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국동울음상점 외 3편

 

장이지

 

 

 안국동울음상점

 천사

 십칠야 날씨, 포근함

 너구리 저택의 눈 내리는 밤



안국동울음상점




나선형의 밤이 떨어지는 안국동 길모퉁이, 밤 푸른 모퉁이가 차원의 이음매를 풀어주면, 숨 쉬는 집들, 비칠대는 길을 지나 안국동울음상점에 가리.

고양이 군은 바닐라 향이 나는 눈물차를 끓이고 나는 내 울음의 고갈에 대해 이야기할 것이다. 진열장에 터키석처럼 놓여있는 울음들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고양이 군은 ‘혼돈의 과일들’이니 ‘그믐밤의 취기’니 ‘진흙 속의 욥’이니 ‘거위 아리아’니 ‘뒤집힌 함지(咸池)’니 하는 울음의 이름들을 가르쳐주겠지.

나그네가 자신의 그림자에게 말하듯 내가 고양이 군에게 무언가 촉촉한 음악을 주문하면 스탄 겟츠의 「이파네마에서 온 소녀」가 바다 밑처럼 깔리리. 나는 내 안의 함지에서 울음을 길어다주는, 이 세상에서 내 울음을 혼자만 들어주는 소녀 같은 것을 상상하며 그 아이가 아픈 것은 아닌지 어떤지 걱정을 하게 되리.

밤이 깊도록 나는 눈물차를 이백(李白)처럼 마시리. 내가 등신대의 눈물방울이 되는 철없는 망상에 빠져.

그러나 새벽이 오기 전에는 돌아가야 하리. 내일의 일용할 울음을 걱정하며 내가 일어서려 하면, 고양이 군은 ‘엇갈리는 유성들과도 같은 사랑’을 짐짓 건넬지도 모르리. 손에 가만히 쥐고 있으면 론도 형식의 회상이 은은히 퍼지는.

지갑은 텅 비었지만 울음을 손에 쥐고 고양이 군에게 뒷모습을 들키면서, 보석비가 내리는 차원의 문을 거슬러 감동 없는 거리로 돌아와야겠지. 비가 내린다면 맞아야하리. 비의 벽 저편 어렴풋 내 울음을 듣는 내 귀가 아닌 내 귀의 허상을 응시하면서, 비가 내린다면 역시 맞아야하리.




천사




청록색 돌의 길 위로

장난기 많은 천사는 물 폭탄을 터뜨립니다.

그것은 11월의 수정우(水晶雨)가 되어서는

가로수 노란 상념 몇 잎에 가 맺히고,

그것은 또 카페 창유리에 가 이마를 대고

허브 향기 떠도는 실내를 구경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또 세상에서 울음이 가장 많은

실연한 여자의 방에도 내려서는

낡은 책상을 적시고 제비꽃 꽃잎 같은 편지들을 적시고,

소파에는 물웅덩이를 만들어 놓고

침대보를 축축하게 하고

여자의 울음 위로도 흘러내렸으므로,

슬픔은 씻겨가 치자색 실내등 얼비치는 물기로 남는 것입니다.


“무슨 근심이 있나요?”

“무슨 번뇌가 또 있는가요?”

테디 곰 인형의 눈은 말없이 뿌예지고…….


울음 여왕이 잠든 밤,

졸음에 겨운 천사는 여자의 방에 찾아와

울음 섞인 물기를 훔치고

훈의초(薰衣草) 향초에 불을 밝혔습니다.

천사는 여자의 잠옷에 향기로 어리다가

대형 전광판이 눈부시게 빛나는 야경 위를 날아다니는

여자의 꿈에 나타나서는

여자에게 한 아름 유성 꽃다발을 안겨주었지요.

부드러운 날개를 지닌 천사는

훈의초 향기가 어린 하늘을 여자 곁에서 내내 날아다녔습니다.

여자의 착한 새 애인이 되어서는.




십칠야 날씨, 포근함




열이렛날 밤 달빛이 야위었다.

자다 깬 텁텁한 입에

보름날 먹다 남은 부럼 털어 넣고,

달빛에 홀려

창가 의자에 엉덩일 내려놓는다.

죽은 나무 위에서 고양이 그리자벨라가

솔로로 「메모리」를 열창하는 밤,

올해는 소원도 빌지 못했구나.


호주머니에 신화를 넣고 다니던 시절,

달님은 동요 속 쟁반,

검은 설탕물 걸쭉하게 흐르는 호떡,

개구쟁이들의 축구공이었다.

신화를 잃은 사람들이 꿈을 꾼다.

가족의 건강, 사업의 번창,

사랑의 기원, 집 장만, 복권 당첨.


대학 입시 때인가 처음 정월 보름달에 빌었다.

고향집 앙상한 목련 나무 꼭대기, 대머리 달은

내 인생의 편집자처럼 앉아 있었다.

내 생의 스토리를 다 안다는 듯.

타관땅 서울에서의 정월 대보름달은

한강 밑으로 잠긴 은항아리로 내게 있다.

짝사랑에게 전화 걸고 돌아오는 길

깊이 가라앉는 달을 보았다.

은항아리 안을 휘도는 물의 발레!


열이렛날 밤 달빛에서 호두 맛이 난다.

늦은 더위라도 팔아볼까, 허물없는 달에게.

나는 아직 꿈을 꾸지만,

달이 무슨 소원을 이루어주는 것은 아니리.

달은 아버지가 아니겠는가.

고3 때 자율학습 끝나고 늦은 귀갓길

무거운 가방 들어주러 나오시던.

짝사랑에 가슴 조이던 대학 시절

술잔 건네며 격려해 주시던.

달은 그렇게 아버지처럼 늘 곁에서 걸었다.


달빛에 기대어 잠시 졸아도 좋으리.

열이렛날 밤 달빛의 품이 벌써 봄 같다.

그리자벨라가 하늘 사다리를 타고

행복한 기억 속으로 마실 나가던

십칠야 날씨, 포근함.




너구리 저택의 눈 내리는 밤




너구리 가죽을 뒤집어쓴 12월 바람, 눈은 내리는데,

푹푹 쌓이는데, 너구리 가죽을 뒤집어쓴 할아버지 혼신,

너구리 가죽을 뒤집어쓴 아버지, 수북한 털가죽에

손을 찔러 넣고 체념하지 못한 꿈을 노래하는데,

막걸리 한 잔씩을 걸치고 날생선을 뜯으며.

세상은 머리까지 눈 이불을 뒤집어쓰고 잠꼬대를 하는데,

너구리 가죽을 뒤집어쓴 고양이, 강아지, 수한무,

개그맨, 회사원, 꽃집 아가씨, 약국 아저씨, 농부,

너구리 가죽을 뒤집어쓴 두꺼비, 탐정, 손자놈, 전경 아우들,

썩은 굴참나무 밑 너구리 저택은 흥청흥청.

눈보라가 빗금을 그으며 떨어지는 12월,

너구리 가죽 가득 눈꽃들을 받아주겠다고

손녀딸의 잠을 툴툴 털어 주고 계신 너구리 가죽을 뒤집어쓴

선생님, 우와, 하고 입을 쫙 벌린 너구리 가죽을 뒤집어쓴

조직 폭력배, 동승, 소설가 김씨, 사실은 순진했던

너구리 가죽을 뒤집어쓴 국회의원 양반,

통속적인 활극을 연출하는 너구리 삼인조,

왁자지껄, 수한무를 찾는 숨이 넘어가는 만담,

모두가 즐거운 한때, 눈은 쌓이는데,

두런두런 유년을 찾아가는데, 종종 미끄러지는데,

청어를 굽는데, 날치 알을 먹으며 깔깔대는데,

하얀 눈은 아랫마을을 재우고는 재 너머 공동묘지에도 내리는데,

썩은 굴참나무 그림자에 빠져 죽은 수상한 허물들 위에도 내리는데,

누군가 죽은 친척 이야길 꺼내 시무룩해졌다가는,

다시 만월(滿月)의 잔이 도는데,

푸치니 오페라 『나비부인』 중 「어떤 갠 날」도 좋고,

음정 박자 무시한 「한 오백 년」도 좋은데, 엉덩이춤을 추는데,

정부도 없고 계급도 없고 빈부마저 없이

너구리 가죽끼리 따뜻한데,

썩은 굴참나무 밑 너구리 저택에도 눈은 시간처럼 쌓이는데,

작은 혁명의 밤이 하얗게, 하얗게 지워지는데,

바람의 말을 자꾸 헛들어도 좋은,

너구리 말로도 그대로 좋은 너구리 저택의 밤.


하얀 눈 위에 찍힌 너구리 발자국,

그리고 

천 년만큼 깊이 내려간 쓸쓸함, 눈을 툭툭 털고 들어오는.




시?낭송 : 장이지

출전 : 장이지 시집 『안국동울음상점』, 랜덤하우스,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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