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장골 시편 외 3편 / 김신용

  김신용   도장골 시편 – 고드름 도장골 시편 – 赤身의 꿈 도장골 시편 – 오디 먹어 푸른 잎 도장골 시편 – 낙엽을 쓸며도장골 시편 외 3편 고드름                                        고드름이 맺혔다 지붕에 쌓인 눈이 물이 되어 흘러내리다 잠깐 멈춘 저 一瞥, 쌓인 적설의 깊이만큼이나 패인 눈빛이겠다 신발 바닥에 얼음 못 박고 얼음 송곳 쥐고 얼음 밧줄에 매달려 빙벽을 오르는 몸짓이겠다 死海문서를 기록하는 펜촉 같기도 하다 자신의 몸 속 깊은 곳에 숨겨진 랑게르한스 섬 같은 곳에서 흘러나오는 샘물을 찍어 여기 허공의 백지에 한 자씩 또박또박 기록하노니 핏줄을 얼어붙게 하는 혹한 속에서 태어나는 이 물의 글자를 읽는 눈들은 지금 여기에[…]

도장골 시편 외 3편
김신용 / 2007-05-31
999 / 이승우

  999 이승우 M에게 알렙에 대해 최초로 이야기해 준 사람은 떠돌이 악사였다. 공교롭게도 악사는 그의 부모가 내준 방에서 숨을 거두었다. 마을에 나타날 때부터 병이 깊었던 떠돌이는 음악을 듣기 위해 몰려든 마을 사람들에게 ‘봄을 부르는 노래’를 한 곡 힘들게 연주하고는 자리에 주저앉아 버렸다.   피리 소리는 너무 약해서 귀를 기울여야 겨우 들릴 정도였다. 봄이 오려다가 도로 돌아가겠다고 누군가 투덜거렸다. 몸이 어찌나 말랐는지 악사가 피리를 부는 것이 아니라 피리가 악사를 부는 것 같았다고 M은 나중에 그 순간을 회고했다. 어떤 사람은 혀를 차고 어떤 사람은 투덜거리며 각자의 집으로 돌아갔고, 그의 부모는 손님들을 위해 마련해[…]

999
이승우 / 2007-05-31
오후 / 한수영

  오후 한수영 도로는 꽉 막혀 있다. 시내 진입을 코앞에 둔 병목구간이라지만 다른 날보다 더 복잡하다. 오후에만 배송해야 할 물건이 일곱 건이다. 이렇게 길 위에서 붙잡혀 버리면 정말 대책이 없다. 조금 전, 남자는 첫 번째 배송지에 늦어져서 죄송하다는 전화를 해 두었다. 연달아 다른 집에도 그런 전화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자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한다.   ―아주 바퀴라고 달린 건 죄다 나와 있구만. 뿌연 앞 유리로 밖을 내다보며 남자가 중얼거린다. 도로 옆으로는 추수를 끝낸 논이 펼쳐져 있다. 빈 들 여기저기에 소먹이 용 볏짚을 포장해 놓은 흰색 비닐뭉치가 서 있다. 황갈색으로 이어진 들판에 드물게 초록색이[…]

오후
한수영 / 2007-05-31
草食期 / 송호필

 송호필 草食期 배가 고픈데 왜 머리가 아플까 하늘이 누렇게 돌아가네 할머니, 얼른 방아깨비라도 잡아먹어야겠어요 손톱만한 청개구리도 징그럽고 매운 무당개구리도 저 말잠자리도 먹을 만하겠어요 효주 형이 그랬어요 쥐고기를 먹으면 눈이 밝아지고 땅강아지 굼벵이를 먹으면 침을 안 흘린대요 하지만 비둘기를 먹으면 애기 둘밖에 못 낳고 까마귀를 먹으면 공부를 못한댔어요 그래도  질경이 명아주 멀건 된장국보단 낫겠어요 고기 좀 주세요 눈 감고 먹으면  쥐고기 땅강아지 굼벵이 비둘기 까마귀 모두 좋아요 하얀 이밥이랑 먹으면 다 먹을 수 있어요 할머니,  귀먹고 팔십 나이 혼자만 실컷 먹은 욕심쟁이 우리 할머니.   새들도 돌아 나는, 지금쯤 파꽃이 피고[…]

草食期
송호필 / 2007-05-31
등뼈로만 살기 / 허연

  허연 등뼈로만 살기 -지원의 얼굴  그녀의 날갯죽지엔 존재의 흔적이 있다. 날개 없는 것들이 모여 비를 맞는다. 침묵도 두렵고 소멸도 두렵다. 구더기가 파먹은 어머니가 너를 만들었다. 물올랐던 어느 시절 널 만들었고, 소멸해 가던 그 언제쯤 너를 버렸다. 칼끝에선 눈물이 흘렀다. 넌 그렇게 날개를 접었다. 날개 없이 살기. 날개의 기억으로 살기. 우울증의 나날을 견디기 위해 비를 맞는다. 수행하기 싫은 수행자들처럼 비를 맞는다. 도를 닦지도 구태여 반항하지도 않는 속된 아름다움. 안식일을 지키지 못한 고된 아름다움. 빗줄기가 더욱 굵어졌고 날개가 흙이 됐고, 그림자도 흙이 됐다 소멸을 향해 가는 침울한 술렁임 등뼈만으로 살아야 하는[…]

등뼈로만 살기
허연 / 2007-05-31
오복 쌀 상회 / 조길성

 조길성 오복 쌀 상회 수희네 돌아가신 아빠 이름은 김오복입니다 우리가 오복아 오복아 하면 사팔끼가 있는 그 눈이 홱 돌아갑니다 학교 끝나고 집에 가다 들여다보면 쌀 한 톨 흐트러짐 없이 늘 정갈했지요 장난삼아 큰 저울에 올라가 보면 저울에 5킬로그램 10킬로그램 쇠로 된 추를 찔러주시며 신발은 벗어야지 하셨지요 오랜만에 나간 동창회입니다 오복아 오복아 하니까 그 눈에 눈물 고입니다 모두들 한동안 말이 없는데 나 혼자 쌀가게 큰 저울에 우리들 지나간 삼십 년을 달아봅니다 저울추가 슬픔이랑 기쁨 사이에서 흔들리더니 슬픔 쪽으로 기우는 걸 바라봅니다 속으로 다시 한 번 오복아 오복아 불러보면서 징검다리 건너 애반딧불이[…]

오복 쌀 상회
조길성 / 2007-05-31
논밭이여 미안하다 / 이중기

 이중기 논밭이여 미안하다 너희가 해마다 죽을힘 다해 거둔 것들 죄 앗아 한방에 꼬라박는 인간 말종들이 있다 그게 나다, 농민이다 그렇지 않은가, 논밭이여? 더러는 운수납자와 몸 바꾸고 싶은 날도 있었다 그런 날은 북극성에 수하를 걸어 암호를 묻기도 했다 무시래기 같은 헐한 삯도 없이 널 부려 이룬 폐허여 염하다가 놓친 놈같이 푸르뎅뎅한 날들이여 손들어! 암호? 헐한, 슬픔의 밥 한 그릇 그 분은 아직 거기 동상으로 서 계신다 노동자 아홉을 키워내고 늙은 자궁 초가삼간 적막강산 옛집, 헐한 슬픔의 밥 한 그릇 있다 나랏말씀이 다 거기에서 나왔다 생의 적도를 건너온 사람은 붉은 울음을 울[…]

논밭이여 미안하다
이중기 / 2007-05-31
개, 새끼 이야기 / 김연

  개, 새끼 이야기      김 연  “흰둥이가 이상해!”  애가 기겁을 하며 방으로 뛰어 들어왔을 때 그렇지 않아도 나는 오엠씨의 하우 비자아(How bizarre)를 따라 부르며 그깟 개새끼 때문이 아니더라도 세상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건지에 찬성의 붓두껍을 눌러대고 있던 참이었다. 아이는 어른의 스승이란 말이 가뭄에 콩 나듯, 봉사 문고리 잡듯 가끔은 운 좋게 들어맞을 때도 있긴 하지만 어른이란 모름지기 철없는 아이를 가르쳐 올바른 곳으로 나아가게끔 해야 하는 막중한 책무가 있는 것이다. 아이를 가르칠 자격이 있다고 할 만한 어른이 세상에 과연 몇이나 있냐고 누군가 게거품을 문다 하더라도 개새끼 하나 때문에 호흡이 가빠지고[…]

개, 새끼 이야기
김연 / 2007-05-31
삼도노인회 제주여행기 / 한창훈

  삼도노인회 제주여행기 한창훈 이번에 삼도(三島)청년회장 김역만이 삼도노인회 회원들을 모시고 여행을 다녀왔는데 온 뒤로는 서로 말을 잘 안 하고 있답니다. 왜 그럴까요. 우선 노인회가 여행을 가게 된 이유는 이렇습니다.   삼도는 남쪽 바다 어디어디에 있는 섬인데 다른 곳처럼 젊은이 떠나고 늙은이만 남아 평균연령이 상당히 높은 곳입니다. 떠난 이들은 도시 생활에 익숙해졌고 남은 이들은 섬 생활을 버릴 수 없으니 가족이 모이는 것은 명절이나 초상 때 정도입니다. 섬 노인들은 밭으로, 바다로 나가 무어든 캐고 다듬고 하여 돈 만드는 버릇이 몸에 배어 있는  데다 어쨌든 자식들이 얼굴 대신 돈이라도 보내오는 탓에 가히 궁색하지는 않게[…]

삼도노인회 제주여행기
한창훈 / 2007-05-31
늦은 휴가 / 강신애

 강신애  늦은 휴가 태양이 쓰레기통을 뒤져 부패한 냄새를 빨아들이는 늦은 휴가철, 한 차례 인파가 빠져나간 해변은 방치한 텐트처럼 고요하다 모래톱 물새들의 어지러운 발자국과 장난하듯 출몰하는 고양이들 나 무른 딸기를 먹었지 너는 오래오래 헤엄을 치고 나와 뚝뚝 물 듣는 전신을 모래에 파묻는다 네 눈꺼풀을 열고 살균된 소금 눈동자 속에서 내 혀는 안데스 계곡 상록의 햇빛을 조금씩 빨아 먹는다 이 짭짤한 단맛 무른 딸기처럼 누가 버리고 갔을까 병에 가득 담긴 진주 빛 조개와 소라껍데기 밀물의 반복, 그 신비한 찌꺼기 초침의 모래알들을 맹렬히 붙여가는 바다 발길에 채이는 대로 따글거리는 유리병 물결 속으로 흘러들어간[…]

늦은 휴가
강신애 / 2007-05-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