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년필 예찬

 

[편집위원 노트]

 

 

만년필 예찬

 

 

오창은(문학평론가, 본지 편집위원)

 

 

 

 

    원고지가 사라지고 있습니다. 문구점에서도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붉은색 줄로 칸을 나눈 200자 원고지는 유물이 되어 가고 있는지도 모르겠네요. 원고지 한 장은 기껏 200자나 400자지만, A4 한 장에 인쇄하면 1800자는 거뜬하지 않습니까? 그러니 효율성과 생산성 입장에서는 원고지보다는 인쇄 출력이 훨씬 낫다고 할 수 있겠지요. 원고지가 사라지니, 다양한 펜의 사용 빈도도 줄고 있습니다. 볼펜, 수성펜, 사인펜, 그리고 샤프까지 사용 빈도는 확실히 줄었지요.
    놀라운 사실은, 볼펜 등의 사용이 줄고 있음에도 만년필 사용자는 오히려 부쩍 늘었다는 사실입니다. 대학생들은 라미 사파리 만년필이나 파카 벡터 스탠더드를 쓰는 경우가 많고, 직장인들은 몽블랑 마이스터스튁과 같은 고급 만년필을 사용하기도 합니다. 작가들 중에는 워터맨 엑스퍼트나 쉐퍼 프리루드를 사용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요? 디지털 시대에 아날로그의 대명사인 만년필의 부흥이라뇨? 유행은 빠르게 변하는 법인데, 이것도 복고인가요?
    만년필은 불편한 필기도구입니다. 만년필촉이 손상되면 아무리 값진 것이라도 효능을 상실합니다. 카트리지를 바꿔 주거나 잉크를 충전해야 하는 일도 번거롭습니다. 오래 쓰려면 정성껏 정기적으로 청소도 해줘야 하는 물건이다 보니 번거롭기도 하지요. 만년필을 사용하려면 거기에 쏟는 정성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이렇게 이야기해 놓고 보니, 현대적 흐름과 어울리지 않는 만년필의 유행이 이채롭네요.
    한국의 대표적인 만년필 마니아이자 만년필연구소 소장인 박종진 씨는 만년필의 유행을 다음과 같이 해석했습니다. 그는 “글씨를 몇 자 안 쓰기 때문에 만년필 인구가 는다”면서 “기왕 글씨를 쓰려면 몇 자 안 쓰더라도 폼 나게 만년필로 쓰겠다는 젊은 층이 늘었다”고 했습니다. 만년필이 시계나 목걸이처럼 자신을 표현하는 장신구가 되었다고도 했고요. 확실히 패션과 유행의 측면을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적절한 지적인 듯하네요. 역사성을 지닌 앤틱한 장신구로서 만년필이 적격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고급 이미지의 부상, 그리고 복고적 성격이 영향을 준 셈이네요.
    그렇다면 만년필은 어떻게 이런 고급 이미지를 갖게 된 것일까요? 흔히 만년필은 몽블랑이 원조라고 생각하지만, 최초의 만년필은 워터맨에서 제작했습니다. 1880년대 초엽에 미국 뉴욕의 보험사 직원 루이스 에드워드 워터맨이 ‘고객의 서명을 편리하게 받기 위해 고안한 발명품’이 만년필입니다. 이 혁신적인 필기구가 글쓰기 문화를 바꿔 온 것이지요. 만년필은 20세기 역사적 전환기에 항상 등장했다고 하네요. 최고의사결정권자들은 만년필로 사인을 했고, 국가 간 중요한 협약도 만년필로 이뤄진 경우가 많았습니다. 1945년 9월 2일에 이뤄진 태평양전쟁 항복 문서에는 맥아더 장군의 사인이 들어갔는데, 그때 사용한 만년필은 ‘파카 듀오폴드’라고 합니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질 때 서독의 콜 총리와 동독의 디메제이 총리가 서명한 통일 조약서는 ‘몽블랑 마이스터스튁 149’로 사인이 이뤄졌다고 하고요. 2000년 러시아의 보리스 옐친이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에게 권력을 이양하면서 넘겨준 만년필은 ‘몬테그라파’였다고 합니다. 최고급 만년필이 역사적 전환기에 상징적으로 사용된 셈이지요. 심지어 어떤 이들은 만년필의 기술이나 선호도가 자기 국가의 역량을 표현한다고 주장할 정도라고 하네요. 몇몇 만년필의 가격이 수백만 원을 호가하는 이유도 이러한 기념비적 성격과 연결되어 있는 것 같아요.
    한국에서도 만년필을 예찬한 작가들이 많았습니다. 김내성, 홍성원, 유주현, 최일남 등이 만년필로 글을 썼습니다. 전남 보성의 ‘태백산맥 문학관’에 가면 작가의 키 높이만큼의 원고지가 쌓여 있는데요, 작가의 성실성을 상징하는 압도적인 원고지의 높이가 인상적인 장면을 연출해 내지요. 그곳에는 작가가 사용하던 한 자루의 만년필도 별도로 전시되어 있습니다.
    대하소설 『혼불』의 작가 최명희는 만년필로 글을 쓰면서 세상과 교감한 대표적인 작가입니다. 최명희 작가는 새벽의 여명을 맞이하며, 글 쓰는 이의 교감의 순간을 다음과 같이 기록해 놓았습니다.

 

    우주에 혼(魂)이 있다면 가장 깨끗하고 비밀스러운 첫 눈을 떠, 바다 밑같이 검은 창문에 푸른 비늘을 일으키며 사람을 깨우는 그 빛이 이러할까. 그 푸른빛을 받아 업은 만년필 등에서 날렵한 촉끝으로 쏟아지며 또 다른 불꽃을 일으킬 때, 나는 우주와 만년필의 교감(交感)에 전율하였다. 그것이 곧 내가 쓰는 이야기와 진정으로 합일(合一)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으리야. 꿈같은 소망이다. – 최명희, 「만년필을 쓰는 기쁨」, 〈 경향신문 〉 1995년 5월 20일자, 5면.

 

    만년필로 글을 쓰다 보면, 한 자 한 자 새기듯 글자를 완성해 간다는 느낌이 듭니다. 서걱거리는 느낌이 손끝으로 전해 오기에 창조자의 감각이 되살아나기도 하지요. 만년필은 새김의 미학을 지닌 필기구입니다. 힘을 준 만큼 굵게 글을 쓸 수 있고, 가볍게 물 흐르듯이 흘려 쓸 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피가 흐르는 듯이 혈관을 타고 잉크가 번지는 느낌도 갖게 하지요. 모세혈관의 느낌이 신체적인 합일로 이어진다고나 할까요. 그래서 작가들은 만년필을 통해 문장에 스며드는 자신의 열정을 느끼는 것이 아닐까요.
    최명희 작가는 그 느낌을 ‘우주와 만년필의 교감’으로 표현했습니다. 그것이 내가 만드는 우주이고, 세상과 합일하는 어떤 경지에의 도달이라고도 보았습니다. 집중해 글을 쓰다 맞이하는 여명의 느낌을 만년필에 투영한 작가의 감각이 새롭게 느껴지기도 하지요. 최명희 작가의 「만년필을 쓰는 기쁨」은 한국 문학의 대표적인 ‘만년필 예찬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무언가에 홀리듯 혼연일체가 되어 글을 쓴다는 것은 ‘경이로운 해방’의 경험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자유를 향한 영혼의 집중이며, 창조적 열정의 타오르는 산화입니다. 만년필은 글을 쓰는 단순한 도구일지 모르만, 손이 기억하는 감각을 환기시키기에 더 각별한 느낌을 자아냅니다. 미국의 사회학자 리처드 세넷은 『장인』이라는 책에서 ‘현대문명이 잃어버린 생각하는 손’이라는 화두를 제시한 바 있습니다. 그는 ‘손과 머리를 연결해 쓰는 힘’에 대해 이야기하며, “솜씨 좋은 장인처럼 삶을 능숙하게 살”기 위해 도구를 쓰는 방법, 몸동작을 조직하는 방법, 물건을 바라보는 사고방식에 대해 다시 생각하기를 제안했습니다.
    만년필도 마찬가지입니다. 작가는 손과 머리를 연결하는 조그만 막대기에서, 세상과 교감하는 방법을 터득하는 장인입니다. 혈관을 통해 피가 흐르듯, 미세한 정신의 결들이 작가들이 새겨 넣은 문장 속에 스며 있지요. 그 문학의 향연이 조금은 더디게, 그렇지만 견고한 강철정신의 혈관처럼 만년필을 통해 지속되기를 기대해 봅니다.

 

    《문장 웹진》 4월호에는 새롭게 ‘나는 왜’라는 꼭지를 선보입니다. 이 꼭지는 우리 시대를 빛내고 있는 젊은 작가들을 초청해 ‘창작의 궁극적 이유를 캐묻는 인터뷰’ 글입니다. 그 첫 번째로 박준 시인을 초청해 ‘나는 왜 서정을 미인처럼 사랑하나’라는 주제로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나는 왜’ 공개 인터뷰는 매월 둘째 주 수요일 저녁 7시에 대학로 아르코 미술관 내 스페이스 필룩스에서 개최되니 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을 바랍니다. 정지아 작가의 장편연재 소설 『도덕의 구조』가 4회째를 맞아 흥미를 더하면서 탄력을 받고 있습니다. 단편소설은 최옥정의 「늙은 여자를 만났다」와 최진영의 「공룡이 있는 곳에」를 게재합니다. 항상 궁금증을 자아내는 익명 소설은 「나와 난쟁이와 유원지」입니다. 흥미로운 서사의 물결에 정신을 흠뻑 적실 수 있는 기회가 되리라고 봅니다. ‘시가 내게로 왔다’에는 오주리, 박남준, 이덕규, 최라라, 김경주, 조은 시인이 소중한 원고를 보내주셨습니다. 다시 한 번 작가님들께 감사드립니다.
    2014년 4월은 한국 사회가 ‘세월호 침몰’로 큰 상처를 입은 때로 기억될 듯합니다. 안타깝고, 분노할 수밖에 없고, 슬픔에서 헤어 나올 수 없을 정도로 가슴이 저밉니다. 고인들의 명복을 고개를 깊이 숙여 빌며, 잊지 않고 기억하는 것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출발임을 다시 한 번 마음 깊이 새겨 봅니다.

 

 

 

 

   《문장웹진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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