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울의 정원 / 박형준

 박형준 거울의 정원                        비좁은 방 거울 속에 정글이 펼쳐져 있다 아침에 나갈 때 깜빡 잊고 끄지 않은 화면 치렁치렁한 고독을 잎사귀처럼 발에 감고 표범이 물속 왕버들 위에 앉아 있다 자신의 무덤은 나무 한 그루면 족하다는 걸까 하류로 떠밀리며 홍수로 불어난 물을 내려다본다 표범은 먹이감에 다가갈 때 눈에 띄는 옷 그대로 입고 죽어간다지 고요한 거울의 정원 속에 어른거리는 불꽃 수평선처럼 아득히 주시한다 먹이감의 숨통이 끊어지면 현기증에 제 얼굴을 쓰다듬던 발톱 유쾌한 살해자가 사는 발톱 달린 거울이 내 얼굴을 쓰다듬는다 부드러운 털이 어두운 방안에 흩날린다   마차                                     조선 국화가[…]

거울의 정원
박형준 / 2006-10-31
집게와 말미잘 / 이나미

  집게와 말미잘 이나미 1. 여자가 사라졌다. 감쪽같이. 한 남자의 아내이자 며느리, 엄마인 그녀가 흔적조차 없다. 남편은 경찰과 함께 아내가 실종되던 날 행적부터 도돌이표 찍듯이 샅샅이 되짚었으나 허사였다. 타고 나간 자동차도 땅으로 꺼졌는지 공중분해 됐는지 종적이 묘연하다. 유일한 단서라곤 실종 당일 집 근처 주유소에서 주유하느라 CC카메라에 잡힌 마지막 모습. 여자는 휴대전화가 없어서 위치 추적도 불가능했다. 경찰은 다각도로 수사를 펼쳤다. 처음엔 바람난 주부의 단순 가출로 초점을 맞췄다가 주변 인물 탐문과 유선 전화 통화기록, 신용카드, 통장 입출금 거래 내역, 집 컴퓨터까지 뒤지고 나서야 단순 가출이 아닌 사고로 방향을 전환했다. 그녀는 컴맹이었다. 게다가[…]

집게와 말미잘
이나미 / 2006-10-31
운명 / 김태동

 김태동         운명                               언젠가 저 물빛 마시며 저수지 물가에 다다르는 저 햇빛처럼 힘겹게 떠, 오르는 이 붉은 꽃들, 그래 그것들 그것들이 제 울음을 물가 풀어놓을 때 나는 내 운명의 살가죽을 이- 저수지에 풀어놓으며 유영하는 뼈다귀 귀신이 되어 거푸, 거푸 헤엄쳐 돌아다닐 것이니, 고기여 그렇게 멀뚱하니 쳐다보지 마라 휘둥그런 눈의 사슬 던지지 마라 이 거친 날에 바람이 불고 비가 추적추적 드리우는 이 한낮 안개는 저 세상의 민머리를 쓰다듬으며 저 능선을 넘어갈 즈음 이 봄의, 이 세상의 마지막 꽃잎임을 증거하는 목련 한 꽃잎, 공중에 떠있다 연못의 수련처럼 고고한 정신을 바람에[…]

운명
김태동 / 2006-10-31
문패로 단 눈웃음 / 정유화

 정유화 문패로 단 눈웃음 잠시 나를 바라보던 한 처녀가 눈웃음 하나를 놓고 봄이 오는 길모퉁이로 사라졌는데 그 눈웃음은 사라지지 않고  내게로 와서 복사꽃 피듯 피어나는데 이를 어찌해야 하나 가슴에 받아 든 이 눈웃음에서 풋풋한 살냄새도 나고 보리냄새도 나고 아카시아 꽃향기도 나곤 해서 이를 오래도록 몸속에 지니고 싶은데 이를 어디에다 숨겨놓고 볼 수는 없을까 하여, 나는 나의 눈웃음까지 섞어 절벽에서 필 철쭉나무에게도 주고 턱을 괴고 듣기만 하는 바위에게도 나누어 주고 봄바람 쐬러 나오는 별의 처마에도 나누어 주고 강물 속의 물고기에게도 나누어 주고 그래도 남은 눈웃음이 있으면 우리 집 문패로 걸어 놓으리[…]

문패로 단 눈웃음
정유화 / 2006-10-31
절에 가는 마음 / 이선영

 이선영    절에 가는 마음 오래 전 현해탄에 몸 던진 연인의 맘이다가도 (벼랑 끝에 몰린 마음은 벼랑 끝에서 몸으로 던져져야만 하지 않을까 끝에 몰린 마음 아니고서야 뒤에 무엇인들 두고 올 수 있을까) 햇빛 창창한 대낮에도 그늘을 보라고 수심에 찬 얼굴이라도 가려 주겠노라고 전등 달지 않은 절 방에 엎드리는 마음 바닥을 들여다보려는 마음 움푹하게 덜어지는 마음 객식구 몸까지 보태 절에 다 털리는 마음 엉덩이를 만지다 내 너의 엉덩이를 즐겨 만지작거리는 것은 그곳에 네 순수의 살집이 가장 많기 때문일까 거기를 통해 너의 누추한 배설물이 흘러나오고 너에 관한 온갖 악취와 추문이 담긴, 네가[…]

절에 가는 마음
이선영 / 2006-10-31
클레멘타인 / 이혜경

  클레멘타인 이혜경 그가 내 기억 속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온 것은 내 나이 일곱 살의 이른 봄날이었다. 물론 그 이전에도 그는 나의 부모들이 사는 집에 종종 들렀을 테고, 나는 머리를 꾸벅하며 그에게 인사를 건넸을 것이다. 그날, 낯선 사람들로 북적이는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엄마와 인사를 나누는 그의 회색 옷자락을 보자 마음이 놓였던 걸 보면. 볕은 환한데 바람이 날 세운 차가운 손톱으로 할퀴는 그런 날이었다. 학교 운동장엔 애 어른 할 것 없이 한데 모여 바글거렸다. 어줍은 표정으로 제 엄마의 치맛자락 뒤로 숨는 아이가 있는가 하면, 서로 재잘거리는 아이들도 있었다. 손에 무슨 서류를 든[…]

클레멘타인
이혜경 / 2006-10-31
카피라이터-소비자에게 윙크를 보내는 사람! / 이기인 (시인)

  카피라이터 조현복 선생님(사진 왼쪽)을 만나러 가는 길에 ‘개구쟁이라도 좋다. 튼튼하게만 자라다오’ 언제 들었는지 가물가물한 이 오래된 카피 한 줄이 언뜻 머릿속에서 튕겨져 나왔다. 이런 종류의 카피가 있어서 말썽을 부렸던 아이들이, ‘한 성질 하는’ 부모에게 조금은 덜 혼나지 않았을까. ‘카피’는 내가 의식했거나 의식하지 않았거나, 어린 시절부터 내 곁에 있었던 것 같다.   부모의 자식 사랑을 ‘문학작품’이 아닌 카피로써, 그것도 한 줄로 이렇게 표현할 수 있다니 ‘카피의 세계’는 정말 놀랍다. 그러고 보니 ‘개구쟁이라도 좋다. 튼튼하게만 자라다오’와 같은 카피는, 아이들의 ‘인권’까지 대변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이런 의미에서라도 나는 카피의 ‘위상’이 지금보다 좀[…]

카피라이터-소비자에게 윙크를 보내는 사람!
이기인 (시인) / 2006-10-17
SF문학의 세계- 마지막 회 / 박상준

 시간여행의 고전들                  오늘날 ‘시간여행’은 SF의 가장 대표적인 제재 중 하나입니다. 그렇지만 원래는 주류문학의 작가들이 현실을 풍자하기 위한 기법으로 채택하던 것이었지요. 가장 대표적인 예가 우리에게도 친숙한 찰스 디킨스의 <크리스마스 캐롤(1843)>일 것입니다. 이 작품의 주인공 스크루지는 미래에 비참해진 자신의 모습을 미리 보고는 탐욕과 이기심에 사로잡혔던 사고방식을 뉘우치고 새로운 존재로 거듭나지요.SF로서 시간여행이 널리 알려진 것은 영국 작가 H. G. 웰스의 <타임머신(1895)>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전에도 시간여행 소설들은 있었지만, <타임머신>은 80만년 뒤라는 광대한 스케일의 미래와 미래 인류를 충격적으로 묘사하여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습니다. 그 결과 작품의 제목인 ‘타임머신’은 오늘날 시간을 여행할 수 있는 장치의 통칭으로[…]

SF문학의 세계- 마지막 회
박상준 / 2006-10-16
열여섯, 우리들의 타화상 [2] / 김경연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독일 작가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1919. 사진 오른쪽)에 나오는 말이다. 현실이 답답하고 억압적이라 느낄 때, 뭔가 돌파구가 필요하다고 느낄 때, 옥죄이는 현실을 떨치고 자유로운 비상을 꿈꾸고 싶을 때 이보다 더 큰 마력을 지닌 말이 또 있을까. ‘알’은 보호와 안정을 보장해 주지만, 날고자 하는 새에게는 구속이 될 수 있다. 알 속의 새는 ‘알’을 파괴해야만 비상이 가능하다. 그러므로 파괴는 새로운 출발과 창조의 전제이다. 이 말이 특히 청소년기를 떠올리게 하는 것은 ‘알’과 ‘새’가 내포하고 있는 이러한 상징성 때문일 것이다. 이경화는 <나의 그녀> (바람의 아이들, 2004. 사진 아래 오른쪽) 에서 <데미안>을 직접[…]

열여섯, 우리들의 타화상 [2]
김경연 / 2006-1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