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테이플러 외 3편 / 윤성택

  윤성택    스테이플러  FM 99.9 비에게 쓰다 주유소   스테이플러 기차는 속력을 내면서 무게의 심지를 박는다, 덜컹덜컹 스테이플러가 가라앉았다 떠오른다 입 벌린 어둠 속, 구부러진 철침마냥 팔짱을 낀 승객들 저마다 까칠한 영혼의 뒷면이다 한 생이 그냥 스쳐가고 기약 없이 또 한 생이 넘겨지고 아득한 여백의 차창에 몇 겹씩 겹쳐지는 전생의 얼굴들 철컥거리는 기차는 멈추지 않는다 촘촘한 침목을 박으며 레일이 뻗어간다 FM 99.9                          육십 촉 전구가 긴 하품처럼 흔들린다 목젖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골목 어귀 바람은 기댄 리어카 헛바퀴로 다이얼을 맞춘다  주파수를 잃은 낙엽이 쓸려간 후미진 끝 별들의 수신음이 가득하다 별과 별 이어보는 별자리는 전선으로[…]

스테이플러 외 3편
윤성택 / 2007-02-28
에쿠우스(EQUUS)! / 최재경

  에쿠우스(EQUUS)! 최재경 피노누아(Pinot Noir) 는 다른 포도에 비해 껍질이 얇아 쉽게 상처를 받는 까다로운 포도입니다. 너무 강한 태양에는 포도가 타버리고 반대로 태양빛이 부족하면 신맛이 강해집니다. 이 까탈스럽기로 유명한 포도 품종 피노누아는 자라온 환경에 따라 그 맛이 최악이 되기도 하고 이 세상 어떠한 와인들과 견줄 수 없는 완벽한 밸런스의 묘미를 보여주는 최고의 와인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가끔은 최악의 환경에서 자란 피노누아가 최고의 와인으로 숙성되기도 합니다. 잘 만들어진 피노누아는 시간이 갈수록 더욱 뛰어난 복합적인 미묘함을 발산합니다. -몬테스 피노누아 와인에 대한 어느 블로거의 글 중에서 1. 첫 만남 지난 추석에는 이상하게 와인[…]

에쿠우스(EQUUS)!
최재경 / 2007-02-28
사푼차 마을로 가는 길 / 이평재

  사푼차 마을로 가는 길           이평재 골목을 사이에 두고 왼쪽으로 빨간 양철대문 집이, 오른쪽으로 이층 양옥집이 있었다. 빨간 양철대문 집 아이는 학교에서 돌아오면 가방을 던져놓고 밖으로만 나돌았다. 동네 어른을 만나도 인사를 하는 법이 없었다. 반면에 이층 양옥집 아이는 어른의 말을 잘 듣는 착한 아이였다. 가끔씩 창가에 서서 빨간 양철대문 집 아이를 내려다보는 것을 빼면 늘 부모가 시키는 대로 충실하게 움직였다. 때문에 빨간 양철대문 집 엄마는 하루도 빼놓지 않고 두 아이를 비교했다. 이틀에 한번 꼴로 자신의 아이를 쥐어박았고, 일주일에 한번 꼴로 아이를 문밖으로 내쫓았다. 그러면 아이는 빨간 양철대문을 발로 걷어차며[…]

사푼차 마을로 가는 길
이평재 / 2007-02-28
지금 어디 계세요? / 홍일표

 홍일표 지금 어디 계세요? 눈 위에 기다랗게 흘림체로 이어져 있는 발자국들, 때론 초서로, 때론 행서로 사관의 붓끝에서 흘러나와 확신으로 빛나던 뜨거운 역사였다 좀벌레 같은 햇살들이 야금야금 두툼한 실록 한 권을 파먹고 있었다 정오가 지나자 군데군데 해어진 책들은 걸레조각처럼 너덜거렸다 제 고집으로 뭉쳐 있는 눈덩이들만 병들고 늙은 개처럼 납작 엎드려 뼈다귀만 남은 발자국을 움켜쥐고 있었다 눈이 녹으면서 개들은 발자국을 물고 사라졌다 길바닥은 질척질척 짓무른 과일처럼 썩어가고, 개의 행방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상추쌈을 먹이다 누군가 바다에서 상추를 뜯어내고 있다 한 잎 한 잎 커다란 상추 잎을 뜯어 허공을 둥그렇게 싸서 바다의[…]

지금 어디 계세요?
홍일표 / 2007-02-28
오래된 처방 / 조기조

 조기조 오래된 처방 기계를 뜯어놓고 고민하다 자꾸 풀리는 큰 배꼽 같은 부품 몸체에 때워 붙이다 오래된 기계와 오래된 기술의 대결이자 합의 잘하면 반년 운 좋으면 일년 아프다 말 못하는 낡은 기계가  기술과 함께 버틸 시간  내 목뼈 세 마디 나사못 박아 붙일 때와 같이 영구적인 처방이다 그러나 오래는 가지 못할. 나의 창고 우리 집 네 식구가 함께 쓰는 공부방 너머에 반 평짜리 베란다를 온통 잡동사니로 붐비는 내 전용 창고로 쓰는데 여태까지 잘 참고 지내더니 갑자기 햇빛도 바람도 들어오지 않는다고 아내가 불만을 품자 덩달아 큰놈 작은놈이 어떻게든 엄마 편을 들며 잡동사니를[…]

오래된 처방
조기조 / 2007-02-28
들판에 놓인 변기 / 최승철

 최승철 들판에 놓인 변기 다알리아 구근이 빨려 들어간다. 변기가 고장 났다. 변기의 구멍에 대고 펌프질을 해도 애인은 돌아오지 않는다. 온 힘을 다해 눌러도 뭉게구름이 흘러갈 뿐 아무것도 뚫리지 않는다. 애인이 두고 간 세탁소의 철 옷걸이를 펴서 변기 구멍을 쑤셔본다. 강물은 앞과 뒤가 없다. 소외도 언젠가 흘러갈 것임을 안다. 하루 분의 비타민 권장량을 입 속에 털어 넣는다. 변기의 손잡이를 돌려 물을 내린다. 비가 오기 전에 서둘러 변기 구멍을 뚫어야겠는데 박쥐는 거꾸로 매달린 채 새끼를 낳는다. 이번엔 드릴 용액을 퍼붓고 기다린다. 어느 하류를 다알리아 구근이 막고 있는지 꽃이 피고 바람이 불고 지루한[…]

들판에 놓인 변기
최승철 / 2007-02-28
어떤 사소한 이야기 / 서하진

  어떤 사소한 이야기 서하진 1  문건은 회사 인터넷 게시판에 올라 있었다고 했다. 사내(社內), 누구나 열람할 수 있는 자료였으므로 소문은 삽시간에 회사 전체로 퍼져나갔다. 문건의 내용이 아니라 거기, 그 자리에 언급된 이름만으로도 사람들은 충격을 받았다. 문건과 관련해서 가장 먼저 보고를 받은 사람은 감사팀의 민 팀장이었다. 출근해서 막 녹차 한잔을 마시려던 그는 찻잔을 내려놓고 부팅이 끝난 컴퓨터의 마우스를 두 번 클릭했다. 그의 얼굴이 조금 창백해졌다. 단 이십초 만에 자료를 열람하고 프린트 아웃한 후 팀장은 기술팀에 전화를 걸어 삭제를 지시했다. 그는 천천히 문서를 반복해서 읽었다. 차분하고 냉정한 어투, 보고서처럼 일목요연하고 군더더기 없는[…]

어떤 사소한 이야기
서하진 / 2007-02-28
꽃은, 그러니까 / 김중식

  김중식 꽃은, 그러니까 대지 위로 턱걸이한 이후 안 봐도 될 걸 못 볼 걸 보았나 비록 한 생이 발이 떨어지지 않는 악몽이었으나, 꽃은, 두고 보자는 구호다 꽃은, 그러니까 숨 거둘 시간을 안다 팝콘처럼 제왕절개로 튀어나와      발가락 꼬물락거리다 호(呼) 숨 내쉬며 생의 밀사(密使)를 삐라뿌리는 것은, 바람을 건드리지 않고 바람결 따라 머리 털며 숨 거두는 소리를 바람소리에 묻는 것은  두고 보자는 구호다 꽃은, 그러니까 귀 막고 비명 지르는 여자의 입 위기 때문에 아름답고 아름답기 때문에 위기인 어머니 한 생이 악몽이었으나 한 생을 바람에 헹구려는 듯 절벽에 선 꽃은   나의 체중미달 바람에[…]

꽃은, 그러니까
김중식 / 2007-02-28
기다리기 / 이준규

 이준규  기다리기 그는 그것을 기다리고 있었다 배를 채우고 공간을 넓히며 담배를 피우고 커피를 마시고 술을 마시고 공기의 결을 하나 하나 세며 다시 공기를 넓히고 오줌을 누러 이동하고 코를 풀고 세수를 하고 하수도로 빠져나가는 물소리를 들어보고 드물게 개 짖는 소리도 듣고 낮게 뜬 놀랍게 커다란 달을 바라보기도 하고 지나가는 사람들의 넥타이 색을 중얼거려보고 지나가는 사람들의 치마 색을 중얼거려보기도 하고 커피 잔에 앉은 파리를 잠깐 바라보다가 쫓아내기도 하며 그것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것은 쉽게 올 것 같지 않았지만 그래도 그는 구체적이지 않은 장소에 분명하게 앉아 계속 무언가를 하며 그것을 기다리고 있었다 헬리콥터가 하늘을[…]

기다리기
이준규 / 2007-02-28
최국희 약국 / 이영주

 이영주 최국희 약국   늘 걷던 거리를 걸었습니다. 밤이면 이 거리는 낮에 보았던 창문들을 천천히 거두어 갑니다. 이 거리를 걷다 보면 모두가 훔쳐보는 최국희 약국의 최국희 씨. 유리창 십자가에 걸려 있는 이마의 주름이 여러 겹의 무늬를 만듭니다. 형광등에 비친 붉은 이마. 밤에만 볼 수 있는 창문이겠습니다. 새를 키우는 소년을 국희 씨는 오늘도 만나지 못했습니다. 부서진 새장을 들고 골목 끝에서 찾아오던 소년은 알록달록한 알약처럼 여러 개의 얼굴이었습니다. 종이 연을 물고 있는 새의 부리를 오래 전 만져본 적이 있습니다. 딱딱하게 굽은 손가락으로 국희 씨는 밤마다 창문을 콕콕 찍습니다. 귀밑머리가 푸르게 상할 때까지[…]

최국희 약국
이영주 / 2007-02-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