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부드러운 손에 떠밀려

 

<작가와 작가>


시간의 부드러운 손에 떠밀려



대담 김광규(시인)

진행?정리 김경주(시인)

 

intro

시업에 충실할 수 있는 시간이 시작되었다

이미륵상 수상

생업과 시업 사이의 긴장관계

독문학의 원시림에서 헤매다

늦깎이 등단

한·독 문학교류

문학매체의 서정성과 서사성

명징한 단순성의 시학

쉬운 시

언어를 살리는 열정과 실험정신

시간의 부드러운 손

짧은 텍스트 하나를 처음이자 마지막처럼 쓰는 것

 




생업은 마쳤지만 시업의 긴장은 계속된다 


김경주  건강하게 잘 지내시는지요?

김광규 네, 덕분에.

김경주 학창 시절부터 선생님을 지면으로만 뵀는데 직접 뵙는 것은 처음인 것 같습니다. 학창시절에 선생님 시를 보면서 열심히 애독하던 때가 많이 떠올랐어요. 재미있는 게 추석 명절에 고향에 내려갔는데 제 어머니께서 선생님의 『가진 것 하나도 없지만』이라는 시집을 가지고 계시더라고요. 제가 시를 쓰면서도 한 번도 어머니께서 시를 보시는지 몰랐는데, 굉장히 놀랐습니다. 그 이후로 선생님과 대담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겨 정말 인연이구나 하고 기쁜 마음으로 나왔습니다. 오늘 떨리고 설레는 마음으로 나왔는데요. 선생님께서 많이 이끌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김광규  김경주 선생은 아주 좋은 어머니를 두셨네요. 시집을 읽는 어머니 얼마나 멋집니까.  우리가 오늘 이렇게 만났지만 작가나 시인과 독자, 또는 작가나 시인들끼리 만난다는 게 사실은 작품을 통해서 만나는 것이죠. 한 번도 만난 적 없어도 서로의 작품을 읽고 거기에 관해서 기억하고 다른 사람과 이야기하면 그것이 진짜 만남이라고 생각합니다. 김경주 선생이 오래전에 이미 내 시집을 읽었다고 하니까 우리가 만난 것은 사실 오래된 것이죠.

김경주  등단을 하고 나서 자기가 학창 시절, 문학청년 시절에 사숙했던 선생님을 직접 뵙는 건 굉장히 큰 느낌인 것 같아요. 굉장히 낯설기도 하고, 여전히 쑥스러운 마음도 있는데……. 저는 큰마음 먹고 설레는 마음으로 나왔습니다. 선생님, 요즘 근황에 대해서 먼저 얘기를 해주시고 질문을 드렸으면 좋겠는데요.

김광규  내가 오랫동안 교직 생활을 하다가 정년퇴직을 했습니다. 정년퇴직한 후에 3년째를 살고 있는데 나이든 사람들끼리의 은어를 빌리자면 “졸업한 지 몇 년 되었나?” 그게 서로의 질문입니다. 졸업했다고 이야기를 해요. 졸업한 후의 감정이라는 것이 야릇한데요. 김 선생은 젊어서 모르겠지만 내 또래가 느끼는 것은 비유를 들어서 말하자면, 우리가 교통 카드를 가지고 다니면서 버스를 타고 지하철을 타고 그러는데 탈 때마다 액수가 줄어들죠. 나중에 언젠가 무효가 돼 버리는데 그러면 다시 돈 내고 충전을 하면 되는 거죠. 그런데 다시 채울 수 없는, 충전할 수 없는 것을 보면서 사는 느낌이죠. 가령 우리가 매일 쓰는 핸드폰도 충전을 가득 시키면 배터리가 네 칸이 채워지는데 자꾸 줄어들죠. 아마 내 또래의 심정이라는 게 다 줄어들고 하나쯤밖에 안 남았는데 충전도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 느낌이 솔직한 고백이죠. 그래도 내 경우에는 내가 독문학자로만 살아오지 않고 계속해서 시작(詩作)을 해 왔잖아요. 독문학 교수로서의 직업은 공식적으로 끝난 것이지만 시인으로서야 누가 정년퇴직시킬 수 없으니까 아직도 많은 원고 청탁이 들어오고 특강해 달라고 불러 주는 데도 있고 심사도 있고. 그래서 그런데 오가고 그러느라고 아직은 계속 바쁘게 살고 있는데, 그런 것을 하는 일 없이 바쁘게 산다고 말하죠.

김경주 예전에 어느 선배님께서 “시인은 직업이 아니다. 시인은 상태에 가까운 거다”라고 한 말을 오랫동안 품은 적 있었는데, 선생님 말씀 들으니까 생각납니다. 시를 쓰고 있는 상태만 시인으로 불릴 수 있는 게 가장 시인에게는 적합한 게 아니겠는가. 직업으로서의 시인은 또 다른 측면이 있겠지만. 정년퇴직을 하시고 나서도 시에 대한 태도가 담대하실 것 같아요. 과거의 방식과 생각들이 달라지신 부분도 있을 것이고, 앞으로 시에 대한 여유랄까, 시에 대해 가지고 계신 생각이 있으신지요.

김광규  우리가 보통 생업이라는 말을 쓰잖아요. 생업은 먹고 살기 위해 직업을 가져야 하니까 그것을 생업이라고 하고 시 쓰는 사람들은 시를 쓰는 일을 시업이라고 하는데, 생업과 시업이 긴장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가 정년퇴직하고 나면 그 긴장 관계가 끊어지는 대신에 시업에 충실할 수 있는 시간이 시작된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이죠.

 

 

김경주  좀 더 시를 대하는 여유가 생기셨다고 생각하시고 마음이 더 풍요로워지셨습니까?

김광규  그렇지는 않습니다. 사람이 결국은 시간에 쫓기면서 사는데 시간이라는 것이 물과 같죠. 물이 맨 처음 졸졸졸졸 샘물에서 솟아날 때, 그 다음에 그게 어딘가 고이잖아요. 고였다가 흐르기 시작하는데, 우리가 태어나는 것을 물이 졸졸졸 샘솟는 데 비유한다면 아마 청년 시절까지가 비교적 고이는, 이름답게 고여 있는 물. 그 다음 아름답게 흐르기 시작하는 게 청장년기이고, 그 다음은 나중에 폭포가 되어서 떨어진다든가 이렇게 비유할 수 있는데, 이러한 시간에 대한 부드러운 쫓김이라고 그럴까. 그런 것을 끊임없이 받고 있죠.



30년 독문학자로서의 삶


김경주 선생님, 최근에 아주 의미 있는 상을 수상하셨는데, 뒤늦게나마 축하드립니다.

김광규 고맙습니다.

김경주  그동안 많은 상을 받으셨지만 이번 상은 좀 특별한 의미가 있을 것 같은데요.

김광규  이미륵 씨는 20세기 전반을 사신 분이에요. 1899년에 황해도에서 태어나서 한 20여 년을 우리나라에서 살고―아마 그 양반이 50에 작고했나 그랬는데―나머지 한 30여 년을 독일에서 살다가 돌아가신 분이니까 20세기 전반기를 살고 가신 분인데요. 독일에서 이 분이 사실은 이과를 공부했습니다. 의학을 하려다가 생물학 비슷한 것을 해서 박사 학위도 받고. 쉬운 일이 아닌데, 스무 살 때쯤 그때 우리나라에 독일어 사전이 있었겠어요? 가서 좌우간 큰 업적을 냈고, 다음에 이 사람이 독일어로 계속 글을 썼습니다. 소설 쓴 게 우리나라에도 번역돼 나와 있습니다. 독일어 『Der Yalu fliesst』가 원제목인데, 『압록강은 흐른다』, 그 외에도 몇 권이 있지만 『압록강은 흐른다』는 독일에서 1940년대에 출판이 된 후 굉장히 좋은 서평이 나오고, 심지어는 독일 교과서에까지 아름다운 산문으로 실렸답니다. 지금도 우리 교과서에 보면 가끔씩 외국 작가들 것도 실리잖아요. 그러니깐 우리나라 사람으로서 독일 교과서에 실린 분은 그분이 처음이 아닐까 생각해요. 우리나라하고 독일의 관계라는 것이 120여 년 됐거든요. 그분이 초반에 한국과 독일 관계를 맺게 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 양반은 독일 작가라고 부릅니다. 왜냐하면 독일어로만 썼으니까. 그러나 한국계라는 말이 앞에 붙죠. 한국계 독일 작가. 그런 역할도 했고, 그 분이 독일 쪽으로 망명하던 때가 우리나라가 일제 강점기에 살던 땐데 그때 가서 50년대에 각광을 받으므로 해서 우리나라의 문학이 직접 나간 건 아니지만 말하자면 유럽 쪽으로 가게 한, 요즘 와서 흔히 말하는 한국 문학의 세계화라든가 해외 진출이라든가 그런 것에 선구적 역할을 한 분입니다. 그 분 소설을 김 선생 아직 못 읽어 보셨어요?

김경주  네. 아직.

김광규  한번 구해서 읽어 보세요. 그게 1인칭 성장 소설이에요. 읽어 보면 그 양반이 우리나라에서 어떻게 살았나가 자세하게 나옵니다. 아주 찬찬히 잘 쓴 소설입니다. 소설이 다 그렇지만 과거 시제로 쓰잖아요. ‘나는 어떻게 했다’ 이런 식으로. 그런데 아까 말씀드린 대로 제목 『압록강은 흐른다』는 현재예요. 그것도 시사하는 바가 많죠. 한국의 발전이라든가, 변혁이라든가 이런 것을 그분이 거기에 상징적으로 담지 않았나, ‘흐른다’라고 현재형으로 말해서. 그런데 이 분이 많이 잊혀 있다가 20세기 후반기에 와서 우리나라의 많은 분들이 그분에 대해 연구도 하고, 그분의 묘소가 독일 뮌헨 근처의 그래펠링이라는 데 있습니다. 거기다 묘소도 만들고, 정규화 선생이라고 그분이 주로 앞장서서 묘소에 우리나라처럼 비석도 만들어 세우고, 나도 독일 갈 때 우리나라 작가들하고 몇 차례 참배를 갔었어요. 참 감개무량했었죠. 그러나 이분의 이름을 딴 상이 생기고 나서 내가 타리라곤 전혀 생각지 않았죠. 왜냐하면 한·독 문화 교류에 이바지한 사람한테 이 상을 줬거든요. 그러니깐 꼭 문인이 아니라 작곡가, 연주자, 칼럼리스트, 교수, 한국 문학을 독일에 알린 독일인 학자도 들어가고 이런 분들이 받다가 문학인으로서는 내가 처음 받은 거예요. 무슨 상이든 다 예기치 않은 것을 받게 되기 마련이지만, 상금은 많지 않지만 기쁘게 받았고, 앞으로도 이미륵 선생의 이름을 더럽히지 않게 내가 처신을 해야겠구나 그런 생각을 하죠.

김경주  꼭 한번 책을 읽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말씀의 연장인 것 같은데요. 선생님은 오랫동안 시인이자 독문학자로서 살아오셨잖아요. 감회가 남다를 거 같습니다. 학문을 연구하는 일과 시를 쓰는 사이의 시적 긴장을 지켜 내는 게 쉽지만은 않았을 것 같은데요. 요즘 젊은이들도 생업과 시 쓰기를 같이 하는 일을 굉장히 힘들어하는 부분이 있는데요. 독특한 선생님만의 방식이 있었다거나, 어떻게 시적 긴장을 학문과 시 쓰기 사이에서 유지할 수 있었는지 한 말씀 해주십시오.



내게 문학은 절제를 통해 균형감을 찾는 일


김광규  생업과 시업 사이의 긴장 관계라고 볼 수 있는데, 생업으로서 택한 것이 독일 문학입니다. 물론 내가 유럽 쪽의 문학을 해보겠다는 생각에서 선택한 길이지만 그러나 좌우간 어문학 아닙니까. 그중에서도 내가 시 쪽에 가깝지만. 우리말로 글을 쓴다는 것이나 독일어로 된 글을 읽고 분석하고 연구하고 학생들에게 가르치는 것이나 사실 언어만 다르지 많은 부분이 겹쳐요. 그래서 내 경우는 생업하고 시업 사이의 알력이라고 그럴까 그런 것이 그렇게 심각하지 않고 어느 정도는 서로 잘 화해하고 보조를 맞출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결과적으로는 정년퇴직할 때까지 30여 년을 독어독문학을 우리나라에 이식하는 일로 살아왔지만, 내 생에 후반기에 접어들면서 한국 문학도 독일어로 옮겨서 독일 쪽에 알려야 되겠다, 말하자면 이미륵 선생이 했던 것을 나도 후반기에 와서 했습니다. 그래서 내가 그나마 이미륵상을 탔을 거예요. 그 알력이 심각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세요. 독문학 교수로서 산다는 것과 한국의 시인으로서 사는 것, 이게 말하자면 교사 내지는 선생과 글을 쓰는 사람으로 갈려지는 건데, 교사의 경우는 어디서나 그렇지만 사회로부터 어떤 도덕적 기대를 받게 됩니다. 가령 ‘선생이 저런 일을 하다니’ 하면서 많이 욕들 하고 그러잖아요. 어떤 도덕적 의무감 같은 것을 항상 갖고 있습니다. 김 선생도 대학에서 강의를 하시니까 그런 것을 은연중에 느낄 것입니다. 거기에 비해서 소위 시 쓰는 사람들은 가장 내면적으로 자유로워야 하는 사람들 아니에요? 하다못해 언어의 문법적인 제약까지 거부하는 것이 시인이잖아요. 그러니깐 어떤 절대적인 자유가 필요한데 거기에 내 경우 알력이 있었던 거죠. 도덕적인 자제를 해야 하는 것이 생업이고, 시업의 경우에는 절대적으로 자유로워야 하는 것인데, 둘 사이에서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줄타기하듯이 잘 균형을 맞춰 오지 않았나. 그게 내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 주어진 것이 둘 다 문학이라는 것, 언어는 달라도 문학은 하나라는 것이 도움이 됐겠죠.



문학이라는 원시림으로 들어서다  


김경주  절제할 수 있다는 것이 시적 긴장으로 작용된 것 같아 제가 본받을 부분인 것 같습니다. 선생님 작품은 여기저기 지면에서 많이 보았는데 정작 문학청년이랄지, 어린 시절 얘기는 거의 못 봤던 것 같아요. 특별하게 독일 문학에 애정을 가지게 된 계기는 무엇입니까. 또는 문학청년 시절 얘기를 해주신다면 독자들이 많이 좋아할 것 같습니다.

 

 

김광규  질문이 문학 일반이 아니라 독일 문학에 관한 것이죠? 왜 독일 문학에 관심을 갖게 되었나. 일제 강점기 말에 태어났는데, 내가 1941생이거든요. 해방이 될 때 네 살, 다섯 살 아닙니까. 초등학교에서 일제 교육을 받지 않았습니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그 아래서 초등학교 교육부터 시작을 했습니다. 그때는 유치원 그런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내 경우는 공식적으로 일본어를 배운 바가 없죠. 일제 강점기에 일본이 우리말을 못 쓰게 하고 국어를 말살시키려고 했고, 심지어는 이름까지 일본식으로 고치려고 하고 그랬잖아요? 거기에 대한 반발로 해방 이후에는 일본어를 안 배우는 대신 영어가 제1외국어가 되어 오늘날까지 지속해 오는 거죠. 제2외국어를 택할 수 있었는데 내 경우는 독일어를 택한 것이, 독일은 유럽의 중부와 중부 이북 쪽인데 그전에 번역된 작품을 읽어 보면 북구 쪽이 내 코드에 맞고. 그래서 아마 내가 독일어를 열심히 하면 북구 문학, 우리나라에서 아무도 하지 않은, 전인미답의 원시림처럼 남아있는 북구 문학을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야심을 갖고 독문과를 택했던 거예요. 사실 학교를 진학할 때 어느 집안이나 의대를 가라, 법대를 가라는 것은 오늘날이나 비슷했을 텐데 내 경우는 집에서 그런 강제를 일체 안 했습니다. 그냥 너하고 싶은 대로 해라 그랬어요. 그래서 독문과를 갔죠. 그때부터 독어독문학을 공부하기 시작했는데, 그게 생각대로 쉽지 않았어요. 난 독문학을 빨리 하고 북구 문학의 원시림으로 들어간다는 것이었는데, 독문학 자체가 이미 원시림이어서 들어가서 막 헤맨 거예요. 들어가서 헤맨 게 ‘스테판 게오르게’라는 어떻게 보면 아주 읽기 힘든 시인의 시를 공부하겠다고 노력을 했었고, 대학원에서도 카프카 소설을 했는데 카프카도 읽어도 무슨 소린지 알 수 없는 소설 아녜요? 그런 데서 헤매다가 되돌아 나온 게 문학이 이런 것이구나 깨닫고, 독일 문학이 전나무 숲이고 한국 문학이 소나무 숲이라면 길을 건너서 소나무 숲 쪽으로 들어온 셈이죠.



어느 날 시가 내게 찾아왔다


김경주  독문학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가 시에 관심을 가진 계기가 있습니까. 자연스럽게 접하셨나요?

김광규  고등학교 시절부터 시를 썼습니다. 그 당시에 전국에 학생들을 위한 문예 잡지가 있었는데 문예 잡지 전국 콘테스트에 응모해서 1등을 한 적이 있어요. 그때 아마 2등, 3등 한 사람을 대면 놀라실 텐데. 그때 또 학생들을 위한 잡지로 『학원』이라는 것이 있었는데 거기에도 내 산문이 몇 편 실렸고. 내 기억으로는 안수길 선생, 최정희 선생이 심사 위원이었습니다. 시는 고등학교 때부터 쓰기 시작했고 대학에 와서도 여기저기 발표도 했습니다만 내가 꼭 시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은 없었죠. 왜냐하면 내가 독어독문학으로 들어섰으니까 독문학자로 뒤떨어지지 않는 사람이 되겠다는 것, 우선은 그것에 치중을 했습니다.

김경주  등단을 하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으셨나요?

김광규  등단은 동기들보다 많이 늦어졌죠. 내가 학교 다닐 때 1960년에 대학 1학년이었으니까, 지금말로 60학번이죠. 60학번에서 글 쓰는 친구들이 꽤 있었어요. 내가 다니던 독문과에 오늘날 문학 비평가로 활동하는 김주연, 염무웅 그 사람들이 다 같은 반이었어요. 얼마 전에 작고한 이청준 씨도 같은 반이었어요. 불문과, 프랑스 어문학 쪽에는 이미 작고한 지 오래된 김현, 김치수, 소설가 김승옥이 있었고, 영문과에는 소설가 박태순, 비평 활동을 하는 정규웅, 먼저 떠오르는 사람이 이런 사람이에요. 김지하는 미학과였고요. 좌우간 60학번에 글 쓰는 사람들이 꽤 있었습니다.

김경주  듣다 보니 그 시절 분들이 지금의 큰 선배님들이신데 당시 특별한 흐름이 있었을까요. 학교 다니실 때 문학이 활발했던 이유가.

김광규 우리 동기에서 문인들이 많이 쏟아져 나왔던 것인데, 여러 가지 설이 있어요. 하나는 12년 주기설이 있어요. 12년마다 한 번씩 많은 인재들이 나오는 주기가 있다는 것이죠. 우리보다 앞선 세대가 우리의 선생님들이었는데 그분들이 우리에게 많은 문학 교육을 해주신 선생님들이시고. 문학 쪽 만이 아니에요. 역사, 사회학 이런 데도 인물들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우리보다 12년 아래가 386세대에서 지금 50대 중반을 바라보는 세대죠. 아, 그래서 이게 거짓말은 아니구나.(웃음) 문학이라는 것이 누가 가르치거나 배워서 되는 것이 꼭 아니잖아요. 자기 스스로 하고 싶어서 하는 것이라 그런 것이 강했을 것이고. 또 하나는 이유가 될지 모르지만 그때는 대학을 나와도 출판사에 교정원으로 들어갈 수도 없었어요. 직장이 없었어요. 아주 잘 팔려야 신문 기자 되고, 법대나 상대는 다 고시 보고. 글을 써서 뭘 해볼까 하는 그런 것도 있었겠죠.

김경주  선생님께서 등단을 75년도에 하셨으니까.

 

 

김광규  아주 늦었죠. 내 동기들이 이청준 김승옥 박태순 이런 사람들인데 대학 다닐 때 신춘문예나 『사상계』 같은 잡지를 통해 화려하게들 데뷔를 했죠. 내가 그때 가지고 있던 좀 건방진 생각은 독문학 쪽에 내가 뭐가 되고 나서도 쓸 수 있지 않나 해서 주로 그쪽에 치중했고, 그 다음 나는 유학을 갔고. 가서 ‘문학은 언어만 다를 뿐 근본적으로는 다 같은 것이구나’를 깨닫고 돌아와서 정식으로 데뷔를 한 것이 75년이죠. 일반적으로 내 동기보다 10년이 늦은 것입니다. 늦깎이죠. 당시 35세로 늦은 거죠.

김경주  독일 유학 생활도 남달랐을 것 같아요. 요즘 유학 풍토와 다른 지점도 있었을 것 같은데. 많이 외롭거나 그러지 않았어요?

김광규 내가 70년대 초에 유학을 갔던 셈인데 유학생으로서는 나이가 많이 들어서 간 셈이에요. 그럴 수밖에 없는 게 그때는 우리나라가 아주 가난해서 아주 부잣집 아니면 집에서 돈을 대서 가기는 힘들고 장학금을 얻어서 가야 됐었는데, 나도 장학생 시험을 봐서 겨우 턱걸이를 해서 유학을 갔습니다. 가서 공부를 하는데 그 장학금이라는 게 죽기에는 좀 많고, 살기에는 너무 적은 액수였어요. 젊은 나이니깐 술도 마셔야 되고 담배도 피워야 하고, 독일이 지금도 그렇지만 담뱃값이 비싼 나라죠.

김경주  독일 상황이 그때는 지금하고 많이 달랐을 것 같아요.

김광규 그래도 국민소득으로 봐서 지금보다 훨씬 앞서가고 그럴 때였으니까요. (저는) 가난하게 살았죠. 아주 가난하게 살았습니다. 가난하니까 할 게 공부밖에 없어요. 오늘날처럼 여행을 다닐 처지도 못되니까 죽으나 사나 도서관에 가서 공부만 해서 독일 현대 문학에 관한 많은 공부를 할 수 있었죠.



우리 문학을 세계에 알리다 


김경주 우리 문학을 세계에 알리시는 데 있어서 선생님은 후배들에게 많은 귀감이 되고 있는데요. 독문학을 하는 학자로서, 또는 시인으로서 요즘의 젊은 시인들을 많이 보실 텐데 한국 문학의 가능성이랄지, 과거에 비해서 달라진 것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이런 부분은 바꿔야 하지 않나 하는 선생님만의 모색이 있으시면 말씀해 주십시오.

 

 

김광규  달라졌죠. 내가 1970년대 초에 유학생으로 독일에 갔는데 그로부터 20년 후에 여기서 교수가 된 후 교직 생활을 하다가 어느 독일 대학에 객원 교수로 갔었어요. 거기에서 ‘독일 문학의 한국 수용’이라는 주제로 강의를 했습니다. 보통 연구 교수로 가서 자기 공부만 하고 오는데 나는 강의를 했어요. 외국에 가서 외국어로 강의를 하는 것이 힘들죠. 내 반에 학생이 12명 정도 있었어요. 일종의 세미나 같은. 그런데 그 가운데 독일 대학생 초년생이 한국에서는 일본어를 쓰나 중국어를 쓰나 그런 질문을 하더군요. 그 학생으로서는 호기심도 느껴지고 그 사람들에게 극동 사람들은 똑같거든요. 우리는 중국인, 일본인, 한국인을 어느 정도 구분하잖아요. 그런데 그 나라 사람들은 구분을 못하죠. 그때 생각해 보니깐 70년대 초에 내가 유학 생활할 때 내 동료 학생들이 나에게 그렇게 물은 적이 있거든요. 너희들은 중국어를 쓰냐, 일본어를 쓰냐. 20년 동안 변한 게 하나도 없구나 하는 느낌이 들었어요. 그래서 내가 학생에게 독일에서는 영어를 쓰냐 프랑스어를 쓰냐 반문을 했어요. 한국에도 우리의 언어가 있고 문자가 있고 특히 한국의 알파벳은 세계적으로 가장 과학적인 훈민정음이라는 얘기도 해줬습니다. 그때 내가 느낀 것이 20년 동안 이렇게 변하지 않았구나. 내 객원교수 생활이 끝날 무렵에 독일 베를린에 ‘문학교류회’라는 문학 단체가 있었는데 거기에 찾아가서 노크를 한 것이죠. 내가 한국 문학을 독일어권에 알리고, 독일 문학은 한국에 이미 많이 알려져 있지만 독일의 젊은 작가들은 별로 안 알려져 있으니까 우리가 작가 교류도 하고 작품 교류도 하면 어떻겠느냐고 했죠. 그렇다고 해서 너희들에게 구걸을 하는 건 아니고 일대 일로 서로 비용 부담해서 해보겠냐고 했더니 그 사람들이 흥미를 표시하더라고요. 1991년에 우리나라 작가들 소설가, 시인, 비평가를 포함해서 열 명 가까운 인원이 독일의 베를린에 가서 굉장히 많은 청중들, 백 명이 넘었으면 많은 청중이죠 거기서는. 그 사람들 앞에서 한국어로 작품을 읽고 번역된 것을 독일 파트너 작가들이 독일어로 읽고. 통역자를 내세워 서로 질의응답을 하고 신문이나 방송 인터뷰도 나가고 그랬어요. 그게 아마 한·독 문학 교류 최초의 정식 데뷔가 아닐까. 물론 그전에도 산발적으로 단행본으로 출판해서 독일 시장에 나간 게 있긴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도 그렇지만 단행본으로 책이 나가면 책방에서 고아가 되어서 사라져 버려요. 호수에 돌멩이 던지듯 가라앉아요. 종이배처럼 떠다니려면 시리즈로 나가야 어느 구석에든 꽂히거든요. 그래서 그 다음에 한국 문학 시리즈를 만들어서 독일에서 나오기 시작했고, 말하자면 한·독 문학 교류를 시작했던 것입니다. 물론 나보다 앞서 시도한 분들이 있었지만 내가 그 당시의 문예진흥원, 대산문예재단, 파라다이스 문화재단의 지원을 받아서 본격적인 한·독 문학 교류를 시작했어요. 그때부터 시작해서 벌써 15년이 지나갔는데 독일에 한국 문학의 교두보를 구축하는데 내가 어느 정도 기여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1999년에 내가 오스트리아 비엔나대학에 객원 교수로 가서 그때는 강의를 두 개 했습니다. ‘독일 문학의 한국어 수용’과 ‘한국 문학의 독일어권 수용’. 독일어권이라고 하면 독일, 오스트리아, 스위스 다 들어가니까. 그때는 이미 학생들 가운데 몇몇은 한글 텍스트를 읽을 수 있었어요. 그러니까 그 십 년 동안에 장족의 발전을 한 거죠. 몇 년 전에 ‘프랑크푸르트 국제 도서전’에서 한국이 주빈국으로 참가했죠. 굉장한 성과고 문화 올림픽에서 우리가 큰 성과를 거둔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런 것을 통해서 우리 문학의 해외 진출은 일단 시작은 된 거예요. 오늘날 작가나 시인은 우리 때보다는 훨씬 기회가 많습니다. 번역돼서 외국에 소개될 수도 있고, 가령 외국어 실력, 우리 또래는 일본말을 못하니까 서양어를 직접 하는 수밖에 없었거든요. 실제로 언어가 자유롭거나 그런 정도는 몇몇을 빼면 힘들거든요. 그런데 요즘 젊은 세대 작가들은 영어도 잘하고 미국의 창작 프로그램에 가서 한국 문학을 소개하고 다른 나라 작가와 토론도 하고 그런 것을 보면 굉장히 마음 든든해지는데요. 지금 21세기에, 2010년이 넘으면 상당히 우리나라 문학이 알려지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문학은 멸종하지 않는다


김경주 상대적으로 영어나 외국어에 대한 경험과 같은 환경적인 부분은 굉장히 풍성해졌는데요. 과거에 비해서는 영상 문화가 발달하다 보니까 문학을 별로 안 하려고 하는, 영화나 공연, 연극 이런 쪽으로 관심의 폭이 더 다변화된 것 같습니다. 오히려 과거 우리 선배님들보다는 문학에 대한 열정이나 문학 인구는 더 줄어들고 있다는 우려도 있습니다.

김광규 내 생각은 그렇지 않습니다. 영상 매체가 영향력을 많이 차지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죠. 영상 예술이 생긴 지 100년이 넘고 일반 대중의 인기를 끌기에 아주 좋은 매체입니다. 눈뜨고 귀는 열려 있고 보면 되는 것 아닙니까. 영상은 하나의 일루젼(illusion)입니다. 거기에 영원히 매료되지는 않습니다. 사람들은 인생을 살아가면서 영화, 연극을 많이 보는 나이가 있습니다. 문학 작품은 그렇지 않습니다. 문학 작품은 같은 작품이라도 나이 들어서 읽을 때 또 달라지는 무엇이 있어요. 영상 매체들이 발전해서 장르 영화로 분화됐잖아요. 서부 영화 좋아하는 사람은 하루 종일 말 타고 총 쏘는 거 볼 수 있고, 추리물 좋아하는 사람은 총 쏘고 뛰어내리는 거 볼 수 있는데, 그러나 그것을 영원히 보지는 못해요. 영상 매체지만 시적인 서정성이나 소설적인 서사성이 들어가 있어야 보거든요. 그것을 공급하는 쪽이 바로 문학입니다. 그래서 문학하던 사람들 중에서 영화감독도 나오잖아요. 그러나 영화감독 하다가 소설이나 시 쓰는 사람은 드물죠. 문학하다가 그쪽으로 나간 사람도 많고 대개 그런 사람들이 성공합니다. 그런 예를 실명으로도 거명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영상 매체는 문학 쪽의 서정성이나 서사성이 없으면 성공을 거둘 수 없을 것입니다. 영상 예술의 수요가 많으니깐 옛날보다 많이 그쪽으로 가려고 하는 것은 당연한 거고 굉장히 화려해 보이잖아요. 영상에 나와서 다른 사람의 관심의 표적이 되고 그런 것이. 그러나 글을 쓰는 것은 대개 숨겨져서 혼자 쓰는 거죠. 요즘은 책 표면에 얼굴도 들어가고 하지만 옛날에는 얼굴도 안 들어갔잖아요. 이름 석 자만 들어갔어요. 그래서 문학이라는 것은 오로지 여기 쓰여 있는 활자를 통해서만 전달이 되는 거였죠. 특히 시의 경우는 시 쓴다고 소리소리 지르고 다니는 사람 없잖아요. 대개 몰래 숨어서 쓴다고요. 소설이야 생업에 보탬이 되니까 집에서도 “아빠가 소설 쓰신다 조용히 해라” 그러겠지만 그런데 시는 혼자서 몰래 조용히 쓴다고. 남이 안 볼 때.(웃음) 문학이라는 것은 속성이 영상 매체와 그런 점에서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 있기 때문에 문학에 취향이 있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것이죠.

김경주 한국의 시인이나 시 쓰는 사람들만이 그렇습니까. 독일에도 시를 쓰시는 분들이 그러합니까?

 

 

김광규 비슷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보통 외국에 나가면 명함을 가지고 다녀야 하는데 서로 이름이 너무 다르잖아요. 기억을 잘 못한다고. 명함을 나누는데 특징이 시인이나 소설가는 명함에다가 시인이나 소설가라고 안 써요. 다른 직업은 자기가 무엇이라는 것을 다 쓰잖아요. 이름만 쓴 명함이 아니라면 명함이 없다는 것이 명함입니다. 그게 다 비슷한 데가 있고, 가령 숨어서 시를 쓴다든가 얼굴 없이 이름만으로 소설을 낸다든가, 이런 것이 피차간에 비슷한 그런 게 있습니다.



한없이 투명하고 명징한 단순성의 시학


김경주  선생님께서 ‘문학은 죽지 않는다, 멸종할 수 없다’라는 믿음을 후배들에게 다시 한번 심어 주신 것 같아 좋습니다. 지금까지 시에 대해서 말씀해 주셨고 독문학자로서 후배들에게 귀이 되고 영향을 많이 준 것도 사실이지만, 선생님 시를 읽고 짝사랑했고 시를 통해 많은 것을 느꼈던 이들도 많은데요. 흔히들 선생님의 작품을 ‘단순성의 시학’이랄지, ‘굉장히 맑은 정신으로 또박또박 써 내려간 듯한 시편들이다’라고 평하기도 하는데요. 정작 선생님께서는 ‘나의 시는 이렇다’고 그리 많은 말씀을 하시지 않은 것 같아요. 텍스트로서 보여 줬기 때문에 다른 선배님들보다는 오히려 침묵으로써 보여 주셨던 것 같은데요. 특별한 시적 태도랄지, 시에 대해서 가지는 생각이 있으신지요. 

김광규  그건 아마 인생관의 차이일거예요. 나는 시인이라고 해서 시인이라는 것을 나타내고 예술가인 척하고 별로 그래 본 적이 없어요. 작품을 쓸 때도 숨어서 쓴다고 얘기했지만, 그런 쪽으로 알리지 않았고 나 자신에 관한 말도, 말하자면 스테이트먼트(statement)를 별로 한 적이 없습니다. 작가나 시인은 작품을 통해서, 자기의 작품을 통해서 말하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하거든요. 내가 지금까지 낸 시를 읽고 시를 통해서 서로 알게 되고 그러면 몰라도 내가 앞장서서 그런 말을 하고 싶지는 않은데요. 그래도 그 질문에 대답할 수 있다면 내가 중학교 다닐 때는 사실 책을 구하기가 참 힘들었어요. 6·25 한국전쟁이 1953년에 끝났는데 내가 그때 중학교에 들어갔거든요. 요즘처럼 이런 책이 없었어요. 대본점에 가서 돈 얼마씩 내고 삼국지 번역본을 빌려서 본다든가 이광수의『흙』이나, 홍명희의『임꺽정』을 빌려서 본다든가 했어요. 그런 데서부터 책을 읽으면서 사실 문학 공부를 어디서 배웠다기보다는 혼자서 한 거고 좋은 선생님들에게서 여러 가지 과목을 배웠지만 문학을 누구한테 가서 사사했다든가 그런 것은 없었습니다. 문학은 나 혼자 공부한 것이고 배웠다든가 깨달았다면 독일 문학의 현장에 가서 깨달은 것일 텐데요. 내가 우리나라에서 독일 문학을 할 때 아까 스테판 게오르게나 카프카를 했다라고 했는데 그게 다 어려운 작가들이에요. ‘독일 문학은 이렇게 어려운 것이구나’ 통감을 했고 그 당시에 우리나라 문학 작품 가운데 특히 시 쪽은 전쟁이 끝난 이후에 현실 생활이 아주 힘든 때라 현실 상황이 반영된 작품들이 많이 나왔을 것 같은데 그렇지 않고 의외로 모더니즘 계열의 시가 많이 나왔어요. 얼마만큼 진실한 의미에서 모더니즘이라고 불러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읽어가지고는 모를 소리가 시집으로 출판됐어요. 많이도 아니죠, 그나마도. 그래서 시라는 것은 남이 모를 소리를 써야 하지 않나 그렇게 생각하고 또 그렇게 쓰려고 했어요. 그런데 독일에 가서 독일 현대 문학 쪽을 읽어 보니깐 그게 외국어인데도 무슨 소린지 알겠어요. 놀랬죠. 아, 시를 이렇게도 쓰는구나. 현대에서부터 리얼리즘 시대까지 거꾸로 올라가면서 읽어 보니깐 다 무슨 소린지 알겠어요. 그때 말하자면 아, 시라는 것은 모든 문학 작품과 마찬가지로 시인이 발표할 때는 뭔가를 전달할 수 있어야 하고, 상대방이 공감할 수 있어야 하고, 그 시대 현실을 어떤 각도에서든지 반영할 수 있어야 하고, 자기 내면을 포함해서 그걸 내가 깨닫고 돌아온 거예요. 1975년에 내가 《문학과지성》이라는 계간 문학지에 시를 네 편 발표하면서 데뷔를 한 셈인데, 거기 데뷔작에 맨 첫 번째 작품이 「시론」이었어요. 「시론」이라는 것은 여러 시에서부터 귀납적으로 공통된 논리와 흐름을 추출해 내든가, 많은 시에서부터 연역해 내는 것이 시론 아니에요? 그런데 나는 「시론」을 맨 처음 시로써 썼어요. 그러니까 굉장히 건방지다는 말을 들었죠. 처음에 나온 놈이 무슨 시론이냐고 말이죠.(웃음) 근데 「시론」이 지금까지 굉장히 많이 인용이 되는데 거기서 내가 밝힌 게 그겁니다. 시인이, 언어와 문자에다가 생명을 걸고 살겠다는 그 시인이 써서 성공할 수 있는 게 무엇이 있나, 굉장히 절망적이게도 나는 “없다”고 했어요. 그런데 절망적인 시 쓰기를 되풀이하는 게 시인이고, 시인의 숙명이다. 그래서 나는 그때 발표했던 시부터 지금까지 남이 읽어서 알 수 있는 소리를 계속 써 왔습니다. 지금 ‘단순성의 시학’이라는 말이 나왔는데, 나는 시어를 쓸 때 굉장히 골라서 쓰지만 문법, 구문을 시에서는 파괴할 자유가 있습니다. 그러나 파괴하지 않았어요. 왜냐하면 그 테두리 안에서도 전달할 수 있는 게 시인이라고 생각했거든요. 내 시에 관해 사람들이 명징성이니 단순성이니 하는 말을 하는데 그건 내가 굉장히 노력해서 이룩한 거예요. 그때 내가 처음 시를 발표했을 때 많은 평자들이 ‘이건 시가 아니다’고 그랬어요. 그동안 내가 열 권 가까이 시집을 냈고 외국에 번역돼 외국 독자들이 생기고 그러니깐 그 사람들이 이제는 조용하죠. 그런데 처음에는 어떤 사람들은 ‘이건 아주 혁명적이다’고 말한 사람도 있고, 심지어는 ‘시가 아니다’라고 주장한 사람도 있었어요. 그렇다고 내가 쓰는 명징하고 단순한 언어를 사용하고 그런 것만 시라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에요. 다 포용할 수 있는 게 문학이에요. 다른 데하고 다른 것이 다양성입니다. 다양성의 공존이고, 다른 작가나 시인의 모든 것을 인정해야 하는 것이고, 그렇게 하지 않는 사람도 많죠. 자기나 자기의 부류만 옳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 사람들은 문학을 잘못 선택한 것이 아닐까 해요.(웃음)



소리가 살아 있는 시가 시간을 견딘다


김경주 선생님께서 독문학을 계속해 오시면서 엄정한 독문학 번역의 과정이 포함돼 있고 남의 문학을 오독하지 않기 위해 섬세하고 디테일한 것까지 고민을 많이 하시는 게 선생님 시에서 고스란히 드러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정갈한 언어랄지, 굉장히 절제되었다는 느낌을 저도 학창 시절에 많이 받았는데요. 그게 정말 단순하다고만 표현할 수 없는 지점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선생님의 시집들을 보면 큰소리로 말하지 않으면서도 꾸준히 열 권에 가까운 시집을 내오셨고, 후배들은 오히려 뒤로 시간이 흐를수록 선생님 시를 다시 꺼내보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시인의 길이라는 건, 선생님이 말씀하신 다양성이라는 게 있는데 이런 길도 참 중요하구나 깨닫게 됐습니다.

김광규 명징성, 단순성과 곁들어서 내 시에 붙어 다니는 별명 중에 하나가 ‘쉬운 시’인데요. 사실 ‘쉬운 시’라는 것이 우리가 1차적으로 읽어서 금방 느끼는 것과 자꾸 읽으면 그 속에 두 번째, 세 번째 겹이 있는데 양파 벗길 때 느끼듯이 그런 것이 다 담겨 있어요. 겉으로 보아서는 단순해서 ‘쉬운 시’라고 그러는데 쓰는 사람은 절대로 쉽게 쓰는 게 아닙니다. 수없이 고치고 그래서 여기에 도달하는 거예요. 내가 여기 예를 하나 들어 볼게요. 적절한 예가 될지 모르겠지만. (시집을 꺼내 골라든다) 내 것이 외국에 번역돼 나온 시집도 몇 권 있는데, 이것이 중국에서 나온 겁니다.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라는 제목을 붙였지만 아마 이게 선집이죠.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가 많이 알려졌기 때문에 이 제목을 붙인 것 같은데 여기에 번역돼서 실린 것을 보면 한 쪽은 중국어로, 한 쪽은 우리말로 돼 있거든요. 「가을 하늘」이라는 시가 여기에 있습니다. 시를 한 편 읽어 볼게요.


가을하늘


구름 한 점 없이

파란 가을 하늘은

허전하다

땅을 덮은 것 하나도 없이

하늘을 가린 것 하나도 없이

쏟아지는 햇빛

불어오는 바람

하늘을 가로질러

낙엽이라도 한 잎 떨어질까 봐

마음 조인다

얼마나 오랫동안

저렇게 견딜 수 있을까

명령을 받고

싹 쓸어버리기라도 한 듯

구름 한 점 없이

파란 가을 하늘은

두렵다


짧은 시입니다. 그런데 이 시가 우리나라에서 신군부 독재가 한창 득세할 때 나온 거거든요. 80년대 초에 나온 시인데 당시에 검열도 심했었고, 이 시는 검열에 걸리지 않고 발표가 됐습니다. 해독한 사람이 한 사람 있었어요. 지금은 작고했는데 서울대 영문학과 교수인 김영무 씨라고 비평가이자 시인으로서 좋은 시 작품을 남긴 분이에요. 그분이 이것을 읽고 시평을 썼어요. 그분이 쓴 시평을 읽고 나서 ‘아, 이 사람 한 사람이 이 시를 제대로 읽었구나’라고 생각했어요. 생각해 보세요. 그냥 한 번 읽고 듣고 나면 언제고 볼 수 있는 가을 하늘이죠. 가을 하늘이 맑게 개이면 우리는 구름 한 점 없다고 좋아하잖아요. 그래선 안 된다고 메시지를 담고 있는 거 아니에요. ‘싹 쓸어버린다’는 말이 나왔지만 군부 정권이 싹쓸이 식으로 이 세상을 다스리려는 것에 대해 일종의 반론을 제기한 건데, 그대로 말하면 걸리니깐 이런 식으로 말한 거 아니겠어요. 그 당시에 소설보다 시집이 나올 수 있었던 것이 바로 이런 우회로가 있었기 때문이죠. 당시에 많은 사람들이 가을 하늘을 노래한 시라고 생각하지 언제 써졌고, 전후 사정이 어떻게 해서 나왔나를 말한 사람은 드물거든요. 지난번에 내가 중국에 작가 교류 프로그램으로 ‘한중 문학 포럼’에 참가했었는데, 북경대학의 교수 조문헌 씨라고, 차오엔센인데 국문과 교수예요. 이 양반이 소설을 잘 써서 우리나라 교재에도 실려 있습니다. 그 사람이 그러더라구요. 대담을 하는데 자기가 이 시집을 재밌게 읽었다고요. 그러면서 이 시가 좋아서 학생들에게 읽어 줬다는 거예요. 그중에서 잠자리에 관한 것과 이 시(가을 하늘)를 학생들에게 읽어 주었어요. 중국에서 한류에 관해서 이야기하고 그러지만 그게 영화나 팝송이나 그런 데에 있는 게 아니라 이런 기초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문학의 저 아래에서부터 출발한 거다. 내가 한 말은 영상 매체라는 것이 그 자체로가 아니라 저 아래 문학이라는 바시스(Basis)가 있어서 한 거다. 그 분이 이야기하는 것을 보니깐 정치적 함의는 해독을 못한 거죠. 정치적 함의는 몰라도 이 시는 그 자체로 좋다. 중국어 번역이 잘 된 것 같아요. 이러한 데서 느낄 수 있듯이 내 시에 대부분이 난해한 시는 없잖아요.(웃음)

 

 

김경주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대 반영적인 은유들이 굉장히 많이 있지 않습니까.

김광규  네. 사실입니다.

김경주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우회로가 시에서는 은유의 형태, 메타포일 텐데요. 선생님은 시를 쓰시고 본인이 직접 낭독을 해보십니까.

김광규  나는 낭독회를 많이 참가했습니다. 특히 독일에서 1999년에 내 시집이 나왔는데, 독일 것도 이것과 마찬가지로 시 선집이지만 그쪽에서는 「조개의 깊이」라는 것이 「Die Tiefe der Muschel」로 나왔는데 (책을 가리키며) 그게 아마 이거죠. 이게 우리나라 풍경 아니에요. 어떤 독일 사진작가가 우리나라에 왔다가 찍은 거예요. 독일에서는 문학 작품이 단행본으로 출판이 되면 대개 출판사에서 조직을 하고 지방에 조그마한 도시에까지 ‘문학예술의 집’이라는 단체들이 있는데 지방의 독립성, 지방 자치가 강하잖아요. 전국의 주요 도시를 돌면서 이것을 가지고 낭독회를 엽니다. 나는 한국 시인이니까 한국어로 몇 편을 읽고, 경우에 따라서는 그것을 다시 독일 청중이니깐 독일어로 읽어 주고 아니면 독일의 시인이나 배우를 파트너로 붙여가지고 읽어 줘요. 독일어는 그 사람들이 읽어야 훨씬 시처럼 들리겠죠. 그러고 나서 질의응답 토론도 하고, 맨 마지막에 서명 판매도 하고 그렇게 전국을 도는 것이 으레 책을 내면 도는 코스로 되어 있어요. 독일의 유명한 가령 베를린, 뮌헨, 함부르크, 프랑크푸르트, 쾰른부터 시작해서 스위스의 취리히, 로잔, 오스트리아의 브레겐츠, 빈 이런 데를 다 돌면서 시 낭독을 했어요. 시 낭송이 이른바 낭독 문화인데, 우리나라는 낭독 문화가 어느 정도 형성돼 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옛날에는 우리가 시조를 읊었잖아요. 오늘날에는 묵독을 하는데 익숙해져 있는데, 사실 시는 소리와 뜻이 결합된 거라 소리 내어 읽는다는 게 굉장히 중요하고 또 그것을 원작자가 읽을 때는 뉘앙스가 달라지고요. 사람들이 낭독회를 하면 공짜가 아니라 입장료를 내고 와서 그걸 아주 진지하게 듣습니다. 독일 문화의 일부예요. 다른 나라보다 독일이 그게 강한 것 같더라고요.

김경주  제가 개인적으로 하고 있는 일이 공연 낭독회를 많이 하는 건데, 항상 벤치마킹을 하게 되요. 독일의 낭독 문화는 소리가 살아 있는 것과는 달리 우리나라는 음독, 숨어서 읽거나 혼자서 읽는 것이 많은데 한국 문학이 보다 소리가 살아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김광규 낭독 문화를 되살리는 것이 우리나라 문화, 문학을 어느 한 면으로 풍성하게 만드는 길이죠.



시인은 최소한의 언어로 보편성을 획득하는 일


김경주  그런 측면에서 요즘 젊은 친구들의 시 세계는 과거보다 낯선 언어를 쓰기도 하고, 더 모더니즘적으로 가기도 하고 전위라고 부르는 것을 많이 하기도 하는데요. 선생님은 요즘 젊은 친구들의 시 세계를 보면서 어떤 생각을 가지시는지요. 덕담이랄까, 이런 부분은 부족하다든가 하는 말씀을 해주시면 후배들에게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김광규  우리나라가 문학인들이 아주 많은 나라입니다. 시인도 수요로 보면 우리나라가 상당히 많은 쪽에 들어가고, 출판되어 도서 시장에 나오는 시집도 굉장히 많고. 사실 내가 우리나라에서 나오는 시집을 다 읽을 수는 없지만 나에게 보내 주는 시집은 들춰 보고 되도록 많이 읽어보려고 노력합니다. 사실 우리나라 젊은 시인들의 시를 다 읽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젊은 시인들의 경향이랄까 하는 것은 알 수 있죠. 젊은이들은 언제나 자기 시대에 대해서 반항 또는 저항하기 마련이고 어느 분야에서든 다 마찬가지일 거예요. 문학에서도 그런 부분이 두드러지게 나타나서 우리나라 젊은 시인들이 발표하는 작품들이 우리 세대, 늙은 세대들이 바라보는 안목으로 보면 굉장히 과격한 언어를 많이 쓰고 이미지도 마찬가지겠죠. ‘우리하고 많이 다르구나’를 느끼는데, 젊은 사람은 젊은 사람다워야 되기 때문에 그런 패기는 도전으로 높이 평가합니다. 그런데 나이 먹은 사람 측에서 보면 우리말, 우리 언어를 좀 더 아껴야 하지 않나 이런 생각을 합니다. 시인이란 문법을 파괴할 수도 있고, 되는 소리 안 되는 소리를 다 써도 되는 게 시인의 특권이죠. 그건 우리나라뿐 아니라 전 세계가 다 그렇죠. 그렇게 쓰기 위해 시인이 된 거고. 그런데 자기가 시를 써서 발표할 때는 누군가가 읽어야 하고 누군가에게 말하고자 하는 것을 실은 나도 잘 모르고 메시지가 담겼겠지만 그게 어떤 정치적인 이념과 달라서 뭐라고 말하기 힘든 거 아니에요? 그래도 그것이 전달되려면 되도록 많은 독자를 가져야 하고, 그러려면 언어를 아껴야 하지 않을까. 언어를 너무 많이 파괴하고, 파괴를 해야만 시라고 생각한다든가, 물론 젊어서 그럴 수 있지만 그렇게 되면 남는 게 없어요. 언어라는 게 최소한의 보편성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데 전달이 전혀 안 된다든가, 가령 험악한 말들만 동원해서 늘어놓고 끔찍한 이미지만 나열하고 그것이 시라고 생각한다면 오해가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어요. 가령 20세기 초에 있었던 독일의 표현주의 문학이 지금 우리나라 시하고 아주 비슷했어요. 그 표현주의 문학이 지나가거든요. 그러나 오늘날 와서 표현주의 문학을 읽어 보면 또 고전적으로 보여요. 피카소의 작품이 옛날에는 고전적으로 보이지 않았지만 지금 보면 아주 고전적으로 보이잖아요. 그런 특성이 있으니깐 단언을 할 수는 없는데, 나라면 저 사람들의 열정이나 실험 정신을 가지고 언어를 파괴하는 게 아니라 살리는 쪽으로 아껴 보면 어떨까 그런 생각이 들어요. 우리가 지금 문학의 세계화에 대해서 얘기했지만, 문학의 세계화는 번역을 통해서 이루어지는데 언어가 완전히 파괴되면 번역이 안 돼요. 꼭 외국에 알려지기 위해 하는 건 아니지요. 그러나 좌우간 언어를 아껴 달라는 게 내 당부의 말이죠.



시간의 부드러운 손을 잡고 가다 


김경주  아주 좋은 덕담이 된 것 같습니다. 선생님 시를 가지고 많은 얘기들이 오고 갔는데, 시간에 대한 얘기는 아주 일관적이었던 것 같습니다. 요즘 젊은 비평가가 선생님 시를 가지고 시간에 대해 ‘시간의 굳은살’과 ‘시간의 손’이라는 명제로써 굉장히 근사하게 얘기한 적이 있습니다. 선생님께서 열 권에 가까운 시를 써 오면서 시간에 대한 이야기를 계속 언급해 오셨는데, 시를 쓰시면서 선생님께 시간은 어떤 것이었는지가 개인적으로 듣고 싶은 지점이었습니다.

김광규  글쎄. 우리가 시간 속의 존재이기 때문에 아마 시간은 느낌이 각 세대별로 다 다를 거예요. 시간의 샘물이 솟아올라 고여 있을 때 그때는 시간이 가는 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우리가 아주 어렸을 때, 미취학 아동이었을 때 엄마가 외출하면 그 기다리는 시간이 얼마나 길었습니까. 아마 한 시간이라도 굉장히 길게 느껴지고 무료하고, 젊은 날이 될 때까지 그렇죠. 나이 먹으면서 점점 급물살을 타고 나중에는 폭포가 되어 떨어지고 그러는데 그 시간을 느끼는 감각이 세대별로 다 다르고 같은 세대에서도 달라질 수 있기 때문에 뭐라고 말할 수 없지만 새삼 이제 회갑을 지나고 정년퇴임을 하면서 느끼니깐 구체적으로 느끼지 못하면서 살아왔던 시간, 물처럼 부드러운 그 시간이 사실은 우리가 피해갈 수 없는 가장 무서운 무엇이 아닌가. 그래서 최근에 나온 시집 제목을 『시간의 부드러운 손』이라고 붙였는데, 가장 폭력적인 것인데 절대로 폭력을 쓰지 않고 아주 부드럽게 뒤에서 손을 떠미는 것 같은, 그게 바로 우리가 헤어날 수 없는 시간이 아닌가 그런 느낌이 듭니다. 그런 시간에 대한 깨달음, 무상감 그런 게 나의 시 여기저기에 많이 나와 있을 겁니다. 근데 시간에 대해 이런 느낌은 누구나 다 결국은 자기 작품 속에 반영되기 마련 아닐까요.

김경주  어떻게 보면 보편화된 이야기기도 하지만 과장되게 자기 전개를 하지 않으면서도 꾸준하게 자신의 길을, 시적 긴장을 유지하는 것이 후배들이 배워야 될 점이 아닌가 하는데요. 오늘 말씀으로 정말 제가 고민하고 있었던 부분을 많이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폐가 되지 않는다면 제가 너무나도 좋아하는 선생님의 시 한 편 낭독해도 되겠습니까.

김광규 영광이죠.

 

 

김경주 아까 선생님이 낭독하신 거 보니깐 선생님 시를 소리로 들었을 때 음악성이 더 산다는 느낌이 들었는데요. 최근에 시집 중에 제가 좋아했던 시가 있습니다. 「비오는 주말」이라는 텍스트인데요.


비오는 주말


워낙은 네 식구였다

비오는 주말에는

서울에 사는 아들과

며느리가 내려오지 않는다

아버지는 몸이 아파 거동이 힘들고

딸과 어머니만 비옷 입은 채

밭일을 한다

땅바닥이 질척거리고

옷이 축축하게 젖어도

흙을 고르는 호미질에 섞여

도란도란 모녀의 말소리 평화롭다

걱정거리 많아도

손님이 없어서 홀가분한 듯


김광규 가족에 관한 시인데 우리가 사실 이 세상에 태어날 때 혼자서 태어나잖아요. 혼자서 태어나 보니깐 아빠, 엄마가 있고 형제자매가 있고 그런데 또 하나하나 헤어져서 죽을 때는 혼자서 죽는 거죠.

김경주 이 시를 읽으면서, 추석에 고향에 내려갈까 말까, 혼자 자취 생활을 하면서 10년 가까이 살고 있는데 항상 명절이 다가오면 그런 생각을 하게 돼요. 아 이번에는 내려가기는 해야 하는데, 긴가민가할 때가 있는데, 이번에 선생님과의 대담 약속이 생기고 나서 시집을 읽으면서 굉장히 울컥해서 뭐가 없어도 저도 부모님께 얼굴 한번 보여드리는 게 큰 게 되겠구나 하고 결정하는 계기가 됐습니다.

김광규  아주 깊이 잘 읽으셨네요.

김경주 선생님 만나면 낭독 한번 해드려야겠다고 생각하고 왔습니다. 오늘 말씀 너무 감사드리고요. 마지막으로 대담을 떠나서 선생님 개인적으로 앞으로 가지고 있는 계획이랄지, 시적 전개에 대한 모색에 관해 한 말씀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시는 늘 처음이고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며 쓰는 것


김광규 괜히 하는 일 없이 바쁘고 프로그램 같은 것에 쫓기지만 예나 이제나 다름없이 시를 쓰려고 노력하고, 시를 쓴다는 것은 모든 시인이 느끼겠지만 한 편 한 편을 쓸 때마다 그게 처음이고 마지막인 것처럼 느껴집니다. 내가 지금까지 발표한 시가 한 7, 8백 편 될 텐데요. 뭐든지 간에 7, 8백 번 했으면 익숙해져서, 말하자면 프로가 돼서 쉽게 쓸 수 있을 것 같은데 시는 그렇지가 않아요. 요즘도 시상이 떠오르면 메모해 놓고, 틈나는 대로 꺼내서 고쳐 보고, 또 어디서 청탁이 들어오면 그중에서 제일 낫다고 생각하는 것을 고르고 다시 수없이 고쳐 쓰고 나중에는 청탁 기일에 쫓겨 발표하고. 그 다음 시집으로 낼 때 다시 고칠 것은 고치고, 그렇게 해도 이것은 완벽한 작품이라고 절대로 생각되지 않습니다. 시라는 것이 아주 묘한 거예요. 아마 이 세상에서 전공으로 할 수 없는, 전문적으로 대가가 될 수 없는 유일한 게 시 쓰기가 아닐까. 시 쓰기는 텍스트가 짧은 것에 비해 굉장히 시간이 많이 가는 작업이죠. 그건 시를 써 본 사람만이 아는데, 우리가 소설가들 하고 얘기할 때는 소설가들이 시인을 우습게 여기고 “짤막한 거 그거 뭐 어렵냐”고 그러는데 자기들 보고 써 보라고 하면 못 씁니다. 3백 페이지짜리 소설은 써도 4행짜리 시는 못 쓰잖아요. 시라는 것이 짧지만 1, 2년 걸리는 것도 있을 수 있고, 어떤 것은 착상을 했던 것을 끝끝내 못 쓰는 것도 있어요. 아주 오래 걸리고 숙달될 수 없는, 모든 게 숙달되는데, 시 쓰기는 숙달될 수 없는 작업이고, 그래서 시를 계속 쓰는지도 몰라요. 숙달될 수 없기 때문에. 찍어 내듯이 쓴다면 무슨 재미가 있겠어요. 그 짧은 텍스트 하나를 처음이자 마지막처럼 쓰는 것. 앞으로 시간의 칩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했잖아요. 갈 때까지 그게 내가 계속해서 해야 할 일이죠.(웃음)

김경주 처음이자 항상 마지막인 듯한 자세로 쓴다는 것. 저도 시 쓰면서 느껴지는 지점인 것 같은데요. 저도 귀하게 마음속에 담고 있겠습니다. 이 세상에 전공이 될 수 없다는 것, 숙달될 수 없고, 끝까지 닿을 듯 닿을 듯하지만 아슬아슬한 그 매혹된 시 쓰기를 포기할 수 없다는 것을 깊이 공감합니다. 선생님 오늘 말씀 정말 고맙습니다. 건강하십시오.

김광규 고맙습니다.《문장 웹진/2008년 11월호》




김광규  1941년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대 독문과 및 동 대학원 졸업했다. 1975년 계간 《문학과 지성》을 통하여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우리를 적시는 마지막 꿈』『아니다 그렇지 않다』『크낙산의 마음』『좀팽이처럼』『아니리』『물길』『가진 것 하나도 없지만』『처음 만나던 때』『시간의 부드러운 손』등이 있다. 영역 시집으로 『Faint Shadows of Love』『The Depths of a Clam』, 독역 시집으로 『Die Tiefe der Muschel』, 일역 시집으로 『金光圭 詩集』, 스페인어 번역 시집 『Tenues sombras del viejo amor』, 중국어 번역 시집 『模糊的?愛之影』,산문집으로 『육성과 가성』『천천히 올라가는 계단』이 있다. 김수영문학상, 대산문학상, 편운문학상, 녹원문학상, 오늘의작가상과 독일 학술원의 프리드리히 군돌프 문화상, 이미륵상을 수상했다.


김경주  1976년 전남 광주에서 태어나 서강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했다. 2003년 대한매일(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으며 <불편>동인으로 활동 중이다. 시집 『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기담』이 있으며, 산문집 『passport』『펄프 키드』가 있다. 연극실험실 <혜화동 1번지>에 작품을 올리며 극작가로도 활동하고 있으며, 현재 자신의 작업장 <나는 공항flying Airport>에서 다양한 인디문화 작업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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