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자, 우주애(宇宙愛)를 품는 여성주의

 

이경자, 우주애(宇宙愛)를 품는 여성주의

 

 

 

고명철

 

 

 

선생님께

선생님과 한 동네에서 이웃처럼 살다가 제 집안 사정으로 이사를 가고 나니 예전처럼 만날 기회가 흔치 않습니다. 사실, 선생님과는 동네 이웃으로서 만나기 앞서 작가와 문학청년의 관계로서 만났습니다. 문청 시절, 문학에 신열(身熱)을 앓으면서 걸신들린 것인 양 손에 잡히는 작품들은 마구잡이 읽어 젖혔는데, ‘작가 이경자’의 작품도 제 독서 목록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솔직히 고백하건대, 문청 시절의 저는 아주 쉬운 문예 이론은 고사하고 어떤 작가들이 한국 문학의 주요 흐름을 형성하고 있는지 문외한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귀동냥으로 슬쩍 주워듣긴 했으되, 그것들보다는 눈앞에 차려진 숱한 작품들의 진수성찬을 향한 포식 욕망에 사로잡혀 있었으니까요. 그래서 ‘작가 이경자’가 페미니즘의 문제의식을 예리하게 보여 주는 작가라는 평가는 한참 후에야 알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문청 시절을 보낸 저는 문학 비평가로서 ‘작가 이경자’의 작품을 접하게 되면서, ‘작가 이경자’를 꼬리표처럼 따라다녔던 저간의 평가, 말하자면 여성주의 시각에 대한 문학적 논의들을 곰곰 성찰해 보았습니다. 선생님이 대중에게 가장 널리 알려진  연작소설 『절반의 실패』가 거둔 문학적 성취는, ‘이경자’ 하면 곧 ‘여성주의’를 연결시키는, 그리하여 한국 문학에서 ‘이경자=여성주의’라는 인식이 자연스레 자리하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이러한 인식은 한 작가의 풍요로운 창작 세계를 성급히 규정짓게 됨으로써 작가의 새로운 창작의 영토를 향한 열망을 은연중 억압할 수도 있다고 봅니다. 그런가 하면, 작가의 창작적 개성과 창작의 특장(特長)을 부각시킴으로써 오히려 다른 작가들보다 뚜렷한 문학적 성취를 내고 있다는 점에서 부정적인 것만은 아닐 터입니다. 그동안 선생님의 문학 세계를 통시적으로 살펴보건대, 저는 후자 쪽이 선생님의 문학에 해당된 것으로 보입니다.

1973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단편 「확인」이 당선된 이후 지금까지 줄곧 선생님은 작가로서 사회적 역할을 충실히 수행해 왔습니다. 저는 언젠가 다른 지면에서 선생님의 소설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전반적 얘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의 소설을 읽어 보고 그를 대해 본 사람이라면 공감하듯이, 소설가 이경자의 품은 넓고 깊다. 그와 얘기를 나누고 있을 때면, 세상을 바라보는 그의 삶의 진면목을 언뜻언뜻 훔쳐볼 때가 있다. 그는 어떤 사안에 대해 명철한 문제의식을 갖고 있되, 부정해야 할 대상을 가차 없이 배제하는 게 아니라 그 대상의 ‘차이’를 인정하고, 더 넓은 사랑으로 품어 안음으로써 부정한 대상이 저절로 정화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하게 한다. ‘차이’를 인정하고 사랑을 하는 그의 삶으로부터 나는 소설가를 떠나 평범한 한 인간으로서 이경자의 삶의 매혹에 흠뻑 젖어들었음을 고백해야겠다.(고명철, 「이경자, 넓고 깊은 품을 가진 ‘소설가―무당’」, 『삶과 꿈』, 2006년 4월호)

 

그렇습니다. 바로 저는 선생님의 문학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것은 ‘차이’를 인정하는 사랑의 아름다움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선생님의 여성주의는 여기에 젖줄을 대고 있다고 저는 평소 생각해 왔습니다. 선생님은 한국 사회의 가부장 중심주의 풍토에서 온갖 성적 모멸과 희생을 감내해야 하는 사회적 약자로서 여성이 갖는 문제의식을 결코 회피하지 않되, 남성과 대결 구도를 통해 가부장으로서 남성이 소유해 온 사회적 권력을 쟁취하려는 ‘투쟁적 여성주의’를 극복하고자 하였습니다. 감히 말하건대, 선생님의 문학에 대한 여성주의적 평가에서 간과해서 안 되는 것은 이 점이 아닐까요.

그래선데요. 저는 선생님의 작품들 중 장편소설 『사랑과 상처』(실천문학사, 1998)를 각별히 눈여겨보곤 합니다. 여러 작품들이 있지만, 하필 제 비평적 촉수는 『사랑과 상처』에 예민한 반응을 보이거든요. 저는 이 작품이야말로 선생님의 문학 세계를 관류하는 그 어떤 무엇의 비의성(秘儀性)이 오롯이 간직돼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박완서 선생님은 이 작품의 발문에서 “이 소설은 이경자로서는 필생의 작업”이라고 언급했듯, 저 역시 작가 이경자의 문학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꼭 『사랑과 상처』를 만날 것을 주변 사람들에게 적극 권장하니까요.

저는 『사랑과 상처』를 읽을 때마다 한국 사회에서 남성으로 살고 있다는 것 자체에 대한 모종의 자괴감으로 인해 부끄러움, 슬픔, 처연함 등이 복잡하게 뒤엉킨 감정에 노출됩니다. 아무리 한국 사회가 가부장 중심주의로 이루어졌다고 하지만, 이렇게 막무가내로 심지어 맹목적으로 남근주의에 포박돼 있다는 사실은 섬뜩하면서도 슬프기 그지없는 일입니다. 『사랑과 상처』의 작중 화자인 ‘나’는 여성으로서 일제강점기와 해방 공간, 그리고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여성의 삶을 살아가는데, 아들에 대한 집착이 보여 주는 한국 사회의 남근주의 혹은 가부장주의가 여성의 삶을 얼마나 옥죄고 있는지를 여실히 증명해 보이고 있습니다. 소설에 나오는 “쓸데없는 지즈바 간나들”(1권, 63쪽), “밥만 축내는 저런 지즈바 간난 나가 뒈져야 한다”(1권, 46쪽), “귀신은 뭘 먹길래 저런 년어 간나를 안 잡아가느냐”(1권, 46쪽) 등 여성 폄하의 언어에 묻어 있는, 남존여비의 이데올로기는 한국 사회의 인간에 대한 존엄성과 민주주의적 가치를 성찰하게 합니다. 무엇보다 심각한 것은 가부장의 권력을 소유한 남성의 시각에 의한 것보다 남존여비의 온갖 차별적 피해를 입은 여성의 시각에 의해 여성 폄하의 언어와 행동이 거침없이 보여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리하여 『사랑과 상처』가 다른 여성주의 시각을 보여 주는 작품과 뚜렷이 구별되는 점이 있다면, 여성의 주체적 시각에 의해 여성‘들’ 사이 혹은 여성의 내면에 똬리를 틀고 있는 남존여비 이데올로기에 대한 내부 고발자의 시선을 취하고 있습니다. 가령, ‘나’의 어머니는 하나밖에 없는 아들의 죽음을 두고 그 죽음의 원인을 온통 딸들의 존재 탓으로 돌려 버리는 대목이 있는데요.

 

“저 찢어 죽여도 성이 차지 않을 저년! 저년어 간나가 드세빠져서 지 오래비 잡아먹었지! 저년을 잡어 저승사자한테 보내야 해!”

우리의 슬픔, 박탈감, 공포 이런 것들은 그 나이의 우리로선 감당할 수 없는 것이었다. 우리는 살고 죽는 것, 자기 자신에 대한 본능적인 애착…… 그런 성정을 마비, 혹은 고사(枯死)당한 채, 그저 물체처럼 있어야 했다. 사흘장 내내. 고아들처럼. 가난한 집 아이가 부잣집 잔치 마당을 비굴하게 기웃거리듯, 우리는 오빠의 장례 사흘 동안 그렇게 지냈던 것이다. 하지만 아무도 우리들의 이런 참혹한 버림받음에 신경을 써 주지 못했다. 우리 자신도 우리의 처지를 비관하지 않았다. 우리는 이미 ‘비관 그 자체’였으므로, 비관의 감정을 따로 가질 수 없었다.(1권, 51―52쪽)

 

아들의 죽음은 일제강점기의 시대적 고통이 낳은 역사적 비극에 그 본질적 원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의 어머니는 딸들 때문이라는 억지스런 원인을 고집합니다. 그러니 딸들은 ‘비관 그 자체’일 수밖에요. 완고한 여성주의자들은 이 부분을 못마땅해 할 게 분명합니다. 심지어 작가에게 여성주의 의식이 철저하지 못하다며 맹렬한 비난을 퍼부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저는 오히려 완고한 여성주의자들의 이러한 태도는 겉으로 볼 때 래디컬한 여성주의처럼 보이지만, 인간의 삶을 깊이 있게 성찰하지 못하는 성급한 관념적 인식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습니다. 오랜 가부장 전통의 습속에서 살아온 여인들에게 느닷없이 그 전통을 전복시키는 혁명적 언행을 요구하는 것처럼 비현실적인 일은 없지 않을까요. 오랜 습속일수록 그것이 일상의 관습으로 고착화된 것일수록 그것을 혁신하기 위해서는 그만큼의 고통이 동반되어야 하고, 그 과정에서 감당하기 어려운 상처를 감내해야 하는 게 중요할 겁니다. 그것은 우리들이 얼마나 가부장 중심주의의 억압적 폐단과 남근 중심주의의 차별적 고통 속에서 서로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혔는지에 관한 정직한 대면에 있습니다. 부끄럽다고 치졸하다고 외면해서는 안 됩니다. 그럴 수밖에 없지 않았느냐고 상황 논리로 봉합해서도 안 됩니다. 그렇다고 단숨에 부정한 것을 척결해야 한다는, 선악 이분법의 논리로 급히 문제를 해결해서도 안 됩니다. 그래서 선생님은 『사랑과 상처』에서 우리들의 추한 모습들을 마주하도록 합니다. 상처를 입고, 상처를 입히고, 그러면서 상처가 치유되는 이 모든 과정을 통해 뭇 여성이 여성으로서의 자기 세계를 온전히 정립하는 아름다움에 주목하고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선생님!

저는 『사랑과 상처』 속 여성들이 생명을 잉태하고 출산하는 장면들로부터 다시 한 번 여성이란 존재에 대해 숙고하는 계기를 가져 보았습니다. 한국전쟁의 와중에서 제 한 목숨도 부지 못하는 상황에서 아이를 힘겹게 낳는 어미의 그 강한 생의 욕망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죽음의 기운이 도처에 도사리고 있는, 살아 있는 모든 것들에 대한 살의(殺意)와 살욕(殺慾)이 넘실대는 공포의 현실 속에서 삶의 핏덩어리를 낳고 그 생을 보호하는 어미의 순정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요.

문득, 선생님의 에세이 한 대목이 떠오릅니다.

 

사막은 어쩌면 오래된 자궁일지 몰라. 엄마에겐 언제나 사막이 그렇게 느껴졌어. 중국 돈황에서 우르무치로 가는 길의 고비 사막에서도 그랬어. 나를 태어나게 한 어머니 자궁이 세월에 부대껴 지치고 늙어 할머니 자궁이 된 것 같은 모습. 사막은 그 오래된 자궁처럼 이제 더 이상 생명을 품을 수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는 이미 딸을 낳고 그 딸이 어머니가 되어 다시 아이를 낳게 한 탄생의 시원이 담겨 있을 것만 같았어.

그 끊이지 않는 시간과 탄생의 순환 고리로, 할머니가 어머니를 낳고 어머니가 딸을 낳고 딸이 어머니에게로 돌아가고 어머니가 할머니에게로 돌아가서 다시 딸을 낳을지 몰라. 사막은 푸른 초원이었고 그 안에 사막을 품고 있을 거야.

이렇게 생명은 분리된 존재로서가 아니라 유구한 자궁의 역사와 연결된 하나이며 전체야. 보이지 않았으나 결코 없는 것이 아닌, 생명과 소멸이 한 몸인 사막을 바라보면서 어머니와 나와 내 딸로 이어지는 생명의 탯줄, 그 경이로움에 속으로 목 놓아 울었다. 동행만 없었다면 엄마는 사막에 내려, 그 한가운데 두 발 뻗고 앉아 필경 한바탕 울었을 거야. 자궁 속에서 숨 쉬고 있는, 아직 태어나지 않은 생명들과의 교감 때문에. 그 생명을 품고 낳고 죽음의 형태로 다시 품은 자연의 놀라운 생산의 힘 때문에. 세상에 그것만큼 순정한 것이 있을까? 우리의 생명은 모두 그 순정한 대지의 어머니 자궁으로부터 왔을 거야.(이경자, 『딸아, 너는 절반의 실패도 하지 마라』, 향연, 2007, 13―14쪽)

 

딸에게 보내는 편지체로 씌어진 이 글은 세상의 뭇 여성들, 아니 모든 인간들에게 타전하는 생명의 존귀함에 대한 전언으로 다가왔습니다. 우주의 고요한 적막만이 존재하는 사막, 일체의 생명이 스러진 듯한 사막, 생의 왕성한 기운보다 소멸의 기운이 가득 찬 사막, 하지만 선생님은 이 소멸과 절멸의 사막을 싱그러운 생명을 잉태하는 자궁으로 뒤집어 파악하고 있습니다. 선생님께 사막은 우주의 존재들을 잉태하고 길러 내며 그 죽음을 자연스레 받아들이고, 또다시 생명으로 이어지는 우주의 순환소(循環所)로서 성속일여(聖俗一如)가 구현되는 공간인 셈이죠. 때문에 “생명을 품고 낳고 죽음의 형태로 다시 품은 자연의 놀라운 생산의 힘”을 소유한 여성들은 “순정한 대지”이며, 이는 “어머니의 자궁”이라는 선생님의 통찰은 완고한 여성주의자들의 여성주의가 얼마나 관념적이면서 생경한 것인지를 반성하게 합니다. 또한 선생님은 남성들에게 “여자를 생각할 때, 당신, 남자의 고향인 어머니의 자궁을 생각해 주세요. 주눅 든 자궁, 황폐한 자궁, 천대받고 학대받는 자궁으로부터 당신이 태어난다……면 당신은 어떨까요.”(이경자, 『남자를 묻는다』, 랜덤하우스중앙, 2004, 68쪽)라는 문제의식을 던지면서, 가부장 중심주의에 젖어 있는 남성으로 하여금 여성에 대한 근원적 인식을 제대로 할 것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선생님!

최근 한국 문학의 문학적 영토는 과거보다 훨씬 넓어졌으되, 문학적 지성의 빈곤은 갈수록 더해만 간다고 합니다. 문학 인접의 다양한 예술 장르의 폭증 속에서 문학적 상상력은 어딘지 모르게 그 순정성을 잃은 지 오래며, 문학적 지성이 안겨다 주는 미적 윤리와 미적 감동은 사회와 공명(共鳴)하는 정도를 현저히 잃고 있습니다. 지금과 같은 때일수록 선생님과 같은 문학 선배와 스승들의 지혜를 적극적으로 섭취해야 하지 않을까요. 늘, 그렇듯이, 그 자리에서 우주애(宇宙愛)를 향한 선생님의 또 다른 작품을 간절히 기대해 봅니다. 《문장웹진 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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