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시나무 외 9편

 

 

가시나무

 

최서림

 

 

 

사랑이란 말이 외계어처럼 들리던 때였다
시뻘건 적개심이 우울증을 몰아내 주기도 하던 때였다
들을 귀가 없어 공허하게 혼자 떠들기만 하던
내 안에 빽빽이 도사린 가시는 보지 못하던 때였다
내 가시에 내가 찔리는 줄도 모르던 때였다

 

잿빛 꿈이라도 꾸어야 시인이지만
모든 이데올로기는 비극적이란 말도 있다
반들반들한 말의 벽돌로 빈틈없이 쌓아올린 집 속에
손님으로 들어가 쉴 만한 방들이 없다
말이 너무 많아 말과 말이 섞일 공간이 없다

 

말에 허기진 나더러 아내는
씨 뿌리는 사람의 심정으로 시를 써보라 한다
정신없이 말을 뱉어내기 바쁜 시인보다
마음속에다 빈 주머니를 주렁주렁 달고
느릿느릿 받아먹어 주는 사람이 고마운 때라 한다
잘라도 잘라도 솟아오르는 말의 가시를
뭉그러뜨릴 수 있는 것도 역시 말뿐이라 한다

 

《시와정신》 2012년 겨울호

 

 

 

 

 

감자 먹는 사람들

 

 

 

왜정 때 배삼식 씨는 봉화에서 목도질로 먹고 살았다.
하루 종일 어깨, 허리 무너져라 황장목을 나르고
물감자 한 바께스 받아들고 후들거리며 돌아왔다.
끼니라는 게 야차보다 무서웠다.

 

봄베이에 가면 왼종일 옷을 수천 벌 빠는
인간 세탁기 불가촉천민이 있다.
꿀꿀이죽 같은 카레를 허겁지겁 퍼 먹을 때도
허리가 펴지지 않는 청년 핫산이 있다.

 

야생 히아신스를 닮은 채털레이 부인이 사는
영국 중부에 지옥 같은 탄광촌 테버셜이 있다.
날카롭고 사악한 전깃불 밑에서 말을 잃어버린 광부들이
껍질도 안 깐 돼지감자로 허기를 메운다.

 

누에넹 들판의 시든 야생화 같은
먼지 자욱한 집 속을 고흐가 들여다보고 있다.
두엄 빛깔 옷차림의 농부들이 갈고리 같은 손으로
설익은 감자를 먹고 있다.
서먹서먹한 내면을 희미하게 가려 주는 램프,
지친 얼굴들은 서로 쳐다보지도 않는다.

 

한겨울에도 난방을 못 하는
질퍽거리는 우리 안 돼지보다 못한 노인
라면 하나로 하루를 때운다.
노인의 흐릿한 초점 너머로 바퀴벌레들이
말라버린 라면 찌꺼기를 뜯어먹고 있다.

 

《시에》 2012년 가을호

 

 

 

 

 

과거를 묻지 마세요

 

 

 

 

어둡고 괴로웠던 세월도 흘러

 

세월이란 무대에 사람들이 웅성웅성 모여 있다
지시에 따라 혹은 서 있고 혹은 앉아 있다
혹은 완장을 차고 있고 혹은 경찰복을 입고 있다
징용 갔다 탈출한 내 아버지 같은 농부도 있고
좌익이라 밤낮으로 도망 다녀야 했던 당숙도 있다
빨치산 피해 면소재지로 이사한 아버지,
설날에도 아버지 대신 내가 큰집으로 가야 했다
죽어서도 아버지는 종중산에 묻히지 않았다

 

끝없는 대지 위에 꽃이 피었네

 

무덤가에 한 가족이 어색하게 엉거주춤 모여 있다
벌겋게 술기 오른 하급 경찰 큰아들이
성난 거위모양 꽥, 꽥 고함지르고 있다
성묘도 잘 안 오는 택시기사 둘째 아들이
심드렁하니 듣는 둥 마는 둥 하고 있다
성난 황소 같은 아버지를 무서워했던 막내아들 혼자
아버지의 죽음을 속으로 애도하고 있다
가슴에 섶불을 안고 떠돈 아버지의 슬픔을 슬퍼하고 있다
독하다는 최씨 무덤가에도 해마다 어김없이
냉이꽃, 제비꽃, 할미꽃이 피고 진다

 

한 많고 설움 많은 과거를 묻지 마세요

 

어머니 무덤가에 한 가족이 따로따로 돌아앉아 있다
연출자의 지시대로 서로 쳐다보지도 않는다
퇴직 경찰 큰아들은 힘 빠진 목소리로 잔소릴 늘어놓는다
경비원 둘째 아들은 자리 뜰 궁리만 한다
시간강사 막내아들은 아무 생각이 없다
평생을 과부처럼 산 어머니는 죽기 전에 아버지를 용서했다
역시 빈틈없는 연출자의 지시대로,
아버지의 바람은 순전히 병 때문이라며
나란히 묻힐 마음의 준비를 다했다
무덤 밑으로는 끝없이 얼었다 녹았다
무심한 세월 같은 강이 흐른다

 

《시와정신》 2012년 겨울호

 

 

 

 

 

나부(裸婦)

 

 

 

물이 탱탱하게 오른 裸婦가
음부를 살짝 드러낸 채 서 있다
검은 터럭만큼 잎이 무성한
물푸레나무에 기댄 채 서 있다
따오기 모양으로 먼 산을 쳐다보고 있다
마티스의 꿈틀, 꿈틀, 거리는 욕망이
女體를 통해 뜨겁게 달구어져 나온 욕망이
화폭에다 알록달록 옮겨지고 있다
보름달을 품은 듯 빵빵한 유방을 한 裸婦에게
머리에 올리브 숲이 들어찬 다른 裸婦가
경배하듯 머리를 기울이고 있다
멀리서 힘겹게 바다를 건너온 또 다른 裸婦가
달에게 바치듯 한 아름의 꽃다발을 바치고 있다

 

《시와정신》 2012년 겨울호

 

 

 

 

 

裸婦를 보는 裸婦

 

 

 

우중충한 창 너머로
마른 종려나무가 몇 그루 뻣뻣하게 서 있다
裸婦는 모로 누워 다리를 꼬고 있다
裸婦는 이윽히 제 샅을 내려다본다
종려나무에는 없는 푸른 색깔이
얼굴에도 유방에도 사타구니 깊숙한 곳에도
거칠게 칠해져 있다

 

청량리 낡은 아파트 베란다에
화초가 말라 노랗게 바스라진다
대낮 소파에 벌렁 드러누운 裸婦가 그윽이
마티스의 푸른 裸婦를 쳐다보고 있다
제 몸을 만지듯 푸른 裸婦의 둔부를 만지고 있다
푸른 裸婦를 만지듯 제 둔부를 쓸쓸히 만지고 있다
손끝을 통해 푸른색이 물들어온다
옆구리에도 배꼽에도 사타구니 깊숙한 곳에도
피멍처럼 스며든다

 

한 裸婦와 한 裸婦가 거울 보듯 서로 쳐다본다
한 슬픔과 한 슬픔이 위무하듯 서로 만진다
한 바가지의 눈물 같은 검푸른 빛이
몸에서 몸으로 흘러 들어가고 흘러나온다

 

《시사사》 2012년 9-10월호

 

 

 

 

 

너무 아픈 사랑은

 

 

 

러브스토리가 전설로 내려오는 평론가 김윤식은
세상에 성공한 사랑도 있을까, 라고 당돌하게 썼다
운명이란 가혹한 이름으로
서로의 심장을 파먹는 사랑도
미쳐 죽어도 좋다는 사랑도
미쳐 날뛰다가 죽는 사랑도 봤다
죽어서도 날뛰는 사랑을 본 적도 있다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우리 시대의 詩客 문정희는
모든 사랑은 첫사랑, 이라고 썼다
막판에는 가슴이 막혀 죽어버릴 것 같은 게 첫사랑인데
어쩌자고 겁도 없이, 그렇게 썼다
대신 죽어도 좋다며 서로가 내뱉은
감당할 수도 없는 말들도 봤다
그 말들이 돌아서자마자
사금파리같이 할퀴는 말들로 변신하는 것도 봤다
신음도 눈물도 터져 나오지 못해 안으로 안으로만 파열하는
하, 붉디붉은 이별을 본 적이 있다

 

    우리 다시는 사랑으로 세상에 오지 말기
    그립던 말들도 묻어버리기 묻어버리기

 

《시와경계》 2012년 가을호

 

 

 

 

 

렘브란트의 어둠

 

 

 

그의 그림은 빛과 어둠으로 짜여 있다
화폭의 중심부까지 밀고 들어오는 어둠,
어둠의 심장부에서 한 줄기 빛이 새어 나온다
어둠 속에서 삼손도 데릴라도 술잔도 식탁도 고양이도
순순히 걸어 나와 빛 가운데 자리 잡는다
빛과 어둠의 경계, 그 어름에서
삼손도 데릴라도 술잔도 식탁도 고양이도
세월과 뒤엉켜 강파르게 뒹군다
빛 가운데로 들어온 모든 존재들은
고된 자기 역을 마치고 나면
다시 어둠 속으로 쥐꼬리모양 퇴장한다
어둠은 사라지는 곳이 아니라 쉬는 곳이다
빛을 감싸고 있는 그의 어둠은
자궁 속처럼 물렁물렁하고 영양이 풍부하다
젖줄기를 닮은 그의 부드러운 빛은
무대에서처럼 캄캄한 하늘
위로부터 내려와 어둠 속으로 스며든다

 

《시와정신》 2012년 겨울호

 

 

 

 

 

마포종점

 

 

 

강 건너 공장에 영혼을 찌를 듯한 불빛,
푸른 새벽 실밥처럼 풀어져 돌아오곤 했다
희뿌연 백열등 아래서도 박쥐처럼 오그라드는 누나는
불도 켜지 않고 쓰러져 누웠다
간호보조원 시절부터 그랬다
언제나 실밥처럼 툭, 툭 끊어지는 삶,
도무지 모아지지 않는 삶을 끌어 모으려다
그만 확, 불사질러 버리고 싶은 때가 있었다
별수 없이 그냥 살아내야 했던 나날들이
자갈길에 경운기 지나가듯 갔다
오늘도 마포를 떠나지 못하고 용강동 식당에서
허드렛일이나 하고 있는 누나,
쭈글쭈글한 마음속에 추적추적 겨울비가 내린다
희미한 잿빛 욕망조차 놓아버린 나의 누나,
타박타박 인생의 종점을 향해 가고 있다
추억의 먼지 자욱한 유리창 너머로
강 건너 영등포의 불빛이 모과빛으로 아른거린다

 

비에 젖어 너도 섰고 갈 곳 없는 나도 섰다
강 건너 영등포의 불빛만 아련한데

 

《시에》 2012년 가을호

 

 

 

 

 

목로주점

 

 

 

젓가락 장단으로 사발을 두드리며
사발 깨지는 소리로 악을 쓰던 때가 있었다
이름만 들어도 가슴이 찌르르 해오는 집,
퀴퀴한 지하주점 녹두집이 있었다
빛을 피해 바퀴벌레같이 숨어들던 집,
우리의 흙바람 벽 같은 주모가 있었다
세상 어디에나 있는, 이모 같은

 

    월말이면 월급 타서 로프를 사고
    연말이면 적금 타서 낙타를 사자

 

이제는 호프집에서 술값을 서로 내겠다는 친구들이다
광고주 만나러 다니면서 간을 버리고도
여전히 원수 갚듯이 술을 마셔대는 친구가 있다
보약 먹어 가며 학원 강사 한다는
감옥에 두 번 갔다 와서는 속으로 골병 든 친구도 있다
검사시보하다 우울증으로 먼저 간 친구 기일에
북한산 둘레길 걷자는 친구들도 있다 내친 김에
큰맘 먹고 고비사막 가자는 친구들도 있다

 

    그래 그렇게 산엘 오르고
    그래 그렇게 사막엘 가자

 

《시와사상》 2013년 여름호

 

 

 

 

 

고흐처럼

 

 

 

    눈알이 쾡, 하게 말라 들어간 북어대가리 닮은 날들이다 우울뿐인 겨울날들이다 헐벗은 그의 영혼처럼 메마른 땅에다 엉성하게 삐뚜름히 꽂혀 있는 나무들, 하관이 빠져버려 생이 빈약한 얼굴이다 그림 한 장 못 팔아먹고 오랜 고생으로 겉늙어버린 얼굴이다 세상을 외면하듯, 구겨진 잿빛 모자를 눌러쓰고 있다 세상을 찌를 듯, 잿빛 턱수염이 바늘 모양 뻗쳐 있다 까칠까칠한 내면에 닿을 만큼 깊게 패인 주름살, 싸구려 의치로 벌써 노인이 되어버렸다 까마귀가 들판에다 게워내는 잿빛, 몸 안에서 마지막 타다 남은 재의 빛들을 끌어 모아 노랗게 격발시키는 눈빛이다 소라게처럼 집을 짓고 들어앉은, 여기저기 뚝, 뚝, 끊어진 의식의 실타래이다

 

《시와정신》 2012년 겨울호

 

 

 

   《문장웹진 8월호》

 

kakao

댓글남기기

  Subscribe  
Notify o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