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사적 기예의 세 가지 풍경들 / 권정관

          서사적 기예의 세 가지 풍경들                  권정관 1. 허구의 확장과 소설의 위기 ‘소설의 종언’을 진단하는 가라타니 고진의 통찰이 아니더라도 소설이 자신의 위의를 잃어가고 있는 것은 분명해 보이는 판이다. 삶과 세계를 자문자답의 틀 속에 꾸릴 수밖에 없었던 근대의 상상적 주물로서의 소설은 당대의 시대정신과 일정한 유대를 결속하며 자기의 신분을 과시했었다. 그러나 전례 없는 ‘허구의 확장’을 겪고 있는 오늘날 소설은 상상적 주물로서의 힘을 급격히 상실해가고 있는 형편이다. 소설이 위축된다지만 문제는 허구의 ‘축소’가 아니라 허구의 ‘확장’이란 점에 우리는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점점 무성해지고 있는 ‘허구들’ 속에서 허구로서의 소설의 장르적 특장이 희석되면서[…]

서사적 기예의 세 가지 풍경들
권정관 / 2006-05-30
메밀꽃 질 무렵 / 김도연

          메밀꽃 질 무렵 김도연 장터 입구가 갑자기 북적거리는 걸 보니 어느 골에서 빠져나온 시내버스가 도착한 모양이다. 허리가 구부러지고 머리가 센 늙은이들이 더딘 걸음으로 꾸역꾸역 밀려온다. 성질 급한 젊은 놈들은 좁은 장거리를 답답해한다. 물건을 사지도 않으면서 이것저것 볼 것 다 보고 오랜만에 만난 이웃마을 사람들과 긴 안부를 나누며 길을 막고 있는 노인들을 추월하기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장거리는 고속도로가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몸과 마음에 밴 습관은 그 느낌을 못 견디고 액셀만 밟아대는 것이다. 그렇다고 노인들이 쉽게 길을 비켜주는 것도 아니다. 어찌 보면 노인들은 의도적으로 느리게 느리게 장거리를 산보하는[…]

메밀꽃 질 무렵
김도연 / 2006-05-30
우리의 뮤지컬 판에 서서 둘러보다 / 조광화

 우리의 뮤지컬 판에 서서 둘러보다 조광화 뮤지컬 시장이 성장하고 있다. 많은 라이센스 공연들 그리고 창작공연들이 연달아 오른다. 그 편수만 봤을 때 우리의 제반 여건으로는 소화하기 벅찬 양이다. 제작단체들은 극장 잡기도 어렵고 좋은 배우를 확보하기도 어려워지고 있다. 왜 뮤지컬에 대한 관심이 폭증했을까? 그런데 정작 흥행에 성공한 작품들은 왜 별로 없을까? 관객들이 정말 좋아하는 것은 무얼까? 창작뮤지컬은 무얼 해야 하나? 이 글은 구체적인 설문이나 과학적 통계 등에 근거한 학술적 서술은 아니다. 그저 현장에서 작업하면서 또 공연을 보면서 객석의 분위기에서 보고 들은 것들에 대한 단상이다. 어쩌면 단편적 경험으로 받은 인상을 무리하게 일반화하는 오류가[…]

우리의 뮤지컬 판에 서서 둘러보다
조광화 / 2006-05-30
폐허와 빈 곳 / 박청호

 폐허와 빈 곳   박청호 어딘가에서, 불명의 장소에서, 어디에서나, Somewhere, Anywhere, 어떤 형태로, 아마, 있을 수 있는, 있어야 하는 결정하기 어려운, -자크 데리다 외부는 내부의 결과이다. -르 코르뷔지에 이곳에는 아무것도 없다.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만 존재한다. 누군가 오래 전에도 이곳에 아무것도 없었느냐고 물었다. 그것은 아무도 모른다. 지금보다 먼 과거에, 그보다 더 전에 그리고 시간의 이전에 무엇이 있었는지 알 수 없다. 최초의 기억을 아직까지 지니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여기 무엇이 있었는지, 단지 지금 없다는 것인지 말할 수 없다. 다만 어떤 흔적이 남아 있다. 그것으로 아주 오래 전에는 무언가 존재했을지도 모른다고 짐작할[…]

폐허와 빈 곳
박청호 / 2006-05-30
김중혁 소설가(2013)
매뉴얼 제너레이션 / 김중혁

    매뉴얼 제너레이션     김중혁       아직도 첫번째 문장을 쓰지 못했다. 주의사항에서부터 막혔다. 흔해빠진 물건이라면 주의사항 쓰는 건 일도 아니다. 예전에 썼던 주의사항을 그대로 베껴 쓰면 된다. 말만 조금 바꾸고 문장의 배치를 달리하면 그만이다. ‘위험할 수 있습니다’를 ‘위험합니다’로 바꾸고 ‘분해했을 때 심한 충격을 받을 수 있습니다’를 ‘분해하지 마세요’로 바꾸면 된다. 하지만 처음 보는 기능을 지닌 제품이라면 아무리 연구원의 설명을 들어도 막막할 수밖에 없다. 어떤 걸 가장 먼저 경고해야 할 것인지를 생각해봐야 한다. 아무리 하찮은 매뉴얼이라 할지라도 체계와 순서가 있어야 하는 법이다. 태어나서 처음 보았던 매뉴얼을 아직도[…]

매뉴얼 제너레이션
김중혁 / 2006-05-30
티눈 / 김만수

 김만수 티눈                               혁명시절 군화 속에서 나를 붙잡던 네가 후들거리고 접히곤 하는 내 쉰의 가을에 다시 몸속에 둥지를 틀었구나 함께 가자고 흘러내리지 않으려고 몸속 깊이 몸을 숨기고 곧잘 내 신경의 끝에 고리를 거는 너는 모양도 없는 너는 누구냐 아직은 피가 도는 땅이라 여겨 나를 뚫고 들어와 눈을 뜨는 눈 나도 갈색으로 저물고 있는 이 저녁에 누군가의 고운 살갗을 헤치고 들고 싶다 들어가 깊이 잠행하고 싶다 아직은 내 몸에도 갉아먹을 사랑이 남았다는 말이구나 살갗 깊이 뿌리내리는 너는 내 몸에 기대어 함께 가자는 것이구나 아직 가 닿지 못한 거기까지 깊어지자는 것이구나 […]

티눈
김만수 / 2006-05-30
위장 / 김응교

 김응교 위장   내시경에 찍힌 피의 골짜기에 정확히 이력서가 기록되어 있다 비대한 레미콘 불그죽죽 정육점 불빛 반짝이며 폭주(暴走)해 왔다 위장 위쪽에 붕괴될 아파트 벽처럼 갈라진 자죽은 감옥살이 스트레스가 지져놓은 火傷이다 매음굴 골목처럼 벌건 십이지장으로 이어지는 통로는 실직으로 초조해할 때 생긴 핏물 진창길이다 가끔 불규칙한 식사는 진물 묻어 있는 기억의 분화구를 곡괭이질 하고 있지만 매 끼니마다 싱그런 웃음을 투입하여 찢어진 솔기를 홀치고 얼룩진 과거를 달래본다 괜찮아?  이젠 견딜 만해요   상처의 골짜기에서 갓 아문 생살이 우주의 맑은 즙을 퍼올리고 있다 저這  말[言]이  무엇인가에 얹혀 천천히 끈적끈적 필사적으로 기어간다 암벽을 오르는 덩굴일까 엄마[…]

위장
김응교 / 2006-05-30
나도 한 그루 이깔나무로 서서 / 김종해

 김종해 나도 한 그루 이깔나무로 서서 삼지연에서 백두산 가는 길은 가도가도 황톳길 칠월의 뙤약볕 아래 말 한마디 하지 않고 서서 바람이 불어도 미동조차 하지 않는 이깔나무 숲속에서 나도 한 그루 이깔나무로 서서 조선 인민들이 걸어온 황톳길을 역주행한다 서로가 서로를 가리기 때문에 이깔나무 숲속은 어둡다 어둠은 행복하다 보이지 마라, 네 참모습을 황토 흙먼지 뒤집어쓴 채 백두밀영으로 행군하는 이깔나무 숲의 이깔나무들 조선 인민들이 모두 행복하다 말하는 까닭을 나는 안다 삶의 길은 단 하나 안위를 묻기 전에 먼저 경배하라 저 높은 곳의 정일봉*을 향해!  * 정일봉 : 김일성의 항일유격지로 북측에서 선전하는 백두밀영. 김정일이[…]

나도 한 그루 이깔나무로 서서
김종해 / 2006-05-30
고장난 라디오 / 김참

 김참 고장난 라디오 맑은 오후다 나는 흔들의자에 앉아 라디오를 켠다 주파수를 맞추다 보니 뮤제오로젠바흐의 음악이 흘러나온다 볼륨을 올리고 눈을 감는다 내가 눈을 깜빡이며 얕은 잠에 빠져들 때 잡음과 함께 이상한 소리가 흘러나온다 루라루라 루라루리 라리루리 내가 얕은 잠에 들 때마다 심한 잡음과 함께 루리라리 루루라리 라리루리 우주 저편에서 부르는 외계인의 노랫소리처럼 라루라리 라루라리 루라루리 맑은 오후다 나는 흔들의자에 앉아 꼬박꼬박 졸고 라디오에서는 라루라리 라리라루 라루라리 알아들을 수 없는 이상한 소리가 루라리라 리라루라 리라리라 알아들을 수 없는 이상한 소리가 자꾸만 루리라리 라리라루 리라루라 큰 거울과 작은 거울이 있는 방에 관한 복잡하고[…]

고장난 라디오
김참 / 2006-05-30
오월 / 유홍준

 유홍준  오월 벙어리가 어린 딸에게 종달새를 먹인다 어린 딸이 마루 끝에 앉아 종달새를 먹는다 조잘조잘 먹는다 까딱까딱 먹는다 벙어리의 어린 딸이 살구나무 위에 올라앉아 지저귀고 있다 조잘거리고 있다 벙어리가 다시 어린 딸에게 종달새를 먹인다 어린 딸이 다시 마루 끝에 걸터앉아 종달새를 먹는다 보리밭 위로 날아가는 어린 딸을 밀짚모자 쓴 벙어리가 고개 한껏 쳐들어 바라보고 있다 도화동 공터 중풍을 앓던 아버지가 삐딱삐딱 가로질러 가던 공터 딛을 수 없는, 나는 딛지 못한 공터 어디에 뒀더라 옷이 되지 못한 보자기 같은 공터 누더기 누더기 기운 공터 헛젖이 달린 공터 헛배를 곯던 공터 우울의[…]

오월
유홍준 / 2006-05-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