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뜯어보는 재미로 사는 작가

 

사람 뜯어보는 재미로 사는 작가

 

 

 

강기희

 

 

 

소설가를 직업으로 살아가는 나. 본업과 부업이 따로 없는 전업 작가로 살아간다. 문학이 위기라는 말이 벌써 몇 해 전부터 전설처럼 떠돌고 있지만 아직 문학은 죽지 않았고, 나 또한 굶어 죽지 않고 소설 쓰는 일에 매달려 있다. 역시 전업으로 살아가는 어느 시인이나 소설가도 쌀이 없어 굶어 죽었다는 소문을 들은 바 없다. 지금도 문학을 공부하는 학생들이 강의실로 향하고 작가와 시인이 1년에도 몇 백 명씩 탄생하고 있는 상황을 본다면 문학은 위기가 아니라 여전히 청춘인 것이다.

하지만 대한민국에서 작가로 살아간다는 일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졸부로의 수직 상승은커녕 하루를 겨우 연명하는 서민들의 생활 풍습도 따라 하지 못하는 소설가의 일상과 형편없는 경제적 빈곤. 이쯤 되면 아직 살아 있다는 단 하나의 이유만으로도 대견한 노릇이 아닐 수 없다.

그런 나에게도 문학에 대한 광대한 꿈은 있으며, 문학의 사생활이 있고, 나만의 樂취미가 있다. 고상한 취미라고 할 수는 없지만 나는 사람을 뜯어보는 것을 즐겨한다. 아니 즐겨하는 것이 아니라 버릇처럼 사람을 뜯어보고 살점을 발겨 보면서 근육의 움직임이나 피돌기의 속도나 핏줄의 굵기를 가늠해 본다.

작품 소재로 여성과 황금빛을 즐겨 사용하는 화가 구스타프 클림트는 ‘여성만큼 좋은 그림 소재가 없다’라고 말했다. 그의 그림에 등장하는 인물은 거의가 여성이다. 여성만큼 다양한 이미지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사물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지난 3월 한국을 찾은 영화 <퐁네프의 연인들>의 주인공인 줄리엣 비노쉬는 사람의 움직임에 관심이 많다고 했다. 직업이 영화배우라 당연한 표현이라 할 수 있지만 그녀가 이번에 한국을 방문한 것은 무용수로서 공연을 하기 위해서였다. 무용가로서의 인간에 대한 탐구는 영화배우로 살아갈 때와는 확연히 다르다는 것이다.

‘친구가 요즘 어떻게 지내냐고 물었을 때 나는 두 손을 들어 주었다’라는 백수들의 패러디 광고 카피처럼 돈벌이라고는 눈곱만큼도 되지 않는 소설가로서 살아가는 나. 그런 나는 인간을 탐구하는 일이 직업이기에 남성과 여성을 가리지 않는다. 더불어 어린소녀의 눈에서 떨어지는 눈물의 성분을 놓치지 않으며, 주름진 노파의 손과 얼굴 그리고 깊은 눈매로 먼 하늘을 바라보는 쓸쓸한 풍경을 무심하게 넘겨 버리지 않는다.

나는 내 시야에 들어오는 사람들의 일상이 만들어 내는 모든 이미지를 집요하게 관찰하는 것도 부족해 그들의 일상을 분해하고 조립하는 일까지 한다. 그러하니 다시 내 삶을 걱정해 보면 내 취미는 樂취미가 아니라 고약한 惡취미에 가깝다. 좀 더 이야기하자면 사람을 뜯어보기만 하는 게 아니라 손가락으로 간을 보거나 질겅질겅 씹어 보며 맛을 보면서 희죽거리기도 하니 이 일은 악취미를 넘어 어쩌면 인면수심에 가까운 일이기도 하다.

생각해 보면 사람을 뜯어보는 내 버릇은 소설을 쓰기 훨씬 전부터 있었다. 그것은 아마 산촌 오지 마을에서 태어난 내가 극장을 드나들며 넓은 세상이 궁금해지기 시작한 후부터 혹은 도시에서 전학 온 하얀 피부를 가진 여자아이를 알고 난 후부터였을 것이다. 그때부터 내 생각은 ‘나 말고 다른 사람은 어떤 생각을 하며 살아갈까. 사람으로부터 받는 상처는 대체 왜 생겨날까. 사랑의 감정은 어떻게 발생되는 것이며 웨이브 머리를 한 멋진 여성을 보면 몸이 혼곤하게 풀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등등에 머물렀다. 초등학교 4학년 무렵이었다. 그때 나는 인간이 만들어 내는 모든 이미지가 궁금했다. 여성의 몸이 궁금했고, 뽀얗던 솜털이 거뭇하게 변해 가는 것도 신기했다.

나이가 들어 도시에 살 때엔 모든 것이 신기하기만 했다. 주변을 스치며 지나치는 여인의 옷에서 풍겨지던 향수가 어디에서 만들어졌고, 그것을 뿌렸을 때 나타나는 반응은 또 어떠한지도 궁금했다. 궁금한 것이 많아지면서 생각도 깊어졌다. 세월이 흘러 사람에게서 나는 냄새만 맡아도 그 사람이 하는 일이나 생애가 짐작되기 시작했다. 그와 더불어 사람의 목소리만 들어도 그의 삶이 짐작되었고, 그 짐작이 맞아떨어지는 것 또한 신기하면서도 무서웠다. 무당처럼 변해 가는 소설가의 삶도 편치는 않았다. 사람을 꿰뚫어 보는 것만큼 불행한 일도 없었다. 눈을 감아도 짐작되어지는 것들이 불편한 적도 많았다.

결국 나는 몇 해 전 오랜 도시 생활을 마감하고 말았다. 단순해지지 못하는 도시의 삶에 피로를 느낀 것이다. 지친 삶의 피로회복제는 자연이었다. 몇 십 년 만에 돌아온 자연은 도시 생활에 물들어 있던 지친 영혼을 말없이 받아 주었다. 자동차 소음 대신 새들의 지저귐이 들려왔다. 노래방의 기계음 대신 계곡물 흐르는 소리가 귓전에 머물렀다. 밤이면 휘황한 네온 대신 별빛이 방으로 스며들었고, 풀벌레 소리는 침실까지 들어왔다.

그때부터 인간을 해부하던 내 취미는 자연을 탐구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사는 곳이 길을 나서지 않으면 사람 구경을 하지 못하는 오지 마을이니 당연한 변화일 수도 있었다. 요즘의 나는 아침에 일어나면 새들과 대화를 시도하고, 나무와 바람과 햇살과 인사를 나눈다. 내 아직 내공이 부족하여 새와 나무가 말하는 것을 해독하지 못하고 있지만, 내 표정이 온순하게 변하는 것을 보면 사람과 대화를 하는 것보다는 행복한 일인 것만은 틀림없는 것 같다.

그럼에도 나는 얄궂게도 가끔은 도시가 그리워지기도 한다. 사람 구경하며 뜯어보는 게 즐거운 탓이다. 그 일은 버리지 못한 습관처럼 되살아나 지하철을 타도 길을 걷다가도 술잔을 비워 내면서도 내 곁을 지나치는 이들을 유심히 관찰하고 그 정보를 저장해 둔다.

그런 후 나는 그늘에 앉아 나무가 지닌 세포와 사람의 세포가 어떤 차이가 있을까, 비교하고 있으니 아무리 생각해도 내 취미는 樂취미가 아니라 惡취미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문장웹진 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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