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을 달래는 순서

김경미

 

 고통을 달래는 순서

 이러고 있는,

 고요에 바치네

 생화 

 

 

 

고통을 달래는 순서

 

 

토란잎과 연잎은 종이 한장 차이다 토련(土蓮)이라고도 한다

 

큰 도화지에 갈매기와 기러기를 그린다 역시 거기서 거기다

 

누워서 구름의 면전에 유리창을 대고 침을 뱉어도 보고 침으로 닦아도 본다

 

약국과 제과점 가서 포도잼과 붉은 요오드딩크를 사다가 반씩 섞어 목이나 겨드랑이에 바른다

 

저녁 해 회색삭발 시작할 때 함께 머리카락에 가위를 대거나 한송이 꽃을 꽂는다 미친 쑥부쟁이나 엉겅퀴

 

가로등 스위치를 찾아 죄다 한줌씩 불빛 낮춰버린다

 

바다에게 가서 강 얘기 하고 강에 가서 기차 얘기 한다

 

뒤져보면 모래 끼얹은 날 더 많았다 순서란 없다

 

견딘다

 

 

 

이러고 있는,

 

 

비가 자운영꽃을 알아보게 한 날이다 젖은 머리칼이

뜨거운 이마를 알아보게 한 날이다 지나가던 유치원 꼬

마가 엄마한테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냐 엄마, 그런다

염소처럼 풀쩍 놀라서 나는 늘 이러고 있는데 이게 아닌데

하는 밤마다 흰 소금염전처럼 잠이 오지 않는데 날마다

무릎에서 딱딱 겁에 질린 이빨 부딪는 소리가 나는데

낙엽이 그리움을 알아보게 한 날이다 가슴이 못질을 알

아본 날이다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닌데 일생에 처음

청보라색 자운영을 알아보았는데

 

내일은 정녕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닌데

 

 

 

고요에 바치네

 

 

내가 어리석을 때 어리석은 세상 불러들인다는 것

이제 알겠습니다

 

누추하지 않으려 자꾸 꽃 본다 꽃 본다 우겼었습니다

 

그대라는 쇠동전의 요철 닳아

없어진지 오래건만

 

라일락 지는 소리들 반원의 무덤이던 아침부터

대웅전 앞마당 지나는 승려들 가사먹빛 다 잦아들던 저녁,

한여름의 생선 리어카와 봄의 깨진 형광등과

부러진 검정 우산 젖어 종일 접히지 않던 검은 눈동자까지

 

다 내가 불러들인 세상임을

 

그 세상의 가장 큰 안간힘,

물 흔들지 않고

아침 낯과 저녁 발 씻는 일임을

 

이제야 알겠습니다

 

 

 

생화

 

 

생생한 꽃들일수록 슬쩍 한 귀퉁이를

손톱으로 상처내본다, 피 흘리는지 본다

가짜를 사랑하긴

싫다 어디든 손톱을 대본다

 

햇빛들 목련꽃만큼씩 떨어지는 날 당신이

손톱 열 개

똑똑 발톱 열 개마저 깎아준다

가끔씩 입속 혀로 거친 발톱결 적셔주면서

 

신에게 사과했다

 

 

 

시.낭송:김경미

출전:김경미시집『고통을 달래는 순서』,창비,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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