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스

 

강정

 

 

 키스

 안녕

 카메라, 키메라

 한낮, 정사는 푸르러

 



키스 




너는 문을 닫고 키스한다 문은 작지만 문안의 세상은 넓다 너의 문으로 들어간 나는 너의 심장을 만지고 내 혀가 닿은 문안의 세상은 뱀의 노정처럼 굴곡진 그림들을 낳는다 내가 인류의 다음 체형에 대해 숙고하는 동안 비는 점점 푸른빛과 노란빛을 섞는다 나무들이 숨은 눈을 뜨는 장면은 오래 전에 읽었던 동화가 현실화되는 순간이다 미래는 시간의 이동에 의한 게 아니라 시간의 소멸에 의한 잠정적 결론, 너의 문안에서 나는 모든 사랑이 체험하는 종말의 예언을 저작한다 너는 내 혀에서 음악과 시의 법칙을 섭취하려든다 나는 네게서 아름다운 유방의 원형과 심리적 근친상간의 전형성을 확인하려든다 그러니까 이 키스는 약물중독과 무관한 고도의 유희와 엄밀성의 접촉이다 너의 문은 나의 키스에 의해 열리고 나의 키스에 의해 영원히 닫힌다 나는 너의 마지막 남자다 그러나 네게 나는 최초의 남자다 너의 문안에서 궁극은 극단의 임사체험으로 연결된다 흡혈의 미학을 전경화한 너의 덧니엔 관뚜껑을 닫는 맛, 이라는 시어가 씌어졌다 지워진다 살짝 혀를 빼는 순간, 내 혓바닥에 어느 불우한 가족사가 크로키로 그려져 있다




안녕




몸소 비장함을 체현한 노트가 허공에 나부낀다

가을비가 뜨겁다

안녕이라는 한국어는 중성명사다

밤이 온다

낮이 왔다

적멸은 배부르고

와인잔은 오래 전에 깨져버렸다

나는 나의 질긴 두통과 결혼하기로 했다

두통은 내가 남자로 태어난 것에 대한 천형

여자들은 두 개의 입으로 날 유혹한다

그때마다 안녕,

하고 발음한다

내 혀는 도토리묵보다 단단하지만,

바위 앞에선 이만큼 부드러운 육질도 드물다

나는 늘 이런 상식에 굴복한다

상식은 궁극의 예술이다

創造는 내 친구 이름이다

미술을 전공한 그는

곧잘 나의 외모가 종잡을 수 없다고 말한다

생물학적으로 남성인 그는

심정적으로는 늘 여성을 지향한다

사랑하지 않는다면

너를 그릴 수 있겠다고 썼던

스무 살의 내가

서른여섯의 나보다 더 또렷하다

다시 와인을 따른다

오래 전에 깨진 와인잔이

붉은 물길을 연다

오래 전에 깨진 것들이

오랫동안 남아있다면

그건 일종의 원형상징이다

또, 안녕이 왔다

와인잔을 따르니

와인이 넘실거린다

新約을 뜯어먹던 스무 살의 내가

사전을 뒤적여

‘寶血’이란 단어를 흡수한다

이 씁쓰레 달콤한 맛,

내가 단어를 말할 때

단어는 말해지고 싶지 않은 나를 말한다

후자가 결정적이다

안녕이 간다

안녕

그것은 性器가 없다

몸소 비장함을 체현한다

깨진 와인잔이 빈다

빈다는 베인다의 경상도 사투리다

깨진 와인잔이 날 빈다

나는 안녕에 베인다

안녕 

그것은 만화에서나 보던

육식식물을 닮았다

나는 몸소 안녕을 체현한다

안녕

이 말에서 풍기는 피비린내가 살갑다




카메라, 키메라




우스운 일이지만,

나는 카메라 한 대로 모든 시간을 포획하려는 꿈을 아직 버리지 못한다

당신의 얼굴을 담으려다가

두 개의 망막을 거쳐 내 심장에 가설된 집에는

당신이 떠난 자리만 휑뎅그렁 살아있는 나보다

더 크고 살갑다

대개 과장법이 잘 통하는 나의 카메라는

사람 여자의 몸에 공룡 머리를 얹은 모습으로

당신을 기억한다

당신은 내 기억보다 훨씬 먼 시간의 지층 아래

흙과 나무의 처소로

봄마다 아름답게 환생하지만

당신이 꾸역꾸역 이 세상의 멸망을 앞당기며

미래의 생을 즐기는 동안,

찍으면 찍을수록 공기의 보이지 않는 결만 지문처럼 분명해지는

카메라를 들고 나는

당신의 길고 긴 꼬리를 좇아

백 권의 책을 불 싸지르고

소리쳐도 뱉어지지 않는

몸 안의 검은 옹이들을 하복부로 몰아넣으며

당신이 한사코 거절해버린

귀여운 벌레들의 미래도시를 상상임신한다

인간의 밥보다는

인간이 뱉어낸 찌끼들과

꽃들에게 짓찢긴 마음의 분방한 운동보다는

몸 밖으로 빠져나온 상처의 분비물들에

순정이 동하는 나의 카메라는

내가 이번 생에 쟁취한 유일한 전리품

사람 여자의 몸을 내던진 당신이

살금살금 뒷물 흘리며 봄의 훈향을 대륙의 모래먼지로 뒤바꾼다 한들

어떤 한계를 넘어서려는 듯

제 속의 사악한 것을 토하려는 듯

낮게 찰랑거리는 허공에서

낯선 풍경으로 상영되는 내 마음의 돌연한 사건들이

지난한 욕정의 형식을 試演하는 걸 막을 순 없다

봄이면 귀환하는 먼 미래의 악취 속에서

나는 이미

당신이 찍어놓은 과거의 얼굴들이기 때문이다




한낮, 정사는 푸르러

  



길게 누워있던 여자가 느리게 몸을 일으켰다

그림자는 더 아래로 내려가 만물의 뿌리를 만지며 땅의 깊이를 더하였다

여자가 길게 일어나자

같이 누워있던 햇볕이 산을 두어 개 넘어 어두운 마을 하나를 지도에서 지웠다

다가올 시간이 지나간 시간 앞에서 더 먼 곳의 아이들을 달랬다

꽃의 생몰 기간이 한 나절쯤 줄었을까

여자를 만졌던 시간이

홀로 여자를 생각하던 시간을 삼킨 듯

전혀 모를 남자가 등을 접은 채 유리창 속으로 사라진다

엉겨 붙어 흘러내리던 조금 전 그 자리가 물씬 차갑다

여자의 머리칼이 수초처럼 휘날리며 하늘거리는 새떼의 하늘을 휘감는다

한 여자의 몸을 통과했을 뿐인데,

어느덧 세상 밖이 발아래 놓였다

풀죽은 下焦에 진짜 풀들이 죽어있다

만물을 뒤바꿔놓은 여자가 긴 다리를 딛고 일어선다

다리 사이로 흰 물이 흘러내리는 걸 착각이었다고 믿는 순간,

오전부터 읽던 책의 낱장들이 허공에 둥둥 떠다녔다

유리창을 뚫고 들어온 천체의 암반에

이끼 낀 남자의 근골이 화석처럼 찍혀있다

얼굴을 잃고 몸 전체로 동굴이 돼버린 여자의 늑골에

최초의 문장이 씌어지는 순간이다




시?낭송 : 강정

출전 : 강정 시집 『키스』, 문학과지성사,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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