훔침과 감춤

훔침과 감춤

― 조연호

 

 

 

한유주

 

 

 

촛농에 손가락을 담가 지문을 얻는다. 이것을 보지 마. 구겨진 촛농의 표면에 단 한 줄의 등고선이 새겨져 있다. 그 위로 내가 잃어버린 단어들을 누군가가 흰 글씨로 새겨놓았다. 나의 단어들은 역사를 갖지 못한다. 나의 단어들은 기원을 갖지 못한다. 갈라파고스 군도의 거북이들은 등껍질에 지진과 화산분출의 흔적이 새겨져 있었다. 그것을 본 적이 없다. 오늘의 하늘을 봐. 멸종된 단어들이 자전과 공전을 혼동하고 있다. 달의 궤적을 따라. 별들의 항로가 우리의 미래를 설득하는 시간, 내가 기르던 모든 식물들은 일시에 쥐고 있던 칼을 내려놓았다. 나는 미명과 박명이라는 단어들의 뜻을 이해하지 못한다. 부드러운 거짓말들이 그림자를 배양하고 있다. 희미한. (이 형용사를 나는 오늘도 훔쳤다. 그리고 돌려주지 않을 것이다.) 내가 기르던 모든 식물들이 손톱을 길게 길러냈다. 그 곡선들이 이루는 날카로운 각도를 봐. 듣는 자로 태어나 보는 자가 된 우리들. 나날이 퇴화하는 청력으로 인해 후천적인 불구의 몸을 얻게 된 우리들. 혈액을 휘젓던 약한 전류(이 표현을 나는 오늘도 훔쳤다.)가 모조리 방전되던 나날. 붉은 색으로 응고된 시간과 하얗게 굳어진 눈동자들이 무언가 지치고 거친 광경을 나란히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니 하늘의 오늘을 봐. 태양이 되지 못한 행성들이 하나씩 둘씩 사라지고 있다. 나타나고 있다. 나는 밀교의 주문을 하나도 알지 못한다. 의식이 집전되는 방식을 하나도 알지 못한다. 혀를 가두는 일에는 폐쇄라는 단어보다 봉쇄라는 단어가 어울린다. 그렇다고 생각하지 않니. 내가 기르던 식물들이 마침내 사물들이 되었다. 사물들이 다시 사물들로 되살아나고 있다. 나의 문어체 말투는 누구로부터 비롯된 것일까. 내 의식에는 갈라파고스 군도가 들어와 있지 않았지만 낯선 지명이 주는 울림은 언제나 듣기 좋았다. 그러므로 거북이들이 벗어두고 간 등껍질들로 시간의 기와를 얹고 의식의 의식을 거행하던 나날. 처음으로 말장난을 배우던 때를 생각해봐. 이마에 무의미라고 눌러 새기던 시간을 생각해봐. 동물의 씨앗을 의태(擬態)하던 날, 갓 나온 것들의 얼굴들마다 검은 혈관이 드러났고 나는 그것들의 이마에 아름다운 무늬가 새겨진 반창고를 겹겹이 붙여주었다.

 

 

달의 뒷면에는 바다가 고여 있지 않았다. 바다는 고이는 액체가 아니었으므로 아무 것도 떠오르지 않는. 체류와 표류 사이의 어느 지점에서 익사자들은 아무 장소로도 흘러가지 않는다. 가을에는 사과묘목을 심고 그 열매에는 선악 대신 선약이라는 이름을. 그 열매에는 선약 대신 섬약이라는 이름을. 발목까지 올라오는 장화를 신고 납빛 얼굴로 언 바다 위를 걸어가기를. 죽은 사물들의 종을 구분하지 않기를. 죽은 사람들의 사물들을 일별하지 않기를. 언 바다 밑으로 죽은 자들의 부릅뜬 눈들을 흘려보내기를. 다음 생에는 멸종된 것으로 태어나야지. 고의는 아니었지만 결국 모든 것은 같은 방법으로 자손을 퍼트렸다. 지난 주말에 아버지는 비로소 고아가 되었고 그날부터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내가 멸종이라는 단어를 몇 번이나 사용하는지 혹은 유용하는지 세어주지 않겠니. 우리는 늘 엇박자로만 걸어다녔고 우리의 발자국들은 저마다 뺨이라도 맞은 것처럼 모로 기울어져 있었다. 나는 직업란마다 흑백 사진사라는 단어를 적어놓았고 종군기자들처럼 야전상의 안주머니에 소형 카메라를 넣어 다녔다. 혀를 가두는 일은 오늘의 사건사고에 기록되지 않았고 내가 타인의 혀를 어떻게 이용하는지 변용하는지 남용하는지는 결코 발설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의인(擬人)이 되돌아오던 날, 시간은 제가 가진 구두끈을 모조리 풀어놓았고 그 후로 모든 이야기는 시작되는 법이 없었다. 가을이 지나면 겨울이 온다는 믿기 힘든 소문처럼 시간은 무성하게 자라났다. 오늘은 모래 위에서 어제는 모래 밑에서. 단수와 복수. 단수와 복수. 감춤이라는 단어는 세상에서 가장 멋진 말인 것 같았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니.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도 좋았다. 모든 고유명사들은 대를 물려가며 끊임없이 반복되었고 결국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겨울외투를 한 벌 얻었다면 다음에는 상아 단추들을 얻어내야지. 단추로 옷을 여밀 수 없다면 혹한은 반드시 누군가의 몫. 물음표. 나의 식물들은 육식을 즐겼지만 단 한 번도 포식자의 위치를 차지한 적 없었고 그러므로 육지의 운명은 고단했던 것. 쉼표. 검은 종이에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저녁의 계보를 적고 우리가 저지르게 될 죄목의 세보를 작성해야지. 무시무시한. 집 밖으로 향하는 계단들은 건반과는 같지 않아서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았고 검거나 희지도 않았다. 잿빛 계단을 두 칸씩 뛰어내려 속지와 속인에 의한 처벌을 동시에 피해가던 날. 우리는 모두 어미의 다리 사이에서 태어났으므로 우리는 모두 같은 태생을 지녔다던 말. 다리 밑에서 주워온. 어슴푸레한 저녁이면 노을을 이루는 먼지의 무게를 가늠하며 소요하고 싶었다. 겨울이 되기 전 꽃들은 단명했고 나는 여전히 이명과 유명의 뜻을 알지 못했다. 내가 알지 못하는 단어들이 벌려놓은 보폭만큼 나는 슬프고도 기뻤다. 그리고 슬프거나 기쁘지 않았다. 그러나 들리는 것을 훔치고 보이는 것을 감추고 싶었다. 그러므로 지난 주말에 내가 기르던 개는 청력을 모두 상실했다. 그리하여 개는 더 이상 짖지 않는다. 마침표.

드디어 겨울 구름이 지나간다. 나는 아무 것도 예감하지 않았다.

기이한.《문장 웹진/2009년 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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