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인간

새로운 인간

― 중미 여행기(멕시코, 쿠바)




권리




우리 집은 다방이 많은 찻길 가에 있었다. 자정이 지나면 남녀 한 패가 나와 길 건너에서 싸움을 벌인다. 그들은 숫자가 들어간 욕을 주거니 받거니, 머리칼을 뜯네 마네 한다. 그들 때문에 잠이 깨면 이번에는 옆집 아저씨가 말썽을 피웠다. 그는 일주일에 한번 정도 거국적으로 술을 마신다. 거기서 끝나면 좋으련만 아저씨는 노래를 부른다. 어제는 남행열차, 오늘은 만남. 아저씨의 입을 거치지 않는 유행가는 없다. 또 거기서 끝나면 좋으련만 아저씨는 자기 집에 대고 소리를 고래고래 지른다. 그는 20년이 넘도록 끈질기게 이사를 가지 않고 있다.

싸움은 누구나 멍들게 한다. 싸움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상한 일은 이 싸움을 대놓고 좋아하는 사람도 많단 것이다. 아레나 데 메히코(Arena de Mexico)는 금요일 밤마다 루차 리브레(Lucha libre: 프로레슬링, ‘자유로운 싸움’이라는 뜻) 경기가 열린다.

 

 

1만 7천석 규모의 경기장 안에는 빈자리가 거의 보이지 않았다. 휴식 시간을 틈타 솜사탕과 콜라를 파는 행상, 피리를 불어대는 팬클럽 단원들, 사이키 조명의 화려함 탓에 장내는 어수선했다. 이제 시작인데 사람들의 흥분은 이미 절정에 달한 것처럼 보였다. 젊은 남자뿐 아니라 여자와 노인과 아이들도 많았다.

한 팀은 복면을 쓴 세 명의 루차도르(Luchador: 레슬러)로 구성되었다. 우두머리 한 명과 졸병 두 명인데 이들 가운데는 악한 캐릭터를 맡은 이도 있다. 의외로 악당의 인기가 좋은데 흔히 말하는 안티 팬들이 많기 때문이다. 게임의 또 다른 중심축은 심판이다. 멕시코는 미국, 일본과 달리 심판이 두 명이다. 그들도 선한 역과 악한 역으로 나뉜다. 사람들은 자기가 응원하던 루차도르가 복면을 쓰고 등장하면 환성을 지른다.

경기는 쉽게 끝나지 않는다. 조금 전에 나가 떨어졌던 사람도 다시 링으로 뛰어 들어오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이 게임이 각본가에 의해서 철저히 만들어진 것이라는 것을 알고 본다. 그래서 안무(?)가 서로 맞지 않아서 ‘퍽’ 소리가 제대로 나지 않으면 일제히 야유를 보낸다. 사람들은 루차도르가 상대편 선수 뒤에서 몸을 날려 그의 목을 꺾고 복면을 벗겨 주기 바란다. 복면은 루차도르에게 생명과도 같은 것이기에 고의로 상대의 복면을 벗기면 패배하게 된다는 규칙이 있다. 그건 상대 선수로서도 엄청난 굴욕이지만 루차 팬들에겐 최고의 이슈가 된다. 이런 경기를 세 시간 동안 여섯 팀이 벌인다. 강도가 높아질수록 나는 돼지와 소가 발가벗겨진 채 걸려있는 정육점의 냉동고에 들어간 기분이 들기 시작한다.

마지막 무대는 경기의 하이라이트다. 스태프들이 닭장차에나 어울릴 3미터 높이의 철창을 링의 사면에 하나씩 붙인다. 모든 선수가 링을 먼저 빠져나가야 이긴다. 루차도르들은 상대가 방심한 틈―좀더 정확히 말하면 방심한 척하는 틈―을 타 벽 위로 기어 올라간다. 한 루차도르가 철창 위를 기어오른다. 상대가 적당히 발을 잡아줄 틈을 놔두면서. 예상대로 그가 링의 바닥에 패대기쳐지면 이번엔 다른 선수가 철창 위에 점프해서 달라붙는다. 선수 두 명이 달라붙어 그를 패대기친다. 이런 패대기가 수십 번 반복되고 이 팀, 저 팀 사이좋게 하나씩 링을 빠져나가고 나면 최후의 일대일 경기가 펼쳐진다. 내 바로 앞에서 어머니와 아들로 보이는 두 사람이 ‘죽여라, 죽여!’하고 있다. 각본에 따라서 한 팀은 이겼고 한 팀은 졌다.

 

 

경기가 끝나자 사람들은 후련해 하며 밖으로 빠져 나갔다. 자정이 되어 가는데도 사람들은 귀가할 줄을 모른다. 약삭빠른 가면 장수들이 ‘마스카라(가면), 마스카라!’를 외치며 아직 열기를 식히지 못해 서성이는 시민들을 유혹한다. 아이들은 좋아하는 선수의 복면을 사달라고 부모를 조른다. 나도 하나 샀다. 그것을 쓴 채 헐크처럼 두 손을 들고 포즈를 취한다. ‘근데 오늘 경기 누가 이겼죠?’하듯이.

멕시코시티는 비의 도시였다. 7월까지 장마라고 하더니 매일 비가 왔다. 멕시코시티에서 동쪽으로 5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는 테오티와칸(Teotihuacan)이 있다. 테오티와칸은 나우아틀어(아즈텍 언어)로 ‘신이 태어난 곳’을 뜻한다. 아즈텍 사람들의 전설에는 이런 이야기가 있다. 태초에 대홍수가 일어나서 사람들이 모두 죽고 첫 번째 세상이었던 테스카틀리포카의 4천년 역사도 끝났다. 그러나 나무에 올라가 살아남은 단 두 사람, 즉 네네와 타타로부터 인류가 지속되었고 두 번째 세상 케찰코아틀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다시 4천년 후 태풍이 세상을 날려 보냈다. 세 번째 세상 틀랄록은 화재로 멸망했고 네 번째 세상 찰치위틀리크웨이는 피와 불의 비로 소멸했다. 그리고 지금의 다섯 번째 세상 토나티우가 찾아왔는데 이곳이 바로 테오티와칸이다.

 

 

가장 인상적인 건축물은 태양의 피라미드다. 바닥의 모서리 길이가 각각 222미터, 높이 70미터로 세계에서 세 번째로 큰 것이라고 한다. 총 248개의 계단을 세 번이나 쉬고서야 정상에 올라섰다. 죽음의 길(Calzada de los Muertos) 북쪽 끝에 있는 달의 피라미드를 비롯해 시가지 유적들이 훤히 들여다보인다. 태양이 떠오를 때 가장 밝게 빛나는 태양의 피라미드는 AD 150년경에 사람의 힘으로만 지어졌다. 300만 톤이 넘는 돌을 철제 도구나 바퀴, 나귀의 도움을 받지 않고 노예들이 져 나른 것이다. 다섯 번째 세상은 홍수와 바람과 피와 불의 비가 아니라 힘없는 사람들의 손과 발에 의해 탄생한 것이다.

나는 그곳을 떠나 힘 있는 사람들의 도시로 갔다. 유카탄 반도 끝에 자리한 칸쿤은 세계적인 휴양도시다. 국제회의가 자주 열리는 만큼 국제적 시위도 자주 열린다. 까라꼴 해변(Playa Caracol)은 5성 호텔로 둘러싸여 있다. 바다를 보려면 누구나 화려한 호텔 로비와 북적이는 수영장을 통과해 들어가야 한단 뜻이다. 바다가 5성 호텔의 소유도 아닌데 나는 괜히 빨간 조끼의 호텔 직원 눈치를 보면서 들어갔다. 옥과 오팔, 비취 등 아름다운 보석을 뿌려놓은 바다 옆에서 밀가루처럼 곱고 하얀 모래를 뒤집어쓴 아이가 놀고 있다. 칸쿤은 좋은 곳이다. 수영장 물에 몸을 담그고 데낄라를 마시며 아름다운 카리브 해를 보다가 밤새 클럽에서 놀 수도 있다. 하룻밤 숙박료로 쓸 100만원과 기타 잡비만 있다면 말이다. 칸쿤은 결코 배낭여행자를 위한 도시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칸쿤에 간 것은 쿠바 때문이었다. 칸쿤은 쿠바의 수도 아바나(Havana)에 가기 위한 최적의 장소이다.

 

 

쿠바를 여행하려면 반드시 알아야 할 두 사람이 있다. 그들은 좋은 집안 출신의 이방인이며 이름의 어원이 같고 잘생겼고 멋진 수염을 가졌고 종군열이 강하고 골초에다 오지랖이 넓으며 총으로 생을 마감했다는 것이다. 두 사람의 가장 결정적인 공통점은 쿠바를 지독히 사랑했다는 점이다. 그들은 에르네스토 게바라 데 라 세르나(Ernesto Guevara de La Serna), 즉 체 게바라와 어네스트 헤밍웨이(Earnest M. Hemingway)다.

오늘도 수많은 영웅이 하늘을 날아오른다. 하지만 이 시대의 영웅은 슈퍼맨도, 배트맨도, 스파이더맨도, 해리포터도, 인크레더블 헐크도 아닌 ‘체’이다. 체, 게바라. 어느 나라를 여행하건 단 한번도 마주치지 않은 적이 없어서 나를 당혹스럽게 만든 인물. 예수, 마릴린 먼로, 밥 말리 다음으로 가장 많이 상품화되었을 인물. 영웅 가운데 가장 반항심이 강하고 그 반항심을 행동으로 연결한 인물. 쿠바를 너무도 사랑한 인물. 체는 쿠바의 모든 것을 만지고 느끼고 알고 싶어 했다. 나도 체 게바라처럼 쿠바의 모든 것을 만지고 느끼고 알고 싶었다. 이 나라는 대체 왜 이럴까, 했던 것들이 너무도 많았기 때문이다.

쿠바에는 유독 1950년대 미국산 시보레 자동차가 많다. 1961년 미국과 수교를 끊는 동시에 미국산 상품이 들어올 수 없게 된 것이다. 여기저기 땜질한 시보레 자동차 중에는 ‘시보레를 타면 미국이 보여요(See the USA in your Chevrolet)’라는 슬로건과 함께 등장한 1954년산도 있다. 이들 미국산 차들은 50년대에 역사의 중심에 들어서서 60년대부터 서서히 퇴장하기 시작한 쿠바의 역사를 한 눈에 보여주는 듯하다.

쿠바의 역사는 콜럼버스가 쿠바의 이름을 지어준 때부터가 아니라 체 게바라와 피델 카스트로의 등장부터라고 해야 맞을 것이다. 19세기 말부터 미국은 유럽 대신 라틴아메리카의 새로운 군주로 군림하기 시작했다. 미국은 제멋대로 카리브 해를 자신의 바다로 점했다. 이어 멕시코의 내정에 간섭하고 푸에르토리코를 속령으로 만들고 쿠바와 파나마를 독립시키고 과테말라의 진보주의 정부를 무력화시켰다. 체 게바라가 멕시코에서 피델 카스트로와 만났던 1956년은 라틴 아메리카의 반미 감정이 극에 달해 있던 때였다. 그들은 부패한 바티스타 정권을 몰아내기 위한 쿠바 혁명을 계획한다. M26-7을 조직하고 150여 명의 동지와 함께 쿠바에 들어가지만 정부군에 전멸당하고 만다. 피델 카스트로가 특사로 풀려난 이후, 80여 명의 게릴라들은 시에라마에스트라 산맥에서 활동을 벌이기 시작한다. 2년 만에 그들은 산타클라라 전투에서 승리하여 1959년 초, 드디어 아바나에 입성한다. 혁명의 승리 후, 체 게바라는 쿠바 국립 은행 총재, 공업 장관 등의 위치에 올라 5년간 정치적 활동을 벌였다. 하지만 천성적인 혁명가 체질인 그는 자리를 박차고 나와 콩고와 볼리비아를 누빈다. 1928년 아르헨티나에서 태어나 의사를 꿈꾸었던 소년은 1967년 볼리비아 어느 산골에서 총살당했다. 미국의 지원을 받은 볼리비아 정부군에 의해서였다. 30년 뒤에 발견된 그의 유골은 두 팔이 잘린 채로 아르헨티나가 아닌 쿠바의 산타클라라에 묻혔다. 

나는 멕시코를 떠날 때 쿠바 여행 책자를 가져가지 않은 실수를 저질렀다. 미친 짓이었다. 그때까지도 나는 쿠바를 전혀 모르고 있었다. 올드 아바나를 몇 바퀴나 돌았는데도 변변한 서점이 보이지 않았다. 여행 정보 센터에서 여행 가이드북이나 지도를 구할 수 있는지 물었다. 직원은 박물관 이름과 전화번호밖에 적혀 있지 않은 두 쪽짜리 인쇄물을 내밀었다. 
“혹시 여행책 파는 데 없나요?”
“론리 플래닛? 에이, 그런 건 없죠.”

그는 속으로 ‘장난하시나?’라고 중얼거린 것 같다.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재화의 부족이라는 것을 경험하는 중이었다. 내가 유복한 가정이나 지역에서 태어난 건 아니지만 우리 집과 근처 슈퍼마켓에는 먹을 것이 넘쳐났다. 내가 좋아하는 웨하스도 10층 높이로 쌓여 있고 초콜릿도 종류별로 가득했다. 상품은 모자란 법이 없었고 물건이 다 소비되어도 언제나 신상품으로 채워졌다. 이것이 바로 자본주의가 돌아가는 방식이다. 하지만 사회주의 국가 쿠바에서는 재화의 융통성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올드 아바나의 대다수 식품점들은 어둡고 물건의 수나 질도 빈약하다. 투명한 쇼룸 안에 웨하스가 마치 귀중품처럼 띄엄띄엄 놓인 것을 보고 나는 제정신이 돌아왔다. 아, 잠시 잊었었다. 여기는 쿠바였다.

나는 아바나의 부촌 중 하나인 베다도(Vedado)의 어느 까사 빠띠꿀라르(Casa particular)에 머물고 있었다. 정부에서 허가를 내준 민박집이다. 처음 투숙을 하거나 체류 기간을 연장할 때마다 비자를 보여주고 숙박부에 사인해야 한다. 까사 빠띠꿀라르의 마리아나 아주머니는 친절하고 배려가 깊었다. 그녀는 매일 손수 깎은 세 가지 종류의 과일과 빵, 계란 등으로 넉넉한 아침을 차려 주었다. 나는 빵에 독일산 버터를 바르고 멕시코산 콜라와 함께 먹었다. 하지만 예약이 차서 그녀의 집에 오래 있을 수 없었다. 새로 옮긴 민박집에는 아침이 제공되지 않았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생각나는 건 빵이었다. 빵을 먹으려고 길을 나선다. 아무리 찾아도 빵집이 없다. 우리 집 근처의 허름하고 조그만 빵집에도 있었던 새하얀 케이크와 설탕 도넛이 보이지 않는다. 이상하다. 사람들은 저마다 잘 먹고 사는 것처럼 잘 차려 입고 돌아다니는데, 아무도 불평, 불만을 하지 않는데 왜 가게에는 그들을 배불릴 음식이나 옷이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나는 민박집 아주머니가 일러준 구둣방만한 가게 앞에 섰다. 주인이 나무판자 위에 시커먼 구두를 꺼내놓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의 투박한 손은 더러운 바구니 안에 든 두툼한 빵을 툴툴 털어 더러운 나무판 위에 올려놓았다. ‘대체 저런 걸 누가 사먹어?’ 하던 내 짧은 생각을 비웃기라도 하듯, 사람들이 줄을 서서 빵을 사갔다. 자본주의의 달콤새콤한 크림빵, 초코빵에 입맛이 길들여진 나로서는 도저히 그것에 손이 가지 않았다.

쿠바는 멕시코와 여러모로 비교가 되었다. 길가에서 또르띠야를 먹고 있던 여자들, 머리에서 번쩍번쩍 빛이 나도록 왁스를 바른 멕시코 남자들, 덥고 푹푹 찌는 지하철, 한국인 음식점 사이에 자리 잡은 분홍색 섹스숍. 이런 것들이 추억처럼 떠올랐다. 멕시코 세븐 일레븐에서 폼 클렌징을 팔지 않는다고 불평했었는데, 쿠바에서는 비누가 나란히 놓여 있는 것을 보는 것만으로도 안심이 되었다.

그전까지만 해도 여행자를 힘들게 하는 것들은 날씨와 물가, 사기꾼, 긴 여정 등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여행을 투쟁으로 바꾸게 하는 것은 재화의 부족이었다. 살기 위한 투쟁. 나는 서서히 ‘없음’에 대한 공포를 느꼈다. 빵이 떨어지면 어떡하지, 먹을 과일이 없는데, 휴지는 어떡하고? 이 알 수 없는 숨 막힘, 공허감, 그리고 ‘없음’에 대한 공포는 쿠바에 한 걸음 다가가게 하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나는 쿠바인들에게 동지애마저 느꼈다.

 

 

내 숨통을 틔어준 것은 음악이었다. 볼레로, 찬찬, 재즈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음악들을 들을 수 있는 바가 아바나에는 많았다. 재즈 클럽 ‘La zorra y el cuervo’(여우와 갈가마귀)는 이름만큼이나 낭만적인 곳이었다. 라자로 발데즈(La?zaro Valde?s)는 이미 여러 장 판을 낸 재즈 피아니스트였다. 그는 볼레로의 대부이자 쿠바를 대표하는 뮤지션 베니 모레의 음악 감독을 담당하기도 했다. 짧게 솟은 흰 수염에 빡빡 민 머리, 푸근한 웃음이 <괴물>의 OST를 담당한 뮤지션 이병우씨를 떠올리게 했다. 물론 음악 스타일은 전혀 달랐다. 발데즈의 팀은 피아노, 베이스, 드럼, 팀파니, 콩가(conga)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시종일관 신나는 음악들이었다. 탁음이 강한 여성 가수가 나와 베싸메무초, 찬찬 등의 귀에 익숙한 곡을 부르기 시작했다. 발데즈는 손가락에서 팔꿈치, 심지어 발까지 이용해 키보드를 두드렸다. 다리도 쉼 없이 움직였다. 다리 떨지 말라고 나를 나무랐던 어른들이 미워질 정도로 발데즈는 다리를 너무 멋있게 잘 떨었다. 흥분한 그는 급기야 여성 가수와 자리를 바꿨다. 가수가 피아노를 치고 피아니스트가 춤을 추었다.

나는 음악을 들으며 럼과 함께 쿠바의 2대 특산품 중 하나인 시가를 피워보았다. ‘로미오와 줄리엣’은 물건이었다. 그것을 입에 대자마자 눈물과 기침이 심하게 나왔다.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일주일간 혀끝이 계속 덜덜 떨렸다. 이러다 언어 장애가 오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이 무서운 담배를 헤밍웨이는 입에 달고 살았다.

헤밍웨이는 체 게바라만큼이나 극적인 삶을 살았다. 그는 1,2차 세계 대전과 스페인 내전에 참전했으며 수많은 유명 인사들과 염문을 뿌리기도 했고, 비행기 사고로 두개골이 파열되었으며 최후에는 아끼던 엽총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또 그는 여행을 좋아해서 유럽과 아프리카, 라틴 아메리카 등 세계 곳곳을 누비며 글을 썼다. 아프리카의 수렵 체험을 바탕으로 한 <킬리만자로의 눈>과 쿠바 생활을 담은 <노인과 바다> 등이 그 예다. 쿠바는 그가 가장 아끼던 곳이었다. 그가 노벨상 수상 소식을 들은 곳도 쿠바였다. 그가 쿠바를 좋아하는 만큼 쿠바도 그를 아꼈다. 그가 살던 저택을 비롯해, 호텔 ‘Ambos Mundos’(‘양쪽의 세계’라는 뜻), ‘노인과 바다’ 등은 쿠바의 주요 관광 명소이다.

<노인과 바다>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의지와 지혜밖에 없는 나에게 맞서고 있는, 모든 것을 가진 저 고기가 부럽구나.’ 의지와 지혜가 있다는 것만으로 인간은 존경받을 수 있는 존재이다. 하지만 의지와 지혜는 아집과 잔꾀로 바뀌기도 한다. 인간을 끝까지 존경받을 수 있는 존재로 만드는 것은 힘없는 자들에 대한 태도이다. 노인은 한낱 자신의 저녁밥이 될지도 모르는 물고기에게 존경과 사랑을 표하고 있다. 이것은 인간에 대한 헤밍웨이 자신의 태도이기도 하다. 그는 의사인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평생 전쟁터를 누볐다. 자신과 전혀 상관없는 일에 끼어들지 않았다면 그는 훌륭한 기자로 늙어죽었을 것이다. 같은 이유로 체 게바라 역시 훌륭한 의사로 편안히 아르헨티나 땅에 묻혔을 것이다. 그들은 남의 일에 끼어드는 것이 혁명의 시작임을 잘 알았다.

아바나를 떠날 때는 느낌이 이상했다. ‘방문해주셔서 감사합니다’란 말이 적혀 있어야 할 간판과 벽에는 온통 혁명에 관한 붉은 글씨들 뿐이었다. 기억에 남는 문구를 적어 보겠다. 

“Revolucion es: No mentir jamas ni violar principios e?ticos?. Revolucion es igualdad y libertad plenas.”

(혁명은 거짓말을 하거나 도덕적인 원칙을 파괴하지 않는다. 혁명은 평등과 자유의 완성이다.)

쿠바 공항 출국장에서 나는 한 무리의 이스라엘인들을 만났다. 그들은 쿠바에서 일주일 정도 머물렀다고 했다. 쿠바 여행이 좋았냐고 묻자, 한 남자가 웃으며 대답했다. “일주일 전엔요.” 나도 대충 무슨 뜻인지 알기에 따라 웃었다. “쿠바의 음악적 센스는 인정해요. 하지만.” 그는 덧붙였다. “공산주의는 좆 까라고 해요(Communism sucks)!” 그는 유태인이었다. 유태인들도 한때는 국가 없는 설움과 멸시의 눈총을 받았다. 그들은 돈으로 서러운 세상을, 자본주의 사회를 거머쥐었다. 그 유태인에게 ‘좆 까’라는 말을 들어야 했던 공산주의는 미안하지만 체 게바라가 꿈꾸던 혁명의 결과물이 아니었다. 그는 말했다. ‘우리 시대의 딜레마는 민중을 헐벗게 만드는 자본주의와 자유를 억압하는 공산주의 중에서 택일해야 한다는 것’이라고. 자본주의의 비인간성과 공산주의의 파쇼적 성격 중 하나를 고르는 일은 짬뽕과 자장면 중 하나를 고르는 일보다 훨씬 더 어려운 문제 아닌가.

 

 

체 게바라는 “야수 같은 인간이 아니라 새로운 인간을!”이라는 말을 투쟁의 목표로 삼았다. 그는 소련, 중국과는 다른 쿠바만의 주체적 사회주의와 인간을 꿈꾸었다. 이윤추구가 목표인 야수가 아니라 세계인과 연대하며 그들과 자유롭고 민주적으로 소통하는 인간. 노동의 결과를 양과 돈으로 따지지 않고 채산성을 공동체의 최대 목표로 여기지 않는 인간. 공동의 생산 과정과 그에 걸맞은 교육 수준을 갖추고 있는 인간. 이것은 사르트르가 ‘우리 세기에서 가장 성숙한 인간’이라고 칭찬해 마지않았던 체 게바라 본인의 모습이기도 하다.

나는 진실을 쓰기 위해 거짓말하는 법부터 배워야 하는 것이 소설가의 천형이라고 생각해왔다. 진실한 거짓말은 진실한 삶에서 나온다. 세상에는 점점 현실적이고 냉소적인 사람들이 늘어난다. 그럴수록 투쟁을 두려워 말아야 한다. 루차도르가 되어야 한다. 더 나은 사회는 단순히 경제적으로 잘 사는 사회가 아니다. 여행 중에 가장 충격받은 장면을 꼽으라면 쇠고기 집회에 촛불을 들고 나온 어린 10대들의 모습이었다. 우리에게는 왜 앵그리영맨이나 68세대가 없을까, 하는 방관적 태도에 사로잡혀 있던 내게 어린 친구들이 한방 먹인 것이다. 나는 그들을 존경한다. 그들은 진정한 21세기 소년소녀다. 

나는 이 여행기의 1회에서 말했다. 영감의 계보를 찾아서 여행을 떠나왔노라고. 그랬다. 나는 내 영감이 어디에서 들어와 어디로 빠져나갈지가 궁금했다. 나에게 자극과 영감을 주었던 데미안에서 시작해, 신밧드, 정글북, 백 년 동안의 고독이 태어난 곳들 사이를 쉼 없이 돌아다녔다. 숨 쉬고 자고 먹고 타고 쉬고 생각하고 이야기하는 모든 것이 고통일 때가 있었다. 하지만 나는 내가 원하는 이상적인 인간이 되기 위해 20대를 온통 여행으로 썼다. 그리고 나는 이효리도 도달했다는 30대가 되었다. 전보다 주름이 늘고 통장 잔고는 줄었고 몸은 허약해졌다. 나는 매일 아침 눈을 뜨며 확인한다. 오늘은 영감님이 오셨을까, 안 오셨을까. 이것은 물론 ‘영감’에 대한 말장난이다. 나와 싸우기 위한 놀이의 일종이다. 영감은 유럽, 중동, 아프리카, 라틴 아메리카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나를 사로잡은 영감은 이제 이국적 풍경을 빠져 나와 서서히 아시아로, 한국으로 흘러든다. 서른을 맞이한 사람이 으레 그렇듯, 나는 원시로, 시원으로 인생의 시곗바늘을 되돌리고 있다. 그 끝에서 갖가지 풍경과 추억을 발견한다. 그것은 한국적이기도 하고 세계적이기도 하고 낡기도 하고 새롭기도 하다. 나는 언제나 그 양쪽의 세계(Ambos Mundos)를 오가며 살고 싶다. 나에게 좌절과 불가능과 용기와 희망을 안겨 주었던 세계들. 그것들에 맞서면서 새로운 인간으로 거듭나고 싶다. 이런 것도 혁명의 시작이 될 수 있다면, 전보다 주름이 늘고 통장 잔고는 줄었어도 충분히 행복한 일일 것이다.《문장 웹진/2008년 8월호》




* 그동안 <권리의 세계여행기>를 읽어주신 분들에게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많은 부분 여행 가이드 <론리플래닛>과 인터넷 사이트 등을 참고했음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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