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닷가 편지 外 / 이종암

이종암 바닷가 편지 바닷가 벼랑에 강단지게 서 있는 해송 한 그루는 우체국이다 파도와 바람의 공동 우체국 수평선, 지평선 너머의 소식들 푸른 솔가지 위로 왔다가 가네 영원한 정주(定住)는 없다는 걸 흔들리는 여린 가지 끝에서 나는 예감하네 물 알갱이 하나 햇살 따라 바람 따라 오고 가는 것 누가 여기 이 자리에 나를, 또 너를 비끄러매려 해도 소용없는 일임을 나는 알겠네 소용없는 길 위에 서서 내가 본 만큼의 내용으로 그만큼의 빛으로 편지를 쓰네 봄날 흙 속으로 내려가 앉는 물의 걸음으로, 숨을 놓으며 쓰네    길에 관한 명상 연못 안에서도 물이 흐른다 흐른다는 것은 길이[…]

바닷가 편지 外
이종암 / 2005-05-16
봄바람 外 / 이은봉

이은봉 봄바람 봄바람은 씀바귀 씨앗털이다 등 떠밀지 않아도 절로 날개 파닥인다 봄바람은 흥건히 젖어 있다 버들강아지 촉촉이 감싸안는다 봄바람이여 새색시 둥근 가슴이여 초록잎새들 젖먹이고 있고나 봄바람은 민들레 씨앗털이다 저 혼자 세상 환하게 피워 올리고 있다.    놈 한때는 반달곰 새끼들처럼 세상 골짜기 여기저기 뒤엉켜 놀던 놈이다 그놈, 참 한심한 놈, 췌장암으로 죽어가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날이다 이곳저곳 TV채널을 바꿔 가며 함부로 시간의 모가지 비틀어대는 날이다 리모콘에서 쏟아져 나오는 총알들 피웅피웅, 소리조차 내지 못하는 밤이다 침대머리 꼬마 등을 꺼버리면 창밖의 달빛들도 퍼르르 떨곤 하는 밤이다 그놈, 한때는 국감장의 의원님들처럼 으르릉대며 침 튀기며[…]

봄바람 外
이은봉 / 2005-05-16
서광 外 / 박판식

박판식 서광 진홍빛 하늘에는 잔인함을 수태하는 비정한 구름이 있다 흙으로 구운 사람의 목이 부러지듯 해가 지면 황혼과 어둠에서 솟아나온 젊은 여자가 덧문도 없는 내 집의 주인이 된다 나의 주인 여자는 의무감에 홀린 여자다 활기를 잃은 목구멍으로 탁한 기침을 뱉으며 밤이면 선심이라도 베풀듯 흉계로 가득 찬 내 방의 창문을 닫는다 그러면 얼룩진 여름은 닫힌 내 방에서 죽고 나는 피할 수 없이 죽음을 맞는 수벌의 역할을 하고 싶어진다 감시하는 자의 넋은 사뭇 열광적인 데가 있다 농부에게 독살 당하는 까마귀의 절규처럼 애욕에 젖어 있다 몽상의 수확은 부질없어 보리밭의 바람이 한 줄 회한을 남길[…]

서광 外
박판식 / 2005-05-16
입춘대길 外 / 박기동

박기동    입춘대길 봄내*에서 한 십 년 살다보면 물에서 나는 냄새를 거부할 수가 없다 안개는 안개인데, 손잡을 데 마땅치 않은, 가령 가는 명주실이라든가 살얼음판에 나선 바람이라든가 더 이상 앞으로 가기 어려운 이곳은 안개밀집지역이라 해야 하나 지워지지 않는 위수지역이라고 해야 하나 내 생에 이런 계엄령 따위가 해제될 수 있을까 영 넘어 양양에서 사는 시인의 시집을 읽었다 『어느 농사꾼의 별에서』 나는 그 별에서 소년으로 살았다!는 어린 시절을 완강하게 붙들어 놓은 시인에게 전화라도 한통 해야겠다 봄내에서 한 이십 년 살다보면 물에서 올라오는 삼월이 소식을 듣지 않을 수 없다 얼음 깨고 올라오는 복수초는 제주도나 대관령으로부터가[…]

입춘대길 外
박기동 / 2005-05-16
탁자가 있는 풍경 外 / 김행숙

김행숙   탁자가 있는 풍경 그 탁자 위에 우리들은 손을 모으고 우정을 맹세했네. 굉장한 음악소리가 쾅쾅쾅 심장소리를 눌렀네. 고함을 질렀네. 여기, 열 개의 손은 달음박질칠 수 있는 하나둘셋 열 개의 다리와 이어져 있네. 손가락의 개수를 세고 발가락의 개수를 세지 않았네. 아랫입술과 윗입술이 달라붙으면 침묵이라고 말했네. 나는 미소, 그 애는 신음이라고 말했네. 그건 같은 말이잖아, 하고 소리친 녀석이 있었네. 손가락을 걸거나, 발가락을 걸거나  말거나, 우리들의 우정은 탁자 위에 있었네. 그 탁자 밑에서 너의 다리와 나의 다리가 합쳐졌다가 천천히 떨어지고 있었네. 그렇지! 수학적인 장난이었네. 그날 신발에 흙을 묻히고 온 한 친구가 있었네. 흙은[…]

탁자가 있는 풍경 外
김행숙 / 2005-05-16
상처 5 外 / 마종기

마종기 상처 5    나이 탓이겠지만 요즈음에는 상처가 잘 아물지 않는다. 피가 많이 흐른 것도 아니고 심하게 다치지도 않은 것 같은데 상처 안에 숨어 있는 작은 세포들은 자꾸 어깨를 비벼대며 운다. 나이 탓이겠지만 남들의 상처도 전보다 쓸데없이 더 잘 보인다. 피부를 숨긴 물건의 빠른 도망도 가슴까지 흔들며 분명하게 들린다. 무자비한 횡포들이 표정 죽이고 우리 사이에 집과 공장을 짓는다. 나는 항생제를 먹기 시작했다. 기적의 알약은 커지기만 하고 주위를 날아다니는 공기의 입들이 사는 것은 상처를 받는 것이라고 떠들며 살충제 묻은 바람을 만들어 주위에 뿌린다. 그래도 피나지 않는 상처를 두 손에 들고 사는 너.[…]

상처 5 外
마종기 / 2005-05-13
문상 / 권여선

  권여선 1 그날 아침에 비가 왔다는 얘기부터 하자. 어둡고 습도가 높아 그는 오랜만에 푹 잘 수 있었다. 더 이상 자고 싶지 않을 만큼 잔 후에야 그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침대에 걸터앉은 채로 어두운 방 안을 둘러보았다. 좋다,고 생각했다. 전자레인지에 한약을 데워 먹은 후 이메일을 확인했다. 시원한 생수를 들이켜고 싶었지만 대신 미지근한 보리차로 입안을 헹궜다. 한의사가 찬 음료와 날음식은 당분간 피하는 게 좋다고 말했다. 담배를 한 모금 피워 물자 혀끝에 남은 감초맛에 쌉싸름한 담배 연기가 섞였다. 한의사는 술과 담배에 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그는 방수 점퍼를 입고 간단한 소지품을 챙겨 집을[…]

문상
권여선 / 2005-05-13
나와 인터넷 / 권지예

 권지예(소설가) Q 인터넷 소설 등 인터넷을 통한 일반 대중의 글(文)에 대한 욕구의 분출이 아주 높다. 여러 가지 부정적인 면에 버금가게 긍정적인 점도 만만치 않다는 지적이 있는 것 같다. 선생께서도, 인터넷의 출현을 반기든 그렇지 않든, 생활의 필요 혹은 불가피한 상황 하에서 인터넷을 이용하시리라 생각하는데, 그 정도가 어느 정도인지 궁금하다. 또 작품을 창작할 때나 기타 다른 글을 쓰게 될 때 인터넷은 어떤 모습으로 다가오는가? 인터넷을 활용하는 범위나 인터넷을 통한 독자들의 반응 같은 것도 염두에 두는지? 이 점에 대해서 기술해주고,  덧붙여 평소에 생각하고 있는 인터넷에 대한 생각을 포함해도 좋을 듯싶다. 컴맹 시절 A[…]

나와 인터넷
권지예 / 2005-05-13
인터넷시대의 문학 / 최혜실

최혜실 Q 최근 십수 년간 급속도로 진행된 컴퓨터의 일상화와 인터넷의 일반화는 삶의 다양한 양태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보는 시각에 따라 여러 가지 가치 평가가 있을 수 있지만 ‘변화’ 자체에 대한 점은 대체적으로 동의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삶의 양태에 변화가 왔다면 문학의 변화 또한 응당 물을 수밖에 없는데, 선생께서 바라보시는 그 변화의 성질은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보다 더 자세히 말해 문학과 인터넷 문화가 주고받는 영향관계는 어떤 것이며, 그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인 측면은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향후 문학과 사이버스페이스는 어떻게 결합해나갈 것이라고 전망하는가? 이와 관련하여 문학의 창작과 유통, 향수는 어떤 변화를[…]

인터넷시대의 문학
최혜실 / 2005-04-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