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세대선정작 개별 평론]남아 있는 나날들

 

 

남아 있는 나날들

– 전석순, 「사라지다」를 읽고

 

양윤의

 

 

 

    전석순의 소설은 제목이 말하듯 소멸이라는 테마에 대한 탐구다. 소설은 두 갈래로 진행된다. 하나는 돌아가신 어머니의 묘자리를 정하는 문제다. 어머니가 살아계셨다면 어디에 묻히고 싶어 했을까? 다른 하나는 사라진 것을 사진으로 남기는 작업이다. 잡지사 사진작가인 ‘나’는 ‘사라질 것들’이란 주제로 특집을 기획하고 있다.
    자주 집을 나간 아버지가 세상을 뜬 후 어머니는 아버지와 살던 집에서 혼자 지내다가 일 년 후에 교통사고로 세상을 뜬다. 갑작스럽게 어머니를 떠나보내고 세 명의 자식들은 어머니를 아버지와 합장할지, 따로 모실지에 관해 논쟁을 벌인다. 어머니는 입버릇처럼 이렇게 말하곤 했다. “너나 나나 누구도 다 싫고 혼자 살아 보는 게 소원”(1쪽)이라고. 두 명의 딸과 막내아들은 서로 다른 의견을 제시하는데 그 과정에서 이들이 생각하는 어머니가 각기 다른 존재일 수도 있겠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큰언니는 엄마가 혼자 살고 싶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아버지가 방랑벽 때문에 무책임하게 가족을 방치했으므로 어머니가 사후에라도 자유롭고 싶었을 거라는 말이다. 동생 준수는 오히려 어머니의 중년이 외로웠기 때문에 죽어서라도 어머니가 아버지와 함께하고 싶어 할 거라고 주장한다. 둘째인 ‘나’는 둘의 극단적인 의견충돌을 바라보면서 어머니에 대한 기억이 불확실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세 명의 자식들 누구도 발설하지는 않았지만 어머니가 혼자 산 데는 여러 이유가 있을 것이다. 세 명의 자식들이 경제적으로 변변찮았기 때문에 누구도 어머니를 모실 수 없었다는 것이 그중 하나다. 혼기를 넘겼음에도 결혼을 하지 않은 ‘나’는 무엇보다 어머니의 노력을 무시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고 얼버무리는 ‘나’에게 어머니가 했던 말, “아무리 급해도 아버지 같은 사람이랑은 절대 결혼하지 말라고”(10쪽). ‘나’는 제대로 된 영정사진조차 마련하지 못한 채 치러진 아버지의 장례식이 떠올랐다. 셋의 의견 차는 좀처럼 좁혀지지 않았다.
    원룸에 혼자 살면서 사진 찍는 일을 하고 있는 ‘나’는 이번 계절의 기획 주제인 사라질 것들을 찾아 지방으로 내려갔다. 곧 사라질 풍물인 시골의 오일장, 언제 인터넷 방식으로 바뀔지 모를 선거유세 현장과 같은 것들이 그 대상이다. 사진 찍을 곳을 물색하고 있는데, 같은 회사에서 일하는 사진작가인 남자 선배가 주인공인 ‘나’가 있는 현장에 찾아온다. 저 선배 역시 훌쩍 사라지곤 했다. 둘 사이에는 남녀 사이에 있을 법한 약간의 긴장이 있다. ‘나’는 더 늦기 전에 선배의 얼굴을 찍어 두겠다고 마음먹으면서도 그게 옳은 일인지 확신하지 못한다. “사라지는 걸 붙잡아 두는 게 좋은 건지 흘러가도록 내버려두는 게 좋은 건지 여전히 알 수 없었다. 이렇게 사진으로 찍어서 남겨 두는 게 좋을지 아니면 그냥 사라지는 순간 한꺼번에 잊어버리는 게 좋을지. 내가 사라질 때 누군가 있던 자리에 붙잡아 주는 게 좋은지 아니면 그때부터라도 내버려두는 게 좋을지.”(10~11쪽) 엄마라면 어느 쪽을 선택했을까.

 

    다시 나타난 선배가 ‘나’를 데려간 곳은 곧 사라질, 철도였다. 철도 근처에서 이들은 불꽃놀이를 보고 급히 플래시를 터뜨렸다. 이어서 둘은 들릴 듯 말 듯, 보일 듯 말 듯 서로의 존재를 의지하면서 어두운 터널 속을 걸었다. 어두운 터널 속에서 ‘나’는 엄마가 했던 말을 기억해 냈다. 결국엔 다 “살아”진다는 말, 그 말.
 
    “지금 보면 이때 아가씨였는데 그땐 왜 이렇게 늙었냐고 서러웠는지…… 다 살아지는데.”
    단칸방에서 찍은 유일한 사진을 보고서도 결혼했을 때나 계곡에 놀러 갔을 때 사진을 보고서도 돌아보면 결국 다 살아진다고 했다.
    나는 그게 어찌 됐든 그래도 결국엔 다 살게 된다는 뜻인 줄 알았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좀 헛갈리는 구석이 있었다. 혹시 결국 ‘살아져’가 아니라 ‘사라져’인 게 아니었을까. 그걸로 버틸 수 있었던 건가.

(「사라지다」, 12쪽)

 

 

    어머니의 말처럼 인생은 결국 사라지는 것들을 견디면서 살아가는 과정인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화된 채 가뭇없이 사라지는 것들은 남아 있는 나날을 퍽 외롭게 만든다. ‘나’가 사라질 것들의 순간을 포착한 프레임과 죽은 어머니에 대한 기억이 교차 편집되면서 이 소설은 사라지는 것들에 대한 스냅사진 같은 것이 되어 간다. 가족제도가 곧 사라질지 모르니 가족사진을 찍어 두라는 선배의 말은 그냥 하는 농담이 아니다. 살아감이 수동태가 되었을 때, 살아짐과 사라짐은 동음이의어에서 동의어로 변한다. 이 신인작가는 그 소멸의 징후를 서사의 교차편집을 통해서, 말놀이의 한순간을 통해서 인상적으로 포착하고 있다. 바로 거기서 우리는 죽음에 대한 해석학 하나를 얻는다.

 

 

 

 

   《문장웹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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