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짜 없음 / 장은진

[2014 아르코창작기금 장편소설]     날짜 없음     장은진         179. 그게 온다고 한다.       178. 붉은 우산을 펼쳤다. 우산 너머로 보이는 하늘은, 날씨는, 오랫동안 신고 벗어 놓은 더러운 양말 같았다. 어떻게 보면 오물이나 흙탕물 속을 데굴데굴 구른 양떼 같기도 했다. 이상기후로 일 년째 우중충한 하늘에서는 멈추지 않고 회색눈이 쏟아졌고, 그것은 순식간에 모든 걸 훔쳐갔다. 빛깔, 소음, 형태, 말, 방향, 표정, 냄새, 분주함. 그리고 성가시게 군다고 투덜댔던 도시의 무수한 현상들까지도. 온통 회색이라 어느 쪽이 하늘이고 어디까지가 땅인지, 섞어놓은 듯 경계는 모호하기만 했다. 그 애매함이 얼마나 심각하던지[…]

날짜 없음
장은진 / 2017-04-14
열애 / 이후경

[2014 아르코창작기금 단편소설]     열 애     이후경     그녀는 그가 태운 마지막 승객 중의 하나였다. 그는 여객선이 아닌 화물을 운송하는 컨테이너선이었기에 애초에 승객을 태우는 일은 거의 없었다. 한 번에 20여 명씩 태우는 선원들을 제외한다면 어쩌다 태우는 선장이나 기관장의 사모님들이 승객의 전부였으니. 그가 평생 태운 승객이래야 몇 십 명도 채 되지 않았다. 그가 태운 마지막 승객인 그들은 ‘예술인 해양 체험단’이란 특수한 목적의 승객이었다. 사진작가 K, 작곡가 H, 그리고 작가인 P와 화가인 그녀 L이 그 구성원이었다. 그는 그들을 태운 채 화염에 휩싸였고, 그들은 그를 버리고 탈출했다. 그는 바다[…]

열애
이후경 / 2017-04-14
멸종 달력 외 6편 / 이지호

[2014 아르코창작기금]     멸종 달력     이지호         멸종의 목록이 적힌 달력이 있다     우수와 소만도 없는 달력     움트지 않는 고백으로     숫자를 거느린 생몰연대     날짜들과 이어진 날짜들     찢어진 꽃잎은 과거로 진화해 갈 뿐이다       철의 씨앗이 가득한 대장장이는 자연의 모양과 그들의 울음소리로 연장을 만들다 두 손이 멸종에 이르렀다지       기일도 없이 숨어있는 위기의 식물들 동물들       지린내에 기댄 광릉요강꽃이 휘청거리는 향기로 남는다     자태에 어긋나는     천한 이름이 피우는 말간 슬픔     수명은 도도한 흐름의 방향타다       곰,[…]

멸종 달력 외 6편
이지호 / 2017-04-14
立冬 외 6편 / 이교상

[2014 아르코창작기금 시조]     立冬     이교상     허투루 안 살아도 그렇게 산 것 같은 텅 빈 저 나뭇잎들 가계부 들여다본다 바스락, 마른 한숨이 구석에 더께 쌓인   비바람 삼켜먹고 익을 대로 익은 홍시 해탈을 꿈꾸는지 몰아沒我에 빠져 있다 까치가 무리를 지어 초저녁 파먹을 때   그 누구를 기다리나, 안거에 들지 않고 이끼 낀 너럭바위 만다라 그 지문으로 산문 밖 비탈에 서서 내 속을 매만지는                     해인에서 보내온 화첩     이승의 아름다운 한 채 집 앞에 앉아[…]

立冬 외 6편
이교상 / 2017-04-14
나비½ 외 6편 / 유미애

[2014 아르코창작기금]     나비½ -망나니     유미애         저녁이면 반쪽 얼굴의 검이 운다       내 정강이의 춤은 붉었다 무모한 복사뼈에 노숙하는 눈물은 귀가 없었다       물려받은 칼 한 자루, 검은 머리채와 모래바람이 전부인 나의 왕국, 피어있고 싶었다 꽃의 생을 탕진한 후 사라지는 남방 꼬리, 날개이고 싶었다       내 춤의 결말은 나비라 이름 붙인 삼류 행성, 뿌리가 썩어가는 동안에도 내 맨발은 형틀을 돌며 비틀비틀 스텝을 쫓았지만       함부로 태어난 씨앗, 빈 술독의 달이 차고 흑발 늑대가 가난한 왕국을 등져도 내 피는 고백하지 않는다[…]

나비½ 외 6편
유미애 / 2017-04-14
입꼬리 맘꼬리 외 6편 / 오한나

[2014 아르코창작기금 동시]     입꼬리 맘꼬리     오한나     친구 성적이 나보다 떨어졌대 입꼬리를 억지로 내려서 “그래~ 어쩌니” 그런데 맘꼬리는 저절로 올라가 ‘휴, 다행이다’   친구 성적이 나보다 올랐대 입꼬리를 최대한 올려서 “축하해” 그런데 맘꼬리는 제 맘대로 내려가 ‘속상해’   이러면 안 되잖아 성적이 다가 아닌데 그보다 소중한 건 친구 사인데   입꼬리 맘꼬리 같이 다니면 안 되는 거야?                     껍데기는     홍합 알맹이 쏙쏙 빼먹고 그릇에 쌓아 놓았더니 산이 하나 생겼다.   봉긋한 껍데기 산 엄마가[…]

입꼬리 맘꼬리 외 6편
오한나 / 2017-04-14
변사 기담 / 양진채

[2014 아르코창작기금 장편소설]     겨울이 내 살을 만진다     양진채        1       기담은 꿈을 꾸었다. 종잇장처럼 얇고 소용돌이처럼 어지러운 꿈이었다. 수많은 불빛이 기담을 에워쌌다가는 부서졌다. 그것이 불빛이었음에도 기담은 불안했다. 둥글게 퍼지지 않고 날처럼 갈라지는 빛이 기담의 몸을 조각낼 것만 같았다. 죽음은 늘 가까이 있었다. 빛이라고 해서 비껴갈 리 없었다. 기담은 빛을 어쩌지 못하고 웅크려 앉아 무릎 사이에 고개를 파묻었다. 저 알알이 부서지는 빛을 어디서 보았던가. 황홀하지만 아프게 쏘아대는 불빛. 어디서, 어디서. 기담은 불빛에 눈이 멀어버린 짐승처럼 꼼짝 못하다가 꿈에서 깨어났다. 눈을 떴으나 쉽게 움직이지 못했다.[…]

변사 기담
양진채 / 2017-04-14
겨울이 내 살을 만진다 외 6편 / 안주철

[2014 아르코창작기금]     겨울이 내 살을 만진다     안주철     우리 집은 노을이 필요하지 않다. 일을 끝내고 집에 돌아와 저녁을 먹고 나면 끓는 물을 대야에 붓는다. 저리 가. 겨울을 피해 방으로 들어온 늙은 개 워키가 구석에서 새끼를 낳는다. 낳다가 좁은 방을 돌아다니며 피를 흘린다. 몇 마리일까?   워키가 낳은 새끼 등에서 꼬불거리며 수십 마리 물고기들이 천장을 향해 헤엄을 친다.   소금 한 줌을 대야에 뿌리고 나는 물이 뜨거운지 뜨겁지 않은지 엄마에게 말해야 한다. 물이 식는 속도를 센다. 물고기를 세는 방법으로 물고기가 더 이상 도망가지 않을 때까지  […]

겨울이 내 살을 만진다 외 6편
안주철 / 2017-04-14
안녕, 햄스터 외 6편 / 박예분

[2014 아르코창작기금]     안녕, 햄스터     박예분     18개월 동안 함께 살았어 잘 가라고, 인사도 못 해 더 눈물이 나 모과나무 아래 곱게 묻어 주고 돌아서는데 누나도 나도 엉엉 눈물 콧물 훔쳤어   햄스터가 아픈 것도 모르고 밤새 혼자 끙끙 앓게 한 것이 학원 다니기 바쁘다고 방학 때 많이 놀아 주지 못한 것이 너무너무 미안해서.                     겨울바람     쉿, 조용! 선생님이 그림책 읽어 주는 시간   덜크덩- 덜크덩 휘이잉- 휘이잉   누가 이렇게 시끄러워! 선생님이 그림책을 무섭게[…]

안녕, 햄스터 외 6편
박예분 / 2017-04-14
조춘 외 6편 / 문태준

[2014 아르코창작기금]     조춘(早春)     문태준         그대여, 하얀 눈뭉치를 창가 접시 위에 올려놓고 눈뭉치가 물이 되어 드러눕는 것을 보았습니다       눈뭉치는 하얗게 몸을 부수었습니다 스스로 부수면서 반쯤 허물어진 얼굴을 들어 마지막으로 나를 쳐다보았습니다 내게 웅얼웅얼 무어라 말을 했으나 풀어져버렸습니다 나를 가엾게 바라보던 눈초리도 이내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나는 한접시 물로 돌아간 그대를 껴안고 울었습니다 이제 내겐 의지할 곳이 아무 데도 없습니다 눈뭉치이며 물의 유골인 나와도 이제 헤어지려 합니다                     정류장에서     언젠가 내가 이 자리에[…]

조춘 외 6편
문태준 / 2017-04-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