는 이틀 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았고, 한마디도 말하지 않았다. 아무도 내게 먹으라고 강요하지 않았고, 말하라고 위협하지도 않았으니까. 방금 전,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오기 전까지는. 누군가 내 삶을 간섭하려 들지만 않는다면, 그 자체로 모든 걸 소유한 삶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랬는데, 느닷없이 걸려 온 전화 한 통은 내 먼 기억을, 눈앞으로 바짝 끌어다가 들이밀었다. 그러니, 휴대전화기가 드르르르 몸부림치며 책상 위를 아무리 맴돌았어도, 끝내 그걸 펼쳐서 오른쪽[…]

눈빛
원종국 / 2007-08-31
춘추 외 3편 / 김광규

  김광규    춘추 가을 거울 이른 봄 효자손춘추 창밖에서 산수유 꽃 피는 소리 한 줄 쓴 다음 들린다고 할까 말까 망설이며 병술년 봄을 보냈다 힐끗 들여다본 아내는 허튼소리 말라는 눈치였다 물난리에 온 나라 시달리고 한 달 가까이 열대야 지새며 기나긴 여름 보내고 어느새 가을이 깊어갈 무렵 겨우 한 줄 더 보탰다 뒤뜰에서 후박나무 잎 지는 소리 가을 거울 가을비 추적추적 내리고 난 뒤 땅에 떨어져 나뒹구는 후박나무 잎 누렇게 바래고 쪼그라든 잎사귀 옴폭하게 오그라진 갈잎 손바닥에 한 숟가락 빗물이 고였습니다 조그만 물거울에 비치는 세상 낙엽의 어머니 후박나무 옆에 내 얼굴과 우리 집 담벼락[…]

춘추 외 3편
김광규 / 2007-08-31
여기는 그림 속 / 허수경

 허수경 여기는 그림 속 아마도 내가 당신을 잊어 버린 것 같다, 그렇지 않고야 이렇게 잠 속에 든 당신 옆에 내가 누워 있겠는가, 이제 당신을 나라고 불러도 될 것 같다.  여기는 그림 속, 손을 잃어 버린 새들이 날고 있다. 검은 부리를 가진 물고기들이 하늘을 향해 늙은 개들을 실어 나르고 있다. 개들은 머리만 있고 얼굴은 없다, 지난 오후에 마을을 폭격한 거미 같다. 전갈도 어쩌면 잠자리처럼 부드러운 곡선으로 세계를 배회할지도 모르겠다.  여기는 그림 속, 대나무 숲이 교회 옆에 있는 그림 속이다. 식당에서 내주는 작은 철근 한쪽을 씹어 먹는다. 가끔 내 주위에서 음악을 연주하는[…]

여기는 그림 속
허수경 / 2007-08-31
친애하는 비트겐슈타인 선생께 / 진은영

 진은영 친애하는 비트겐슈타인 선생께 별빛이 젊은 예술가의 이마 위에 어둠의 긴 자루에서 빠져 날아오는 낫 같이 찍힌 후 더 깊은 심연으로 되돌아가는 밤입니다 로댕 씨의 작업장은 아주 넓고 아름답습니다 저는 지르던 비명을 완성하기 위해 차례를 기다리는 석고상이나 팔다리 없이 영원을 향해 애무의 몸짓을 던지려는 청동토르소 사이를 거닐고 흰 라일락의 턴테이블에서 밤공기의 검고 낡은 음반이 돌아가며 흘리는 향기를 맡습니다. 타블로이드판 신문 냄새, 새로 깔은 파리 대로의 타르 냄새, 노동자들의 오래된 가죽장화 냄새가 소음처럼 뒤섞이는 곳에서 저는 이곳 주인장의 명성과 그가 만든 조각들의 탄생과 죽음을 써야 합니다. 모든 사람의 혀에 익숙한 맛이[…]

친애하는 비트겐슈타인 선생께
진은영 / 2007-08-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