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의 바깥, 바깥의 소설

소설의 바깥, 바깥의 소설

 

강동호

 

예술은 스스로를 상실한 자, ‘나’라고 더 이상 말할 수 없는 자,

세계의 진리를 상실한 자, 추방에 처해진 자의 상황을 보여준다.

-모리스 블랑쇼-

 

1.

소설의 품격에 미달하기 때문이 아니라, ‘소설적인 것’의 과잉으로 소설이라 부르길 주저케 되는 소설들이 있다. 여기서 ‘소설적인 것’이란 소설을 구성하는 데 필요한 정형적인 요소들, 이른바 인물, 사건, 배경과 무관하다. 일전에 롤랑 바르트는 자신의 글쓰기를 소설과 구별하기 위해 ‘소설적인 것’이라고 지칭하며, 이를 “삶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것에 대해 메모하고 투자하며 관심을 보이는 방식”이라 정의한바 있다. 이 정의에 따르면 글쓴이의 사유와 욕망의 요체가 적당히 맞춤한 형식과 결합하여 하나의 이야기로 거듭날 때, 비로소 우리는 그 완성형의 글쓰기를 두고 소설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한편으로 소설적인 것은 “이야기에 의해 구조화될 수 없는 담론 양식”이 될 수도 있다는 점에서 ‘소설’ 그 자체와는 다소 다른 것이기도 하다. 가령, 작가의 사유와 욕망에 전대 소설의 의장을 씌우는 과정에서 파열음이 발생한다면, 바르트의 말처럼 소설적인 것을 소설로 변모시키는 것은 매우 어려워 보일 것이다. 이때 ‘소설적인 것’은 글쓰기의 주체로 하여금 정형화된 이야기의 외관을 벗어버리고, 소설의 자명한 형식들과 결별을 선언함으로써 완연히 새로운 존재 양태로 변신토록 촉구한다. 이처럼 소설에 대한 제도권의 담론이 쳐놓은 격자(格子)로부터 어떤 꿈틀거리는 정념(‘소설적인 것’)이 넘쳐나기 시작할 때, 그 텍스트 충동은 인물을 지우고, 사건으로부터 탈주하면서 이야기의 자명한 요소와도 결별을 시도할 수 있을 것이다.

 

2.

최근의 어떤 소설들은 더욱 근본적인 차원에서 소설의 경계 바깥에 있다는 인상을 준다. 다소간의 거침을 무릅쓰고 말하건대, 이들은 소설 안에서부터 소설의 바깥으로 그 영토를 확장시키는 데 복무하는, 일종의 전통적인 아방가르드의 경로를 걷지 않는다. 대신에 이들은 애초부터 소설의 완강한 역사 자체에 무관심한 채로, 소설의 바깥에서, 마치 독존(獨存)하는 무리들처럼 각개로 산개하는 형국을 취한다. 가령, 한유주, 김태용, 김유진 등이 보여주는 기묘한 방식의 글쓰기에 설혹 ‘소설’이라는 인장이 찍혀 있다고 할지라도, 어째서 이들을 ‘소설’이라 부를 수 있는가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 앞에서 우리는 어쩐지 난감해질 수밖에 없다.

이 난감함의 원인에 대해 해명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오해를 피하자는 의미에서 조금은 에둘러 가보자. 우선 이러한 텍스트 앞에서 우리가 난감한 이유를 텍스트들이 지니고 있는 형식적 새로움과 낯섦의 강렬도로 돌리는 것은 타당해 보이지 않는다. 형식적 새로움과 낯섦이란 어찌되었던 간에, 전대(前代) 소설에 대한 ‘파괴’로부터 발생하는 미학적 효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러한 대상들이 놓여 있는 자리는 소설의 바깥이 아니다. ‘과거’의 것을 상정한다는 것은 결국 이 돌연변이들이 계통사(系統史)의 관점에서 파악될 수 있는 존재 양태임을 뜻한다. 이는, 각각의 전위는 그 형태가 어떠하든 간에, 어쩔 수 없이 문학사라는 좌표축 위에서 특정 좌표값으로 존재해야하는, 일종의 사적(史的) 존재라는 사실을 환기한다. 바흐가 구축한 평균율의 세계 없이 쇤베르크의 12음계가 열어놓은 낯섦을 경험할 수 없듯, 기존 세계로부터 전해져온 인식론적, 미학적 기율이 부재하다면 새로움의 불꽃은 점화되지 않으며, 점화된다하더라도 불꽃으로 인식되지 못할 것이다. 발생기원이 돌연변이와 같을 수는 있으나 그 변이체가 생존하기 위해서는 이미 형성되어 있는 문학사의 환경과 어느 정도 내통할 필요가 있다는 것(비록 그것이 무의식적이라 하더라도)이 진화론이 문학사에 들려주는 교훈일 터이다.

이러한 파괴와 부정의 논리는 그간 문학사의 전위적 에너지를 설명하는 데 있어 얼마간 효과적이었다. 그런데 곧 문제가 발생했다. 이들을 하나같이 다름, 혹은 새로움의 미학으로 옹호하는 방식의 논리가 더 이상 작동하지 않게 된 것이다. 왜 그런가? 그것은 소설이 파괴 자체에만 골몰하게 되었을 때 발생할 수 있는 사회의식의 결여와 같은 모더니즘의 과오와도 연관되지만, 이는 어쩌면 부차적인 문제일지도 모른다. 파괴가 당면하는 더욱 근본적인 어려움은 “파괴를 양식화”(황지우)하는 작품들이 종국에는 맞이하게 될 어떤 파국과 같은 딜레마 때문이라 할 수 있다. 화성(和聲)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화성의 모든 원리를 벗어나던 쇤베르크가 역으로 꽉 짜인 12음계의 세계를 건설했듯이, 이른바 해방을 위한 파괴의 반복이 역으로 자기 자신을 규약 하는 구속복의 체계로 변신하는 순간이 도래한다. 우리가 모더니즘의 역사 안에서 ‘관례를 부정하는 것 자체가 관례인 괴물’(이장욱)의 탄생을 목도하고 경악하는 것도 그러한 사정과 무관하지 않다. 이러한 딜레마의 암약(暗躍)이 하이데거가 말했듯 시간성이 빚어낸 사태라면, 이 괴물을 폐기하는 것은 절대적으로 불가능할 것이다.

오늘의 소설적 전위가 감당해야 할 전투의 최전선은 바로 여기라 생각한다. 그러니까 이들이 싸움을 벌이는 장소는 차라리, 자신의 육체가 맞대고 있는 전 국면이라 할 법하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한다면 외부 대상일 뿐만 아니라, 내 존재가 차지하고 있는 공간까지도 싸움터에 포함시켜야 하니, 그것은 장소라기보다 자신의 육체까지도 포함한 세계 전체라 할 만하다. 그 전체와 싸우는 형세가 다음과 같다.

 

     나에게는 과거가 없다. 거짓말이다. 한 줄의 폭력, 한 줄의 평화, 나는 한 줄의 평화, 나는 한 줄의 과거로 스크랩된다. 거짓말이다. 거짓말이다. 거짓말이다.

    거짓말이다. 나는 입을 열지 못한다. 내 입은 독으로 가득 차 있다. 말하는 순간 온 몸으로 퍼지리라. 독일어 수업 시간, 왜 그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죠?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은행 창구 앞, 여권 말고 다른 신분증은 없으세요?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강당 앞에서, 지금 몇 신지 아세요?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한유주, 「그리고 음악」, 『달로』, p. 111)

 

 

이것은 언어에 대한 총체적 부정이며, 소설에 대한 전면적 거부이다. 왜 그런가? 말한다는 것, 그리고 쓴다는 것은 소설의 가장 원시적인 존재 양태에 해당하니 이를 믿지 못한다는 것(“거짓말이다”)은, 나아가 “입을 열지 못한다”는 것은 바로 소설 자체에 대한 회의와 맞닿아 있다. 이러한 소설들은 더욱 근원적인 회의, 이른바 말한다는 사실, 쓴다는 사실 자체에 골몰한다. 소설이 결국 언어를 상대로, 나아가 소설의 존재 형식을 대상으로 싸움을 걸겠다는 뜻이니. 이러한 소설들은 단순히 쓰기의 차원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쓰기에 대한 쓰기, 즉 메타적 소설로 건너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른바 “의심하는 자신까지도 의심”(한유주,「베를린 · 북극 · 꿈」, 『달로』, p. 128)하는 것. 이것이 이들 소설이 내장하고 있는 제1의 정언 명령이다.

지금 내가 쓰고 있다는 것, 나아가 쓴다는 것 자체를 회의하는 소설이니, 엄밀히 말해 이러한 소설이 시작되는 지점은 소설의 영토 안쪽이라기보다는, 그것의 바깥이다. 그런데 그것은 소설의 차원에서 바깥이지, 언어의 관점에서 보자면 여전히 안쪽에 해당한다. 다시 말해 그 싸움의 대상인 언어를 쓰러뜨릴 무기 역시 언어여야만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언어가 쓴다는 것의 몸체를 이루는 살점이니, 그 투쟁은 나의 존재 근거를 판돈으로 걸고 감행될 수밖에 없다. 소설 자체를 근본적으로 회의하는 “언어에 대한 혐오증”(「편백나무 숲 밖으로」, 김태용 )에 들려, 자신들의 욕망을 부정해야 하는, 그리하여 스스로의 육체마저도 게워내야 하는 운명을 사는 이러한 텍스트들은 블랑쇼의 말처럼 소설의 영역으로부터 “추방에 처해진”,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자의 상황을 보여준다.

 

 

3.

이 생존을 건 투쟁에 대해 “차라리, 글쓰기”(김형중)라고 이름붙이는 것이 적당할 지도 모른다. 이러한 글쓰기(ecriture)들을 향해 새로움의 이데올로기에 복무하고 있다고 비판하는 비평의 타박은 어쩐지 성말라 보인다. 중요한 것은 그들의 이 낯선 글쓰기를 추동하는 내적 필연성(‘소설적인 것’)이 무엇이며, 이 죽음 충동에 가까운 글쓰기의 모터에 의해서도 소설의 생존이 과연 가능한가, 혹 가능하다면 그 생존 양태가 어떻게 달라지는가를 따져 보는 일이다. 그러니 소설 양식에 대한 선험적인 판단 기율에 의거하여 이들을 검열하는 일은 부차적인 문제처럼 보인다. 그보다는 다음과 같은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 보다 생산적일 것이다.

혹시 이러한 글쓰기가 현재형의 언어로 교직되는 선형적 이야기를 파괴하고, 그것을 파괴하는 자신의 발화마저 파괴하다가, 소설이 완전한 무의미의 공동(空洞)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은 아닌가? 그 결과 소설이 현실로부터 완전히 퇴각하고 일종의 사적 언어(private language)라는 자기 멸몰의 상태에 이르게 되어, 스스로를 완전히 소통체계의 바깥으로 내몰면 어찌하나? 이것은 곧 소설의 자살이다. ‘관례를 어기는 관례라는 괴물’을 스스로 잉태하고 있다는 것을 자각하여, 그 괴물을 죽이기 위해 그 괴물과 함께 텍스트 자신을 죽음의 진창으로 투신하는 자폐증적 글쓰기이니 말이다. 정말 그런가?

프로이트에 따르면 인간은 외부세계로부터 스스로를 격리시킴으로써 긴장의 최저수준(tension zero) 즉, 니르바나(nirvana)에 이르고자 하는 죽음충동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라캉은 이것을 약간 변형된 원리로 비튼 바 있는데, 그가 보기에 죽음충동에는 열반원칙을 넘어서는 무엇, 혹은 그 원칙의 밑바탕을 이루는 더욱 내밀한, 어떤 충동의 응결체가 있다. 자신을 죽음으로 내모는 반복강박(compulsion to repeat)의 파괴 행위 속에서도, 그 긴장의 최저 수준에서 우리는 다시 이 영도(零度)의 지대로부터 빗겨나가는 어떤 마이너스 삶을 발견한다는 것이다. 죽음의 밑바닥에서 발견되는 이 음각화된 에너지는 무엇인가? 한마디로 말해,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는, 죽음으로 투신하는 과정에서 다시 발견되는 잔여적 충동으로서의 삶이 그것이다. 욕망의 최하층으로 하락했을 때, 우리는 다시 죽음을 넘어선 모종의 충동적 기제에 몸 달을 수밖에 없다. 이 죽음 안에서 발견되는 죽음 바깥의 지대에서, 죽음을 향하는 주체는 삶을 끝내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자신을 버리고 미래의 새로운 자신을 맞이하는 것이다. 이러한 존재의 가소성(plasticity, 말라부)으로 인해 자신을 죽음으로 내모는 파괴적 충동의 극단에 이르렀을 때조차, 기묘하게도 새로운 삶으로의 활로가 열린다. 이를 소설의 영역 바깥에서 자신을 부정의 구렁텅이로 몰아가는 글쓰기의 존재 양태와 견줘볼 수 있을 것이다.

자기 자신의 존재 근거까지도 말소하려는 의지를 불태우는 오늘날의 자기 파괴적 글쓰기는 그 파괴에 대한 의지가 아무리 강렬하다고 해도, 그것이 결국 글쓰기인 한, 해체의 끝자락에서 어떤 얼룩(trace; 흔적)을 지워내지 못한다. 이 게워내지 못하는 생의 마지막 불순물은 무엇일까?

 

 

4.

    쓰는 것, 쓰고 있는 것, 그것만이 중요하죠. 나를 봐요. 이게 나예요. 내가 나를 바라보지 않는다면 누가 나를 볼 수 있을까요?

(한유주, 「되살아나다」,『얼음의 책』, p. 99)

 

 

소설에 대한 소설, 쓰기에 대한 쓰기가 아무리 자기를 향한 파괴적 충동으로 가득하다고 해도 “쓰는 것, 쓰고 있는 것”만은 어떤 제거할 수 없는 내핵처럼 잔존한다. 마치 ‘나는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는 것을 알 뿐이다.’라고 말한 소크라테스의 형식 논리가 처해 있는 수행적 오류처럼, 이 자기 부정의 극단에 이른 메타 소설은 결코 걸러낼 수 없는 어떤 텍스트-충동으로 인해 스스로를 실패의 순간으로 몰아간다.

이처럼, 소설이 무엇인가를 묻는 소설들은 언제나 이미 자기 자신과의 관계에서 어떤 모순과 같은 역설에 처할 수밖에 없다. 이는 허무주의인가? 그렇지 않을 것이다. 이 역설의 소용돌이로부터 탈출하는 길이 없으므로, 이들은 거꾸로 이 역설을 텍스트-삶으로 체현함으로써 글쓰기 행위 자체에 어떤 내부적 분열을 일으키는 길을 택할 수 있다. 그리하여 이 애매한 정체성의 글쓰기는 온전하게 소설이라 부를 수도 없고 또 소설이 아니라고 할 수도 없는 모호한 지경, 즉 소설의 안도 바깥도 아닌 곳에 처할 수밖에 없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허무주의의 늪에 쉽사리 침몰하지 않는 것은 그 글쓰기의 경계에서, “내가 나를 바라보지 않는다면 누가 나를 볼 수 있을까”라는 말에 내장되어 있는 작가의 어떤 가열한 의지가 더욱 오롯이 재점화되기 때문이다. 이 파괴의 끝자락에서 발견되는 의지(“쓰는 것, 쓰고 있는 것, 그것만이 중요하죠”)가 사실상 이들의 소설적 충동을 지탱하는 내핵이기에 그들은 끝없이 스스로를 지워도 끝내 지워지지 않는 글쓰기의 흔적을 백지 위에 남기게 된다.

해체(deconstruction)의 정신을 명제의 형태로 직접 발설하지 않고 그것의 국면을 “징후로써”(김현) 실행에 옮기는 방법은 이렇게 가까스로, 실천 가능하다. 그것은 소통이 불가능하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그 스스로를 ‘지옥인 타자’(사르트르)로 변모시키고, 소통 불가능성의 기미가 되어 그 미약한 기미로 소통을 겨냥한다. 이렇게 소설의 바깥에서 시작된 글쓰기는 자기 파괴의 극단에서 삶으로의 활로를 뚫어내는 글쓰기, 말하자면 ‘파괴를 존재태로 내장’(정과리)하고 자기 멸몰을 끝없이 연기시키는 문학만의 삶, 즉 글쓰기를 직접 사는 글쓰기이다. 소설의 바깥, 바깥의 소설이다. 《문장웹진 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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