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라리, 사랑 / 김태용

  차라리, 사랑 김태용 우리는 쇼핑을 마쳤다. 카트를 집어넣고 동전을 꺼내려고 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몇 번 되풀이해도 소용없었다. 우리 중 하나가 그만두라고 그깟 동전 하나 때문에, 라고 신경질을 냈다. 우리 중 또 다른 하나가 그깟 동전이라니, 라고 말을 받았다. 둘은 잠시 동안 동전의 가치에 대해 논쟁을 했다. 논쟁은 평소 서로에 대한 불만으로 전이됐고 급기야 이 부르주아 새끼와 그러니 니가 맨날 지지리 궁상 그 모양이지, 라는 감정이 섞인 격한 언어로 표출되어 나타났다. 우리의 나머지가 둘을 말렸지만 둘 다 이미 주먹을 쥔 채로 싸울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쇼핑을 이제 막 시작하려는[…]

차라리, 사랑
김태용 / 2006-10-31
“노래는 삶에 대한 경외의 산물입니다” / 이지상

  “노래는 삶에 대한 경외의 산물입니다” 이지상 김중미의 『거대한 뿌리』를 읽으며 김중미의 최근작 『거대한 뿌리』를 읽습니다. 몇 페이지 못 가 등장하는 낯익은 이름들, “보산리” “동두천 중앙시장” 지금은 사라진 “어수동역”. 소설 속 인물들의 표정을 따라 한 뜸 한 뜸 책장을 넘기다 보니 어느새 나도 30여 년의 긴 시간을 되돌려 동두천의 한 거리에 와 있는 듯합니다. 미국으로 입양가는 게 소원이었던 초등학생 임경숙이나, 보산리 기지촌의 포주집 딸 해자, 해자네 집에서 제일 나이가 많지만 “꿈이 양갈보는 아니었다”고 넋두리하는 미자 언니, 동광극장 옆 산파집에서 제이콥을 낳은 주인공의 육촌언니 윤희나, 튀기 만들기 싫어 결혼하지 않는다는 주인공의[…]

“노래는 삶에 대한 경외의 산물입니다”
이지상 / 2006-10-31
91년의 애도를 위하여 / 이수형

 91년의 애도를 위하여 ―김연수, 「구국의 꽃, 성승경」 이수형 우리 문단에서는 조금 특이한 경우로, 김연수는 단편집의 표제를 그 안에 수록된 단편의 제목에서 따오는 것이 아니라 새로 짓는 편이다. 『내가 아직 아이였을 때』와 『나는 유령작가입니다』가 그 예인데, 이처럼 독자적인 표제로 묶일 수 있는 단편들의 모음이 마치 일종의 기획 패키지 상품 같아서 ‘나는 유령작가입니다’라는 제목을 접할 때 종종 ‘나는 기획작가입니다’라는 변형된 버전이 환기된다. 실은 둘은 비슷할지도 모른다. 이제는 유효 기간이 지났을 수도 있지만 그 표현도 고색창연한 “감정의 유로(流露)”라는 낭만주의적 작가관이란 게 아직도 남아 있다면, 모름지기 작가란 자연스러운 자기 영감을 표현하는 사람이지 집필 기획을[…]

91년의 애도를 위하여
이수형 / 2006-10-31
변산바다에 와서 / 이승철

 이승철  변산바다에 와서 ―박영근 시인을 생각하며 그날 파도는 온종일 나에게 앓는 소리를 토해 냈다. 변산반도 앞 새푸른 솔섬이 깃발처럼 나부껴대던 날 태풍이 난장 치며 떠나간 방파제 아래 뻘밭 게떼들이 생존의 구렁 속에 온몸 처박고서 진격을 멈추지 않았다.  만삭의 파도가 하이얀 면사포를 뒤집어쓴 채 떠나갔다.  저물녘 흐느낌소리 뒤끝 홍화문 문짝처럼 서러워지던 너.    저 꽃들이 두렵다던 네 말을 그땐 차마 믿지 못하였다. 눈먼 네 사랑은 곰소 염전창고 막소금처럼 짜고, 개운했다.       애당초 끗발 없던 인생쯤이야 적막강산으로 남겨져야 했다.   이팔청춘의 흔적처럼 산다손 얼마나 더 버팅길 수 있었을까.     여직 귓바퀴 속에 감도는 이냥저냥 잘 놀다간다던[…]

변산바다에 와서
이승철 / 2006-10-31
자전거 / 전윤호

 전윤호 자전거  술 마시다 보았다 축축한 담벼락에 세워진 짐받이 자전거 잔을 들 때마다 목에 걸리는 녹슨 페달 검고 딱딱한 안장이 돼지껍데기처럼 씹힌다 우린 이제 만나면 싸워 그만 만나 내가 타도 달릴 수 있을까 앞바퀴가 기우뚱한 자전거 언덕을 넘어서 바람처럼 내려가다 웅덩이를 만나면 제 때 멈출 수도 있을까 탄 고기와 함께 남아 지글거리며 빈 의자를 바라보다 휘청거리며 일어난다 축축한 담벼락에 세워진 짐받이 자전거 한번 가볼까 옥상 정원 중환자실에서 창밖으로 보이는 옆 건물 옥상 정원 나무도 심고 꽃도 심었다 바람에 흔들리는 잎들이 나보다 푸르다 한참 보고 있으면 철문 열고 한 사람이 나와[…]

자전거
전윤호 / 2006-10-31
축구 / 장석주

 장석주 축구 어린 시절 공을 차며 내가  중력의 세계에 속해 있다는 걸 알았다. 사는 동안 배워야 할 도덕과 의무가 정강이뼈와 대퇴골에 속해 있다는 것을, 변동과 불연속을 지배하려는 발의 역사가 그렇게 길다는 것을, 그때 처음으로 알았다. 초록 잔디 위로 둥근 달이 내려온다. 달의 항로를 좇는 추적자들은 고양이처럼 신경을 곤두세우고 그 우연의 궤적을 탐색하고, 매복하고, 노려본다. 항상 중요한 순간을 쥐고 있는 것은 우연의 신(神)이다. 기회들은 예기치 않은 방향에서 왔다가 거머쥐기 전에 이내 다른 곳으로 가버린다. 나는 굼뜬 동작으로 허둥대다가 헛발질한다. 헛발질 : 수태가 되지 않은 상상임신. 내 발은 공중으로 뜨고 공은 떼구르르르[…]

축구
장석주 / 2006-10-31
여름학교 / 윤제림

 윤제림 여름학교 집도 밭도 둥둥 떠내려간 저녁 남은 몸뚱이들만 교실에 모였다 “죽고만 싶어요.” 말만 붙여도 눈시울에 물이 넘는다. 산소까지 모두 쓸려 내려서 잠자리를 잃은 귀신들도 복도 창문에 매달렸다 현고학생부군, 눈썹에서  물이 뚝뚝 떨어진다.      후일담(後日譚) 중종임금 때 진사 윤결(尹潔)은 두 개의 호(號)를 번갈아 썼다. 취했을 땐 취부(醉夫), 깨었을 때엔 성부(醒夫). 홍문관에서 일하던 어느 날, 을사사화로 억울하게 죽은 친구를 위해 이렇게 말한 죄로 죽었다. “안명세(安明世)를 참한 것은 잘못이다.” 취부는?  아직도 피마(避馬)골 빈대떡집에 앉아서 성부를 기다리고 있다.

여름학교
윤제림 / 2006-10-31
늙고도 늙은 팥죽집 여자 / 서성란

  늙고도 늙은 팥죽집 여자 서성란 * 노파가 언제부터 그곳에서 팥죽을 팔았는지 알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사람들은 아주 오래 전부터 노파의 팥죽을 사먹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지만 더러 눈과 귀가 어두운 이들은 나이를 짐작하기 어려운 늙고도 늙은 노파의 맛난 팥죽집이 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했다. *     건물 외벽을 새로 단장한 고층 아파트와 빌라들이 웅기웅기 모여 있는 빌라촌은 차도를 사이에 두고 편을 가르듯 위쪽 아래쪽으로 갈라져 있었다. 차도를 따라가다 보면 아담한 운동장을 끼고 있는 초등학교가 있고 아파트 초입에서부터 학교로 이어지는 도로변을 따라 상가 건물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도로변에 있는 상가 건물 출입구로[…]

늙고도 늙은 팥죽집 여자
서성란 / 2006-10-31
마침표 / 김명환

 김명환 마침표 언제부터인지 마침표를 찍지 않는다 마침표를 찍어 놓고 지웠다 찍었다 새운 밤도 많았지만 언제부터인지 시가 갇혀버릴 것 같아 다시 노래를 부를 수 없을 것 같아 마침표를 찍지 못한다 자전거 나이 오십에 자전거를 배웠다 초등학교를 졸업하도록 자전거를 못 타는 자식놈이 답답해서 몇 번 넘어지면 될 것을 툭툭 털고 일어서면 될 것을 구르는 바퀴가 멈추면 쓰러진다는 게 슬픈 나이에 쓰러지는 게 두려운 나이에 자전거를 배웠다

마침표
김명환 / 2006-10-31
정의된 의미와 정설에 대한 저항으로서의 문학 / 송영 & 전성태

  정의된 의미와 정설에 대한 저항으로서의 문학 대담 송영(소설가) 진행.정리 전성태(소설가) intro 등단 40년을 돌아보며… 소설의 문학적 특징 음악 이야기 앞으로의 계획  우리는 젊은 시절을 감옥에서 살았다 전성태  《웹진 문장》 ‘작가와작가’ 시간입니다. 오늘은 송영 선생님을 모시고 재미있는 이야기 나누어 보겠습니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송영  예, 오랜만입니다. 전성태 간간이 전화 통화는 했습니다만 만나 뵙는 것은 한 4년 만인 것 같습니다. 2002년 무렵 이곳으로 막 이사 오셨을 때 선생님께서 우스갯소리로 여기까지 밀려와서 더 이상 갈 데가 없다고 말씀하셨는데요. 이쪽에서 지내시기는 어떠세요? 송영  바깥 출입을 거의 안 하고 지냅니다. 광주에 온 지 4년째 되는데 공기도 맑고 살기 좋습니다. 전성태 […]

정의된 의미와 정설에 대한 저항으로서의 문학
송영 & 전성태 / 2006-10-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