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집 『가을여자』 중에서

소설집 『가을여자』 중에서

 

오정희



  단편 <병아리> 중에서… 
  단편 <사십세> 중에서…

 

 

 

 

 

1. 단편소설 「병아리」 중에서

 

설핏 초저녁잠이 들었던 그가 아홉시 텔레비전 뉴스를 보기 위해 방을 나왔을 때 거실의 불은 꺼져 있고 대신 거실과 트인 주방의 불이 켜져 있었다. 아내와 두 아이가 앉아 있는 식탁주위의 불빛이 밝아 한없이 호젓하고 정다운 분위기를 만들고 있었다.

불빛 때문에 잠들지 못한 병아리들은 여전히 삐약대고 그중 기운찬 놈은 푸드득 상자에서 뛰어나와 함부로 돌아다니다가 아이들의 발을 쪼아대기도 하여 그때마다 아이들은 간지럽다고 발을 옴추리며 웃었다.

그 한없이 정답고 평화로운 광경이 느닷없이 무섬증과 쓸쓸함을 안겨준 이유를 그는 알지 못했다.

그들은 어둠 속에 홀로 서 있는 그의 존재 따위는 잊은 듯했다. 아니, 애초부터 그들속에 자신은 끼어 있지 않은 것인지도 몰랐다. 아이들의 옷 손질을 하는 아내와, 숙제와 그림그리기를 할 뿐인 아이들이 왜 꼭 자신을 따돌리고 비밀한 모의를 한다고 보여지는 건지, 멀리 느껴지는 건지, 너희들에게 이같은 안락함과 평화로움을 주기 위해 내 삶은 얼마나 혹사당하는 것인지.

“병아리, 베란다에 내놔라. 시끄럽고, 또 여기저기 함부로 똥싸는 게 안보여?”

그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베란다에는 쥐가 다니는데—”

“비오면 어떡해요? 병아리는 추우면 그냥 죽어버린대요”

아내와 아이들이 각각 조그맣게 항의했으나 그는 거친 손놀림으로 병아리를 상자에 주워담아 베란다에 내놓고 문을 닫았다. 봄이라고는 해도 밤이면 한결 낮아지는 기온에 추운 듯 털을 부스스 부풀린 병아리들이 유리창에 주둥이를 비비며 안으로 들어오고자 기를 쓰고 퍼덕거렸다.

초저녁잠을 어설프게 자두었던 탓인가. 그는 한밤중에 잠이 깼다. 담배라도 한대 피울까 하여 거실로 나온 그는 또다시 약하게 삐삐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아이들 방에서 나는 소리였다.

‘이 녀석들이 기어이 내 말을 어기고—’

문을 열고 불을 켜자, 이불을 걷어차고 잠들어있는 아이들과 방문 곁에 바짝 대어놓은 라면상자, 그리고 병아리들이 한눈에 들어왔다. 필시 아빠가 잠자리에서 일어나기 전에 재빨리 베란다로 내놓아야 한다는 조바심으로 낸 작은 꾀이리라.

손가락을 빨고 자는 작은아이와 앞니빠진 입을 반쯤 벌리고 자는 큰아이를 오랫동안 바라보던 그는 차 던진 이불을 고쳐 덮어주고는 가만히 문을 닫고 나왔다.

그가 늘상 어떤 종류의 억울함으로 돌이켜보곤 하던 인생, 고독과 초조감과 좌절감으로 감내해야 하는 중년이 결코 자신만의 삶의 짐이 아님을, 무구하게 자고 있는 아이들 역시 얼마나 고독하게 자기의 세계, 인생의 짐을 지고 있는가를 깨달았던 것이다.

 

 

〈작가의 말〉

 

이 짧은 소설은 내 지난 삶 중 어느날의 풍경일 수도 있겠다. 성공적이라고도 실패라고도 말할 수 없는 소시민적 평범한 삶을 영위해나가면서도 모종의 막연한 억울함과 분노, 피로감에 억눌려 있는 중년가장이 어느 가정에서나 일상적으로 일어나게 마련인 사소한 사건과 상황을 접하면서 어른이나 어린아이들이나 나름대로의 버거운 짐을 지고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는 내용이다. 나는 이 작품을 통해, 우리 모두 나름의 아픔과 분노 슬픔을 지니고 있지만 그것이 또한 몸과 마음을 따뜻하게 덥히는 밑불같은 연민과 사랑의 근원임을 말하고 싶었다.

   

 

 

 

 

 

 

2. 단편소설 「사십세」 중에서

 

부모님은 그녀에게 ‘김활란 박사’를 본받으라는 바람에서 ‘활란’ 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셨다.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라는 의미가 담겨 있었다. ‘김활란박사’는 부모세대의, 선각자로서 당당히 선 여성의 표상이었다. 활란자신은 어떠했던가. 능력과 분수 이상의 욕망과 욕심에 괴로워하지 않고 자족하며 살아왔지만 먼 세월 저쪽 푸르렀던 날들, 그녀에게도 자신의 이름으로 무엇인가가 되겠다는 꿈이 있었다. 결혼 혼수로 남들과는 달리 화장대 대신 책상을 해오고 ‘자신의 가치에 대한 믿음’ ‘행복에 대한 우리의 권리’ ‘우리는 인생에서 최상의 것을 누릴 자격이 있다는 자존심’ 따위의 글들을 열심히 옮겨적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것들은 아이들을 낳고 기르며 가파르게 살아가는 생활 속에서 흐르는 물살에 모난 바위가 닳아지듯 삭아들었다. 살아온 세월은 욕망과 능력의 구분, 다시 태어난다 해도 이러한 형태로 살 수밖에 없으리라는 자신의 기질, 성질, 욕망의 크기를 알만큼 철들게 했다.

‘참으로 위대한 것은 소박한 것에 있다는 것을 알게 하시고—’ 이것은 그녀가 벽에 써붙인 맥아더 기도문의 한귀절이었다. 인생의 갈피갈피 얼마나 느닷없고 예상할 수 없는 복병이 도사리고 있다가 앞을 막고 뒤통수를 치는가를 알기에, 인생에서 모든 것을 얻었다는 만족감은 없었지만 감사하고 겸손하려 애썼다. ‘나는 죽어 원귀는 안될 거야’ 라고 우스개소리를 할 만큼 스스로 원과 한은 없다고 생각해왔다.

그러나 이러한 나날들이 인생의 전부일까. 내가 정말 살고 싶었던 것이 이러한 생이었던가. 자신에게 있어 이미 미래란 끝없이 뻗어 있는 길이 아니었다. 벌써 백년 전 버지니아 울프는 여자가 자신의 일을 하려면 자기만의 방과 연수입 오백파운드는 있어야 한다고 역설했었다. 왜 까마득히 잊고 있던 그 말이 생각나는 걸까. 자기의 방은커녕 혼수로 해온 책상마저도 아이들차지가 된지 오래지 않았나.

“짐을 마저 싸지 않고 뭘해? 밤새울 작정인가?”

남편의 핀잔에 활란이 문득 말했다.

“나도 내 방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식구들 다 나가면 방 세 개, 서른평이 모두 당신차지 아닌가?”

물론 그랬다. 식구들이 서둘러 나가고 나면 방 셋이 텅 빈다. 그러나 그것은 치우고 쓸고 닦아야 하는 일거리로서의 장소이지 생각하고 어지르고 꿈꿀 수 있는 그녀만의 방은 아니었다.

“잔금받은 거야. 잘 간수하라구”

남편이 양복 주머니에서 봉투를 꺼내 건넸다. 집을 팔고 받은 잔금으로 내일아침, 새로 이사가는 집의 주인에게 건네줘야할 돈이었다. 오천만원. 큰돈 관리는 남편이 하는 터라 활란으로서는 만져보기 어려운 거금이었다. 봉투를 열어 확인하고 핸드백에 넣으려다가 내일 입을 옷의 속주머니 깊이 넣었다. 자신의 건망증이 두려워 다시 꺼냈다. 천만원짜리 수표 다섯장을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불현듯 한 생각이 떠올라 후루룩 가슴이 떨렸다. 이 돈을 가지고 뒤돌아보지 않고 이 자리에서 그대로 걸어나간다면? 통속적인 비유로 아마 운명이 바뀌게 될 테지. 흐르는 물살처럼 떠밀려온 듯한 생활에서 벗어나 자의적으로 자신의 운명을 바꾸어 새로운 생을 살아본다는 것은 얼마나 통쾌한 일일까.

물론 그 돈을 가지고 집을 뛰쳐나가는 일이야 천만 없으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활란은 단지 그 돈을 둘 곳이 마땅찮아 망설이는 양 찬장서랍에 넣었다가 주머니에 넣었다가 다시 꺼내 떨리는 손으로 세어보곤 했다. 

 

 

〈작가의 말〉

 

인생의 반환점이라 할 수 있는 40세를 맞이한 주부의 마음안에서 이는 파문을 짧은 소설로 형상화해보았다. 어느날 문득 더 이상 젊지 않은 자신의 나이를 자각할 때, 주변 사람의 죽음을 겪을 때 그런대로 자족하며 살아왔더라도 누구나 삶 속에 입벌리고 있는 어두운 심연, 크레바스와 맞닥뜨리며 당혹감을 느끼게 된다. 가지 않은 길에 대한 미련, 잃어버린 가능성에 대한 아쉬움이 희미한 얼룩처럼 남아 삶을 구차하게도 하지만 그것은 또한 ‘너그러움’이라거나 산다는 일 전반에 대한 이해를 가능케하는 소중한 미덕이 되기도 하는 것 같다.  《문장웹진 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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