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나푸르나의 능선이 보이는 작은 방 外 / 박정대

박정대      안나푸르나의 능선이 보이는 작은 방                                                            이곳은 대낮에도 어둡다 램프의 심지에 불을 붙이면 겨우 돋아나는 지구, 지구에 불이 켜지면 나는 나의 고독과 함께 생의 탁자에 돌아와 앉는다 누군가와 소곤소곤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이다 가스레인지의 불꽃에 주전자를 올려놓고 뜨겁게 물이라도 끓이고 싶은 것이다 지금 내가 앉아 있는 지구는 몹시도 춥고 어둡다 그대가 없는 지구는 대낮인데도 흑야다, 그래서 검은 대낮의 밤을 나는 그대 생각의 불꽃만으로 견딘다 (그 불꽃의 힘만으로 내가 살아갈 수 있기를  그 불꽃의 힘만으로 내가 살아갈 수 없기를)   그래서 어두운 창밖에는 하루 종일 함박눈이라도 내리고 있는 것이다 흑야[…]

안나푸르나의 능선이 보이는 작은 방 外
박정대 / 2006-01-23
SF문학의 세계 – 첫번째 이야기 / 박상준(SF평론가)

 과학적 합리성으로 무장한 상상력, SF 정지용이 자신의 책 「문학독본」(1948) 맨 앞에 붙였던 짤막한 서시가 있습니다.  별똥 떨어진 곳마음에 두었다다음날 가보려벼르다 벼르다 인젠 다 자랐소  저는 SF를 즐기는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의 분기점은 바로 이 시를 통해서 파악할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합니다. 이 시에 대한 일반적인 감상이라면 ‘삶에서 꿈꾸던 이상과 현실의 괴리’ 정도로 은유적인 의미를 이끌어낼 수 있겠지요. 그러나 SF독자들은 그에 더해서 ‘별똥별’이라는 구체적 물체에도 묘한 이끌림을 느낄 것입니다. 별똥별이 떨어진 곳을 정말로 찾아가 보고픈 생각도 들고, 혹시 그 별똥별에 무엇인가 담겨있지는 않을지 상상의 나래를 마구 펼치지요. 그러면서 어느새 별똥별이 떨어진 곳보다는 별똥별이[…]

SF문학의 세계 - 첫번째 이야기
박상준(SF평론가) / 2006-01-22
[알림]2006년 2월호 업데이트 개시 /

오늘부터 웹진 <문장> 2월호가 업데이트 되고 있습니다. 신작시 류인서 문혜진 박정대 고두현 노향림 신현정 우대식 오철수 정세기  단편소설 김종은  중편소설 이남희  문제작 탐구 손정수  멀티미디어 낭송시 서정춘 시인  작가vs작가 이제하vs윤성희 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과 사랑 부탁드립니다.

[알림]2006년 2월호 업데이트 개시
/ 2006-01-20
당신은 누구십니까 外 / 오철수

오철수  당신은 누구십니까 좋아서 눈물이 그렁하니 세상이 다 보석입니다 반갑다고 말하니 그 말 곧바로 내 귀로 들어와 붕 붕 내 몸이 붉어집니다 내가 모르는 기쁜 세상이 다 당신 뒤에 있으니 당신은 누구십니까 생각만 해도 세상이 다 웃습니다 그냥 좋아서 검은 비닐봉지에게 검은 비닐봉지가 바람에 날린다 이리 가자면 가고 저리 가자면 가고 싱겁게 붕 솟아올랐다가는 필시 못난 짓 해서 끌려가듯 지이익 처박히듯 가기도 하는데 갑자기 나는 무안하다 이유는, 그 비닐봉지가 화도 안 내고 외려 즐거운 몸짓으로 놀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인데 왜 이렇게 세상 이치는 단순한 것이냐 누가 부를 때 훌쩍 따라가려면 제[…]

당신은 누구십니까 外
오철수 / 2006-01-20
표범약국 外 / 문혜진

문혜진   표범약국                                               청담동 표범약국에는 표범약사가 있지. 멸종된 줄로만 알았던 표범약사가 하얀 가운을 입고 인터넷을 하다가 귀찮은 듯 인공눈물을 던져주지. 호랑이연고도 팔고 낙타거미의 독이 든 마취제도 팔지만 새끼표범 침으로 만든 구강청결제라든가 호피로 만든 무좀 양말 따위는 팔지 않아. 인간의 육체를 포장해 온 무수한 환상을 제거하고 오로지 생물학적으로만 본다면 인간은 맹수의 공격 본능으로 학살을 일삼고 모피를 찬양하며 발정제를 사러 약국에 가지. 창담동에는 루이비통이 있고 구찌, 프라다, 진도모피가 있고 표범약국이 있지. 이 겨울 다국적 패션거리에는 베링해 섬 출신의 북극여우털로 만든 자켓이 있고 덫에 걸리면 다리를 자르고 도망간다는 밍크쥐의 가죽을 수백개 이어 만든 코트가[…]

표범약국 外
문혜진 / 2006-01-20
부음 外 / 류인서

류인서  부음   연밥 줄밥 사그라진 얼음방죽 건너서 조팝꽃 이팝꽃 마을 건너서 동으로 백 리   쉰밥덩이 찬밥덩이 절그럭대는 양푼이 부뚜막 지나서 피살이꽃 숨살이꽃 뼈살이꽃 바리데기 세월 다 보내고 이제야 꽃밥 잡수러 가시네 할머니 소금모래 서걱거리는 저잣거리의 밥그릇 모두 밀쳐두고 쭈글쭈글 까치밥 하늘 밀쳐두고 햇빛보료 들풀 언덕으로 꽃밥상 받으러 가시네 할머니 살아있다 완고한 흰빛 일색의 근조화환에 섞인 몇 송이 분홍백합 도드라진 꽃빛 위에 흑백으로 멎어있는 영정의 얼굴을 겹쳐본다 오가는 검은 양복차림의 조문객들의 뒷모습 위에 시간을 훔쳐간다는 이상한, 잿빛 목소리의 회색신사들*의 실루엣을 겹쳐본다 초겨울 하오를 낮게 날던 까마귀 떼가 일사불란 몸을[…]

부음 外
류인서 / 2006-01-20
산길 外 / 노향림

노향림   산길                                          진홍빛 아침해가 한쪽 눈 찡그리며 주둔군처럼 왁자한 와우산 중턱 그 중심은 어둡다. 인대 늘어난 목뼈같이 삐딱하게 얹힌 나무계단을 나는 숨가쁘게 오른다. 새들이 발가락 오무리고 땅을 차오르듯 오른 힘찬 발자국들 몇 오늘은 그조차 보이지 않는다. 멀리 강변북로에 뻘밭게들처럼 밀려 있는 차들 사이를 먹이를 찾아 헤매고 가고 있을까. 맴도는 바람이 내 목덜미를 잡고 놓아주지 않는다. 저주파 전기바늘로 콕콕 찌르는지 선뜩하다. 드르륵 저주파 바늘 지나가는 소리로 화답하며 높은 데서 날아내려 온 하늘. 그 하늘이 잎이 성긴 철쭉나무에 걸려서 흔들린다. 봄이 오기도 전에 열꽃 피듯 핀 몇 송이 꽃은 천둥을 피하려고[…]

산길 外
노향림 / 2006-01-20
죽순의 힘 外 / 고두현

고두현   죽순의 힘  내 이름은 순(筍) 어리고 연한 싹 나무도 풀도 아니면서 나이테까지 없네. 그래도 밤마다 키는 부쩍 자라 험한 바람 빗물 씻길 때마다 속 비우며 단단해지지 꽃은 좀처럼 피우지 않아 어쩌다 한 번 피면 온 대밭 다 밝히고 마침내 진 빠져 죽고 말지. 죽어선 바람벽 되고 참빗 되고 대창 되어 꼿꼿하게 살아나지만 새 뿌리도 마디에서 나고 새 순 또한 마디에서 돋고 땅 속 줄기마저 옆으로 뻗는 이유 봄밤 그대 속에 들어 순하게 새 싹 틔우면서 보면 알게 될까. 혼자는 외로워 함께 서서 솟는 죽(竹). 김밥천국 천 원짜리 한 장이면 미얀마[…]

죽순의 힘 外
고두현 / 2006-01-20
나락의 다비식 外 / 김경윤

 김경윤 나락의 다비식 겨울 햇살이 거실 깊숙이까지 파고드는 주말 오후 푹신한 소파에 비스듬히 누워 강 건너 불을 보 듯 불타는 나락들을 본다, 검게 타들어가는 나락가마니 속에서 나락(那落)으로 가는 검은 낟알들이 톡, 톡, 튀며 이승의 마지막 화두를 던지고 있다 농자천하지대본야(農者天下之大本也)라, 할! 흙에서 태어나 흙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분신(焚身)하는 나락의 운명 앞에서 거리는 야단법석이다 평생 나락을 경배하며 살아온 수천의 농자들이 나락경(經)을 색색의 만장에 새겨 들고 다비장 주위에 도열할 때, 이교도 같은 병사들이 행렬을 막고 선다 경문(經文)을 외우듯 소리치는 군중들, 머리 위로 쏟아지는 물세례도 아랑곳하지 않고 깃발을 흔들고 있다 나락의 덕으로 살아온 늙은 농자들[…]

나락의 다비식 外
김경윤 / 2006-01-04
스무 살의 바다를 쉰 살에 가다 / 고재종

 고재종 스무 살의 바다를 쉰 살에 가다 버려진 시멘트집처럼 혼자인 그가 혼자인 그를 사랑해서 오늘도 바다는 고조곤히 그를 부른다 혼자인 그를 사랑은 하고 바다는 그를 자꾸 부르고 너무 잦은 생의 수태와 뒤이은 사산으로 그는 숭숭 구멍 뚫린 혼자가 되어 바다가 부르는 소리를 듣는다  처음 만나 눈에 맞은 연인이거나 이제 또 헤어져야 하는 상처들이 한사코 바다로 가는 것도 바다가 부르기 때문 바다는 시도 때도 없이 부르고 조금도 순탄치 않은 시간들과 고립으로 그는 되레 치명적으로 과잉된 혼자인 그를 사랑해서 이제 바다에 아니 갈 리 없다  썩어도 더는 치유할 수 없는 생이 몰려선[…]

스무 살의 바다를 쉰 살에 가다
고재종 / 2006-01-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