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판 외 1편 / 한경숙

[신작시]     모판     한경숙           쌀 몇 가마 못짐 지고     논둑 쪽으로 이앙기 허리가 휘청한다     중심을 잡는가 싶더니     여섯 줄 가지런히 논흙의 살점 더듬는다     모판 아래로 하얗게     뻗어 나온 뿌리의 기억     거세당한 모는     잘림으로 꼿꼿하게 논바닥을 버티고 있다       산 하나를 담고도 좁지 않은     논물 위로 해거름 마을길이 놓여 있다     산그늘이 바닥에 쌓이고 있다     온갖 들풀들 속에서     벌레들의 웃음이 저녁의 불빛처럼 튀어 나온다     그 소리 위로 모는 쑥쑥 뻗쳐 오른다    […]

모판 외 1편
한경숙 / 2020-11-01
등 좀 긁어줘 외 1편 / 황형철

[신작시]     등 좀 긁어 줘     황형철           제 몸이어도 제 손이 닿지 않는 데가 있어       누구라도 쉽게 설 수 없는     수직의 캄캄절벽       아득히 깊은 극지를 홀연히 바라보다       좀처럼 갈 수 없는 먼 곳까지     손가락 끝에 체온을 실어 오가는 동안       너조차 잘 모르는 네 모습을     손톱 아래 새겨 넣고       사는 게 끔찍이도 소란스러울 때     어떤 여지 같은 게 필요하다 싶을 때       등 좀 긁어 줘, 하는 그 자리에[…]

등 좀 긁어줘 외 1편
황형철 / 2020-11-01
셰퍼드 / 김도연

[단편소설]     셰퍼드     김도연           긴 혓바닥을 입 밖으로 늘어뜨린 셰퍼드 두 마리는 헉헉거리며 침을 줄줄 흘렸다.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무더운 여름날 오후였다. 김(金)은 혓바닥 양쪽으로 솟아나 있는 셰퍼드의 날카로운 송곳니에 허벅지를 물리기라도 한 듯 인상을 찡그렸다. 셰퍼드는 거의 송아지만 했다. 두 마리가 한꺼번에 달려든다면 아무리 싸움을 잘하는 인간이라도 당해 낼 수 없을 것이다. 사나우면서 덩치마저 큰 개는 정말이지 싫었다.     “빚쟁이들 몰려오기 전에 빨리 끌고 가. 우리 클럽에서 가장 비싼 개야.”     “……얘들을 끌고 가라고?”     “새끼 낳으면 한 마리당 몇 백만[…]

셰퍼드
김도연 / 2020-11-01
동네 역사에서 단 한번 있었던 화상사건 외 1편 / 김병호

[신작시]     동네 역사에서 단 한 번 있었던 화상사건     김병호           비명은 중저음이었다. 비명은 긴 탄식으로 변했다. 헬스장 샤워기 앞이었다. 당연한 알몸이었다.     샤워실에 들어서는 그의 눈길을 물비누 통에 써 있는 글씨가 붙잡았다. shower mate, 영어로 따지자면 쇼를(show) 하는 사람(er)이다. 그러니까 샤워는 항상 누군가 보는 사람을 전제로 한 쇼라는 생각 덕분에 물을 트는 꼭지를 부주의하게 돌렸을 수도 있다.     그는 샤워기에서 기습적으로 쏟아진 뜨거운 물에 자지를, 그중에서도 귀한 대가리를 데고 말았다. 남자를 엄습한 고통은 인간의 역사 이래 비교할 것을 찾을 수 없었다. 많은 신경이[…]

동네 역사에서 단 한번 있었던 화상사건 외 1편
김병호 / 2020-11-01
광주광역시 러브앤프리(제2회) / 광주광역시 러브앤프리

[책방곡곡]       광주광역시 러브앤프리(제2회) 이름을 기억할 것, 그리고 ‘낙관’할 것. – 한정현, 『소녀 연예인 이보나』, 민음사, 2020 –     사회/원고정리 : 윤샛별(러브앤프리 책방지기) 참여 : 강성희, 구희진, 윤송일, 최미나               책을 읽는 방식도, 해석도 다른 이들이 모였다. 각자의 취향도 삶의 경험도 다른 이들이다. ‘흑백사진에 색을 입히고, 오래된 이야기에 주석을 달고, 사라진 이름들을 부르며, 다시 쓰는 사랑의 역사’를 다루는 한정현 작가의 단편소설 「소녀 연예인 이보나」로 두 번째 만남이었다. 한국의 근현대사, 여성, 퀴어, 국가, 젠더…… 로 다루어지는 등장인물의 이야기는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와 나의[…]

광주광역시 러브앤프리(제2회)
광주광역시 러브앤프리 / 2020-11-01
태풍의 경로 / 김선재

[단편소설]     태풍의 경로     김선재           누구일까.     우편물을 든 채 조는 그런 생각을 한다. 자신에게 온 것이 맞는지 몇 번이나 확인한 건 발신인인 라라라는 이름 때문이다. 아직 해가 길게 남아 있는 저녁의 현관은 적막하다. 드는 사람도 나는 사람도 없는 다세대 주택의 입구에서 들리는 소리라고는 매미 울음뿐이다. 담벼락을 감은 잎사귀들이 불그스름하게 타들어가는 여름. 조는 그 깊고 환한 적막의 한가운데서 혀끝으로 라라라는 이름을 굴리고 있는 거다. 라라라……. 매일 여러 이름과 상호를 다루기는 하지만, 그래서 여러 이름들 – 도도나 는는, 시시, 미미와 같은 – 을 알고[…]

태풍의 경로
김선재 / 2020-11-01
구석에서 외 1편 / 박경희

[신작시]     구석에서     박경희           어느 이에게 사기를 당해 밤길 밟아 고향을 떠났던 당숙 누이     스무 살 아들이 교통사고로 죽었다는 소식에 밤길 밟아 달려왔다     조각 난 얼굴     어디에도 없는 눈     엄마를 부를 수 없는 입     마지막 아들의 얼굴은 조각난 누이의 가슴 속에서 조각난 채로 구석에서 무너졌다     구석이 흐느끼다가 구석이 더 구석으로 밀려났다     잘못 디디면 끝도 없이 떨어질 구석에서 누이는 끝없이 떨어졌다     만날 때마다 늘 마지막이었던 아들은 마지막이 되어 되돌아 웃어 줄 얼굴도 없이     저승에서도 찾지[…]

구석에서 외 1편
박경희 / 2020-11-01
바라보는 토마토 / 남궁지혜

[단편소설]     바라보는 토마토     남궁지혜           말이란 게 주워 담을 순 없는 거라지만, 만에 하나 그럴 수 있다면 해선은 사 년 전 늦여름의 새벽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오랫동안 생각해 왔다. 당시 해선의 나이는 스물두 살로 여러 사람들과 생각 차이를 겪기도 하고 나름대로 상처도 주고받으며 관계성에 대한 자신의 주관을 확장해 나가던 시기였다. 대학 친구들은 그럭저럭 다정했고 몇몇 친구들과는 고민을 나눌 수 있는 진솔한 관계로 발전도 했지만, 자신에게는 모든 것을 이해해 줄 수 있는 13년 지기 동네 친구들이 있다는 점을 별도로 상기했다. 그에게 동네 친구들은 서로의 가정사를[…]

바라보는 토마토
남궁지혜 / 2020-11-01
살아남은 자의 아름다움 / 한승은

[본격! 비평] 지난 몇 년간 비평의 영역은 리뷰나 서평 등 '쪽글'의 형태로 축소되어 왔다. 폭넓은 담론을 펼칠 장이 부족하고 비평적 공론화, 활발한 논쟁 등은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다. 동시에 비평의 형태는 무척 다변화되고 있기도 하다. 작품을 읽고 그에 대한 분석을 하는 행위를 넘어 비평적 기획, 조직 등 새로운 시도가 최근 들어 늘어나고 있다. 이에 《문장웹진》은 웹진이라는 매체의 특성과 공적 지면이라는 점을 활용해 '본격비평'의 장을 열어 보려 한다. 분량의 제한 없이 정액의 원고료로 자유롭게 투고를 받아 아래와 같이 게재한다.     살아남은 자의 아름다움 – 편혜영, 『재와 빨강』(2010)     한승은  […]

살아남은 자의 아름다움
한승은 / 2020-11-01
11월호 / 임노식

[커버스토리] ※ 기획의 말 2020년 커버스토리에서는 웹툰, 사진작가, 일러스트레이터 등 다양한 장르의 작가들을 모시고, 《문장 웹진》 과월 호 수록작 중 1편을 선정해 시각화 해주시기를 요청 드렸습니다. 문학 작품에 대한 감상을 이미지로 다시 되새기는 작업 속에서 폭넓은 독자층과 소통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  김유진, 「흘러내리는 얼굴」(《문장 웹진》, 10월호)을 읽고           Sand sledding slope02, ink on canvas   그것들은 자신에게 맞는 옷을 입은 것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불편하다. 모양, 채도들이 불안정하고 어색하게 느껴졌다. 우리와, 우리를 둘러싼 많은 것들이 바뀌어 가고 있었다. 성격, 말투, 외모, 다른 모든[…]

11월호
임노식 / 2020-11-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