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수북한

 

이진명

 

 

 너무 수북한

 세워진 사람

 모래밭에서

 거인이 왔으면

 

 

너무 수북한




너무 수북한 떨어진 잎 너무 수북한 떨어진 산새들


바위와 흙길과 침엽을 지나 골짜기


너무 수북한 손뼉들 키스들


밟으면 푹푹 쏟아지는 수북한 무덤들 젖은 나팔들


나팔들 울음에 묻혀 돌아가는 산허리 빈 손뼉소리


너무 수북한 떨어진 입 너무 수북한 떨어진 구름


바위와 흙길과 침엽을 지나 또 골짜기


너무 수북한 빨간 물 물들었던 가을 가을 일기장들




세워진 사람




그는 2분 전에 세워진 사람

지하철 출입구가 있는 가로

어느 방향으로도 향하지 않고

그는 2분 전에 속이 빠져나간 사람

11월 물든 잎 떨어져 쌓인 갓길 하수구

먼저 떨어진 잎 말라 구르고

구르는 잎에 오후 남은 햇빛은 비추고

리어커와 자전거와

허름한 식당들의 골목이 있고

서성거리는 짐꾼들이

리어커와 자전거에 기대 팔짱을 끼고

남은 햇빛을 쬐고 담배를 물기도 하고

가게 앞 플라스틱 쓰레기통에선 흘러내린

빈 캔과 우유팩 구겨진 빠닥종이

리어커가 움직이고 자전거가 돌고

자동차 밀고 들어와 좌우 회전을 하고

지하에서는 수개의 환승노선이 혼교하고

혼교하느라 뱉어낸 검은 숨이

입구 근처에서 자옥히 남은 햇빛에 드러나고

그는 2분 전에 뚝 끊겨 세워진 사람

끝내 이별한 사람

발이 없어진 사람

이다지도 조용한 여기

후세상의 지푸라기가 떠가고 있는 여기




모래밭에서




내가 많이 망가졌다는 것을

갑자기 알아차리게 된 이즈음

외롭고 슬프고 어두웠다

나는 헌 것이 되었구나

찢어지고 더러워졌구나

부끄러움과 초라함의 나날

모래밭에 나와 앉아 모래장난을 했다

손가락 사이로 모래를 뿌리며 흘러내리게 했다

쓰라림 수그러들지 않았다

모래는 흘러내리고 흘러내리고

모래 흘리던 손 저절로 가슴에 얹어지고

머리는 모래바닥에 푹 박히고

비는 것처럼

비는 것처럼

헌 것의 구부린 잔등이 되어 기다리었다


모래알들이 말했다

지푸라기가 말했다


모든 망가지는 것들은 처음엔 다 새것이었다

영광이 있었다


영광, 영광

새것인 나 아니었더라면

누가 망가지는 일을 맡아 해낼 것인가

망가지는 것이란 언제고 변하고 있는 새것이라는 말

영광, 영광


나는 모래알을 먹었다

나는 지푸라기를 잡았다




거인이 왔으면




희귀 병마와 싸우다 일찍 죽은

한 여자 시인의 시집을 다 읽은 밤


이 밤을 뚫고 거인이 왔으면 좋겠다

거인은 아주 크고 검은 그림자

안개와 구름이 솜이불처럼 두껍게 깔린 높은 산봉우리

광휘를 터트리며 아침해 떠오를 때

반대편 구름장 위에서 보란 듯

빛바퀴 오색 커다란 원광을 두르고 온다네

원광 밝디밝고 신비로워 아름답지만

그 중심 놀랍도록 크고 검은 몸체 무시무시해

이빨을 딱딱 부딪치게 된다네


마흔세 살 고요한 여자여

지붕 밑 다섯 살 딸아이 머리 빗겨 두 갈래

방울고무줄로 묶어 달랑달랑 흔들리게 하지 않고

어디로 혼자 가는 노랑나비처럼 날아갔는가

감감한 들 오백 리


네가 떨구고 간 너무나 선명하고 쓸쓸한 두 낱 빛가루


바구니 속의 계란 삼십 개

고이 들고 온 이것이 인생의 황금기였나*


이 밤을 뚫고 거인이 왔으면 좋겠다 무시무시한

검은 그림자로 붉게 터지는 아침태양을 맞받는

그러면서도 아름답고 신비로이 오색 광륜을 두른 거인이


그 여자 슬프고 무섭고 아름다웠으니

나도 이 밤 그와 같으니

밤을 깨 우리 슬픈 운명을 들어올려줄 거인이 왔으면




* 최영숙 유고시집 『모든 여자의 이름은』중 「바구니 속의 계란」에서 인용.




시?낭송 : 이진명

출전 : 이진명 시집 『세워진 사람』, 창비,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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