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 사내들, 그의 아내, 그리고 그녀의 딸 / 김민정

 김민정 할머니, 사내들, 그의 아내, 그리고 그녀의 딸 -피터 그리너웨이 풍으로 할머니가 죽자 그녀의 사내들이 되살아났고 게서부터 우리들의 가계는 시작이라 했다 유언은 단 한 마디, 굿! 하셨다는데 그래서 좋단 말씀이시우, 아님 살짝 비명이실까 할머니가 죽자 되살아난 그녀의 사내들은 시루 속 콩나물처럼 길쭉길쭉 자라났고 이거야말로 우리 모두의 로망 아니겠니 이 많은 아버지들 속에 내 아버지 골라잡기 말이다, 매일 밤 그녀는 물 찬 조루로 똥 찬 시루를 적시느라 여념이 없었거늘 소녀는, 재주라곤 손톱이나 물어뜯을 줄 아는 소녀는, 이도 저도 시큰둥이라 머리가 덜 찬 아버지의 대가리를 따거나 뿌리가 시들한 아버지의 아랫도리를 짓이기는 데서[…]

할머니, 사내들, 그의 아내, 그리고 그녀의 딸
김민정 / 2007-01-31
입안의 송곳 / 명지현

  입안의 송곳 명지현   정수리 위로 노란 빛이 켜진다. 눈을 질끈 감는다. 지이이잉 가느다란 기계음. 등받이가 아래로 젖혀지자 뒤통수가 바닥에 닿을 것 같다. 입을 크게 벌리세요. 의사는 위에 매달린 조명을 얼굴 가까이로 끌어내린다. 더 크게요. 입을 최대한 벌리자 어쩐지 굴욕감이 든다. 혀에 차가운 금속이 닿는다. 치석이 제법 많네요. 의사는 내 입술을 조심스레 잡아 늘인다. 치과에 오기 전 칫솔질을 하면서 나도 봤다. 눈 오는 날 창틀처럼 치아 사이에 허연 것이 끼어 있었다. 손톱으로 긁어내자 치석이 석필 조각처럼 잘게 부스러졌다.   의사는 스케일링부터 해야 한다며 달리 불편한 곳이 있냐고 묻는다. “송곳니, 이거[…]

입안의 송곳
명지현 / 2007-01-31
우화 / 표광소

 표광소 우화 껍데기를 벗은 노랑나비 흰 나비들이 초등학교 1학년 교실로 모두 사라지고 봄 날빛이 막벌로 반짝이는 운동장과 떡잎도 안 나온 꽃밭 사이에서 껍데기들은 봄 날빛에 어색한 볼을 비비며 먼눈 깜박이는데 누가 저 껍데기들을 지금 이 자리에서 쫓아내랴? 이른 봄 날빛과 껍데기들이 우두커니 반짝이는 불기 저리 따뜻하고, 껍데기를 벗은 노랑나비 흰 나비들이 우화를 아직 안 마쳤는데 목련 목련꽃 지나 봐요. 목련꽃 지면 어떡해요?   꽃망울 때도 있었는데 추억은 황사바람이었나요? 꽃 떨어진 나무에 푸릇푸릇 새잎 돋아오면 어떡해요? 목련꽃 지나 봐요. 새잎 돋아오면 어떡해요?    돋아오는 저 잎들은 목련꽃을 아주 몰라요.

우화
표광소 / 2007-01-31
어느 날 아침, 너구리를 잡다 / 유승도

 유승도 어느 날 아침, 너구리를 잡다 슬쩍 눈을 감고 다리도 아래로 뻗고 죽은 척 매달렸다 목줄을 묶은 나뭇가지도 드러나지 않게 땅으로 몸을 숙였다 이젠 죽었겠지 지켜보기가 싫어 벗어났던 자리로 돌아오며 보니 눈을 뜨고 바둥바둥 목줄에서 벗어나려 안간힘을 쓴다 그러다 나를 보곤 슬그머니 또 눈을 감고 다리도 축 늘어뜨린다 한 시간이 흘렀다 다시 너구리가 매달린 나무 아래로 다가가며 보니 그때도 눈을 길게 뜨고 발로 허공을 훑다가 나를 다시 발견하곤 ‘나 죽었어요’라고 말한다 더는 죽기를 기다릴 수 없어 손도끼를 가져와 머리를 내려쳤다 그제서야 사지를 뒤틀며 피를 토하며 눈동자가 나를 잡아 돌리며 몸이[…]

어느 날 아침, 너구리를 잡다
유승도 / 2007-01-31
마북리 가구공장의 너는 / 박후기

 박후기 마북리 가구공장의 너는 이불도 없이, 이불처럼 아무렇게나 개켜진 채 컨테이너 박스 속에서 잠이 드는 너는, 뿌리 잘린 원목이 실려 온 먼 고향 해일 덮친 바닷가에 집 한 채 짓기 위해 본드 냄새 들이마시며 가구를 짠다 옷과 이불도 가구라는 집이 있는데 옷과 이불의 집을 짓는 네가 집이 없으니, 너는 더러운 이불 홑청만도 못한 것이냐 한밤중 인기척에 놀라 컨테이너 문 박차고 어둠 속으로 도망친 너는, 도랑 건너 밭고랑에 엎드린 채 숨죽이는 너는, 울분 섞인 발길질에 담장 밖 어디론가 사라져버린 휴일 아침의 축구공만도 못한 것이냐 소녀들 1 레바논 국경 시모나의 이스라엘군 포진지를[…]

마북리 가구공장의 너는
박후기 / 2007-01-31
/ 김남일

  망 김남일     벌레 한 마리가 망을 향해 나아갔다. 벌레는 호기심에 가득 차서 쉬지 않고 더듬이를 움직였다. 벌레들은 하루에도 수천 수만 번 망의 의지와 관용과 능력을 시험했다. 그 과정에서 망이 그러했듯 벌레들끼리 서로 연합하고 동맹을 맺고 조합을 만들기도 했다. 때로는 변종과 이단, 그리고 무성 증식에 의한 클론과 라멧을 만들어 망을 노리기도 했다. 지금, 망은 피곤했다. 차라리 거대한 벌레 동맹이나 돌연변이 변종의 색다른 호기심이라면 망 또한 호기심을 갖고 대처할 의향이 있었다. 그러나 눈앞에 뻔히 보이는 이런 따위의 벌레라니! 이제 갓 책보를 메기 시작한 유치원생 수준의 더듬이를 달고서도 마치 엄청난 소명을[…]

김남일 / 2007-01-31
폭주족들 / 이원

 이 원 폭주족들 텅 빈 심야의 길이 폭주족들을 매달고 허공을 지그재그로 내지른다 어제의 어제와 오늘과 또 오늘의 오늘로 뒤범벅된 시간이 폭주족들의 몸에 확확 불을 붙인다 기우뚱거리며 폭주족들이 몸의 속도를 높인다 허공 속에 뜨거운 알을 낳는다 뒤엉킨 경적을 비집는다 아카시아 향기가 길을 뚝뚝 끊었다 붙인다 한 무리의 폭주족들이 끊어진 길을 굉음을 내며 건너뛴다 뒤따라 달려오던 한 무리의 폭주족들은 끊어진 길속으로 빠진다 끈적끈적한 괴성과 경적이 함께 길속으로 묻힌다 봄밤이 눈물처럼 반짝이다 마른다 매몰의 시간을 잘 아는 길은 금방 아문다 시간의 만다라로 타오르며 폭주족들은 길을 꿀꺽꿀꺽 삼키며 달린다 하나의 길을 삼키는 순간 다시[…]

폭주족들
이원 / 2007-01-31
기억의 우주 / 이병률

 이병률 기억의 우주 고개를 든 것뿐인데 보면 안 되는 거울을 본 것일까 고통스레 관계를 맺은 기억들, 기억의 매혹들이 마지막인 것처럼 몰려오고 있다   이제 쓰거운 것이 돼버린 파문들을 단숨에 먹어치우고 끝내버리자는 것일까 하나의 지구를 녹이고 또 하나의 지구를 바꾸게 되었다 기억하고 있다면 기억하지 말라는 듯 우주는 새들을 풀어 놓았다 무엇으로 다시 천지를 물들일 것인가를 곰곰이 생각한 듯 소멸하지 않는 기억의 우주를 쌓이고 쌓이는 외부의 내부를  어쩌자고 여기까지 몰고 와서는 안정하지 못하는 것일까 해를 보면 어두워지는 달을 보면 환해지는 기억들은 왜 적막하게 떠돌지 못하고 우주에 스미는 것일까 사과나무 사과나무를 사야겠다고 나서는 길에[…]

기억의 우주
이병률 / 2007-01-31
가족 / 이규리

 이규리 가족 지난 밤 비에 물이 불었나 보고 오라 하니 아이는 나무의 키를 보고 왔다 물에 비친 나무의 키가 더 커졌다고 수척한 물 위에 왜 나무의 키가 더 커 보이는지 그 아이 비오는 날 마당에 나가 화분에 물을 준다 우산 쓰고 물을 준다 아이의 말을 알아들은 화분의 꽃들은 그것이 약속이란 걸 안다 비가 왔으니 물이 불었을 거라는 건 어른의 말 비가 와도 화분에 물 줘야 하는 건 아이의 약속 그 아이 통통 뛰어다니며 현관문이나 창문을 죄다 연다 비가 자꾸 안으로 들어오려 한다고 바깥에 젖고 있는 풍경들 자꾸 안으로만 들고픈데 안에[…]

가족
이규리 / 2007-01-31
이런 기사를 올려 달라….하는 요청을 해도 되나요? /

제가 가장 흠모하는 한국 작가가 강신재 선생님입니다.언제고 한번 직접 만나뵈었으면 했는데 이미 돌아가셨다더군요.제가 볼 때 강신재 문학의 본령은 단편에 있습니다.강신재의 장편들은 오늘날의 기준으로 보더라도 매우 세련되고 감각적이기는 하지만 단편들만큼의 깊은 울림을 주지는 않더군요.특히, <점액질>이란 단편은 읽을 적마다 매번 저를 뒤흔들어 놓는답니다. 강신재 선생님은 물론 문단에서 대단한 대접을 받으셨긴 하지만 그래도 그분의 문학성이 원래 받아야 할 인정을 받지는 못하고 잇다고 저는 생각합니다.뭐, 그런 부분이야 제가 아쉬워하거나 말거나 달라질 수 있는 일은 아니겠지요.음… 제가 지금 원하는 것은 강신재 문학을 전반적으로 한번 쭈욱 훑어보는, 말하자면 화가로 치면 '회고전' 같은 것을 웹진의 기사로 한번 다루어 주셨으면[…]

이런 기사를 올려 달라....하는 요청을 해도 되나요?
/ 2007-01-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