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풍지 외

박두규

 

 

 문풍지

 세월이 간다

 문득

 이파리 하나만 달고

 

 

문풍지

 

 

 

폭풍한설에 풍경소리마저 얼어붙은 겨울 산사에서

온 밤을 통째로 우는 건 문풍지뿐이다.

문의 틈새를 살고 있으나

사실은 안으로 들어가고 싶은 것이다.

솜이불이 깔린 따뜻한 아랫목에 몸을 누이고

바람 타는 생을 마감하고 싶은 것이다.

하지만 바람이 멈추고 울음을 그쳐도

문풍지는 문풍지

안으로 들어 갈 수가 없다.

차라리 바람에 온몸을 치떠는 것이

몸부림치며 우는 것이, 살아있는 이승의 시간인 것을.

안이어서도 안 되고 밖이어서도 안 되는

안과 밖의 경계를 살아야 하는 문풍지.

 

 

 

세월이 간다

 

 

 

내 서성이던 젊은 날의 배경은 늘 해가 저물고 쉽게 어둠에 젖었다. 그리고 그곳에는 강가의 느릅나무 한 그루와 그 눈물과 눈물을 정제하던 바람소리가 있었다. 세월은 그 어딘가에 책갈피처럼 끼워져 말라갔다.

 

아직도 내 안에는 정처 없는 어둠들이 가득하고 그 어둠을 떠도는 꽃그늘 하나 있다. 세월을 칭칭 감고 끝내 함께 가는 꽃도 없는 꽃그늘이다. 꽃도 잎도 다 날려보낸 텅 빈 나무 한 그루가 만들어내는 꽃그늘의 기억이다.

 

그렇게 이루지 못한 사랑 하나가 그림자처럼 떠돌고, 귓가에는 늘 어둠에 젖은 바람소리가 가득 고였다. 어느 험한 도량에 들어야 이 절망 하나가 떨어져나갈까. 사랑은 더디게라도 오기는 오는 것일까.

 

세월은 가고 눈 덮인 벌판에 서서 노래를 부른다. 이제는 아무도 아무 것도 보낼 것 없는 메마른 별리의 노래를 부른다. 상심도 없이 넋도 없이 한 치의 그리움도 없이 막무가내로 세월이 간다.

 

 

 

문득

 

 

 

문득, 시베리아를 떠나 호주까지 날아가야 한다는

고니나 흑두루미 같은 새들의 안부가 궁금하다.

도심의 거리에서 자판기 커피를 마시며

하루 종일 걷고 있는 거리의 군중들을 보며

저 사람들은 언제쯤이나

시베리아를 떠나 호주로 갈 것인가가 궁금하다.

늘 다투고 질시하던 눈빛도 없이

질서 있고 평화롭게 날아오르는 저들의 모습을 상상하며

문득, 나는 내 안의 새 한 마리가 궁금해졌다.

나를 두고 이미 혼자서 날아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반대편에서 늘 나를 불편하게 하던

지금 자판기 커피를 마시고 있는 저 녀석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가로수에서 떨어지던 이파리들의 미세한 떨림조차

내 안의 모든 실핏줄로 번져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문득, 걷잡을 수 없는 파문이 일고

목젖을 적시던 평화로운 커피가 역류하더니

생활하수처럼 썩은 수십 년 묵은 평화를 쏟아냈다.

다 토했다 싶을 즈음 내 안의 어느 어두운 구석에서

찌꺼기처럼 남아 있던 새 한 마리가

젖은 날개를 털었다.

 

 

 

이파리 하나만 달고

 

 

 

언젠가 나는 반드시

잔가지 다 잘라내고

몸통 하나로만 남겠다.

뿌리도 한 가닥만 땅에 박고

이파리도 달랑 하나만 달고

그렇게 단정한 아침을 맞으리.

가장 가벼운 몸을 이루어

수직으로 홀로 깊어지면

그 어둠 속

맑은 물줄기 소리도 들으리.

 

 

시.낭송 : 박두규

출전 : 박두규 시집 『숲에 들다』, 애지, 2008

 

 

 

 

kakao

댓글남기기

  Subscribe  
Notify o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