깍두기 / 김연경

  깍두기    김연경 “뭐야, 반찬이 깍두기뿐이야!” 동생이 소리를 내질렀다. “배추김치와 파김치도 있잖니?” 엄마가 말했다. 그러자 아빠도 거들었다. “역시 설렁탕 전문집이야. 국물이 진국인 걸. 이 기름 좀 봐.”   아빠는 설렁탕 위에 둥둥 떠 있는 싯누렇고 굵직한 기름방울들을 가리켰다. 하지만 동생은 시무룩한 표정으로 희뿌연 설렁탕 국물 속에 들어 있는 하얀 소면을 휘저어볼 뿐이었다. 김치에는 아예 손도 대지 않았다. ‘외식’이라는 황홀한 말을 듣고 동생이 기대한 것은 외국어가 들어간 패밀리 레스토랑이나 피자집이었다. 고작 설렁탕 집에 오려고 아침부터 그렇게 흥분하여 옷을 챙겨 입었다고 생각하니 억울하고 분했다. 스테이크나 파스타, 립, 포테이토, 킹크랩 등 힘들게 외운[…]

깍두기
김연경 / 2006-09-28
나를 다듬는 지문 / 김병호

 김병호  나를 다듬는 지문指紋 쉬이 마르는 냇물이 바닥을 드러내면 거기 누룽지처럼 들러붙어 멍하게 티비를 본다 꺼진 티비의 화면 뒤로 모르는 이들의 전생이 고여 소리 없이 잠자고 그 옆에 땀 흘리며 밥 먹는 혼자가 있다 정신은 아직 몸에 미련이 남아 뒷덜미에 스민 꿈 한 토막에 소스라친다 살갗에 동심원의 파문이 인다 그 중심에 초점 놓은 눈동자 하나, 자극이 없으면 몸은 혼(魂)을 가두지 못한다며 자꾸 마른 우물에 빠진 두레박줄을 잡아 흔드는데 떨림을 그리는데 잔물결에 놀란 몸은 문을 닫고 혼은 단백질 껍질이 느끼하다며 쉽게 증발한다 가끔 숨을 쉴 수 없어 벽에 몸을 던지면 순간,[…]

나를 다듬는 지문
김병호 / 2006-09-28
국화도 / 윤의섭

 윤의섭 국화도 그녀는 바다에서 기어 나와 해변에 올라선다 이튿날 저녁에도 그녀는 바다에서 기어 나와 모래밭에 발자국을 찍는다 물갈퀴가 보인다 다음 해에도 조금 늙은 그녀는 바다에서 기어 나왔다 새벽에는 바람이 심하게 불었다 섬은 원체시리 산이어서 바람 고일 곳이 없긴 하다 섬에 죽은 자를 묻지 않는 것도 같은 이치겠지만 한번 들어가면 살아 나온 이가 없었다는 섬은 이미 무덤으로 그득하다 모두 섬으로 파고들었던 것이다 등 굽은 해송도 다년생 풀도 일제히 비스듬하다 바람에 쏠린 빗발이 땅에 꽂힌 채 저렇게 되어간다 아침에 그녀는 딸을 데리고 바다에서 기어 나온다 다음날에도 그녀는 딸을 데리고 섬산으로 올라간다 섬은[…]

국화도
윤의섭 / 2006-09-28
츄파춥스 / 조영아

  츄파춥스 조영아         사람들이 노란선을 밟고 선다. 열차가 들어온다. 열차를 볼 때마다 아나콘다처럼 징글맞게 큰 뱀이 떠오른다. 광화문 해태상 지하 수십 미터 아래를, 경복궁 이끼 낀 주춧돌을 비껴 압구정 테헤란로 가로등 밑을 허겁지겁 돌아온 물뱀한테서 비릿한 물비린내가 난다. 저놈은 간밤에 경회루 연못 속에서 시커먼 몸체를 틀어가며 짝짓기를 했을지도 모른다. 놈의 식탐은 그악스럽다. 꾸역꾸역 사람들을 집어삼킨다. 물뱀이 이윽고 어둡고 긴 터널 속으로 사라진다. 사람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승강장에 일순간 적막이 흐른다. 졸음이 몰려온다. 손으로 가판대를 더듬는다. 남아 있는 츄파춥스는 하나도 없다. 가판대를 더듬던 손이 힘없이 아래로 떨어진다. 힘을 주어 내려오는 눈꺼풀을[…]

츄파춥스
조영아 / 2006-09-28
운주사 와불 / 이창수

 이창수 운주사 와불 화순 산비탈 위에 그녀의 집이 있었다 허술한 하늘의 이엉에 박꽃 같은 별이 보였다 나는 자주 그녀를 찾아 갔지만 그녀는 눈에 빗물을 머금고 돌보다 깊은 잠을 잤다 솔밭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그녀의 이마를 핥아주었지만 결코 이승의 나를 보아주지 않았다 이승과 저승이 구별되지 않는 세월이 흘렀다 빗물에 배롱나무가 꽃의 허물을 벗던 어느 가을날 그녀를 찾아갔다 그녀는 여전히 가파른 산비탈 위에 누워 있었고 감은 눈엔 눈물이 고여 있었다 그녀의 이마에 주름진 손을 짚어 주었다 하늘의 이엉에 그녀의 꿈이 키우는 별들이 세상을 덮고 있었다 오랫동안 잠들지 못했던 한 남자가 그녀의 곁에 누워[…]

운주사 와불
이창수 / 2006-09-28
잘 자라 우리 아가 / 길상호

 길상호 잘 자라 우리 아가 북아현동 비탈진 그의 집에 가면 아기 고양이 물어가 있다 사람에게 버려지고도 사람을 잘 따르는 물어, 처음 보는 나의 사타구니로 들어와 털을 비벼대던, 사람의 체온을 덮고 껌뻑 껌-뻑 무거운 눈을 감던 고양이, 물어는 머리 쓰다듬던 나의 손길을 아직 털끝에 간직하는 듯하다 언젠가 발바닥 속발톱에 가슴 할퀴더라도 지금은 사람의 체취로 입속 거미줄을 거둘 수밖에, 길들여진다는 건 허기 앞에 무릎 꿇는 것 심장박동을 버릴 수 없는 아기는 또 야옹, 야아옹 바짓가랑이를 문다 나의 어설픈 측은지심을 길들인다 그래, 잘 자라 우리 아가 눈꺼풀에 무겁게 놓인 물어의 짐을 잠시 내[…]

잘 자라 우리 아가
길상호 / 2006-09-28
외계로 사라질 테다 / 박상

  외계로 사라질 테다 박 상 -너. 외계인…… 이지? 룸메이트가 말했다. 말하면서 어깨를 들썩거려 발음이 한번 접혔다. 울면서 말을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그녀의 눈은 울면서 쉽게 TV 화면을 볼 수 있었다. 그녀의 뺨에서 눈물이 스스로 빛을 내는 별처럼 반짝였다. 그것은 잘 꺾어진 파워커브처럼 뺨의 굴곡을 따라 휘어지며 떨어졌다.    TV 속에서는 한 남자가 울고 있는 여자를 등지고 어깨를 살랑 꺾으며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난 남자들을 꽤 많이 아는 편인데 내 주위에서 우는 남자를 본 적이 없다. TV 드라마는 남자들조차 참 쉽게 울린다. 슬픔을 과장하고 싶은 거다. 나는 뻔한[…]

외계로 사라질 테다
박상 / 2006-09-28
열네 살 舞子 / 김선우

 김선우           열네 살 舞子                                                                      1                                                        무쇠 신 벗고 청동방울 흔들어요 하늘 높이 달 가까이   삼냄새 풍기는 젖은 머리칼 바람의 즙을 먹고 올올이 나부껴요 몸 깊이 우물 파고 물 긷는 소녀여, 붉은 강이 넘치네요 두레박을 버려요 오래 전 죽은 달빛 젖꽃판 위를 맴돌며 흘러요 달이 흘린 희디흰 피 칼날 위에 가득한 밤, 물 젖은 삼베 찢고 넋배를 몰아가요 그대 몸 속 나 어린 여자들의 혼령과 함께, 그러니까 이건 옛날 얘기, (아주 오래된 오늘 얘기란다),   춤추는 그 애는 용띠, 열 살 되던 해부터 마산에 살았지…… 처녀를 잡으러 다닌다는[…]

열네 살 舞子
김선우 / 2006-09-28
2006. 전국시낭송경대회로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

포석조명희문학제기념 4회 전국시낭송경연대회  포석 조명희문학제를 기념해 시를 사랑하는 사회를 만들고자 진천에서 시작한 ‘전국 시낭송경연대회’가 전국 시낭송인들의 주목을 받으면서 진천이 시낭송 물결의 메카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진천은 한국 가사문학의 최고봉 송강 정철 선생의 묘소와 사당 ‘송강사’가 있고, 한국근대문학사상 첫 창작시집 ‘봄 잔디밭 위에’를 펴낸 포석 조명희 선생의 출생지로 시에 대한 역사적인 배경과 문학적 향훈이 높은 곳입니다. 진천군의 후원으로 동양일보가 주최하고 전국시낭송경연대회조직위원회와 포석회가 주관하는 4회 시낭송경연대회가 다음과 같이 열립니다.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많은 참가 바랍니다.  ■ 일 시 :△예선: 2006년 10월 12일 (목) 오후 2시     (동양일보 15주년 행사관계로 부득이 예선을 12일로 옮겨 실시함을 양해[…]

2006. 전국시낭송경대회로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 2006-09-27
양귀자의 <한계령>중에서 / 고인환

  이현용흔히 인생을 시지프스의 고역에 비유하곤 한다. 떨어질 줄 알면서도 바위를 굴려 올려야 하는 시지프스의 형벌. ‘현실 속에서 현실 너머’를 꿈꾸는 문학의 운명과도 닮은꼴이다.여기, 시지프스의 운명을 환기하는 인물이 있다. 먼저, 일찍 세상을 버린 아버지를 대신해서 여섯 동생을 보란 듯이 키워낸 큰오빠. 그는 신화적 인물로 제시된다. 사회의 운명을 짊어지고 바위를 굴려 올렸던 산업 역군의 이미지와 겹쳐지기도 한다. 자신의 울타리를 보호막으로 자란 동생들은 어느덧 사회의 주역으로 자리 잡았다. 그런데 그가 삶의 의욕을 상실했다. ‘열심히 뛰어 도달해 보니 기다리는 것은 허망함뿐’이라는 탄식과 함께. 정상을 향해 밀어 올렸던 바위가 굴러 떨어지는 순간에 직면한 것이다. ‘유년의[…]

양귀자의 <한계령>중에서
고인환 / 2006-09-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