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풍경소리 外 / 김해화

 김해화 가을 풍경소리 쇳가루 마시면서 스무 해 지났습니다 느을 가슴 뜨거워 쇳물 끓었으니 지금 내 목숨 절반은 쇳덩어리 당신을 향하여 남아 있는 반쪽 부드러운 목숨에 여러해살이풀을 심어 쇳덩어리 파먹으라고 갉아먹으라고 합니다 이렇게 스무 해쯤 더 지나면 속 갉아먹힌 쇳덩이에 희디흰 꽃 한 송이 피어나지 않겠습니까 낮은 언덕에 올라 당신이 내뱉는 숨결에도 가을에는 바람이 일겠지요 아니라고 하여도 바람 한 점 꽃을 흔드는 저녁 얇게 남은 목숨 꽃빛으로 부서지면서 꼭 저 풍경소리로 날아오르고 싶습니다        일당쟁이 하루에 한 번씩 죽어 가기 꼭 꼭 날개를 접고 더러운 세상에 마침표를 찍어 가기 돌아보지 않고 고개[…]

가을 풍경소리 外
김해화 / 2006-02-20
아디오스 탱고 / 김을해

 김을해    마지막으로 승요에게 전화가 온 건 거의 삼 개월 전이다. 근 반년 만에 걸려온 전화였다. 한때 수없이 추상적인 고백을 주고받았던 승요와의 통화는 간단했다. 사실 서로의 고백이란 게 거의 우격다짐이어서 다투는 날이 많았지만, 허황된 행복감에 젖어 서로에게 긴 편지를 쓰는 날도 더러 있었다. 그 정도로 우리는 실없이 젊었다. 승요는 누구일까. 새삼스레 생각해보았다. 내가 보기엔 그의 삶엔 두 가지 영역뿐이었다. 가능과 불가능. 그는 자신의 상황에서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을 정확하게 나눌 줄 알았다. 자신의 성격, 자신의 가족, 자신의 직장, 자신의 앞날, 이런 게 그에게는 당연히 불가능의 영역에 속했다. 반대로 나에게는 가능의 영역[…]

아디오스 탱고
김을해 / 2006-02-20
손가락 무늬 外 / 김영승

  김영승 손가락 무늬 作品으로 보지 않고 그저 ‘標識’로 즐문토기 같은 문양으로 보지 않고 겨우 표지로…… 惡人들이여…… 손가락에도 배와 등이 있다면 그 손가락의 배 그 손가락 무늬는 어느새 指紋이나 되어 여기저기 찍히고 손가락 무늬 자체의 오묘함 당당함 중복 있을 수 없음은 온데간데없으니 손가락 무늬가 범죄와 사랑 사이에서 아아, 내가 슈베르트라면 그 손가락 무늬 사이에 보리수 악보를 썼으리 손가락 열 개 다 다른 손가락 무늬여 네 몸에 내 몸에 巖刻된 손가락 무늬여 청실홍실 金줄이고 태산준령 실크로드인 손가락 무늬여  나 그 손가락 무늬 있는 손을 모아  눈물의 長江  짧게 단 한 번[…]

손가락 무늬 外
김영승 / 2006-02-20
잡히지 않는 나비 4 外 / 김상미

 김상미  잡히지 않는 나비 4 그들이 불렀지만 나는 가지 않았어요 노란 은행잎이 흩날리는 길을 걷고 또 걸었어요 반짝거리며 살던 사람들이 하나 둘 죽어간 길 걸을 때마다 시계바늘이 암살범처럼 내 심장을 찔렀어요 땅에 떨어진 은행잎들도 눈을 꼭 감고 입을 꼭 다물었어요 자꾸만 그들이 불렀지만 나는 가지 않았어요 가슴에서 미소한 눈물들이 출렁거렸어요 전설 속의 들짐승이라도 만났으면 좋겠어요 포효하는 입 속으로 나를 밀어 넣고 그가 내지르는 절망의 심벌즈 소리나 들었으면 좋겠어요 그들이 자꾸만 나를 부르고 불렀지만 나는 끝내 가지 않았어요 노랗고 빨갛고 파란 집들을 지났어요 세계가 양팔을 오므리고 서 있는 검은 집도 지났어요 […]

잡히지 않는 나비 4 外
김상미 / 2006-02-20
산협(山峽) 外 / 김남극

 김남극 산협(山峽) 지게를 진 아저씨가 오토바이를 타고 담배를 물고 뽀로롱 마가리로 사라진다 오토바이를 타고 피울 수 있는 담배는 장미밖에 없다 챙이 넓은 모자에 수건을 동치고 세레스 적재함에 올라앉은 아주머니가 뭘 오물거리며 실려간다 세레스 적재함에서 먹을 수 있는 건 찰강냉이밖에 없다 JD트렉터 해가림 천막 속에서 버클리대 모자를 쓴 친구가 밭가에 트렉터를 세우고 커피를 마신다 밭가에서 마실 수 있는 건 정다방에서 배달된 커피밖에 없다 친구 몇이 솔모종거리에 모여 장미 담배를 물고 찰강냉이를 물어뜯으며 정다방 정양을 기다린다 진이 다 빠졌네 먼 섬에서 태어난 시인이 자정 넘어 전화를 했다 “집 한 채 지으니 진이[…]

산협(山峽) 外
김남극 / 2006-02-20
책을 설계하는 사람들-출판기획자 / 이기인(시인)

  ‘한겨레’ 문학담당 기자인 최재봉은 어느 글에서 ‘책은 왜 읽는 것일까?’에 대한 자문자답에서 “그것은 다르게 생각하기 위해서다”라고 밝히고 있다. 그는 같은 글에서, 우리는 책을 통해 우리가 모르던 것을 알게 되고, 옳다고 생각했던 것이 꼭 그렇지만은 않음을 깨닫게 된다는 점을 환기시킨다. 또한 책을 읽으면서 기존의 지식과 가치관을 재확인하는 경우도 있다는 것을 첨언한다.  그는 덧붙여 철학자 니체의 말을 적절히 인용하고 있다.  “사람들은 책을 포함한 사람들로부터 자기가 이미 알고 있는 것 이상을 빼낼 수 없는 법”이다. 그의 말에 따르면 이 말은 ‘옳고’ 동시에 ‘틀림’이다. (옳으면서 동시에 틀릴 수 있는 것이야말로 책의 세계에 어울리는 역설이라고[…]

책을 설계하는 사람들-출판기획자
이기인(시인) / 2006-02-20
[알림]2006년 3월호 업데이트 개시 /

오늘부터 웹진 <문장> 3월호가 업데이트 되고 있습니다. 차례 신작시 정진규 김영승 박남준 양애경 정영 조문경 김해화 정재학 김남극 김상미   단편소설 이경자 김을해 조윤 중편소설 연재이남희 작가vs작가 김규동&고운기 멀티미디어 낭송시 이문숙 문제작 탐구장철문(시인) – 김소월 <왕십리>를 다시 읽는다 삶이 담긴 에세이전창환(한의사) – 평양할매 문화의 창권경우(문화평론가) – 문화다양성과 문화민주주의 책장을 넘기며정재환(방송사회자. 한글문화연대 부대표) -『미래를 여는 역사』박래군(인권운동사랑방 상임활동가) – 『세계인권사상사』 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과 사랑 부탁드립니다.

[알림]2006년 3월호 업데이트 개시
/ 2006-02-16
문화다양성과 문화민주주의 / 권경우

 권경우(문화평론가) ‘문화의 시대’라는 말이 강력한 기호로 작동하기 시작하면서, 우리에게 남아 있는 것은 문화산업과 문화컨텐츠라는 이름을 가진 새로운 시대의 산물들이다. 현재 그러한 산물들이 움직이고 있는 양상을 보노라면 애초 ‘문화’라는 말이 갖는 의미와 느낌과는 다른 방향으로 가는 것처럼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거칠게 말하자면 신자유주의와 세계화의 그림자라고나 할까. 그렇다 하더라도 국내뿐만 아니라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문화를 둘러싼 다양한 활동과 싸움을 보노라면, 문화는 전혀 다른 의미와 감각으로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중에서도 우리가 직접 느낄 수 있도록 알려준 일이 있었다. 2005년 10월 20일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유네스코 총회에서 ‘문화적 표현의[…]

문화다양성과 문화민주주의
권경우 / 2006-02-16
이문구의 <우리동네> 중에서 / 고인환

  노동훈교양 수업 시간에, 이문구의 소설 『우리 동네』 한 쪽과 영어 지문 한 쪽을 나란히 복사해 나누어주고 해석하라는 과제를 낸 적이 있다. 요즘 대학생들에게 영어 지문이 훨씬 쉽게 다가오는 모양이다. 이문구의 소설을 놓고 쩔쩔매며 식은땀을 흘리는 학생들의 모습이 대견한 한편, 씁쓸하고 안타까운 생각도 들었다. 이문구는 토속적인 언어, 전통적 서사구조, 농촌공동체에 대한 향수 등 가장 한국적인 소설을 쓴 작가의 하나이다. 가장 전통적인 소설이 가장 낯설어진 이러한 역설적인 상황은 지금 우리의 현실을 보여주는 한 척도가 될 수 있을 터이다. 대한민국을 한자로 쓰지 못하는 대학생들이 많다고 하지 않던가. 물론, 세계가 하나의 전산망으로 연결되는 지구촌[…]

이문구의 <우리동네> 중에서
고인환 / 2006-02-16
꽃내음 길 / 이경자

  이경자 이불 속에서 몇 번이나 이리저리 뒤챈 뒤에도 그의 마음은 가라앉지 않았다. 그는 이불자락 한 끝을 도둑질하듯 들어올려 보았다. 위쪽은 흐릿한데 구석은 어두웠다. 벌써 아침이 시작된 것이었다. 그는 울상을 지었다. 벌써 아침이면 안 됐다. 그는 어두운 구석에 시선을 던져놓고 지친 듯이 팔 하나를 침대 아래로 떨어뜨렸다. 이때 눈이 따라서 저절로 감겼다. 아, 그래. 이젠 살았다……. 그는 한숨을 내쉬며 생각했다. 어깨와 가슴과 배와 팔다리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게 느껴졌다. 빠져나가고, 또 빠져나가는 걸 느끼다가 마침내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도 남지 않게 되어 주검 같을 때, 그는 반대로 아, 그래, 이제 살았다,[…]

꽃내음 길
이경자 / 2006-02-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