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유(引喩)에 대하여 / 김윤태

 인유(引喩)에 대하여 ―정지용의 「향수」를 중심으로 김윤태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There is nothing new under the sun)”라는 이 유명한 말은 구약성서에 나온다고 한다. 이 말을 문학에 적용시키려 하자, 문득 김기림의 발언이 떠오른다. 그는 「오전의 시론」(조선일보, 1935. 4.20)에서 “실로 벌써 말해질 수 있는 모든 사상과 논의와 의견이 거진 先人들에 의하여 말해졌다. 그들은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을 별로이 남겨 두지 않고 그들의 머리에 떠오르는 뭇 일을 인색함이 없이 토로해 버렸다. 남아 있는 가능한 최대의 일은 선인이 말한 내용을 다만 다른 방법으로 설명하는 정도라는 것을, 더군다나 자신의 작품에서 발견하는 때 우리들의 자존심은[…]

인유(引喩)에 대하여
김윤태 / 2006-08-31
굶주린 사랑 / 윤동수

  굶주린 사랑 윤동수 봉숙에게 떠밀려 들어간 사진관에서 공달은 아기를 보았다. 털북숭이 사진사의 팔에 안긴 아기는 잠들어 있었다. 사내애였다. 저 아기가 아우의 핏줄이라니. 믿기지 않았다. 굳이 따지면 조카가 될 터인데, 아우가 세상에 자식을 남겼다는 게 실감이 안 났다. 그저 무덤덤했다. 곁에서 아기와 사진사를 힐끔대던 준배가 붕어빵이 따로 없다고, 사진사를 아기 아빠로 넘겨짚어도 아무렇지도 않았다. 이 양반이 생사람 잡는다고! 펄쩍 뛰는 사진사가 친부면 어떠랴 싶었다. 커다란 덩치에다 부숭부숭한 털, 새우 눈, 벌렁 뒤집힌 콧구멍까지, 사진사는 영락없이 고릴라를 떠올리게 했다. 차라리 욕을 하라고 사진사에게서 아기를 냉큼 빼앗은 봉숙이 준배에게 눈을 흘겼다. 애[…]

굶주린 사랑
윤동수 / 2006-08-31
전생으로 가는 길에 대한 안내 / 임영태

  전생으로 가는 길에 대한 안내  임영태 시작은 이렇다.          어느 날 아주 이상한 기운 하나가 새벽녘에 들이켠 찬물처럼 서늘하게 스며들 것이다. 무엇이었지? 처음엔 이런 되새김을 할 사이도 없이 순식간에 파장이 사라지겠지만, 차츰 비슷한 느낌이 거듭되면서 길거리 한복판에서 우뚝 걸음을 멈추게 되곤 할 것이다. 그리하여 자기도 모르게 한순간 골똘해진다. 바람이었는지, 소리였는지, 빛이었는지, 자기를 건드리고 지나간 것이 무엇인지 몰라, 아니, 외부의 자극이었는지 자기 몸 안에서 올라온 것인지조차 알 수 없어 기분만 잠시 아뜩해진다. 우두커니 서 있게 된다.   그리하여 무심코 주변을 한번 둘러보게 되면, 그때 아마 기시감 비슷한 현상이 나타날 것이다. 자신을 둘러싼[…]

전생으로 가는 길에 대한 안내
임영태 / 2006-08-31
적멸의 거처 / 반칠환

 반칠환 적멸의 거처 -오대산 상원사 적멸보궁에서  적멸보궁에 와서 비로소 적멸의 얼굴을 보았다 천년 출타 중인 본존불 대신 적멸이 앉은 보료를 보았다 적멸의 궁둥이가 누르고 간 둥근 복숭아 자국을 보았다 적멸도 앉을 자리가 필요하구나 적멸의 육체를 똑똑히 보았다 적멸이라 해도 내가 늘 보던 그것과 다르지 않았다 너와 나 앉은 곳이 모두 적멸의 거처임을 알았다 허공도 바위도 적멸의 몸통인 걸 알았다 소음도 적막도 적멸의 음성인 걸 알았다 방금 핀 저 풀꽃 자리도 시끄럽게 꽹매기 치는 저자거리도 모두 적멸의 거처이다 적멸보궁에 와서 다시금 적멸의 얼굴을 보았다 도무지 적멸도 적멸의 바깥으로 달아날 수 없는[…]

적멸의 거처
반칠환 / 2006-08-31
변성기 / 박상수

 박상수    변성기 물감 번지듯 구름이 이동하는 날, 우린 베이킹파우더를 나누어 먹었지 핫케익처럼 조금만 뜨거워졌으면, 고음이 사라진 선율, 끝내 장조로 돌아오지 않을 아카펠라 플란넬 천이, 그 애가 색이 모두 빠져나간 천치 같은 얼굴로 노래를 부르는 동안 우린 잠시 바다거북 몸을 떨며 쏟아낸 알처럼 잔잔해졌지 우리가 바란 건 누군가의 몽정에서 아름다움을 뽐내는 것, 기어이 서로의 뺨을 때리고 난 뒤 책상에 새겨두었던 이름마저 천천히 희미해졌던 시간들 세 개의 영혼으로 태어나 서로 다른 그림을 그리고 서로 다른 말을 쓰다가 어떤 날은 똑같이 칫솔질 끝에 피를 흘리고, 맑은 날엔 자스민 화분에 묻혀 꽃이 필[…]

변성기
박상수 / 2006-08-31
천문학자 / 서영처

 서영처 천문학자  바흐의 음악들은 별빛, 수백 년을 거쳐 내게 도달한다 느린 악장을 천천히 켜며 나는 날개를 달고 날아올라 총총한 별자리를 더듬는다 선율과 화성으로 가득 찬 별들의 길과 간격 나는 둥근 하늘을 가늠하고 측량한다 활 끝에 묻히는 별빛에 귀를 곤두세운다 페가수스, 카시오페아, 북두칠성, 오리온 宇宙絃을 건드리자 푸가, 자유롭게 쫓아다닌다 내 별은 멀찍이 서서 그를 향해 반짝일까 말까 반짝일까 말까 반짝인다 무한한 창공인 바이올린의 지판 위에서 다가갈 수 없는 거리를 더듬어내던 음정…… 나는 다시 별들의 길을 추적한다 별빛들을 끌고 와 활 끝에 휘감아서 펼쳐낸다 부드러운 소리들을 비밀한 바구니에 담아둔다 부메랑 그해 가을[…]

천문학자
서영처 / 2006-08-31
/ 김선태

 김선태 길 고개 넘어 산비탈을 따라 길이 하나 내려오고 있다 굽이굽이 허리를 꺾으며 진양조 서러운 가락을 뽑고 있다 청산도에 봄이 와서 산도 바다도 하늘도 온통 푸른데, 하도나 푸르러서 죄없이 눈물나는데, 술취한 듯 술취한 듯 벌겋게 달아오른 길이 하나 비틀비틀 내려오고 있다 내려오다 다른 길들을 만나 중모리 중중모리로 얼크러지고 있다 서로 얼크러져 한바탕 질펀한 춤으로 바뀌고 있다 돌담에 피는 아지랑이며, 봄바람에 살랑대는 보리밭, 유채꽃밭 나비들도 덩달아 너울너울 춤을 추고 있다 저물도록 맺히고 풀리고를 반복하다 마을로 접어드는 길은 그대로 절창이다 신명나는 춤 한마당이다. 發光 혹은 發狂                천지사방에 미친 봄이니, 물도[…]

김선태 / 2006-08-31
죽음과의 만남 / 곽효환

 곽효환 죽음과의 만남 1. 흐리고 가끔씩 비 오는 날 오후 혹은 우중충한 날이 어둑어둑할 저물 무렵 라이프치히의 토마스교회에 가보세요 도심 어디선가 파이프오르간 소리 아득히 들리면 작은 광장에 우두커니 서 있던 파우스트 銅像이 뚜벅뚜벅 큰 걸음으로 다가와 문을 활짝 열어젖힐 것 같은 웅장하지도 아담하지도 않은 오래된 교회 천정의 아치를 따라 붉은 나무를 덧댄 지붕선 아래 중앙통로를 따라 더러는 저만치 떨어져 앉아 기도하는 연인들 수백 년을 받침돌 위에서  오래된 도시를 지켜온 사내는 밤이면 비틀거리며 아우어 바흐 켈러*에서 걸어 나와 붉은 눈으로 그들의 심장을 들여다보곤 이렇게 말하지요    사랑하라 사랑하라 다시 사랑하라    죽기까지 그리고[…]

죽음과의 만남
곽효환 / 2006-08-31
물 마시러 갑니다 / 김사과

  물 마시러 갑니다 김사과 잠이 오지 않는다. 네이버 분야별 주요뉴스와 오늘의 날씨, 핫이슈 따뜻한 세상-70대 박사에 도전하는 집념의 할머니까지 읽고 나서 블로그에 두 개의 글과 일곱 개의 사진을 올린 다음 방명록을 열어본다. 아무도 글을 남기지 않았다. 메일함을 확인하고 구글에서 지난달 헤어진 애인의 주민등록번호 앞자리와 메일주소를 쳐본다. 메일주소와 이름을 쳐본다. 이름과 주민등록번호 앞자리를 쳐본다. 지난달 헤어진 나의 애인은 참으로 주도면밀하거나 아니면 비밀스럽거나 아니면 아무것도 없이 그저 가볍고 얄팍한 사람이었구나. 침대에 눕는다. 일어나 컴퓨터의 전원을 끈다. 다시 눕는다. 그러나 여전히 잠이 오지 않는다.   밤은 검푸른 색으로 투명하게 바래가고, 달은 불투명한 상아색으로[…]

물 마시러 갑니다
김사과 / 2006-08-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