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 달을 만나러 / 백승연

[단편소설]     초록 달을 만나러     백승연           "다른 행성에 너랑 똑같은 사람이 살고 있다고 생각하면 좀, 찝찝해."     혜지가 입술을 삐죽이 내밀다가 맥주잔을 들었다. 혜지의 말을 온전히 무시할 수 있을 정도로 나도 아무렇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지구에서의 나의 하루하루도 고되고 힘든데, 척박한 제2 지구에서 또 다른 나는 어떤 방식으로 힘든 삶을 살고 있을지 걱정되었다. 그래도 다른 방법은 없었다. 나의 복제인간이 제2 지구로 보내지는 걸 허락하면 학자금 대출을 모조리 갚을 수 있었으니까.     "쓰리디 업종이겠지? 분명히?"     혜지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25년 전 인류는 인간이[…]

초록 달을 만나러
백승연 / 2020-03-01
호미 외 1편 / 안도현

[신작시]     호미     안도현           호미 한 자루를 사면서 농업에 대한 지식을 장악했다고 착각한 적이 있었다       안쪽으로 휘어져 바깥쪽으로 뻗지는 못하고 안쪽으로만 날을 세우고       서너 평을 나는 농사라고 하였는데     호미는 땅에 콕콕 점을 찍으며 살았다고 말했다       불이 호미를 구부렸다는 걸 나는 당최 알지 못하였다     나는 호미 손잡이를 잡고 세상을 깊이 사랑한다고 생각했다       너른 대지의 허벅지를 물어뜯거나 물길의 방향을 틀어 돌려세우는 일에 종사하지 못하였다     그것은 호미도 나도 가끔 외로웠다는 뜻도 된다     다만 한철[…]

호미 외 1편
안도현 / 2020-03-01
3월호 / 나미나

[커버스토리] ※ 기획의 말 2020년 커버스토리에서는 웹툰, 사진작가, 일러스트레이터 등 다양한 장르의 작가들을 모시고, 《문장 웹진》 과월 호 수록작 중 1편을 선정해 시각화 해주시기를 요청 드렸습니다. 문학 작품에 대한 감상을 이미지로 다시 되새기는 작업 속에서 폭넓은 독자층과 소통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뜨거운 반복     나미나               – 「기도」(황시운, 《문장 웹진》, 2월호)를 읽고       가끔 이 현실이 지옥 같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그럴 때면 어디의 누군지도 모를 신에게 기도를 하곤 한다. 부디 이 상황을 누군가 알아주기를. 하지만 그 누구도 나에게[…]

3월호
나미나 / 2020-03-01
지구 따윈 없어져도 그만이지만 외 1편 / 유병록

[신작시]     지구 따윈 없어져도 그만이지만     유병록           참 애쓰는구나     지구 멸망을 막으려 분투하는 사람들을 보고     영화관을 나와     자주 들르던 칼국숫집에 간다       사정이 생겨 문을 닫습니다     그동안 사랑해 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세상 칼국숫집이 그 집뿐이겠냐만     그 비빔칼국수와 황태칼국수를 먹지 못한다니       친구 같기도 하고 자매 같기도 한     한 명은 사장님 같고 한 명은 직원 같기도 한     아주머니 두 분       도대체 무슨 사정이 생겼는지     슬픈 일이 있었는지     임대료가 턱없이[…]

지구 따윈 없어져도 그만이지만 외 1편
유병록 / 2020-03-01
고양이 눈 / 최정화

[단편소설]     고양이 눈     최정화           여기는 경성의 북쪽에 자리 잡은 구릉 지대로, 위에서 내려다본 모양이 고양이 눈을 닮았다고 해서 묘안정이라고 불린다. 원래는 공동묘지였다고 하는데 안성에서 온 어떤 이가 묘지건 뭐건 상관할 바 없이 일단 몸 누일 곳 찾는 것이 우선이라는 심정으로 움막을 지어 살았다. 오갈 데 없는 몇몇이 더 모여들어 그 옆에 따라 움막을 짓기 시작한 것이 어느새 묘지 전체가 하나의 촌을 이루게 되었다. 근처에 고양이들이 많아 번식기의 울음소리만이 귀에 거슬릴 뿐, 그것도 몇 번 듣다 보니 이제는 익숙해져 버렸다.     집이라고 하기에[…]

고양이 눈
최정화 / 2020-03-01
뼈의 중량 / 편혜영

[단편소설]     뼈의 중량     편혜영           초인종이 울리자 도진은 먹고 있던 스낵을 내려놓고 텔레비전 볼륨을 줄였다. 불을 끄고 창마다 커튼을 치고 소리가 새어 나가지 않게 조심했지만 사람 있는 기척은 쉽게 감춰지지 않았다. 긴장해서인지 숨소리가 커졌다. 참으려고 할수록 그르렁거리는 소리가 났다. 배고픈 동물의 울음 같았다.     조금 지나자 방문자는 현관문을 두드렸다. 도진은 그게 무슨 의미인지 알았다. 애원이나 부탁이 아니었다. 요구나 경고에 가까웠다. 방문자는 집에 도진이 있는 걸 알았고 자신이 아는 걸 감추려는 마음이 없었다. 도진에게 겁을 주고 싶어 했다.     그들은 도진이 근무하는 은행으로 먼저[…]

뼈의 중량
편혜영 / 2020-03-01
밤이 올 무렵 외 1편 / 이원

[신작시]     밤이 올 무렵     이원       빛이 넘치게 스며드는 거다 빛이 넘치게 몰려오는 거다 빛에 숨 막히는 거다 빛에 타죽는 거다 이런 느낌으로 빛을 떠올리면 얘야 너는 아프구나 얘야 너는 병증이 있구나 얘야 빛은 그런 게 아니다 이 말을 할 수 있는 것은 누구? 나무들 바람이 넘치게 일렁이는 거다 바람이 넘치게 몰려오는 거다 바람에 숨 막히는 거다 뒤집히면 나뭇잎 한 장의 뒷면은 다른 색이다 어떻게 그렇게 가까이에서 그럴 수 있어? 빛을 떠올리면 바람을 떠올리면 얘야 너는 신경이 쇠약해졌구나 얘야 너는 숨을 세어야겠구나 얘야 너는[…]

밤이 올 무렵 외 1편
이원 / 2020-03-01
3월호 / 나미나

[커버스토리] ※ 기획의 말 2020년 커버스토리에서는 웹툰, 사진작가, 일러스트레이터 등 다양한 장르의 작가들을 모시고, 《문장 웹진》 과월 호 수록작 중 1편을 선정해 시각화 해주시기를 요청 드렸습니다. 문학 작품에 대한 감상을 이미지로 다시 되새기는 작업 속에서 폭넓은 독자층과 소통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뜨거운 반복     나미나               – 「기도」(황시운, 《문장 웹진》, 2월호)를 읽고       가끔 이 현실이 지옥 같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그럴 때면 어디의 누군지도 모를 신에게 기도를 하곤 한다. 부디 이 상황을 누군가 알아주기를. 하지만 그 누구도 나에게[…]

3월호
나미나 / 2020-03-01
문장입니다영(제4-2화) / 임국영, 정다연

[문장입니다영]           문장입니다영(제4-2화) 그래서 어떻게하면 시를 조금 더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까요…?           EP 4-2 : 그래서 어떻게하면 시를 조금 더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까요…?       시란 무엇일까.       우리는 시를 어떻게 이해하고 향유할 수 있을까.       기초교육과정에서 학습했던 것처럼       어휘 하나하나에서 시대와 정신을 함축한 상징성을 포착하고       기계를 뜯어 살피듯 그 구성과 작동원리를 분석해내는 일은 과연       시를 받아들이기에 알맞은 태도일까?       시를 대면하는 '올바르고 건강한 자세' 같은 것이 따로 존재하기는 하는 걸까?  […]

문장입니다영(제4-2화)
임국영, 정다연 / 2020-02-14
팔판동 외 1편 / 전호석

[신작시]     팔판동     전호석           편의점 앞 플라스틱 탁자에 둘러앉아     우리는 생일파티를 한다     촛불이 누웠다 일어서는 동안     개 짖는 소리     회오리가 낙엽을 그러모은다     유리문이 열린다 작은 종이 울리고     담배를 쥐고 걸어 나온 사람은     플라스틱 탁자의 얼룩을 잠시 바라본다     일행이 하나 둘 도착한다     나는 고깔모자의 부재를 생각하며     유치한 짓을 하지 않아 다행이라고     낯선 일행에게 소곤거린다     촛농이 케이크를 덮어 간다     눈이 먼 일행이     플라스틱 칼을 들고 일어난다     그는 추위로 몸을 떨며[…]

팔판동 외 1편
전호석 / 2020-02-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