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리 외 9편

 

 

꼬리

 

김왕노

 

 

 

    꼬리에 꼬리를 치다가 등이 굽고 허리가 휘었다. 쥐꼬리만 한 월급을 주는 세상에 꼬리에 꼬리를 쳐서 겨우 이르렀을 뿐이다.

 

    꼬리에 꼬리를 치더라도 꼬리를 치지 않는 세상에 이르지도 못한다. 꼬리치지 않는 세상에 이르렀다는 것이 도리어 비애의 거리에 도착했다는 역설이기도 하므로 우리는 먼 곳을 향해 꼬리에 꼬리를 칠 뿐이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꼬리에 꼬리를 쳐서 앞으로 나아간다. 꼬리치지 않아 죽은 정충처럼 어둠 위로 떠내려가는 비명을 들은 적이 있다. 허우적거리는 손을 본 적이 있다. 꼬리를 치므로 모든 에너지가 고갈되지만 꼬리에 꼬리를 치므로 재충전되는 푸른 에너지

 

    꼬리에 꼬리를 치면 먼 곳이 어디 있으랴.
    먼 사랑이 어디 있으랴.

 

    우리가 꼬리에 꼬리를 치고 있을 때만이 오직 세상이 우리 것이다.
    우주도 우리의 텃밭이다.

 

    그래서 우리가 꼬리 치는 것이 살아 있음을 자축하는 몸과 영혼의 노래라는 것을

 

    우리가 꼬리에 꼬리를 쳐가므로 먼 곳에서도 아이들이 하나 둘 태어난다.

 

 

 

 

 

내 2 시의 구름은

 

 

 

누가 또 바람에 쓰러진 고춧대를 세우고 있다.
누가 또 수취인 부재로 반송된 편지로 울고 있다.
내 2 시의 구름은 어디로 날아가는지
금속의 심장을 가진 새가 나르는 데
누가 또 이별의 흔적 위에서 소주잔을 하염없이 비우고 있다.
한 땀 한 땀 기웠던 사랑의 실밥이 터져버려 괴로운 사람이
공복의 쓰라린 속에서 낙타로 터벅이고 있다.
내 2 시의 구름은 잔털이 수없이 돋아난 텔레파시가
눈처럼 펄펄 휘날리는 하늘을 건너
어느 목장으로
아니면 어느 남미의 바닷가로 용연향처럼 떠밀려 가는지
내 2 시의 구름에는 가사가 투명한 노래가 실렸는데
내 2 시의 구름에는 처녀막을 가진 내 영혼이 누웠는데
아직도 구름 노예사냥꾼이 날뛰는지, 유린하는지
내 2 시의 구름을 찾다가
내 2 시의 구름 먼 곳에서 고꾸라지는 내 그림자들

 

 

 

 

 

동정을 버리러 가라, 아들아

 

 

 

 

동정을 버린다. 동정을 버리러 간다라는 말 얼마나 좋으냐.

 

아들아, 이렇게 봄밤이고 경칩이 울음 시끄러울 때는 동정을 버리기 좋은 밤이다.
네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을 가만히 불러 보면 봄밤을 따라 오는 네 사람을 만날 것이다.
혼전이니 혼전 이후이니 따지지 말고 아들아 너는 가장 귀하다고 여기는 동정을
네 사랑하는 사람의 가슴 모서리에 버려라. 네 버린 동정이 네 사랑하는 사람의 울음에
닿기도 하거나 네 사랑하는 사람의 가슴에 꽃잎처럼 피어나 달빛에 젖기도 할 테지.
그때 넌 한 여자의 남자가 되고 네 사랑하는 사람도 한 남자의 여자로 태어나는 거야.
그때서야 너는 한 여자의 첫 남자고 한 여자에게 너는 첫 남자가 되는 거야.
무인도처럼 외로웠던 내 안에 비로소 한 여자의 웃음 같은 발소리가 들리고
여리고 여리던 네 사람도 비로소 물푸레 같은 어깨를 가지고서
네 뜯겨진 날을 한 땀 한 땀 깁고 네 얼룩을 닦거나 구겨진 바지를 다리면서
몇 바가지 잔소리도 늘어놓겠지.
그때 너는 미안한 듯 허허 웃다가 네 사람의 손을 슬며시 잡아 이끌고
동정을 버리러 가듯 다시 네 사람의 가슴 기슭으로 끝없이 노 저어 저어가거라, 아들아
네 여자가 이끄는 대로 바보처럼 따라다니면서 네 여자의 건장한 종이 되어도
아들아, 그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란다. 네 사람을 자랑하는 팔푼이라도 허물이 아니다.
아들아, 지금은 보리 달짝지근한 냄새가 물결치고 보리밭에 넘어지기 쉬운 봄밤이다.
아들아, 망설이지 말고 동정을 버리러 가거라. 한 여자의 남자가 되러 가거라. 아들아

 

 

 

 

 

아줌마는 처녀의 미래

 

 

 

애초부터 아줌마는 처녀의 미래, 이건 처녀에게 폭력적인 것일까, 언어폭력일까. 내가 알던 처녀는 모두 아줌마로 갔다. 처녀가 알던 남자도 다 아저씨로 갔다. 하이힐 위에서 곡예하듯 가는 처녀도 아줌마라는 당당한 미래를 가졌다. 퍼질러 앉아 밥을 먹어도 아무도 나무라지 않는 아저씨를 재산목록에 넣고 다니는 아줌마, 곰탕을 보신탕을 끓여 주고 보채는 아줌마, 뭔가 아는 아줌마, 경제권을 손에 넣은 아줌마, 멀리서 봐도 겁이 나는 아줌마, 이제 아줌마는 권력의 상징, 그 안에서 사육되는 남자의 나날은 즐겁다고 비명을 질러야 한다. 비상금을 숨기다가 들켜야 한다. 피어싱을 했던 날을 접고 남자는 아줌마에게로 집결된다. 아줌마가 주는 얼차려를 받는다. 아줌마는 처녀의 미래란 말은 지독히 아름답고 권위적이다. 어쨌거나 아줌마는 세상 모든 처녀들의 미래, 퍼스트레이디

 

 

 

 

 

여자라는 베스트셀러

 

 

 

어쩌면 누가 이렇게 달필로 때로는 깊은 문장으로
이렇게 좋은 책 한 권 내놓았을까요.
순결한 물방울이 맺혀 있는 여자란 이 책
손가락으로 살짝 대어도 순결한 물방울이 엉겨 붙는데
달빛이니 물소리니 다 깃들어 있는 연두의 날이 있고
풀뿌리처럼 때로는 뽀독뽀독 잘 씻어낸 글이 있는

 

읽다가 지치면 가슴에 품고 잠들었다가
여자의 깊은 페이지 어디서 나는 꿩 울음소리 듣고는
다시 따뜻한 지층 같은 페이지로 들어가 물방울 화석 같은
사랑의 말을 도굴해 내기도 하는
이 세상에서 제본이 가장 잘 된 책, 읽고 읽어도
또 읽게 만드는 세상 모든 남자를 매료시킨 여자라는 베스트셀러

 

어느 장인 같은 작가가 저처럼 여자를 잘 쓰고
어느 편집장이 저렇게 기획해 이 세상에 내어놓았을까요.

 

남자의 지문이 여기저기 따뜻하게 들꽃처럼 남아 있는 여자
읽다 읽다가 눈이 침침하면 가끔은 외도하듯 새파란 하늘을 바라보라는
건장한 어깨로 기지개를 켜고 다시 읽어 달라는 여자라는 베스트셀러
싫증나 팽개쳤다가도 혹한의 깊은 밤을 건너다가
또 일어나 부스럭거리면서 읽어 힘을 얻는 여자라는 베스트셀러

 

 

 

 

 

우황

 

 

 

밤새 뼈골로 그대를 앓았다.

 

그대를 앓고 난 아침, 밤새 몇 그램의 우황이
내 몸에 생겼는지
왜 쓴 쓸개즙보다 더한 우황으로 오는 것이
사랑이라 믿어야 하는지

 

닫아건 창문을 열어젖힌다.
그리운 것들은 약속이나 한 듯
더 먼 곳으로 물러서 있는 아침

 

난 우황 든 소 한 마리로 운다.
언덕에 누운 우황 든 소 한 마리로도
종일 되새김질해야 할 그대라는 사랑

 

아침기운을 타고
이슬 반짝이는 풀밭까지 번져 가는
내 울음이 안쓰럽다.

 

하나 이 서러운 울음을 앞세워
풀밭까지 가야 한다.

 

풀잎을 뜯어야 그대를 더 앓는 푸른 힘이 생긴다.

 

 

 

 

 

옥수수의 이념을 가진 적 있다.

 

 

 

    1.

 

    그 사막에서 옥수수 싹이 돋아났다고 했다. 옥수수 뿌리는 죽은 자의 몸을 텃밭으로 자랐다고 했다. 슬픈 죽음을 세상에 알리려고 옥수수는 죽은 자의 주머니에서 죽음의 즙으로 자라났던 것이다. 죽은 자의 넋을 옥수수 줄기로 잎으로 밀어 올렸던 것이다.

 

 

    2.

 

    꽃 시절은 출가 중이니 옥수수나 키우자니까. 옥수수꽃도 가만히 쳐다보면 볼 만한 것 옥수수수염은 옹고집의 세월을, 꺾이지 않는 지조를 가르쳐 주는 것, 올곧게만 자르는 옥수수의 이념을 가지자니까. 척박한 땅에 뿌리박고 고구려의 무사처럼 잎을 휘두르는 옥수수의 검법을, 그 나란히 잎맥의 정신을 본받자니까. 굶주린 세월을 거뜬히 먹여 살리는 그 번식력을 그 생명력을 닮아서 우리도 척박한 세월 위에 척척 서보자니까.

 

 

    3.

 

    너무 가지런하게 빛나는 노란 사랑을 읽은 적 있다. 너무 가지런해 먹지 못하고 숙희가 내게 가져와 내밀던 옥수수, 그 노란 사랑, 그 노란 식욕, 알알이 까서 서로의 손에 놓아 주던 그 노란 알의 사랑, 노란 사랑의 노란 이념, 그 가지런한 정갈한 사랑, 어디서 이제는 홀로 익어 갈 노란 사랑, 서걱거리는 바람 속에서 홀로 노랗게 익어 가다가 퇴색할 사랑

 

 

    4.

 

    옥수수를 딸 때 옥수수 대에서 옥수수가 분리되며 내던 딱 소리가 우주를 울린다는 것을 알았다. 우주의 목탁소리라는 걸 알았다. 빈 식용유통 하나 들고 몰래 숨어들었던 전방의 옥수수 밭, 들키면 말뚝 박고 영창 간다지만 졸병에게 삶아 주려 숨어들었던 옥수수 밭, 별 초롱초롱해 더 무서웠던 밤, 오지리 고운 분이가 잠든 밤, 조심스레 옥수수를 돌리자 나던 딱 소리, 옥수수가 옥수수 대를 떠나며 내던 작별의 소리, 우주 끝까지 번져 가 여운마저 다 사라질 때까지 나는 숨죽였다. 지금도 내 가슴의 가장자리를 물들이고 있는 그 푸른 소리

 

 

    5.

 

    딱 옥수수 한 그루만 이 지구 위에 자라나게 해다오. 딱 한 사람만 지구에 있고 딱 한 송이 꽃만 피고, 딱 한 마리 새만 저녁을 지키고 그러면 어느 별에서 딱 한 사람이 찾아들고 서로의 짝을 먼별로부터 불러들여 주면 옥수수는 비로소 푸르고 푸르러져 옥수수만으로 연명하고 옥수수로만 노래하는 세월이 오게 해다오. 옥수수의 정부 옥수수의 당국만 있게 해다오. 옥수수의 달콤한 그늘만 세상에 가득 차게 해다오.  

 

 

 

 

 

비둘기와 살았던 날의 기억

 

 

 

    다행히 비둘기와 살았던 기억이 내게는 있어. 모든 천한 것의 발밑까지 내려앉아 평화의 상징이니 온순함이란 대명사를 버리고 누구는 우주의 장례를 외치고 종말의 날을 말하지만 낟알 하나에도 고개를 공순히 내리고 쪼아대던 비둘기와 비둘기 마음으로
    비가 오면 젖은 날개로 처마 밑에 앉아 구구대던 비둘기와 함께 산 날이 있어. 비둘기의 종종걸음으로 구절양장 같은 세월을 걸어간 적 있어. 키 낮은 팬지며 봄나물이며 관목 숲이며 별을 더 아득히 바라보는 것이 정이 많다는 것을, 더 아득한 곳으로 향하던 것도 결국은 날개 접고 돌아오는 곳이 비둘기 꿈 아름다운 지상 어디 거처라는 것
    나 비둘기와 함께 운 날도 있어. 날 저물고 모든 게 저물어 비둘기마저 부리 묻고 잠들 때까지 울음마저 잠들 때까지 짓무른 눈으로 운 적이 있어. 유통기한이 지난 것 같은 모습으로 비둘기가 선회하던 날 난 비둘기와 산 적이 있어. 그때 슬픔에 세 들어 살았던가. 웃음보다 한숨이 많아도 청춘의 비문 새기며 비둘기 깃털 후후 불며 산 적이 있어
    누구나 다 비둘기가 되어 구구구 대자고 다시 평화의 상징이나 되자고 그러자고 비둘기 앙가슴으로 비둘기와 살았던 날의 기억이 있어

 

 

 

 

 

리아스식 사랑

 

 

 

내 말이란 저 바다 위에 점점이 떠 있는 섬입니다. 그대에게 다가가지 못하는 섬입니다.
당신은 섬의 어법도 모르고 내 어법도 모르고 나도 당신의 어법을 모릅니다.
당신의 주소도 모릅니다. 내 마음도 저 바다 위에 뚝뚝 지는 동백 꽃잎 같은 것입니다.
당신은 동백의 어법도 모르고 동백 꽃잎을 싣고 먼 당신을 찾아갈 물결의 어법도 모릅니다.
동백 꽃잎을 대하고 속삭일 당신의 어법을 나도 모릅니다.
하나 당신의 어법에 익숙해질 때까지 나는 저 바다 위에 떠 있는 섬입니다.
수없이 몰아쳐 오는 태풍에 동백 꽃잎 같은 그리움만 뚝뚝 떨어뜨리며 내 어법에 당신이
익숙해질 때까지 저물지 않는 섬입니다. 비록 내가 당신을 향해 가진 사랑이란 들쑥날쑥한
리아스식 사랑이지만
우리의 모국어, 사랑의 어법에 우리의 입술이 물들 때까지 난 점점이 떠 있는 섬입니다.

 

 

 

 

 

지나가버리는 것은 정말 지나가버린다.

 

 

 

그것이 당신의 말이었을까. 유난히 많이 피던 청매화가
청매화 뚝뚝 질 때 청매화 그림자로 지던 광음의 그 그늘이
차마 당신이 다 읽어 주지 못하고 간 공산당 선언문이거나
내 불온을 살찌우려는 몇 줄의 비문

 

해독하지 못한 문장이 청매화로 뚝뚝 지고 그 꽃잎마저 삭아지고
당신이 가버리자 그제야 청매화 휘날리는 꽃잎 꽃잎이 당신의
푸른 別辭였음을
인연이 아니든 맞든 지나가버리는 것은 정말 지나가버린다는
생에서 우러난 당신의 말씀이라는 것을

 

청매화는 가지에서 피어나 가지에서 지지만 아득한 지층에서
청매화 꽃 잎 잎을 길어 올린 것은
돌 틈도 비집고 드는 긴 뿌리와 긴 뿌리 끝에서 분열하는
말간 생장점이었음을
청매화 꽃 시드는 이유도 지층을 향한 회귀임을

 

하므로 지나가버리는 것은 정말 지나가버린다. 수면을 스친 제비가
몇 방울 물의 힘으로 창공으로 솟구쳐 올라 멀어지듯이
끝내 연줄을 끊고 멀리로 멀어지는 연처럼
청매화 잎잎이 당신의 별사로 지금은 나를 가르치는 일획의 글
아직도 비린내 풍기는 지나가버리는 것은 정말 지나가버린다. 는
당신의 눈물 하르르 하르르 번진 말씀

 

지나가는 것은 정말 지나가므로 난 영원히 당신의 고삐를
녹음방초 내 마음의 언덕에 매지 못한다.
비바람 몰아쳐 가는 당신의 길이 험해도 구절양장 같아도
말구유 같은 내 곁으로 당신을 몰아세우지도 못한다.

 

지금도 당신의 別辭로 휘날리는 몇 잎 남았던 청매화 꽃잎
지나가버리는 것은 정말 지나가버린다 저 휘날리는 別辭,別辭

 

 

 

   《문장웹진 8월호》

 

kakao

댓글남기기

  Subscribe  
Notify o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