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과 만년 사이에서

청춘과 만년 사이에서

 

김언

 

 

90년대 후반에서 2000년대 초반에 걸쳐 등단. 나이는 마흔 전후. 적게는 한 권에서 많게는 세 권의 시집 출간. 2010년을 지나가는 내 또래 시인들의 대체적인 이력이다. 달리 말하면 등단 10년 안팎의 경력에 더는 청년이라고 부르기 곤란한 나이에 들어선 시인들. 그럼에도 몇몇을 제외하고는 여전히 시단에서 젊은 시인으로 분류되는 시인들. 젊은 시인이 아니라면 그럼 중견 시인인가? 꼭 그렇다고도 할 수 없는 시인들. 아직은 어중간한 시력과 나이를 지나가고 있는 시인들. 내 또래의 가깝고도 먼 친구들이자 동료들. 그들이 공유하는 경험은 개인마다 조금씩 편차가 있겠지만, 크게 두 가지다.

우선은 첫 시집을 내기가 꽤 힘들었던 시기를 보냈다는 점이고, 또 하나는 미래파 논쟁이라는 뜻하지 않은 사태에 어떤 식으로든 감정적인 격랑을 겪었다는 점이다. 이 두 문제에 대해서는 그리고 둘 사이의 역학관계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로 할 말이 많겠지만, 여기서는 말을 줄이자. 불과 10년 안쪽의 과거를 들추어내는 것보다 더 중요한 지점은 그들의 미래에 있기 때문이다.

각각의 시적 성취와 무관하게 그들 앞에는 이제까지 써온 시들보다 훨씬 더 많은 시들이 기다리고 있다. 도중에 포기하지 않는다면 그리고 시인은 무엇보다 시로써 자신의 존재를 증명해야 된다는 단순한 사실을 망각하지 않는다면, 그들 앞에 기다리고 있는 것은 언제나 작품이고 미지의 그 작품들이 층층이 두께를 쌓아갈 때 젊은 시절 10년간 썼던 작품 수를 추월하지 못하겠는가. 문제는 앞으로 남아 있는 그 긴 시간을(각자에게 남아 있는 시간이 얼마나 될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어떻게 시와 더불어 살 수 있는가일 것이다. 그가 시인이라면 죽을 때까지 시인으로 살고 싶다면, 어떤 식으로든 작품 생산이 끊이지 않아야 하며 생의 마지막까지도 작품 생산에 젖줄을 댈 수 있는 어떤 원천이 고갈되지 않고 남아 있어야 한다.

어떤 원천은 물론 시의 원천이다. 젊은 시절 시의 원천은 비교적 단순하다. 그걸 표현하는 단어가 무엇이든 서로 엇비슷한 느낌을 공유하는 단어들로 묶을 수 있기 때문이다. 여러 단어가 한데 엉켜서 거대한 파도로 일렁이는 곳, 폭풍 같은 날씨가 지배하는 장소이자 스스로도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이 빚어내는 공간. 그러한 공간이 점유하는 시간은 그러나 길지 않다. 길어야 몇 년간 지속할 수 있는 고통과 희열의 폭발적인 동거 기간을 지나면서 한 시인은 비로소 청춘을 졸업한다. 졸업과 동시에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하는 시인도 있고, 용케도 살아남아서 비루한 세월을 견뎌야 하는 시인도 있다.

용케도 살아남았다지만 대부분의 시인이 후자의 운명을 따른다. 무엇을 써도 시가 되는 시절을 지나고서도 계속 시를 붙들고 있는 자의 얼굴이 뒤집어쓰는 운명. 점점 더 먹고사는 일에 치중할 수밖에 없는 그 얼굴에는 어느 한 가지로 집약할 수 없는 복잡한 날씨가 더께처럼 내려앉아서 굳는다. 하루가 다르게 늙어가는 얼굴과 더불어 하루가 다르게 굳어가는 시의 원천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자신의 시와 시에 대한 수많은 사유가 자신도 모르게 석고상처럼 굳어간다는 느낌. 혹은 정반대로 연기처럼 흩어지고 있다는 상실감. 어느 날 문득 시 쓰는 방법을 잊어버린 것 같은 자괴감은 누구를 막론하고 찾아올 수 있다. 그러지 않을 자신이 있는 시인이 얼마나 될까?

시는 한때의 성공이 눈부시면 눈부실수록 그다음 시의 실패를 혹독하게 예고하며, 거의 예외 없이 증명한다. 이번이 성공하면 다음은 실패한다는 징크스. 저 저주와도 같은 예언에서 자신만큼은 예외이고 싶은 욕망이 없는 시인이 또 얼마나 될까? 다른 사람은 몰라도 자기만큼은 영원불멸 청춘의 장르로서 시를 유지하고 싶은 열망은 또 얼마나 강할까?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가 못하니 폭발적으로 쏟아지는 시는 한때이고 그런 시들로 똘똘 뭉친 시집은 단발성 사건으로 그치는 경우가 훨씬 더 많다. 그럼에도 계속 시를 써야 하는 의무감과 계속 쓰고 싶은 열망 사이에서 번민하는 시간이 청춘을 넘어서는 시인에게는 통과의례처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이쯤에서 시를 접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접지 않고 계속 쓴다면 또 어떤 시를 써야 하나, ‘시는 청춘의 장르’라는 저 무시무시한 저주를 극복할 히든카드를 과연 어디서 찾아야 하나, 이런 고민들 앞에 손쉬운 답변이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니다. 참고할 만한 사례가 많은 것도 아니다.

아쉽게도 한국 시인들에게는 만년의 작품으로 신화가 된 사례가 매우 드물다. 당연히 만년을 준비하는 시인들이 참고할 만한 선례도 드물 수밖에 없다. 젊은 시절보다 만년에 더 풍성한 꽃을 피운 사례는 물론이고 젊은 시절만큼의 성과를 유지하는 경우도 드물기 때문에 만년의 문학 자체가 머나먼 미답지나 불모지로 남아 있는 것이다. 반면에 외국 시인들에게는 신화로 남은 만년작에 대한 기억이 우리보다는 풍부하게 남아 있다. 따라서 만년의 문학 또한 막연한 미답지나 불모지라기보다 오히려 뚜렷한 가능성의 세계로서 그들 앞에 열려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불안 대신 확신을 심어주는 곳에 그들의 만년작이 기다리고 있는 셈이다.

그런 확신을 심어주는 세계가 한국 시인들에게는 유독 청춘의 신화에만 집중되어 있는 것 같다. 멀리 이상에서부터 가까이 기형도에 이르기까지, 한국 시인들의 기억을 지배하는 신화적인 시인들의 작품 대부분이 초기작에 머물러 있다는 뜻이다. 아울러 청춘의 신화는 훨씬 더 지엽적인 곳까지 파고드는데, 가령 등단작이나 등단 시절의 무용담조차 신화처럼 계속 재생산되어 후대 시인들에게 전승되고 있는 것이다(해마다 연말이면 등장하는 ‘누구누구 과거 신춘문예 몇 관왕’ ‘누구누구의 신춘문예 도전기’ 같은 기사가 그런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다). 덕분에 한국의 시인들은 등단에서부터 한두 권의 시집을 낼 때까지는 여러모로 참고할 시인도 많고, 믿고 의지할 신화도 충분히 보유하고 있는 듯하다. 문제는 이후의 시 작업에서 좌표로 삼을 만한 모델이 나이가 들어갈수록 적어지고 협소해지고 희박해진다는 사실이다.

물론 외국 시인을 통해서도 만년작의 모델을 얼마든지 세울 수는 있다. 그러나 다른 언어 풍토에서 증명된 신화와 같은 언어공동체에서 증명되는 신화는 아무래도 피부에 와 닿는 정도가 다르고 그것이 끼치는 영향력도 사뭇 다를 것이다. 바로 이곳 한국시단에서 증명되는 만년작의 신화가 지금보다 훨씬 더 풍성하기를 바라는 이유도 이 때문이리라.

만년작의 신화는 한국시단이 지속적으로 개척해내가야 할 미개지 중 하나다. 선례가 드물면 드물수록 그곳은 새롭게 도전해야 하는 영역이며, 이제 막 젊은 시인 딱지를 떼기 시작하는 이들이 새삼스럽게 통과해야 하는 시험대이기도 하다. 아직은 거대한 늪과도 같은 그곳을 어떤 식으로든 돌파하지 않는다면 그들 역시 지지부진한 미래를 되풀이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석고상처럼 굳어가는, 아니 연기처럼 흩어져가는 시의 원천을 어떻게든 긍정하면서 새로운 계기로 맞이하려는 지난한 몸부림의 희망적인 결과물을 다음 시에서 어렴풋이 느껴본다.

 

   인간들과 다른 원소들의 도움으로

   시간은 비교적 원활하게 조각상과 관련된 임무를 수행해나갔다.

   먼저 코를 도려내고, 나중에는 은밀한 부위를,

   계속해서 손가락과 발가락을 삭제해나갔다,

   세월이 흘러가면서 어깨를 차례로 없애더니,

   오른쪽 허벅지와 왼쪽 허벅지,

   등과 허리, 머리와 엉덩이를 제거했다,

   떨어져 나간 부분은 조각조각 잘게 부서져

   돌멩이가 되고, 자갈이 되고, 모래가 됐다.

 

   (중략)

 

   앞서 언급한 그 조각상에서 간신히 살아남은 건 토르소뿐이다.

   몸뚱이는 근육을 잔뜩 긴장시키며 애써 숨을 참고 있다.

   지금 이 순간

   나머지 부위들이 잃어버린

   모든 매력과 권위를

   자신에게로

   되돌려놓아야 하기에.

 

 

   토르소는 성공했다,

   마침내 성공했다.

   성공을 거두며, 황홀경에 빠진다,

   황홀경에 빠지며, 존재를 지속한다―

 

 

   이 시점에서 시간은 찬사를 받을 자격이 충분하다.

   일찌감치 하던 일을 멈추었을 뿐만 아니라

   일부는 나중으로 미루었기에.

 

  – 「그리스 조각상」(『끝과 시작』,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시선집, 최성은 옮김, 문학과지성사, 2007)

 

시간은 무정하게 흘러간다. 그리고 모조리 담아간다. 영원한 것 같은 시의 순간도, 무궁무진해보이던 시의 원천도, 한때는 탄탄했던 시인의 몸과 정신까지도. 그럼에도 우리에게 시 쓰는 시간이 계속해서 남아 있는 이유, 아니 남아 있어야 하는 이유, 그게 무얼까를 곰곰이 곱씹어보게 만드는 시. 저 시에 대해 참고삼아 밝혀둘 것이다. 폴란드 시인 쉼보르스카가 우리 나이로 83세가 되던 해(2005년) 출간한 시집에 바로 저 시가 들어 있다는 사실.  《문장웹진 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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