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세대_3차_평론]오타쿠적 인간들이 산다

 

 

오타쿠적 인간들이 산다

―김중혁 단편소설의 정치성

 

 

허희

 

 

 

 

    첫 번째 방식 : 시시콜콜한 깜냥으로

 

    사람은 사람들과 살아간다. 세상에 던져지고, 숨지는 순간은 비록 혼자일지라도 삶을 영위하면서 타자와 마주하는 것은 불가피하다. 당신과 나는 개별적인 단독자임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우리라는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관계망을 형성한다. 호모 폴리티쿠스(Homo politicus)의 탄생은 정치의 메커니즘이 소여이면서 동시에 제도라는 작위의 형태로 작동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 그동안 인간의 삶을 규정짓는 정치에 대해서는 수많은 논의가 있었다. 그 가운데에서 홉스가 자연상태를 정의한,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상태’라는 언명은 역사를 반추했을 때 여전히 유효성을 갖는 것처럼 보인다.
    서로가 서로에게 늑대인 파국적 상황을 종식시키고자 한, 합의에 근거한 국가 혹은 주권자의 탄생. 괴물 같은 삶의 형식을 극적으로 전환하기 위해 또 하나의 괴물을 창조하는 태생적 모순을 담지한 근대 정치체제는 적과 동지를 구분하는 분할과 배제의 논리를 지금 이곳에 도래하는 예외 상태로 구현시킨다. 그리고 비루한 현실 속에 “더는 이렇게 살지 않겠다!”라는 의지적 선언을 담고 있는 문학은 늘 비상 상태에서 정상 상태로의 이행을 시도한다.
    물론 문학은 인간을 옭아매는 삶의 제반 조건을 직시하되, 상상력을 통해 그렇게 하므로 정치에 직접 개입하지는 않는다. 보다 정확하게 말해서 문학은 ‘정치적인 것’과 떼려야 뗄 수 없다. 이 글에서 정치적인 것을 강조하는 까닭은 정치가 함의하는 권력의 순치 방식보다는 공동체가 기반을 둔 원리에 대해 거론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격렬한 정치운동의 시대 이후 쓰인, 특히 2000년대 한국 소설들의 경향적 특징을 정치성의 결여로 꼽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공통적인 삶의 심급을 문제 삼는 이상 ‘참을 수 없는 작품의 가벼움’에는 각각의 이유와 정치성이 아로새겨져 있다.
    김연수가 과거의 정치적인 사건들을 주억거리며 모두가 하나로 이어져 있다는 통찰에 다다르고(『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밤은 노래한다』), 박민규가 자본주의가 삶의 규준으로 입법해버린 지구를 통째로 “언인스톨”시킬 때(『핑퐁』) 이들과 동년배 작가인 김중혁은 별 것 아닌 사물들로 새로운 정치적인 것을 이야기한다.1) 라디오, 레코드, 타자기, 자전거, 매뉴얼 등을 제재로 하는 김중혁의 소설은 앞에 언급한 두 작가가 다루는 작품의 세계에 견주면 소소해 보인다. 그러나 스케일의 크기가 작품의 가치와 비례하지 않듯이 그는 사소한 것들의 사소하지 않음에 대해 설파하며 한국문학에서 자신만의 자리를 마련해가고 있다.
    지금부터 살펴보려는 김중혁의 단편소설들은 한용운이 ‘즐거움과 슬픔, 사랑’ 대신에 “얼굴과 소리와 걸음걸이”를 쓰겠다고 다짐했던 시편 「예술가」의 방법론을 전유하고 있다. 예컨대 그는 “비트”와 “엇박자”로 정치적인 것의 의미를 형상화한다. 그러니까 별로 대단해 보일 것도 없는 개개의 사물에 완전히 몰두하고 거기에서 낯선 의미를 창출하는 김중혁의 소설 속 인물들은 포괄적 의미의 마니아(mania)라기보다는 사회문화적 용어인 오타쿠(オタク)에 가깝다. 2)

 

택배로 도착한 물건의 포장을 뜯었을 때 나를 압도한 것은 디지털카메라가 아니라 300페이지에 달하는 매뉴얼이었다. 나는 카메라의 포장을 뜯어볼 생각도 하지 못하고 밤새 매뉴얼을 읽었다.(…중략…) 그때부터 나는 매뉴얼을 모으기 시작했다.
      (「매뉴얼 제너레이션」, 『악기』, 40쪽)

 

내가 벌이던 일은 무모할 뿐더러 세계의 평화에 아무런 이득도 되지 않으며 돈을 벌 수도 없고 심지어 영원히 끝장을 볼 수 없는 목표였다. (…중략…) 그 일을 마친다는 건 불가능했기 때문에 더욱 마음이 끌렸다.
      (「악기들의 도서관」, 『악기』, 128쪽)

 

 

    이처럼 보통 사람이 가치를 느끼는 대상에 매혹되지 않고 오직 사소하고 시시콜콜한 것에 집착하는 ‘나’야말로 김중혁이 그리고 있는 세계의 주체라고 할 수 있다. 돈을 벌지도 못하고, 도저히 끝낼 수도 없는 일에 흥미를 느끼는 김중혁의 소설 속 인물들은 통상의 교환과는 다른 고유의 가치 체계를 가진다는 점, 나아가 사물의 교환 가능성을 거부한다는 점에서 자본주의에서 태어난 자본주의의 이단아이다. 스스로 “매뉴얼을 읽고 감동을 받는 종류의 사람을 정상적이라고 생각할 수는 없다.”(「매뉴얼 제너레이션」, 『악기』, 53쪽)라고 말하면서도, 결코 그것을 포기하지 않는 별종들.
    김중혁은 지금까지 발표한 단편에서 1인칭 시점을 견지하고, 인물이 겪는 사건과 경험의 폭을 한정한 채 자신의 골방 안에서 소설을 전개해왔다. 각각의 이야기들은 모든 것을 ‘나’로부터 시작하며 그들은 자기만의 목표 안에 모든 가치를 복종시킨다. 그렇다면 지극히 개인적일 수밖에 없는 오타쿠로 하여금 김중혁은 어떻게 변종의 정치적인 영역을 열어젖히게 하고 있는가? 아니, 과연 우리는 오타쿠라는 병적인 주체에서 새로운 정치성을 찾을 수 있기는 한 것일까?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서는 먼저 김중혁이 창조한 소설 속 캐릭터의 특이성을 눈여겨봐야 한다. 오타쿠의 특징을 갖고 있으면서도 일반적인 오타쿠와는 다른 면모를 보이는 일련의 인물군을 지칭하기 위해서, 접미사 ‘적(的)’의 에두름을 무릅쓰고서라도 이들을 ‘오타쿠적 인간들’이라고 명명하려 한다. 과연 이들은 시시콜콜한 깜냥 외에 어떠한 방식으로 이 세상을 살고 있는가?

 

    1) 이 글에서 다루는 김중혁의 작품들은 다음과 같다. 『펭귄뉴스』(문학과지성사, 2006), 『악기들의 도서관』(문학동네, 2008), 『일층, 지하 일층』(문학동네, 2012). 이하 소설집의 제목을 각각 『펭귄』, 『악기』, 『일층』으로 약칭하고, 인용할 경우 본문 괄호 안에 소설집 제목과 작품명 및 쪽수만 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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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마니아’가 어떤 한 가지 일에 열중하는 사람을 뜻한다면, 일본에서 쓰이기 시작한 ‘오타쿠’라는 용어는 흔히 마니아 이상으로 그것에 탐닉해 자기의 세계에 틀어박힌다는 부정적인 뉘앙스를 띤다. 그들은 사회와의 소통을 거부한 채 자신만의 공간에서 산다. 오타쿠는 주로 만화, 게임, 피규어(figure) 등의 하위문화에 열광하는데, 점점 그 범위와 사회적 파장이 커지고 있어서 일본에서는 그에 대한 문화 분석이 속속 이루어지고 있다. 특히 아즈마 히로키(東浩紀)의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이은미 옮김, 문학동네, 2007)은 현대의 일본 문화를 오타쿠 현상으로 고찰한, 주목할 만한 저작이다. 그는 이 책에서 코제브(Alexandre Koj?ve)를 전유해 타자를 경유한 욕망에는 무관심하고 스스로 만족 가능한 욕구에 충실한 오타쿠의 특성을 “동물화”라고 정의하고 있다.
본격적인 일본 문화의 개방 이전에 이미 해적판을 통해 일본 만화 등에 중독돼 있던 한국에서도 오타쿠의 징후적 특성이 나타나고 있다. 한국에서는 “오덕후”라는 용어가 오타쿠를 변형한 신어로 쓰이고 있다. 이들은 일주일에 한 회 연재되는 일본의 최신 인기 만화를 한국어로 실시간 번역해 인터넷 블로그나 카페에 게시한다. 또한 동호회를 결성해 만화의 스토리와 캐릭터를 분석한 자료를 공유하기도 하고, 다음 회 연재본이 나오기 전에 자신이 가상으로 창작한 이야기를 올리기도 한다. 단순한 향유의 차원을 넘어서 적극적인 활동을 벌이는, 애니메이션을 즐기는 이들 사이에서 한국과 일본의 문화적 시간차는 존재하지 않는다.

 

 

    두 번째 방식 : 레고 블록 쌓는 재미를 느끼며

 

    이 글에서 김중혁의 등단작 「펭귄뉴스」에서 쓰인 “비트 마니아” 대신 ‘오타쿠적 인간들’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은 오타쿠적인 것의 보편성을 고려했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가 실체가 없는 환상에 중독되지 않기는 사실상 거의 불가능하다. 스펙터클을 양산하는 사회에서는 누구라도 부분적인 의미에서 오타쿠적일 수밖에 없다. 복사된 이미지의 범람과 현혹 속에서 “원본이란 건 이제 어디에도 없다. 파일을 복사한 파일, 그 파일을 또 복사한 파일이 있을 뿐이다.”(「바나나 주식회사」, 『펭귄』, 191쪽)
    오타쿠들이 횡행하는 포스트모던한 시대에 대한 언급은 책 뒤편에 실린 김중혁의 육성, “생각해보면, 나는 레고 블록이다. 나라는 것은 무수히 많은 조각들로 이뤄진 덩어리일 뿐이다.”(「작가의 말」, 『펭귄』, 377쪽)와 대구를 이룬다. 그리고 여기서 잠깐, 김중혁이 자신을 구성하고 있는 블록 중의 하나로 “장 보드리야르”를 언급한 것을 기억해두자.
    보드리야르는 소비사회에서 모든 가치는 기호화되며, 사물 또한 물질적 가치를 지닌 대상에서 기호로 변화해 어떠한 대상을 만들어낸다고 주장한 철학자이다. 기호가 창출한 대상은 하이퍼리얼, 즉 실재보다 더 실재적이라고 할 수 있는데 시뮬라시옹은 원본도 사실성도 없는 파생 실재를 모델로 삼아 산출하는 작업을 가리킨다. 환상의 공간은 사회 전체가 환상임을 감추기 위해 존재한다는 시뮬라시옹은 포스트모던의 세계 전체를 구성하고 있는 담론이다.3) 이렇게 원본과 복제의 구별이 모호해지는 시뮬라크르의 증식은 현실보다 허구를 중시하고 원작의 모방과 인용으로 이루어지는 오타쿠적 인간의 활동 영역을 넓혀나간다.
    가령 가사의 내용이 의미가 있는지 혹은 정확하게 들리는지의 여부와는 상관없이 음악의 리듬에 온 관심을 기울이는 ‘나와 B’의 관계는 어떠한가. “누군가의 이름을 대기만 했는데도 10년을 알아온 사람 같은 느낌”(「나와 B」, 『악기』, 191쪽)이 드는 것은 취향이 작품의 메시지에 선행하고, 취향만으로 그들의 공동체를 만드는 오타쿠적 인간들의 신념 체계에서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성(性)이 무화되는 이들의 공간에서는 굳이 남성과 여성의 역학 관계를 따질 필요가 없다. “언밸런스”야말로 김중혁 소설의 문을 여는 열쇳말이라고 할 때, 남자 네 명만으로 구성된 회사는 정형적이지 않으며 회식자리에서 “남자 네 명이 와인바에 앉아서 수다를 떠는 것도 재미있는 일”(「매뉴얼 제너레이션」, 『악기』, 51쪽)이기 때문이다. 즐기고자 하는 코드가 통한다면 그들은 거리낌 없이 연합한다. 「매뉴얼 제너레이션」에서 남성들과 허물없이 교류하는 여성인 고신희도 바로 그러한 점으로 인해 “우리 회사의 다섯 번째 팀원”(59쪽)으로 인정받게 되는 것이다.
    김중혁은 그가 쓴 대부분의 작품에서 남성 중심의 서사를 드러낸다. 그렇지만 젠더의 관점에서 이 문제는 부차적이다. 변주 없이 반복되기만 하는 연애 과잉의 시대에 그가 지겨운 사랑의 담론을 삭제한 채 다르게 말하기를 시도하는 까닭이다. 쓸모없는 사물에 골몰하는 오타쿠적 인간들을 대상으로 섹슈얼리티의 차별을 거론하는 것 자체가 우스운 일이 된다. 만약 그들을 “취향의 프리메이슨”(신수정)이라고 이름 붙인다면, 왜 그들이 비밀결사가 될 수밖에 없었는가를 설명해야만 한다. 김중혁은 무엇과 싸우고자 하는가?
    그는 다음과 같이 명확하게 주적을 규정한다. “만약 적이라는 게 있다면 따분함 속에만 있는 거야.”(「펭귄뉴스」, 『펭귄』, 291쪽) 김중혁에게 적과 동지를 구분하는 정치적 기준은 따분한가 따분하지 않은가의 여부에 불과하다. 펭귄뉴스가 벌이는 전쟁도 “지나치게 모든 것이 제대로 돌아가는 듯한, 모든 톱니바퀴들이 1밀리미터의 오차도 없이 맞물려 나가는 듯한 착각”(「펭귄뉴스」, 『펭귄』, 291쪽)에서 해방하려는 투쟁이다. 이들에게는 상투성이야말로 진정 싸워야 할 대상이다.
    주지하다시피 〈매트릭스〉는 시뮬라시옹을 전면에 내세우면서 각종 철학적 소재를 결합시킨 영화이다. 그만큼 〈매트릭스〉에 대한 해석은 분분하지만, 이 영화에서 평범하게 살던 컴퓨터 프로그래머 앤더슨이 빨간 알약과 파란 알약을 놓고 현실과 가상이라는 선택의 순간에 마주하게 됐던 사건의 발단이 그가 순전히 ‘재미’로 시작한 해킹 때문이었음은 김중혁의 작품들과 관련해 몇 가지 생각할 거리를 제공한다. 반복강박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일탈의 욕망은 앤더슨이 지금까지 눈앞에 펼쳐지던 것과는 전혀 다른 세계를 펼쳐 보인다. 앤더슨은 환상에서 깨어나 궁핍한 실제를 볼 수 있게 하는 빨간 알약을 선택한 뒤 〈매트릭스〉의 구원자 네오로 각성한다.
    반면 김중혁 소설의 오타쿠적 인간들은 환상 속에 계속 머물게 하는 파란 알약을 삼킴으로써 시뮬라시옹으로 파생한 것들이 실재임을 믿는다. 그들에게는 현실과 가상의 구분 따위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발을 딛고 서 있는 현실의 “어느 곳이든 다 지루하고 재미없기 때문”(「펭귄뉴스」, 『펭귄』, 263쪽)에 그들은 어디로 가야 할지 갈팡질팡하다가 무엇이든 생각대로 되는 상상의 세계로 뛰어든다. 오타쿠적 인간들은 흥미의 유무로 세계가 짊어진 죄의 크기를 결정한다. 천편일률적인 음악밖에 연주할 수 없다면 현실이라고 할지라도 유죄라고 선언하는 이들은, 그래서 감각적인 개체이다.
    세상이 컴퓨터가 프로그래밍한 허구임을 알면서도 그곳에 상주하고자 하는 인물은 실제로 음식을 먹지 않더라도 맛있는 음식을 먹고 있다고 만족시켜 줄 수 있는 말초적인 욕구에 충실하다. 현실에서 고무를 씹더라도 스테이크를 입에 넣고 있다는 느낌 안에서 살다가 죽을 때, 현실과 가상의 구별이 사실상 무의미함을 직시한다면 가상에 머무르려는 자를 비난하기란 쉽지 않다. 코기토는 의심하고 있는 내가 있음을 존재의 증표로 간주한다. 그렇다면 감각할 뿐 사고하지 않는 벌레와 꽃 등의 존재는 어떻게 증명할 수 있는가? 인간이란 주체 없이 사물은 홀로 존재할 수 없는가? 이러한 의문을 품은 ‘오타쿠적 인간들’은 코기토적 관념을 감각으로 치환해버린다. 현실과 가상이 영속적으로 교차하는 공간 안에서 감각의 촉수는 뻗어 자란다.

 

    3) 장 보드리야르, 하태환 옮김, 「시뮬라크르들의 자전」, 『시뮬라시옹』, 민음사, 2001, 9~90쪽 참조.

 

 

 

    세 번째 방식 : 눈을 감고 노래하기

 

    “평범한 진실이란 게 어떤 겁니까?”라는 질문에 “재미있게 노는 거요.”(「유리방패」, 『악기』, 173쪽)라고 답하는 오타쿠적 인간들은 ‘심술궂은 악령(Malin G?nie)’이 우리를 기만할지라도, 흥미롭다면 기꺼이 속아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그들은 시각보다는 청각을 신뢰한다는 나름대로의 원칙을 세우고 이렇게 말한다. “눈은 말이죠, 느낌을 단순화하려는 경향이 있어서 미묘한 색을 아주 단순하게 축소해서 본대요. 정말 게으른 녀석이죠?”(「무용지물 박물관」, 『펭귄』, 33쪽)
    사물의 미묘한 것들을 인식하고 구별하려는 오타쿠적 인간들에게는 무지개의 빛깔을 일곱 가지로 한정시키는 시각의 아둔함이야말로 무용지물이다. 그들은 세밀한 감각을 특정한 몇 가지로 뭉뚱그리는 둔감한 사고를 경계한다. 오타쿠적 인간들은 세상에서 제일 어리석은 사람은 눈앞에 보이는 것을 세계의 전부라고 믿고 귀 기울여 듣지 않는 자라고 생각한다.
    에스키모들은 눈을 감은 채 나무를 깎아 해변의 지도를 만든다. “촉각과 상상력이 완벽하게 일치해야만 당신은 당신의 길을 찾을 수 있을 것”(「에스키모, 여기가 끝이야」, 『펭귄』, 95쪽)이라는 에스키모들의 나무 지도는 오타쿠적 인간들을 위해 제작된 맞춤형 지도이다. 시뮬라크르를 애용하는 오타쿠적 인간들에게 상상력은 무엇보다 필수적인 덕목이며, 그들은 소리에 집착하는 만큼 촉각도 예민하다.
    본래 소리는 공기 분자의 파동이 사방으로 퍼짐을 말한다. 사람이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것도 성대의 ‘떨림’이 있기에 가능한데, 이와 같은 ‘움직임’이 없다면 우리는 침묵할 수밖에 없다. 멀리서 밀려오는 파도 같은 공기 분자는 귓가에 다다라 고막을 ‘진동’시킨다. 그제야 우리는 소리를 지각할 수 있다. 청각은 촉각과 밀접한 관계에 놓인다. 김중혁의 작품 속 오타쿠적 인간들이 비트에 열광하는 이유도 청각과 촉각의 상호 연관성에 기인한다. 비트는 무엇인가를 퉁퉁 두드림으로써 생겨난다. 이를테면 어떤 록그룹의 콘서트에서 볼륨을 최대로 높인 기타ㆍ베이스ㆍ드럼ㆍ보컬의 사운드는 청중의 가슴을 쿵쾅거리게 한다. 여기서 한 가지 밝혀둘 점은 음악을 듣고 감흥이 되어 청중의 가슴이 뛰는 게 아니라, 음악의 파동이 몸에 직접 강렬한 자극을 가한다는 사실이다.
    「펭귄뉴스」에 등장하는 비트 한계선을 넘어버려 방송 금지곡으로 지정된 벨벳 언더그라운드(Velvet Underground)와 톰 웨이츠(Tom Waits)의 노래를 실제로 한 번 찾아서 들어본다면 “비트는 어쩔 수 없는 것”(「펭귄뉴스」, 『펭귄』, 328쪽)이라는 ‘나’의 고백에 충분히 공감할 수 있다. 설령 그러한 음악들을 듣지 않는다고 해도 비트가 불가항력적이라는 진실은 변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비트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살아 있음을 증명하는 심장의 고동이다.
    김중혁의 작품 곳곳에서 언급되는 비트는 상징적인 의미를 지니지만, 펭귄뉴스가 “비트를 가로막는 모든 것들을 거부하는 운동에서 시작된 것”(「펭귄뉴스」, 『펭귄』, 338쪽)이라는 점에서, 비트는 해방을 내포하고 있다. “그(메이비ㆍ인용자) 목소리만 들으면 심장이 울렁거린다니까.”(「무용지물 박물관」, 『펭귄』, 21쪽)라는 ‘나’의 중얼거림은, 비트에 대한 집착이 실은 청각과 결부된 촉각의 작용임을 방증한다. 비트가 실린 다양한 소리를 듣고 심장이 약동함을 느끼는 것은 오타쿠적 인간들이 자유의 쟁취를 촉발하는 방식이다.
    실존의 자각을 몸의 떨림에서 찾는 오타쿠적 인간들은 서로 다른 것들을 조합해서 새로운 무엇인가를 만들어낸다. 본래 리믹스(remix)는 DJ만이 아니라 오타쿠적 인간들의 기본 작업이기도 했다. 원본을 변형ㆍ가공하는 2차 창작을 통해, 모델로 삼았던 대상 자체에도 영향을 끼치며 그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해왔던 것이다. 시뮬라크르의 패러디에 길들여진 오타쿠적 인간들은 원작의 아우라를 보존하는 데 무심하다. 그들은 기술복제 시대에 정치의 예술화에 반(反)하는 예술의 정치화를 향한 도정은, 원작에 아른거리는 특유의 분위기가 파괴됐음을 받아들임으로써 가능하다는 주장에 공감한다. 오타쿠적 인간들은 오리지널이 단 하나뿐이고, 그 외의 나머지는 모두 키치로서 쓰레기 취급을 받아야 한다면 차라리 획일화된 오리지널을 거부하겠다는 급진적인 노선을 택한다. 아래의 인용문은 일관된 박자를 요구하는 세상에서 엇박자가 살아가는 방식을 보여준다.

 

한 사람의 목소리가 두 사람의 목소리로 바뀌었다. 두 사람의 목소리가 세 사람의 목소리로 바뀌었고, 네 사람, 다섯 사람의 목소리로 바뀌었다. 합창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합창이라고 하기에는 서로의 음이 맞질 않았다. 박자도 일치하지 않았다. (…중략…) 잘못 부르고 있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마치 화음 같았다. (「엇박자 D」, 『악기』, 280쪽)

 

 

    음치는 노래에 서린 아우라를 깨뜨린다. 자신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원곡을 왜곡할 수밖에 없는 그들에게, 원조를 숭배하는 세상은 뺨을 후려치며 말한다. “야 이 새끼야, 부르지 말란 말이야. 입 다물어, 입 다물어!”(268쪽) 그러나 “엇박자 D”라는 이름을 가진 오타쿠적 인간은 기어이 다른 음치들의 목소리를 절묘하게 리믹스해서 “내가 음치가 아니란 걸 보여주고 싶은”(271쪽) 소망을 이룬다. 그가 그토록 자신이 음치임을 부정하는 이유는 정상성의 추인을 갈망해서가 아니라 음치라는 말 자체를 부정하기 위해서이다. 엇박자 D를 비롯한 오타쿠적 인간들에게 음치란 노래를 ‘못’ 부르는 사람이기는커녕 색다르게 노래하는 사람인 것이다.
    시뮬라크르의 조합을 통한 조화의 윤리는 김중혁이 오타쿠적 인간들로 하여금 타진케 하는 정치적인 것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이제 눈 감은 자들은 눈만 떴을 뿐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자들의 도시 한복판에 파란을 일으킬 준비를 한다. 그 프로젝트의 이름은, 「c1+y=:[8]:」이다.

 

 

    네 번째 방식 : 스케이트보드로 동네 한 바퀴 돌고

 

    이쯤에서 2010년대에 맞춰진 시계를 잠시 1930년대로 돌리자. 당시에는 서울이 아니라 경성이라 불린 이곳을, 동그란 안경을 쓴 웬 사내가 대학노트를 끼고 배회하고 있었다. ‘구보’라는 이름의 이 관념적인 남자는 전차에서 승객들의 얼굴을 살펴보기도 하고, 다방에 가서 차도 마시면서 도심을 누빈다. 그에게는 특별한 목적지가 없다. 어쩌면 ‘무목적의 목적’은 구보와 같은 근대의 산책자가 취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는지도 모른다. 주변을 잠식하며 변태하는 도시의 정체를 알기 위해서 그는 우선 이곳저곳을 기웃거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처럼 근대화되어가는 도시가 생경한 시대의 산책자는 듬성듬성한 조감도를 그리는 어설픈 건축가이기도 했다.
    그런데 한 세기가 지난 지금, 포스트모던한 도시의 산책자는 더 이상 도시가 낯설지 않다. 오히려 그는 자연 속에 있는 것이 몹시 불안하다. 정글을 다녀온 뒤에 그는 고백한다. “나는 도시를 떠나서는 살아갈 수 없다. 책 속의 정글은 온통 아름다운 연둣빛이지만 실제 정글의 뒤편은 무시무시할 정도로 짙은 녹색으로 가득하다.”(「c1+y=:[8]:」, 『일층』, 12쪽) 녹색에서 공포를 느끼는, 도시에서 태어나고 자란 아스팔트 사내는 익숙한 도시의 경관을 더는 조망하지 않고 대신에 특별한 목적의 독특한 탐색을 시작한다. 산책자ㆍ오타쿠적 인간은 스케이트보드를 타고 도시의 낙서 연구에 몰두하기로 한 것이다.
    이제부터 그의 연구에 대해 알아보기 전에 포스트모던이라는 수식이 붙는 것은 도시가 아니라 산책자임을 명확히 부기하도록 하자. 어떤가 하면, 100여 년 전 구보가 활동하던 경성과 오타쿠적 인간들이 누비는 현재의 서울은 본질적으로 크게 변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철도가 놓이고 자동차가 다니는 도시는 여전히 모던하다. 그리고 이러한 도시의 속성은 근대로 변모하는 시기 동ㆍ서양이 공유했던 바이므로, 우리는 20세기 초에 파리에 거주하며 ‘아케이드 프로젝트’를 구상하던 한 산책자의 노트를 참고해 볼 수 있다.
    그는 도시가 표면적으로만 동질적으로 보일 뿐, 경계선으로 분할되어 있으며 도시를 속속들이 알기 위해서는 경계선을 먼저 이해해야 한다고 쓰고 있다. 또한 도시에 산재해 있는 다양한 외진 곳을 알고 있어야 “마치 허공으로 한 걸음 내딛는 것처럼, 마치 어딘가 전혀 낯선 곳으로 내려가고 있는 것처럼 하나의 새로운 구역이 시작된다.”4) 라고 부연한다. 이 같은 탁월한 통찰력을 지닌 이 산책자의 노트에는 「c1+y=:[8]:」의 오타쿠적 인간이 왜 “서울 곳곳의 후미진 골목을 헤집고 다니면서 새로운 형태의 낙서를 발견하기 위해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17쪽) 다니는지가 암시되어 있다.
    이 소설에서 ‘나’는 낙서를 해석하는 게 아니라 낙서의 패턴에서 사회학적인 무엇인가를 찾고자 한다. 그러던 중에 ‘나’는 담벼락의 맨 아래에 적혀 있는 낙서를 발견하고, 그것을 쓴 이들과 조우하게 된다. 바로 ‘숏컷라이더즈’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스케이트보드 그룹이다. ‘나’는 몇 주간 숏컷라이더즈에게 스케이트보드 타는 법을 배우기도 하지만 결국 흥미를 잃고 그들과 작별한다. 그런데 ‘내’가 스케이트보드 낙관까지 찍어가며 낙서를 한 그들의 의도를 깨닫게 되는 건, 새해 다음 날 아무 할 일이 없어 오랜만에 스케이트보드를 타러 거리로 나선 순간이다.

 

나는 스케이트보드가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가보기로 했다. 길이 갈라지는 곳마다 스케이트보드 낙관이 찍힌 낙서가 있었다. (…중략…) 삼십 분이나 낙서를 따라다닌 후에야 길을 따라오는 동안 단 한 번도 신호등을 만나지 않았고 횡단보도도 건너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머릿속으로 온 길을 되짚어보았다. 그들의 이름이 어째서 숏컷라이더즈인지, 스케이트보드는 왜, 어떤 방향을 가리키고 있는지 그제야 알 수 있었다. (31쪽)

 

 

    서울에는 자동차를 위한 자동차 전용도로가 있고, 자전거를 위한 자전거 전용도로도 있는데, 스케이트보드를 위한 스케이트보드 전용도로는 없다. 이 작품에서처럼 바퀴가 있는 것 중에서는 스케이트보드가 살아남아야 한다고 믿는 이들로서는 이의제기를 할 만하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만의 일방통행로(Einbahnstra)를 만들기로 한다. 교통의 흐름을 조율하고 통제하는 횡단보도와 신호등의 경계선을 가로지르는 새로운 선 긋기.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길을 정신없이 따라가며 ‘나’는 서울의 중심부에 아직도 이러한 곳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외진 곳에 위치한 “보드빈터”와 마주치게 된다. 그곳의 맨 끝에는 정글에나 있을 법한 절벽까지 있다. 포스트모던한 산책자ㆍ오타쿠적 인간이 도시의 뒷길을 더듬어 결국 최후에 발견한 것이 그가 그토록 무서워하던 정글이었고, 자신을 몹시 부끄럽게 만들었던 “긴허리아기말원숭이”였다는 서술은, 인공의 도시가 자연과 다르지 않은 거대한 생명체임을 입증한다.
    감히 맞설 수 없는 압도적인 힘, 익숙한 세계의 지평을 깨뜨리는 숭고를 ‘나’는 정글에서 최초로 맞닥뜨린다. 상상력의 종합적 표상 능력을 능가하는 대상의 출현 앞에서는 누구나 위축과 외경을 동시에 느끼기 마련이다. 그 당시 ‘나’의 경악은 동물이 사람처럼 생각하고 판단한다는 것에 대해 코기토적 주체가 느끼는 두려움이었다. 원래대로라면 이러한 주관적 비합목적성은 자신의 생명에 위협이 없음을 깨닫게 순간 이성의 우월을 감지하는 희열이 되는데, 도시의 한복판에서 예기치 않게 다시 한 번 맞닥뜨리게 된 보드빈터의 절벽에서 ‘나’의 불쾌는 곧바로 쾌로 전환한다. 판단력의 전도는 인간적 이성의 승리가 아니라, 이성의 외연을 인간 너머로 확장시킨 결과로써 가능해진 것이다. 재현과 달리 제시하는 숭고는 지금 여기에 어떠한 경계가 그어져 있음을 확인시키면서, 그 경계의 극단에 다다르는 무한의 방식으로 탈경계를 지향한다.5) 긴허리아기말원숭이에게 감사의 말이라도 전해야 했다고 자신을 꾸짖는 ‘나’는, 정글에서와는 대조적인 유쾌한 심미성을 느끼며 도시가 구획한 일정한 경계선을 벗어나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도시와 정글이 리믹스 되는 광경이다.
    도시를 제대로 알기 위한 방법을 고스란히 체현한 일련의 낙서는 오타쿠적 인간들이 아닌 사람은 보지 못한다. 눈 뜨고 있어도 경계선과 감추어진 것들을 인지할 수 없는 눈 먼 자들의 도시에서, 눈 밝은 자들은 자발적으로 눈을 감았던 이들뿐이다. 오타쿠적 인간들은 거기서 도시와 자연의 혼성성을 감지하고 그 안의 배치를 새롭게 적용한다. “모든 골목과 골목이 이어져 있고, 미로와 대로의 구분이 모호하고, 골목을 돌아설 때마다 사람들이 깜짝 놀랄 만한 또 다른 풍경이 이어지며, 자신이 지나온 길을 되돌아가기도 쉽지 않을 정도로 무수히 많은 갈래길이 존재하는 도시”(32쪽)는 정글의 원리를 그대로 차용한 것이다.
    정글화된 도시 혹은 도시화된 정글은 스케이트보드에 걸쳐진 두 개의 발과 도시와 스케이트보드에 가로 놓인 ‘=’의 속도감을 기호화 한 ‘c1+y=:[8]:’이 된다. 바야흐로 도시가 스케이트보드인 시대에 시티는 스케이트보드ㆍ정글로, 사람은 오타쿠적 인간ㆍ동물로 현현한다.

 

    4) 발터 벤야민, 조형준 옮김, 「태고의 파리, 카타콤베, 폐허, 파리의 몰락」, 『아케이드 프로젝트Ⅰ』, 새물결, 2005, 29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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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숭고에 대한 분석은 장-뤽 낭시, 김예령 옮김, 「숭고한 봉헌」, 『숭고에 대하여』, 문학과지성사, 2005, 67~85쪽 참조.

 

 

 

    다섯 번째 방식 : 동지들과 함께 놀기

 

    타자의 욕망을 욕망한다는 정신분석학의 견해가 있다. 코기토를 해체하는 이 방법론은 타자 없이 욕구를 충족하는 동물화보다는 훨씬 인간적이다. 그것은 또 다른 의미에서 주체가 인간임을 한층 더 강조하기 때문이다. 그에 비해 오타쿠가 동물로 변하는 과정은 타자가 개입할 여지를 남기지 않는다. 이와 같은 욕망의 부재 상태는 사람이 사람들과 살아가야 할 필요성을 상실하게 하고 정치적인 것을 실종시킨다. 커다란 이야기에서 작은 이야기로 변화한 포스트모던의 세계관이 사람들의 공감적 영역마저 축소시킨다고 할 때, 고독할 수밖에 없는 오타쿠가 주도하는 이 시대의 전망은 결코 장밋빛이 아니다.
        그러나 앞에서 서술한 바, 김중혁의 소설에 등장하는 오타쿠적 인간들은 상식적인 의미의 오타쿠와 같지 않다. 이 글에서 일관되게 사용한 용어의 ‘적(的)’은 그것을 구별하기 위한 표기였다. 시뮬라크르를 향유하되 허구성에 고립되지 않는 이들은 청각과 교호하는 촉각, 즉 비트를 신봉하며 펭귄뉴스로 대표되는 대항군을 결성한다. 자기 눈을 찔러 더 이상 운명에 속지 않으려는 오이디푸스처럼 이들은 눈을 감은 채 도시와 자연의 분할을 기묘하게 지우고 섞으면서 도시도 정글도 아닌 혼재된 공간을 발견한다.
    김중혁이 담아낸 오타쿠적 인간들의 공통감각ㆍ심장에 직접 작용하는 감각의 전이는 현란하기에 쉽게 미혹될 수 있는 이미지가 주도하던 지각장의 틀을 격변시킨다. 정치적인 것은 그곳에 놓인다. 이때 간과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포섭과 해방의 긴장 관계에서 기존의 고루한 감각의 체계를 어떻게 전복시키는가 하는 정치적 가능성의 검토이다.
    말할 수 있고, 볼 수 있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을 아우르며 감각의 새로운 나눔을 실현한다는 측면에서 문학은 이미 정치적인 것과 연동한다고 할 수 있다.6) 그 중에서 특히 오타쿠적 인간들이 등장하는 김중혁의 소설을 주목하는 연유는 사물의 가려진 부분을 들추어내 걸맞은 이름을 붙이고 미세한 틈을 만들어내는 그의 문학론과 결부되어 있다. 김중혁은 사람이든 사물이든, 이데아든 시뮬라크르이든 간에 “오차와 오류는 어디에나 있다. 지도에도 있고, 자동차에도 있고, 사전에도 있고, 전화기에도 있고, 우리에게도 있다. 없다면 그건, 뭐랄까, 인간적이지 않은 것이다.”(「에스키모, 여기가 끝이야」, 『펭귄』, 80쪽)라고 언술한다.
    전술했듯이 일자(The one)로의 회귀를 강요하지 않는 오타쿠적 인간들의 관계에서 적과 나를 구분하는 기준은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그것이 식상한가 식상하지 않은가의 여부뿐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에 오차와 오류가 있을 수밖에 없다면 당신과 내가 다름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단지 우리는 서로 적이 될 수 없다는 간명한 명제로 귀결되는 것이다. 김중혁의 오타쿠적 인간들은 자아와 세계가 대결하는 첨예한 갈등 없이도 근대소설이 탄생할 수 있음을, 때로는 무관심한 듯 보이는 타자에 대한 역설적 배려가 세련된 냉소를 감싸 안을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들은 배제와 분할의 예외 상태를 규정하지 않는 감각적인 재배치를 행한다. 그 속에서 모든 것을 극단의 비상 상태로 몰아붙이는 적대적인 원한의 정치에 균열을 낸다. 김중혁은 자신이 주변에 있는 모든 것들과 교류하며 만들어졌다는 것을 늘 인지하고 있다. 따라서 그가 구상한 오타쿠적 인간들은 정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재구성되는 상호텍스트성의 구현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한 사물에서 다른 사물로 관심이 이동하는 과정만으로 새로운 정치적 가능성이 촉발된다고 보기는 어렵다. 사물에 골몰하는 이들이 가장 경계해야 할 점은 무반성적인 같은 방식의 반복이고, 그것은 그들이 그토록 혐오하는 따분함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김중혁의 오타쿠적 인간들은 앞으로 나가면서도 끊임없이 뒤를 살펴야 하는 위태로운 외줄타기를 하고 있다. 그들은 아날로그적 사물에서는 향수를 느끼지만 디지털 기기에 대해서는 “멍청한 유비쿼터스”라고 경멸한다.
    오타쿠적 인간들은 이렇게 되묻는다. “종이를 버리면서 생각을 정리하는 게 낭비입니까, 아니면 컴퓨터처럼 종이를 아끼면서 생각을 지우는 게 낭비입니까. 어떻게 생각하십니까?”(「회색 괴물」, 『펭귄』, 176쪽) 당연히 그들은 후자의 견해를 지지한다. 그러나 첨단으로 치닫는 무빙워크에 탄 포스트모던의 기수 오타쿠적 인간들이 계속해서 과거를 가리키며 걷기에만 열중한다면 그들은 전진도 후진도 하지 못한 채 제자리에 머물 수밖에 없게 된다.
    여하튼 김중혁은 “지금 어디에선가 하얀 종이나 텅 빈 모니터를 앞에 두고 뭔가를 쓰려 하고 있는 모든 사람들, 그게 일기든 시든 소설이든 수필이든 편지든 뭐든 간에, 뭔가를 쓰기 위해 허공 앞에 앉는 모든 동지(同志)들”(「작가의 말」, 『펭귄』, 377쪽)을 잊지 않고 소설을 쓴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김중혁이 늘 염두에 두고 있는 레고 블록은 조합과 변형이 자유롭고, 그 조각의 개수 또한 무수히 많다는 것이다. 언제나 복수형인 오타쿠적 인간들로서 그들은 다시 리믹스를 해서 곡을 만든다. 김중혁은 아니, 오타쿠적 인간들은 다음과 같은 부탁을 한다. “이제 여러분의 카세트데크에 있는 파란색 플레이버튼을 눌러 제가 녹음한 소리를 들어봐 주십시오.”(「작가의 말」, 『악기』, 309쪽)
    물리적인 실체가 존재하지 않는 MP3 파일에 밀려, CD도 소멸해가고 있는 요즘 판국에서 오타쿠적 인간들은 고집스럽게도 카세트테이프에 녹음을 한다. 그 소리를 들어보려고 플레이버튼을 누르고 나서 그들의 집착을 곰곰 생각해본다. 음질이 깨끗하지도 않고 간간히 잡음도 섞여 나오는 소리가 들린다. 비로소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그렇다. 그들은 기어이 오타쿠적 인간들일 수밖에 없다. 이것이야말로 그들이―어쩌면 우리가―온전하게 살아가는 방식이다.

 

    6) 미학과 정치의 교호에 대해서는 자크 랑시에르, 오윤성 옮김, 『감성의 분할』, 도서출판b, 2008, 13~23쪽 참조.

 

 

 

 

 

[개별 작품 선정평]

(선정평) 허희의 「‘오타쿠적 인간들’이 산다」외 (평론)

 
    이 평론은 김중혁의 작중인물들이 교환가치가 지배하는 세계에서 어떤 방식으로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하며 살아가는가에 대한 탐색이다. 구체적으로는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에 적응하지 못하는 인물들이 나름의 방식으로 삶의 지평을 열어 가는 모습을 밝혀낸다. 이 글의 장점은 무엇보다도 텍스트에 대한 면밀한 분석이다. 이를 바탕으로 자신의 논리를 차분하게 전개해 간다. 서론에서 제기한 문제를 결론에서 다 밝히고 있는가에 대한 의문이 있지만, 앞서 언급한 장점이 이를 충분히 극복하리라 생각한다.

 

 

===== 작가와 6문6답 =====
 

1. 우선 선정된 소감을 간단히 밝혀주세요. ^_^

  성긴 글임에도 불구하고 심사위원 선생님들께서 패기와 도전 의식을 높이 사주신 것 같습니다. 더 좋은 평론 쓰도록 갈고 닦으라는 따뜻한 격려의 뜻으로 새기겠습니다. 앞으로 열심히 읽고, 치열하게 생각하고, 잘 쓰겠습니다.

 

2. 평론가로서 작품을 대할 때 가장 먼저 염두에 두는 부분이 있으시다면 그것이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이를테면 문장이나 주제 혹은 작품의 어떤 지향점 같은 것들을 염두하고 읽으시는지!)

  어떠한 작품을 접했을 때, 저를 감동시키거나 혹은 불편하게 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곰곰 생각해봅니다. 평론은 작품의 정보를 정리해주는 글쓰기가 아니라 그로부터 비평적 창조성을 발휘하는 새로운 글쓰기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저와 작품이 충돌하고 교호하는 지점을 탐색하는 데 우선적으로 착목합니다.

 

3. 글을 쓴 작자 이외에, 글을 막 완성했을 때 가장 먼저 읽어주는 1차 독자가 있으신가요?

  지금은 특별한 1차 독자가 없습니다. 등단을 목표로 습작하던 시기에는 저를 가르쳐주셨던 선생님들께 쓴 것을 보여드리고 피드백을 부탁드렸습니다. 다들 바쁘신 와중에도 저의 엉성한 글을 보고 애정 어린 조언을 해주셨습니다. 특히 전상기 선생님, 황호덕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4. 글을 쓸 때 특별히 듣는 음악이 있다든가, 자기만의 습관이 있다면요?

  소리에 민감한 편이라서 글을 쓸 때는 항상 귀마개를 사용합니다. 음악은 주로 걸어 다니거나 쉴 때 듣고요. 그래서 카페에 가지 않고 대부분 집에서 글을 씁니다.

 

5. 평론을 하는 자신으로서의 지향점이랄까요, 이런 평론가가 되고 싶다,라고 생각하시는 점이 있으신지 궁금합니다.

  하나의 세계가 다층적인 텍스트의 교직으로 이루어졌다고 믿는 비평적 주체로서 모든 사회적 현상은 판단과 논평의 대상이 될 수 있다고 봅니다. 시와 소설처럼 엄밀한 규정에 합치되는 문학은 아닐지라도, 문학적으로 사유해야만 하는 텍스트를 적시하고 비평하는 평론가가 되고 싶습니다.

 

6. 지금은 어떤 작품들을 주로 읽고 계시나요? 앞으로의 작품 활동 계획을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시기를 정하여 한 작가의 전작을 읽는 습관이 있습니다. 요즘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과 에세이를 탐독 중입니다. 이후에는 다른 언어권의 작가―밀란 쿤데라나 필립 로스 등에 관심을 기울이려고 합니다.
  나중에 제가 평론집을 출판할 때는 한국 문학뿐만 아니라 외국 문학에 대한 비평, 문학적으로 독해해야 하는 사회 현상에 대한 비평을 종합적으로 묶을 계획을 갖고 있습니다. 그것을 하나로 통괄하는 키워드는 아마도 ‘비순수의 정치성’이 되지 않을까 합니다.

 

 

 

 

   《문장웹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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