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생일날 / 이윤설

       1937년 가을, 소비에트 중앙인민위원회는 고려인(소련에 살고 있는 한인)들을 일본의 첩자라는 누명을 씌워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시킨다. 124대의 화물열차(마소 운반용)에 실려 카자흐스탄(9만5256명)과 우즈베키스탄(7만6525명)으로 쫓겨 간 고려인은 모두 17만1781명이었다. 그중 고려인 인텔리와 군 장교 등 2800여 명은 비밀리에 체포되어 학살당했다. 강제 이주를 반대할 우려가 있다는 단 하나만의 이유로. 이때 중앙아시아의 황량한 황무지에 버려지다시피 한 고려인들은 추위와 기아, 풍토병 등으로 줄줄이 쓰러져 숨졌다. 1937년부터 1938년까지 숨진 고려인의 수는 무려 2만여 명이 넘었다. 등장인물이반돼지연이갑이연이모고씨고씨부인김씨할배로스께교장로스께위원장로스께1로스께2이반어미지식인들    암전 속에서 끊임없이 이어지는 기차바퀴음. 식민지 조선에서 소련의 연해주로 또 다시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되어 떠도는 고려인들의 유랑의 궤적처럼 기차 소리는,[…]

엄마의 생일날
이윤설 / 2007-12-31
타인들의 타인 / 하재영

 타인들의 타인 ― 17세 하재영  나는 부엌 식탁 아래 웅크려 앉아 있다. 불도 켜지 않고, 캄캄한 부엌, 식탁 아래. 나는 여기에서 음식을 먹는다. 하지만 내가 먹는 것은 음식이 아니라 단지 씹어 삼킬 무엇인지 모른다. 내가 먹는다고 생각하는 행위는 ‘먹다’가 아니라 ‘쑤셔 넣다’일지 모른다. 고로 나는, 씹어 삼킬 뭔가를, 입 속으로, 입 속으로, 꾸역꾸역 쑤셔 넣고 있는 중이다. 학원에서 돌아와 교복을 벗다가 옷핀이 없어진 것을 깨달았다. 옷핀. 터져 버린 호크와 올라가지 않는 지퍼 대신 스커트를 여며 주던 옷핀. 그 옷핀을 언제 잃어버린 걸까. 아니 그보다 교복이 불어나는 살을 감당하지 못하게 된[…]

타인들의 타인
하재영 / 2007-12-31
테러리스트들 / 손홍규

 테러리스트들 ― 암살자 3 손홍규 누나의 방은 어김없이 축축했다. 책장이 서 있는 벽 위쪽부터 천장까지 곰팡이 먹은 벽지가 부풀어 올라 있었다. 냉장고에서 흘러나온 물이 식탁 아래까지 적시고 있었다. 창문틀에서 벽을 타고 흘러내린 빗물은 침대 발치까지 이르렀다. 현수는 수백 년 동안 심해에 잠들어 있다가 발견되어 방금 인양된 보물선의 선실 같은 누나의 방을 조심스럽게 거닐었다. 그래도 양말이 젖었다. 그는 개수대로 다가가 수도꼭지를 완전히 젖혔다. 한 방울씩 떨어지던 물이 그쳤다. 젖은 양말을 벗어 욕실에 던져 놓고 마른 걸레를 찾아 물이 흥건한 식탁 아래와 냉장고 앞, 그리고 침대 주변을 닦았다. 걸레를 쥐어짜니 더러운 물이[…]

테러리스트들
손홍규 / 2007-12-31
정사 / 박형숙

  정사 박형숙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콩콩거리는 작은 소리였지만 소리는 차츰 가까워지고 있었다. 발자국 소리가 가까워짐에 따라 내 손놀림도 빨라졌다. 어쩔 수 없는 인연의 사슬처럼 세탁기 안에서 뒤엉켜 있는 빨래 더미 속에서 청바지를 꺼냈다. 탈수가 된 청바지는 몹시 구겨져 있었다. 청바지에 남은 구김은 얼핏 조잡한 큐빅 모양 같았다. 그것은 아내의 표정을 닮았다. 다 돌린 빨래 너는 일이라도 해야 되는 거 아냐? 그렇게 말하며 물기를 짜낸 빨래처럼 인상이 구겨졌던 아내를 닮았다.     아내의 얼굴이 다림질한 것처럼 펴지려면 빨래들은 일제히 건조대에 매달려 있어야만 했다. 그쯤은 나도 안다. 내 손을 거쳐 건조대에 매달린 빨래들이[…]

정사
박형숙 / 2007-12-31
밖으로 들어가고 안으로 나가는 방법에 대한 고찰 / 김도언

  밖으로 들어가고 안으로 나가는 방법에 대한 고찰 김도언 1. 퀴르르, 퀴르르, 퀴르르. 바늘 끝으로 녹슨 철판을 긁고 있는 듯한 소리 같다. 이를테면 스피커 장치와 연결되지 않은 채로 돌아가고 있는 LP판을 레코드 바늘이 긁고 있을 때 나오는 소리 같다. 귀뚜라미다. 어디선가 귀뚜라미가 울고 있는 것이다. 귀뚜라미 울음소리를 듣는 일이 흔한 일이 아니게 되어 버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나는 귀뚜라미 울음소리를 들을 때마다 그것이 어떤 일의 전조를 깨우는 소리인 것만 같아 마음이 되게 심란해지고는 한다.   그런데 귀뚜라미는 언제부터 저렇게 울고 있었던 걸까. 마치 오래 전부터 움직이고 있는 시계의 초침 소리가 어느 순간부터[…]

밖으로 들어가고 안으로 나가는 방법에 대한 고찰
김도언 / 2007-12-31
안국동울음상점 외 3편 / 장이지

  장이지    안국동울음상점 천사 십칠야 날씨, 포근함 너구리 저택의 눈 내리는 밤안국동울음상점 나선형의 밤이 떨어지는 안국동 길모퉁이, 밤 푸른 모퉁이가 차원의 이음매를 풀어주면, 숨 쉬는 집들, 비칠대는 길을 지나 안국동울음상점에 가리. 고양이 군은 바닐라 향이 나는 눈물차를 끓이고 나는 내 울음의 고갈에 대해 이야기할 것이다. 진열장에 터키석처럼 놓여있는 울음들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고양이 군은 ‘혼돈의 과일들’이니 ‘그믐밤의 취기’니 ‘진흙 속의 욥’이니 ‘거위 아리아’니 ‘뒤집힌 함지(咸池)’니 하는 울음의 이름들을 가르쳐주겠지. 나그네가 자신의 그림자에게 말하듯 내가 고양이 군에게 무언가 촉촉한 음악을 주문하면 스탄 겟츠의 「이파네마에서 온 소녀」가 바다 밑처럼 깔리리. 나는 내 안의 함지에서 울음을 길어다주는,[…]

안국동울음상점 외 3편
장이지 / 2007-12-31
천상이 아니라 지옥에 발 디딘 언어가 시(詩)요 / 고은&김형수

  <작가와 작가> 천상이 아니라 지옥에 발 디딘 언어가 시(詩)요  대담 고은(시인) 진행?정리 김형수(시인)  intro 과거가 없는 사람 생래적인 나그네성 영원한 불완전 동사 김수영, 서정주 폐허 한국의 근대시사를 거부 시인은 시인의 운명을 저주한다 만인보 알렌 긴즈버그 위악성 시는 문학이 아니다 한국문학에 대한 희망  나는 영원한 불완전동사 김형수  선생님을 서울대학교에서 뵈니까 느낌이 상당히 새롭습니다. 고  은  나는 사실은 들의 사낸데 어떻게 요즘은 이따금 학교의 사내가 돼 있네. 김형수  제가 1959년생 올해 나이 마흔아홉 살입니다. 그런데 선생님은 그 전 해에 등단하셨습니다. 이후 참으로 긴 시간을 변화무쌍하게 작품 활동을 하셨으니 저희 세대로서는 그[…]

천상이 아니라 지옥에 발 디딘 언어가 시(詩)요
고은&김형수 / 2007-12-28
인형 / 강기원

 강기원 인형 너덜너덜한 내가 너덜너덜한 너를 주워 든다 뜯겨 나간 누더기 너의 조각을 찾아 붉은 실로 꿰맨다 실밥이 함부로 드러나도 그게 오므라지지 않는 상처로 보여도 떨어져 나간 팔 다리 이어만 붙여도 어디냐 그러나 입술을 새로 만들면 눈동자가 일그러지고 콧구멍을 뚫으니 뺨이 우그러 드는구나 그래도 이게 어디냐 우멍한 눈자위가 이제 날 바라보는데 네 몸 속으로 내 숨결이 흐르는데 나를 찌르던 바늘로 너를 찔러 네가 다시 내가 되었는데 말이다 내가 다시 네가 되었는데 말이다 2인3각 경기 나의 하루는 너의 하루와 달라 나의 스텝은 너의 스텝과 달라도 너무 달라 나의 문법과 너의 문법이[…]

인형
강기원 / 2007-12-28
오리 / 강은교

 강은교 오리 주홍빛 발, 솟구치는 엉덩이,  기쁨에 떨며 황색 부리로 저수지 바닥의 돌을 끝없이 헤집고 있다. 언제나 마지막 유혹인 너, 삶. 상처를 눈부시게 켜들고   적도의 꽃 브룸엘리아드 필 때 너에게 가리라 거기, 날개 푸른 새들 날고 있으리 상처를 눈부시게 켜 들고 너에게 가리라 거기, 푸른 이끼들 밤이슬에 몸 씻고 있으리 네가 상처를 보듬어 주면 거기, 뺨이 분홍인 구름들 소곤대며 이끼에 찾아오리 이끼를 들추면 지상의 모든 사랑들이여, 잠시 걸음을 멈춰라 첨 보는 별 얇은 구름 속에서 긴 속눈썹 펄럭이고 있으니 뜻밖에 일어서는 저 배후(背後)들 남은 상처 모두 벗어라 내 눈까풀[…]

오리
강은교 / 2007-12-28
아무도 없는 물가에서 노래를 불렀다 / 김충규

김충규  아무도 없는 물가에서 노래를 불렀다 어두운 낯빛으로 바라보면 물의 빛도 어두워 보였다 물고기들이 연신 지느러미를 흔들어대는 것은 어둠에 물들기를 거부하는 몸짓이 아닐까 아무도 없는 물가에서 노래를 불렀다 노래에 취하지 않는 물고기들, 그들의 눈동자에 비친 내 몰골은 어떻게 보일까 무작정 소나기 떼가 왔다 온몸이 부드러운 볼펜심 같은 소나기가 물 위에 써대는 문장을 물고기들이 읽고 있었다 이해한다는 듯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어댔다 그들의 교감을 나는 어떤 문장으로 기록할 수 있을 것인가 사심이 들어간 어두운 문장만 기록하는 게 아닐까 살면서 얻은 작은 고통들을 과장하는 동안 내 내부의 강은 점점 수위가 낮아져 바닥을 드러낼[…]

아무도 없는 물가에서 노래를 불렀다
김충규 / 2007-12-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