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상이 아니라 지옥에 발 디딘 언어가 시(詩)요

 

<작가와 작가>


천상이 아니라 지옥에 발 디딘 언어가 시(詩)요



 

대담 고은(시인)

진행?정리 김형수(시인)


 

intro

과거가 없는 사람

생래적인 나그네성

영원한 불완전 동사

김수영, 서정주

폐허

한국의 근대시사를 거부

시인은 시인의 운명을 저주한다

만인보

알렌 긴즈버그

위악성

시는 문학이 아니다

한국문학에 대한 희망



 




나는 영원한 불완전동사


김형수  선생님을 서울대학교에서 뵈니까 느낌이 상당히 새롭습니다.

고  은  나는 사실은 들의 사낸데 어떻게 요즘은 이따금 학교의 사내가 돼 있네.

김형수  제가 1959년생 올해 나이 마흔아홉 살입니다. 그런데 선생님은 그 전 해에 등단하셨습니다. 이후 참으로 긴 시간을 변화무쌍하게 작품 활동을 하셨으니 저희 세대로서는 그 궤적에 대한 가닥을 잡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전에 어디에 쓰기를 “한국문학사에서 고은이라는 이름은 한국정치사에서 김대중이라는 이름자만큼 범람했다!”라고 한 적이 있습니다. 선생님이 쏟아 놓은 방대한 텍스트를 개괄하기가 이만 저만 어려운 일이 아닌 까닭입니다. 우선, 과거의 윤곽을 대충 잡아 가면서 다음 이야기를 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고  은  나는 1958년에 우리나라 시단에 처녀작을 보이고 시인이라는 공인이 된 것이죠. 지금까지 50년 세월을 보냈는데, 이 50년은 또 생각해 보면 근대시 100년의 절반이죠. 절반 이전의 선배들의 시세계를 등에 지고 그리고 그 절반을 살아 온 셈이죠. 공교롭게도 김형이 말씀하신 것처럼 1959년생이라니까 생각이 나는데, 1958년에 러시아의, 그때는 소비에트지만 보리스 파스테르나크가 세계의 집중적인 관심을 갖게 되는 명예로운 해였죠. 그러나 그 사람은 그 당시 체제의 그늘 속에서 자기 목소리를 내세울 처지가 아니었고. 그래서 우리는 시인의 언어라고 하는 것은 드러내는 것보다 드러내지 못할 때 더 강렬한 언어라는 것을 처음 알았죠. 그게 바로 1958년입니다. 그 시절 『닥터 지바고』니 이런 것 떠들고 이럴 때 처음 문단에 나왔는데. 나는 사실은 과거가 없는 사람입니다. 그때, 이전에 내가 만났던 체험도 없었고 기억할 만한 놀라운 시세계를 만난 다음도 아니고 무작정 시인이 됐어요. 말하자면 엄마도 아빠도 없이 나온 고아였죠, 고아로서의 시인인데, 때마침 한국전쟁이 끝난 직후에서 얼마 안 됩니다.

 

 

 

1953년에 휴전이 됐고, 그 여파는 10년 이상 갔는데 그 폐허에서 내가 어떻게 살아남아서, 그 벽돌 조각이 있고 억새풀 돋아 있고 도시는 다 없어져 버렸고 산은 초토가 되어서 낮아지고 그럴 땐데, 인간의 마음 자체도 폐허가 들어 있죠, 외부의 폐허와 내부의 폐허가 함께 있는 그런 데서 어떻게 나 같은 게 살아남아서 숨을 쉰 것이죠. 그 숨, 폐허에서의 호흡, 이게 아마 내 시의 출발이었다고 이야기할 수 있죠. 그런 점에서 나는 참 과거가 없네. 음. 50년 전에 그때 기껏해야 읽은 게 고향에서 신석정의 『촛불』인가 원두막에서 보다가 말고. 나는 서당에 다녔으니까 한자를 배웠고 『시경』 몇 줄 알았는데, 그건 문학이 아니라 문자를 배운 것이고. 이렇게 하다가 무지몽매한 상태로 내 시의 운명을 시작했다고 이야기할 수밖에 없어. 그런 점에서, 우주를 우리가 이해할 때 카오스로부터 출발하는 것처럼 참 작은 카오스에서 태어난, 어디로 걸어갈지 모르는 막막한 아이였죠.

김형수  제가 선생님의 문학을 통해 평소에 느끼던 두 가지를 지금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는 ‘과거가 없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카오스를 산다’는 것인데, 이 두 대목은 저한테 굉장히 깊이 박혀 있거든요. 제가 더러 평론가적 기질을 발휘하여 선생님의 어떤 지점을 기념비화시키려고 하면 그때마다 선생님은 쐐기를 박으신 것 같아요. “나는 어떤 곳에도 기념비로 남고 싶지 않다. 가차 없이 떠나겠다.” 그런 점에서 유목민적 영혼을 가지신 분이 아닌가…….

고  은  그래요?

김형수  시에서도 언제나 화자가 어떤 자리를 차지하는 자가 아니라 훌훌 털고 이동해 다니는 자거든요. 아주 젊은 시기나 지금이나 공통되게 그런 행인의 정신이 있다는 생각을 해 보게 됩니다.

고  은  참 아픈 데를 침이 찌르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말씀입니다. 나 어렸을 때 그림을 그렸는데 늘 기차, 타 보지 않은 기차, 그때는 증기기관이라 하얀 연기가 나오고 칙칙폭폭하는데, 기차를 그렸고, 또 바다 위에 떠 있는 돛단배를 그리고, 아니면 철새가 여기서 이쪽으로 가는 새를 그리고……. 아버지가 한번은 “너는 왜 떠나는 것만 그리느냐. 집을 한번 그려 봐라.” 그래서 ‘아! 그렇구나. 집을 한 번도 못 그렸구나’ 하고 집을 그려 봤어요. 집이라고 초가삼간, 부엌이 있고 방 두 칸 있고 울타리 좀 있고 뒤에 조각달 하나 있고 나무 하나 있는 이런 것이겠지요. 기억인데, 그런 것 몇 번 그리다가는 잊어 버리고 다시 기차를 그리고, 배 그리고, 새 그리고, 어디를 떠나는 것을 그리게 되대요. 이거는 내 생래적인 나그네성, 지금 얘기하는, 요새말로 하면, 유목개념 같은 것이 여기에 적용될지 어쩔지 모르겠지만. 그것 말고 근원을 생각해 보면 인류, 인간 자체가 사실은 정착민이 아니라 유목민입니다. 적어도 우리 할아버지는 아프리카에 있습니다. 아프리카에서 직립인간으로 두 발로 처음 섰습니다. 네 발로 기어 다니다가. 그게 우리 할아버지 아닙니까. 그 할아버지가 서 가지고 거기서 살다가 먹을 것이 떨어지니까 먹을 것을 찾아서 움직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걸어가고 떠나가고 이동한 것 아닙니까. 손님이 된 것이죠. 그게 나중에는 오스트레일리아까지 바다 건너서 가고, 인도까지 가고, 유럽 가고, 슈메르 이렇게 해서 중앙아시아에서 시베리아 건너서 북부여, 동부여 된 것 아닙니까. 남쪽에서도 기어 올라가서 지금으로 이야기하면 필리핀이나 대만으로 기어 올라가는 것이 섞여서 한반도에서 만나서…… 그런 그들의 손자 아닙니까, 내가. 나는 나그네의 피요, 나 자신이 떠돌이고 집시고 유목민의 아주 머나먼 원정으로서의 인자가 있을 것 아닙니까. 그런 것이 천 몇백 년, 2천 년이나 3천 년 농업정착민으로 살 때 밑으로 가라앉았겠죠. 때때로 보름달이 떠올 때라든지 바람이 불 때라든지 폭풍이 불 때 눈보라가 칠 때는 옛날 근원으로서의 움직임, 동작의 욕망이 있을 것 아닙니까, 나그네로서. 그런 것이 여전히 소멸하지 않고 계승돼서 내 핏줄에도 맺혀진 것으로 해서 내가 유목민적인 세계에서 아직도 도저히 헤어나지 못하는 나그네의 운명이 시에 그려져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김형수  지금 말씀하시는 바들이 선생님의 시에서 가장 먼저 느껴지는 것들입니다. 언제나 떠돌아다니는, 멈추지 않는, 성을 쌓지 않는 영혼을 가졌다는 것, 또 조금 전에 ‘카오스’라고 말씀하셨는데 제 생각에는, 저희들이 1980년대를 거치면서 한때 상당히 등한시하기도 했던 문제인데, 적어도 한국 시사(詩史)에서 ‘모호함에 가득 찬 직관과 영감의 영토’를 처음 만들어낸 것이 선생님의 「문의 마을에 가서」 등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조금 전에 말씀하셨던 비유를 빌린다면, 옛날에 언어와 언어들이 갈라지기 이전에 생명체들이 내던 소리, 숲에 천둥 번개가 치고 동식물이 우짖고 그러면서 최초의 생명체들이 소통했을 것 아닙니까, 그때 서로의 모국어로 규정되기 이전에 소통되던 언어의 건강성을 시가 고집해야 한다면 그 영역이 선생님 시 안에서 계속 살아 움직이고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고  은  그런데 나는, 언어는 물론 내가 한때 좋아했던 비트겐슈타인의 언어이론도 있고, 거의 존재를 압도할 만큼 미치게 만들었던 언어이론이겠지만, 그러나 그 이전에 방금 말씀하신 것처럼 근원언어에 늘 닿아 있고 싶죠. 우리가 쓰는 근대언어가 아니라, 언어를 통해서 우리가 대화를 하는 것이 아니라, 이런 것 이전의, 언어 이전의 그들의 언어, 말하자면 자연언어이겠지만 새소리도 있겠지만 그것과 아주 근접했을 때 인간의 언어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그냥 말하는 의태어, 의성어까지도 내포해서 이야기하는 것인데, 언어의 시작, 그것에서 너무 동떨어져서 지금의 언어만을 가지고 살면 이것은 언어가 아니라 또 하나의 다른 관계의 텍스트가 돼 버린다, 이것은 나는 싫다, 그래서 나는 근원으로 늘 잇대고 싶어요. 그런 점에서 나는 새로운 과거를 끊는 것이 아니라 내가 없었던 과거를 찾고 싶은 허영이 있죠. 그런데 이것이 내 시에 어떻게 구체적으로 나타나는지 내가 판별할 수는 없고, 앞으로 내가 살아가는 동안 남아 있는 생애 동안 어떻게 시를 통해 구현될지 어렴풋하게나마 기대를 걸고 있습니다.

김형수  언제나 일관되게 맞춤법의 질서에 구속되지 않는, 문장이나 화법의 체제랄까 제도랄까 하는 것을 계속 무너뜨려 버리는, 말씀으로 하실 때도 그렇고 글로 쓰실 때도 그렇고 그런 점이 아마 가장 뚜렷한 선생님의 독보성이라 봅니다.

고  은  나는 아직 영원한 불완전동사 같아. 나는 완전한 종결성, 이것은 참 어떨 때는 거의 저주스러워요. 예술이나 시를 완성개념으로 파악하지 않고 영원한 미궁으로서의 미완성성, 예술은 시는 미완성으로밖에는 안 되는 것, 그 마지막의 숙명 거기까지 가고 싶어. 그런 것이지. 아! 이것은 완성됐다, 다음의 세계로 완성을 향해서 지향하자는 이런 사무적인 행위는 나는 못 견디겠어.

김형수  말씀 듣는 중에 퍼뜩, 지금 활약 중인 21세기의 시인들, 우리 문단에 새로 출현한 젊은 목청들이 선생님의 왕년이라 할 시절의 감수성에 퍽 가까이 닿아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우리 젊은 친구들에게 보탬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여쭙고 싶은데, 이제부터 궁금한 몇 가지를 되도록 실감이 닿게 말씀해 주셨으면 합니다. 문단에 갓 데뷔 하셨을 즈음에 한국시의 기본형이라고 할까 하는 것을 서정주적인 것과 김수영적인 것, 이렇게 나누어볼 수 있을까요?



전후시대, 그 폐허의 동질성


고  은  그 당시에는 살아남은 자들이 기어 올라와서 서울에서 만났죠. 참 좋은 시인들이 빨리 죽어 버렸고, 또 다른 지역으로 가 버렸고. 살아남았다는 것은 어디로 가지 못한 존재이기도 하죠. 살아남은 것의 가치가 아니라 어디로 못 갔다는 가치부정적인 존재이기도 하죠. 거기 간 것이 좋다는 것이 아니라. 그런 분들, 그런 것이 모였을 때는 시에 대한 일정한 규정이 불가능한 상태였습니다. 그냥 왔어요. 서로 다 거지가 되어서. 그럴 때 이전의 식민지 때부터 있었던 언어가 있었고, 폐허에서 용출한 언어가 만나서 아주 당연하게 충돌을 했죠. 그게 지금 이야기하면, 좋게 얘기해서 서정주를 얘기하지만, 서정주로 표상이 안 됩니다. 또 거기에 여러 가지 있지 않습니까. 이쪽에 이런 것이 있었는데, 만나면서 둘 다 온전하지 못했죠. 만나서 충돌하면서 얘가 옳고 얘가 그르고 이런 것이 아니라 둘이 옳으면 둘이 옳아 버리고 둘이 그르면 다 글러 버렸어요. 거기서는 규정이 안 되는 것이죠. 이를테면 시의 문학사, 시사가 허용되지 않는 상황이었죠. 시작이니까. 폐허에서. 그럴 때 나도 거기에 끼여들었습니다. 나는 육당 최남선을 압니다. 만났으니까. 근대시의 시작 아닙니까. 그리고 춘원 이광수의 부인은 만났죠. 춘원 이광수는 북쪽으로 가서 못 만났고. 나는 근대문학의 시작과 함께 동시대를 살아 왔어요. 거기에 다 있었습니다. 그런 게. 있다가 세상 떠나기도 하고 정리되기도 하면서 이렇게 왔는데, 그런 것이 막내 같은 아이로서 기웃거려서 근대시 속에서 있게 되는데, 그렇게 되니까 나중에는 터가 잡히죠. 당연히 나는 그때는 서정주에 속해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굳이 얘기하면. 지금 말씀하시니까. 두 개로 나누어서 이야기할 때. 그러나 나는 육체적으로 먼저 만난 것은 김수영입니다. 내 고향에서 김수영과 함께 만주에서 연극운동을 하던 배우가 있는데 김수영도 배우였습니다, 눈도 크고 그러니까 그 사람 때문에 김수영이가 고향에 왔어. 그때 내 시를 보고 이것은 어떻다고 해 주려고 했는데 고향 선배가 이 사람은 추켜올리지 마라, 추켜올리면 곧 시들어 버릴 수도 있으니까 혼내 줘라, 그랬는데 혼내지도 않고 날 보고 그냥 떠났습니다. 나중에 김수영이가 나를 만났을 때 그 얘기를 해 줘서 알았죠. 그때 네 물건이 괜찮았는데 나는 너를 칭찬하려고 했는데 못하게 해서 왔다, 술 먹으면서 얘기한 적이 있는데. 그런 다음에 서정주를 만난 겁니다. 서정주 만난 것은 처음에는 내가 몸으로 만나지 않았죠. 그때 나는 승려였으니까. 비구승 대처승, 서울에 와서 처음으로 신문도 창간하고, 불교신문도 할 땐데, 공간을 편집할 줄 모르니까 구멍이 생기면 거기다 무엇을 집어넣어야 하니까, 내가 뭘 생각나는 것을 썼어. 어떤 사람이 보고 누가 썼냐고 그래. 내가 그냥 공간 메우기 위해서 썼다니까 이 사람이 나를 나중에 서정주에게 데리고 간 거야. 작품 몇 개 있냐고. 무조건 나를 끌고 가서 만난 거야. 그래서 그렇게 된 거야. 그 이전에 내 친구가 문학에 밝은 화가가 있었어요. 수채화 하는 화가인데 내가 「폐결핵」이라는 시를 하나 썼는데 걔한테 줬어요. 너 읽어 봐라 하고 줬는데 그것을 버리지 않고 그걸 가지고 전쟁 직후에 한국시인협회가 처음 창립이 됐을 때 거기다 보냈어. 최초로 창간호에 신인으로 나온 거야. 나와 상관없이 내 친구가 보낸 거야. 조지훈 시인이 시를 본 것이야. 그래서 난 조지훈과 서정주 둘에 의해서 문단에 나온 것이죠. 하지만 내 문학은 처음에는 못 알려질 뻔했습니다. 시집 하나가 책으로 나오려다가 불타서 없어져 버렸어요. 나는 첫 시집이 둘째번 시집입니다. 『피안감성』이라는 게. 그 이전에 뭐라고 했더라……. 아! 『불나비』, 공초 오상순 선생이 서시를 써서 프로메테우스의 불나비 뭐 해서, 오상순 보면 그 시가 있습니다. 그것을 서시로 해서 했는데 인쇄소가 불나서 첫 시집이 다 없어요. 그게 모더니즘입니다, 그때는. 그러고 나서 그것이 끝나니까 말하자면 김수영적인 것이 아니라 서정주적인 것으로 돼 가지고. 그런데 이것도 저것도 형용 지을 수 없는 그런 시대였죠.

 

 

김형수  바로 그 시절 이야기입니다. 제가 어디에다 쓰기를, 고은은 서정주와 김수영으로부터, 서로 충돌하는 두 선배로부터 후배로서는 유일하게 동시에 사랑받았지만 서정주의 시에는 근대적 이성이 부족해서, 성찰하는 자아가 부족해서 그 시를 높이 평가하지 않았고, 또 김수영에게는 이성의 도구, 인식의 도구로서의 언어만 있었지 그 속에 파란과 신명이 들어 있지 않아서 그 역시 폄하했다, 그런 점에서 서정주적인 것, 혹은 김수영적인 것과 뚜렷이 선을 그으면서 출발했다, 이랬는데, 엉터리 진단은 아니었는지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싶습니다.

고  은  거의 정확합니다. 다만 한 가지 거기에 덧붙일 것은 김수영이 열정 덩어리였다는 사실입니다. 흔히 떠올리는, 태양과 같은 열정은 아닌데 월광, 달빛과 같은 열정이 있죠. 그런 것이 김수영에게 있었죠. 그 사람의 언어에는 폭력성이 있지 않습니까. 내던지는 언어들이 많거든요. 곰살궂게 언어 하나 골라서 여기다 집어넣을까 말까, 활자 문선공이 그러하듯이 이런 김춘수처럼 수작하지 않습니다. 김수영은 확 던집니다. 일종의 이백과 같은 스타일인데 나는 그 점에서 김수영을 높이 평가합니다. 시는 편집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그 점에서 교정을 미치게 보고 퇴고를 미치게 하는 방법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세공을 엄격하게 하는 이런 것은 시를 모독하는 것입니다. 시는요, 문법이니 어떤 규율이니 시스템이니 이런 것을 전부 다 불태워 버리는 행위죠. 그게 시거든요. 그런 점에서 나는 김수영의 야만성, 자기가 위선적이면서도 위선을 가장 부정하는 모순, 이런 것을 참 좋아해요. 서정주는 언어를 일부러 아주 각고해서 가져 오지 않습니다. 탁! 가야금 줄에 닿으면 화음이 나와요. 그 무서운 재능이 있죠. 이런 점에서 시는 참 좋죠. 그런데 그게 좋다고 해서 그들에게 나는 예속되고 싶지 않죠. 그래서 나는 둘 다 발길로 차고 싶은. 삼거리 주막 같은 데서 한 잔 먹고 나의 길을 괜히 떠돌았어.

김형수  그 시대의 문학을 ‘전후문학’이라 했지 않습니까? 전후시대, 전후라는 표현이야말로 저희들이 문학수업을 시작할 때 제일 많이 접한 표현인데, 지금 생각해도 궁금하고 신기한 것 중 하나가 당시 상황에서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느냐는 것입니다. 지금은 유학도 많이 갔다 오고 외국을 늘상 이렇게 국경 안에 갇혀 있지 않고 살고 있단 말입니다. 당시에는 그러기가 아주 어려웠을 땐데 오히려 당시가 한국문단이 국제 감각을 더 크게 가지고 있었던 것 같은, 유럽하고 동시에 호흡하고 있었다는 느낌을 갖는데요.

고  은  참 좋은 지적을 했고 그때를 긍정적으로 의미부여를 한 것 같은데 이런 점을 얘기할 수 있겠죠. 우리는 식민시대를 이어 온 세대입니다. 식민지 일부를 자기화시킨 삶을 가지고 있고. 그때는 적어도 중국을 갈 수 있었습니다. 북경. 이육사가 북경 감옥에서 죽었습니다. 이광수의 『무정』이란 소설은 바이칼 호수까지가 무대입니다. 이르쿠츠크. 거기는 실제로 조선공산당의 국제적인 근거지가 된 데 아닙니까. 그렇게 우린 세계를 가지고 있었죠. 대륙을 가서. 물론 태평양을 건너서 미국 간 것은 이승만과 안창호밖에 없었지만. 이렇게 갈 수 있었는데 그런 기억을 가진 사람이 해방돼서 분단돼서 갇혔죠. 우리는 오도 가도 못하고 GI가 와서 헤밍웨이가 오고 이렇게 된 것이죠. 하지만 그때 우리는 이전의 공간을 허구로서도 가져야 돼요. 왜냐하면 우리 공간이 너무 폐허니까, 서로 죽이고 했으니까. 어디로 가야 하는데 갈 데가 없죠. 그러면 가지 못하는 유럽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때 향토시인 이철균이라고 있는데 이 사람은 거기서 제가 무슨 파리도 모르는데 ‘아! 지금은 파리에 안개가 끼었겠지’ 하면 그 말에 우리는 아주 녹아들었어. 파리에 그냥 안개가 끼어 있는 것처럼 느꼈어. 파리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를 때죠. 그러면서 들어오는 것이 사르트르였고. 사르트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2차 대전 후에 유럽의 폐허에서 만들어진 싹인데 문학이고 그게 오니까 우리 폐허의 동질성이 생겨 버렸죠. 참 이것은 전혀 낯선 것이지만 우리에게 맞는 정신의 교사 혹은 정신의 위안부라고 느꼈죠. 전혀 프랑스가 낯설지 않습니다. 명동에는 ‘세느’라는 다방이 있었고 심지어 청계천을 우리는 ‘세느강’이라고 했습니다. 그게 1980년대로 가면 구역질나는 그런 것이지만 그 당시에는 그런 언어 자체가 내가 살아 있는 세계인의 존재로서 기호가 됐죠. 다 그랬습니다, 그때는. 실제로 현실에서는 각박하게 ‘순자’가 ‘에레나’가 됐잖아요. 패티김이라는 가수도 생겼고. 순자 옥자라는 우리 처녀들 이름이 에레나로 바뀌었어요, 현실에서. 그러니 우리 역시 청계천이 세느강이 된 것이죠. 그런 막막한 자아상실 속에서 자아를 견뎌 왔다 이렇게 얘기할 수 있겠네요. 그게 아마 1950년대 1960년대 초반까지의 우리 자화상, 슬프다면 슬프고 살아남기 위한 풍경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김형수  지금 말씀하신 그런 내용들은 누구의 어떤 에세이나 논문에서도 분석되지 않았던 것인데 저는 선생님의 저작물 중에서 『1950년대』라는 책을 읽으면서 그에 대한 실감을 아주 깊이 느꼈습니다. 그러면서 전후라고 하는, 저희들이 문학에 관심 갖기 시작하면서 수없이 만났던 그 용어의 정서적 실체는 이것이다 하는 것을 가슴에 담았습니다. 제게는 아주 인상 깊은 책인데, 그 책을 개인적으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아끼는 책입니까?



발에 사슬을 찬 인간들이 저벅저벅 걸어 가는 고통이 시


고  은  나는 책을 몇 권 쓰기는 썼죠. 지금 140권이 된다, 146권이 된다 하지만 수량은 의미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버트란트 러셀이 너는 얼마나 썼냐고 그러니까 내 저작물은 내 신장만 하다, 가만히 나도 그 얘기를 어디서 보고 나서 보니까 나도 내 신장 정도는 돼요, 전집이. 사실 누락된 것도 많습니다만, 지금은 더 불었겠지만, 그래서 많이 쓴다는 소리를 듣잖습니까. 이게 좋은 얘긴지 나를 짓궂게 표현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고전시대나 낭만주의 시대나 서구의 문학을 보면 스케일이 큽니다. 괴테 같은 경우는 편지 같은 것만 해도 전집이 규모가 크고, 시, 소설, 『파우스트』까지 하면 엄청나지 않습니까. 그리고 또 빅토르 위고도 『레미제라블』 한 권이 아니지 않습니까. 시가 아마 나보다 많은지 조금 적은지 모르겠습니다만 그렇게 많이 쓴 사람이고. 소설도 희곡도 비평, 정치평론하면 엄청나지 않습니까. 이런 사실은 우리는 근대문학을 하면서 간과한 거예요. 왜냐하면 우리는 첫째로 식민시대의 물적인 기반이 강고하니까 우선 시인들이 단명합니다. 김소월이 서른둘에 죽었고 윤동주는 서른도 못 채우고 죽었고 이상도 마찬가지고. 쓸 만한 촛불들은 곧 꺼져 버리고 꺼져 버리고 그랬습니다. 실제로 또 오래 산 사람이라고 해도 고월 이장희가 사십 몇 편밖에 안 남았습니다. 20편 남긴 사람, 이런 것으로 근대시를 이어 온 것이 우리 시의 역사 아닙니까. 이런 데 익숙하니까. 윤동주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옥중에서 남겨 동생이 나중에 한 것, 그것 몇 편 됩니까. 그 시가 아주 냉혹하게 이야기하면 얼마나 유치합니까. 시의 높은 단계까지 못한 시입니다. 그런데도 그의 죽은, 그의 남겨 있는 작은 것이 강력하게 가슴에 와서 국민적인 사랑을 받고 있지 않습니까. 이런 기회에, 잘못됐다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우리의 문학을 시의 세계를 파악할 때 이제까지 익혀진 시인들의 얼굴에 의해서 척도를 만들지 말고 세계 문학의 난바다에 떠 있는 이 시들의 풍경을 자기화시켜야 되겠다는 점에서 나는 한국의 근대 시사를 거부하죠. 그 점에서는.

김형수  『1950년대』를 읽으면서 비극을 인식하는 능력의 부족에 대해서 개탄을 하시는 장면을 봤습니다. 

고  은  지금도 일관된 생각이에요. 우리 문학에 비극정신의 지속적인 결핍은 여전히 지적되어야 마땅하다고 생각하죠. 누군가와 술 먹고 이야기하지만 시인에게는 불운이 있어야 합니다. 불운. 내가 가지고 있는 이런 방은 불운이 아니죠. 세속적인 행복 속에 잠겨 버린 것인데 이건 시인의 태도가 아니죠. 두보가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어요. 시는 시인의 운명을 저주한다고. 근대언어지만 풀이하면 아마 이렇게 될 것입니다. 그가 쓴 시는 그 시인을 저주하고 시인의 운명이 불행하기를 바라는, 시인에게 끊임없이 비극을 요구하는 그런 작품일 거란 말이죠. 그런 것이 우리에게 필요하다는 것이고. 내가 『시경』 세계나 이런 것보다 『초사』를 더 좋아하는 이유가 ‘황하의 시경’보다 양자강의 옛날 초나라 ‘굴원의 시사’를 좋아하는 이유가, 비극이 담겨 있는 탓입니다. 『시경』은 사회에 대한 여러 비판도 있지만 비극이 없습니다. 나는 『초사』 쪽을 좋아하죠. 고대 그리스의 비극정신은 그것이 서구 것이 아니라 동양과 서양의 완충지대에 있는 것 아닙니까. 이것을 동양에서 가져 와야 한다고 생각하죠. 나는 그래서 비극정신이야말로 시의 고향이라고 늘 생각하네요. 그런 점에서 나는 베토벤을 좋아하고, 모차르트의 천상의 기가 막힌 것보다 지옥에 발 디딘 베토벤의 인간의 언어가 더 좋은 것이죠. 그렇다고 모차르트를 싫어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어디 하늘의 유치원 같아. 나는 거기 말고 발에 사슬이 잠겨 있는 인간들이 저벅저벅 걸어가는 고통, 거기에 연관되는 정신으로 시 써야 한다는 것인데. 아! 모르겠어.

김형수  여쭙기가 조금 그렇기는 한데, 좀전에 이 대담을 시작할 때 좌석 정돈을 하는데 이쪽 면을 봤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신 이유가 귀 때문이시죠? 예전에 제가 청년위원장 시절에 작가회의에서 일하다가 선생님께 말씀 올릴 때 가끔씩 느낀 건데, 귀를 다치셨지 않습니까? 제가 어디서, 귀를 한 번 다치신 이후에 1980년에 또 잡혀 들어가 고생한 이야기를 읽었어요. 캄캄한 먹방에서 많이 고문을 당하고 어둠 속에 던져졌는데, 거기에서 선생님은 먹방의 절망 속에서 ‘기억이 나를 구원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도, 세계는 인간의 체험 속에서 신성하다는 것을 신봉합니다. 그래서 그 부분이, 『만인보』를 생각하게 만들었다는 어느 구절을 읽고 가슴에 아주 깊이 닿는 것이 있었습니다. 지금 ‘만인보’라는 어휘는 우리 사회에서 고유명사처럼 선생님 시 말고도 여러 곳에서 씁니다. 많은 이들의 이야기를 하려면 무슨 만인보라고 해서 고유명사화가 되다시피 했는데, 바로 그것을 생각하게 된 이야기, 왜 만인보를 시작하고 만인보가 어디까지 갈 것인지 이런 말씀 듣고 싶습니다.

고  은  아까 귀 이야기를 했는데 사실은 귀에 두 개의 사연이 있습니다. 하나는 전후세대로 살아남았을 때 난 이 세상의 소리가 다 듣기 싫었어. 나는 죽음을 많이 봤어요. 얘가 얘를 죽이고 얘가 얘를 죽이고 이런 것을 많이 보고 그 송장을 내가 수습하고 그랬는데 그때 인간의 소리, 어떤 풍경 이런 게 정말 싫었어. 그래서 청산가리를 귀에 집어넣었어. 내가 이 세상 소리는 새소리도 싫었어. 도랑물 흘러가는 소리도 징그럽게 싫었어. 청산가리를 집어넣었는데 한쪽을 집어넣고 이쪽을 집어넣으니까 본능이 움직였어. 뜨겁고 아프니까. 이쪽은 고막은 안 건드리고 흘러나왔어. 흘러서 여기만 태웠어. 여기는 넣은 게 고막이 녹아 버렸어. 그게 더 들어갔으면 청신경이 죽고, 청신경이 죽으면 목숨을 잃는 것이죠. 본능적으로 이렇게 하니까 고막만 녹이고 나온 거야. 여기가 시커멓지. 흉터가 오래갔죠. 지금은 없어졌는데, 하나의 귀로 살아남았는데 다시 청산가리를 집어 넣을 용기는 없어요. 자살미수도 그런 건데, 한번 하면 이어지지 않아. 의지는 늘 단절돼. 지속이 안 돼. 의지는 순간이고 섬광이고 그래요. 그러고 있다가 나중에 1979년에 카터 방한 반대 데모를 내가 주동했어요. 안국동에 사는 윤보선도 내가 강제로 데려오고. 1979년이니까 저항도 지쳐 있었어요. 안 하려고 하는 것을 욕해서 오게 하고 그랬는데. 나중에 잡혀갔는데 조사할 때 조사에 응하지 않는 불복종 운동을 했어요. 말을 안 하니까 패는 것이죠. 말 잘하는 게 함석헌 선생이야. 다 이야기해 줘. 참 순둥이들이야. 우리 문익환 목사도 조사받을 때 다 얘기해 줘. 미주알고주알. 장충동에서 미리 안 한 이야기도, 하려고 한 것까지 다 해 줘. 그래서 내란음모가 성립된 거야. 그렇게 이뻐. 우리가 다 그런 형인데 나는 그때 거부한 거야. 아이! 이 새끼들 안 돼. 얘기 안 하겠다고. 그때는 폭력이 와서 여기가 깨진 거예요. 그 다음에 YH사건으로 또 들어갔죠. 그래서 백기완 씨가 고발하라고. 그런데 그때는 고발 이런 의미가 없을 때야. 들어가서 멀리 들리던 것이 완전히 파열이 돼서 안 들렸어요. 그러다가 박정희가 죽고 나서 나와서 수술한 것이 내 피부로 만든 인조고막이지. 이걸로 지금 유지하는 거야. 그 얘기는 그렇고. 아까 무슨 이야기 하다가?

김형수  귀에 얽힌 이야기를 하셨으니 이제 『만인보』 이야기로 넘어가시면 됩니다.

고  은  그러고 육군교도소에 가서도 치료를 받았어요. 하나 남은 것을. 이쪽은 놓아두면 죽으니까 이쪽은 인조고막을 다시 했어요. 감옥에 있을 때. 나는 생명의 은인이 많습니다. 갚을 수가 없는 은혜인데…… 그럴 때 육군교도소에 들어가는데 보통 형무소 감옥처럼 양쪽에 방이 있는 게 아니고 미로입니다. 특수감방인데. 여기서 죽어도 모르고 외쳐도 몰라. 메아리가 나오는 덴데. 나중에 알고 보니까 김재규 정보부장이 있다가 서대문형무소에 가서 처형된 그 방이에요. 문익환 목사는 그때 정승화 육군참모총장 방에 있고 그랬는데. 그 방이 작은 방이죠. 한 평반 정도 되는 방인데 창이 없습니다. 철장은 그래도 쇠로 된 창이 있는데 이거는 무창입니다. 30촉짜리가 꺼지면 사진을 현상할 수 있는 암실 같은 곳인데 입관된 시체 같은 느낌이 들어요. 숨 막혀요. 자! 내가 어떻게 여기서 사나. 이미 나 떠나보낼 때는 계엄사 합동수사본부에서 너는 죽어 했으니까, 몇 놈은 죽는지 알고 있고. 아 이렇게 죽는구나! 죽을 때 마지막 몸짓까지 미리 예상을 했어. 껄껄 웃고 죽을까, 민주주의 만세 부르고 죽을까. 뭐 할까. 그러다가 아무 표정 없이 죽겠다는 결론까지 내렸어. 왜냐하면 껄껄 웃고 죽으면 신화가 어떻게든 전해지겠지. 만세 부르면 그것도 있겠고. 그런데 그런 것도 좀 거짓 되는 느낌이 들고 해서 그냥 가만히 죽겠다 이렇게까지 결론을 낼 정도로 살고 있었는데, 그래도 생명이니까 살고 싶은 욕구가 강렬하고 아! 내가 살아 나가면 뭘 해야겠다고 하니까 그 동안 살아온 것, 잘못 살아온 것에 대해서 후회가 엄습해. 별의별 것이 집중적으로 악마처럼 나를 괴롭혀. 이런 것을 내가 어떻게 문학으로 승화할 수 있을까. 살아 나가면 이런 것을 해야겠다는 것이 몇 가지 꼽아졌는데 아직 다 못했습니다. 『백두산』하고 『만인보』인데 그때는 그런 것을 생각만 해도 그 자체가 힘이 돼요. 존재의 힘. 기억 속에서 살고 있는데 사실 기억은 믿을 수 없는 거예요. 기억은 불완전한 것이죠. 20미터 짜리가 기억에서는 수백미터 짜리로 잘못돼 있잖습니까. 그렇지만 불확실하지만 기억에 내 힘이 생겼어요. 그래서 나는 아! 나에게도 과거가 있구나. 과거의 힘에 의해서 현재의 힘이 만들어지는구나, 위안을 받아가면서 고향사람, 떠돌 때 만났던 사람이 하나하나 나타나더라고. 나는 그 전에 도스토예프스키가 시베리아에서 죽을 때 처형 직전 5분 동안에 지나온 생애가 다 집약됐다고 하는 것을 어디서 읽어 봤거든. 그런가 보다 했는데 그때 아! 얘도 그랬겠구나 하는 것이 느껴지더라고. 그런데 이것을 나중에는 시간이 있으니까 형상화한다는 생각이 생겨. 기억이 희미했다가 기억을 재생시켜서 뭘 만들어야겠다는 생각까지 오는 게 『만인보』의 시작이죠. 그때는 죽고 싶지 않더라고. 죽는 모양, 어떻게 죽어야겠다는 것도 다 버리고 살고 싶어. 그러면서 군사재판 받고 있다가 국내에서 석방운동해서 기어 나왔지. 그래서 『만인보』 썼는데, 모르겠어, 네 권 남았는데 2008년 2~3월에 끝내려고 합니다. 일단 30권으로.



위악(僞惡)으로 위선을 깨뜨리다


김형수  힘들었던 시절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로부터 이제 1980년대 문학이 펼쳐지는데, 제 기억 속에 아주 강하게 남아 있는 일이 미국의 긴즈버그 시인이 한국에 왔을 때 낭송하시던 모습입니다. 저는 두 분의 움직임이 아주 섬세한 동작까지 다 생각납니다. 국제적인 교분이랄까, 선생님이 외국 시인하고 만나서 문학행사를 하신 것은 그때가 처음입니까?

고  은  그것이 처음이에요. 왜냐하면 나는 여권이 없어서 못 나가니까. 사실, 긴즈버그는 우리와 상관없이 다른 데 왔습니다. 이 사람이 전두환 정부에서 만든 얘들하고 놀아 보니까 어쩐지 냄새 날 것 아닙니까. 우리한테 수소문해서 왔어. 그래서 만나게 된 것이지. 창비에서 둘이 시 낭송회를 만든 것이지. 아! 여기다 했는데 우리가 너무 전투적이니까 위화감이 됐죠. 그 이후로 긴즈버그가 날 좀 좋아해서 미국 시단에 소개하고 하니까, 그 친구인 게리 스나이더가 서부에 있고, 긴즈버그는 뉴욕에 있으니까, 서부에 있는 스나이더에게 연결해서 하고. 그렇게 되니까 로버트 하스가 날 이렇게 하고 해서 그들이 내 세계 시단의 창이 된 것이죠. 긴즈버그는 내 영어판 시집의 서문을 쓰고 바로 죽었어요. 나는 미 8군 방송에서 죽은 것을 알고. 긴즈버그는 현대시사에서 ‘들의 사나이’죠. 전통의 오소독스는 거절하고 늘 들판에 있었던 사람이죠. 미국 비트의 제1인자고, 샌프란시스코 사는 로렌스 퍼링게티와 하고 잭 케루악, 스나이더 다 이렇게 해서 하는데 지금도 현존하는 시인들이 있습니다. 이상하게 나는 비트 제너레이션과 육체화됐어요. 내가 나이가 많으면 형이고 내가 나이가 어리면 동생이고, 이렇게 돼버렸죠. 우리는 스나이더도 나와 형제 시인이라고 하고, 자기 시에도 나를 많이 노래하고 그렇죠.

 

 

김형수  그 낭송회 때 언어는 잘 몰라도 굉장한 에너지가 전해 오는 것을 느꼈습니다. 여의도 여성 100인회관에서 행사를 끝내고 한강 가에서 뒤풀이를 할 때 그 바람 속에서 맛보았던 ‘시의 모국어 초월성’에 대한 느낌이 지금도 굉장히 강하게 뇌리에 인화되어 있습니다. 하여튼 두 분이 쌍으로 갈기를 휘날리는 것을 목격한 셈인데, 선생님께서도 그 분과 상호 간의 느낌을 주고받으셨는지, 그 야성성을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고  은  긴즈버그는 미국의 금기인데요. 교과서에 실리지 않는 시고, 심지어 라디오에서도 금지시킵니다. 지금은 미국하면 앨런 긴즈버그 그렇게 돼 버렸죠. 죽으면 세상은 합법화시키는 것 같아. 윤이상처럼. 죽고 못 오면 지금 아무나 이야기하고 예술제까지 하지 않습니까.

김형수  죽고 나면 위협이 느껴지지 않으니까 살아남은 이들이 정당한 평가를 시작하는 것 같아요.

고  은  그뿐이 아니라 죽음은 또 하나의 삶이야. 죽은 다음의 명예가 진정한 명예가 아닐까 그렇게 생각돼요. 살아서 붙어 있는 명예라고 하는 것은 속절없는 것이고. 죽은 뒤에 이름 좀 기억했다가 몇 십 년 지나면 없어지고 소멸돼야지. 그래서 다음에 명예도 계속 와야 하고.

김형수  상당히 위악적인 몸짓과 언행으로 위선적인 교양과 매너, 체제를 뭉개고 깨뜨리려 하는 두 분이…….

고  은  사실은 김수영도 그렇습니다. 일부러 ‘종삼’ 가고. 그걸 또 과시하고 그렇죠. 다른 사람들은 종삼 숨어서 가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거는 가지 않고도 갔다고 하고 그러는 사람이거든요. 그런 점에서 시인에게는 일정한 위악성이 있어야 해요. 그것 참 좋은 것입니다. 일종의 좋은 의미에서 현학성인데 삶을 아주 올곧게 거짓 없이 좋은 곧은 길만 간다면 거기에는 예술이 없습니다. 어쩐지 거짓과도 만나야 하고 어쩐지 타락과도 자기 몸을 섞어야 되고 이러면서 뭐가 돼요. 그런 점에서 시는 순정을 파괴하는 행위인 것 같아요. 순정, 순결함, 영혼은 순결한데 순결하지 않으면 영혼이 아니죠. 이 순결을 모독하고 내던지고 이러는 일 자체가 시의 행위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죠. 사실은 베토벤이 이런 말을 한 것을 봤는데요, 두 개념이 따로 분리되면 음악이 아니다. 이를테면 제1악장이 끝나면 바로 제2악장인 것이지 제1악장과 제2악장은 독립된 것이 아니라는 식이겠죠. 그런 얘기를 한 것을 보면 우리 언어는 어디 가서 매듭이 있고 새로운 매듭이 있고 이러면 재미가 없을지 몰라. 그냥 흘러가 버리는 것이 언어야. 진주 남강에 등, 유등축제에서 가듯이, 삼천포 어디 가서 가 버리듯이, 파도에 파묻혀 버리듯이.

김형수  선생님, 사실 저는 이 자리에 오면서 마지막으로 가고 싶은 방향 하나만 정해 놓고 아무 준비도 안 했습니다. 그 마지막으로 가고 싶은 방향이란 최근 젊은 작가들이 움직이는 색다른 활력에 대한 선생님의 생각을 경청하는 것인데요, 요즘 젊은 시인들은 저희들 때보다는 많이 자유롭습니다. 저희들은 1980년대의 사변들 속에 꽁꽁 묶여 있어서 문학사 안에서 숨쉴 겨를이 없었습니다. 짧은 시간에 가파른 길을 통과하려면 신발도 묶어야 하고, 그렇게 한 달음에 통과해 왔다는 생각이 들지만 요즘 젊은 시인들은 그런 시대가 아니니까.

고  은  지금이 더 어려울 것 같아요. 갇혀 있을 때는 내 머리를 부딪쳐 버릴 수가 있었는데 지금은 부딪칠 벽이 없잖아요. 그래서 지금은 더 순 무소속이야. 무소속처럼 막막한 것이 없거든요. 이데올로기도 없죠. 뭔가 새로 자기가 설정한 꿈의 도식도 안 만들어지죠. 순전히 자기 내면에게만 모든 것을 맡기잖아요. 내면이라는 것은 한계가 있습니다. 내가 알기에는 무궁무진하지 않습니다. 무궁무진하려면 내면을 외면화시킬 수 있는데 외면화 못 시킵니다. 이런 점에서 지금의 시인들이 우리보다 결코 행복하다고 이야기할 수 없고. 나는 우리가 상상력을 많이 이야기 하는데 1990년대 이후 상상력이라는 말이 트렌드가 돼 버렸는데 나는 의심스러워요. 이렇게 지껄이는 개념으로서 상상력이라는 것이 무책임하게 귀신처럼 떠도는가. 상상력이라는 게 무서운 이야기인데. 자기 이기주의를 만드는 장치로서 상상력이라면 이런 것은 가차 없이 내버려야겠다. 그리고 타인의 심장소리까지 기어 들어가지 못하는 상상력, 사회의 어둠이나 꿈까지 닿아 있지 못한 상상력, 이런 것 가지고 어떻게 문학을 하는가. 나는 도저히 실천하지 못하면서도, 이런 데까지 실천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강력한 불만이 섞여 있는 과제, 이런 게 나는 지금의 젊은 사람들을 바라볼 때 비춰 주는 경고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그들이 행복한가. 나는 우리가 1970년대, 1980년대는 이른바 거대 명제가 있지 않았습니까. 지금 얘기하면 옹졸하지만 민족이라는 것도 큰 것이었고 거기에 내 한 목숨을 바칠 수 있다는 고결한 가치였고, 또 자유 해방 또 나중에는 분단을 없애는 통일이 거대한 것이었는데, 지금 그런 이야기 하면 진부하고 우스꽝스럽지 않습니까. 그렇다고 무궁무진한 세계, 우주를 향해 달려가는 것도 아니고. 나는 이렇게 생각하죠. 그때의 거대 명제가 오늘날 없고 지금 미시적인 개체로 돌아가 버렸다는 것을 개탄하는 것이 아니라 ‘아! 이렇다. 1970, 80년대에 있었던 거대 명제는 오늘의 미시 명제를 위해서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생각해요. 그래서 나는 지금의 사람들이 갖는 자기들의 여러 가지의 정서나 사색이나 번민, 고민을 그 전보다 왜소해졌다고 얘기하지 않고 바로 옛날에 있었던 거의 호황하기까지 했던 실현될 수 없었던 허황한 무지개가 있었던 것은 이 작은 세포들을 위해서 있었던 것이다, 그 거대와 미시는 하나다, 연결하고 싶어. 옛날에는 이랬는데 지금은 이렇다 개탄하지 않고, 바로 이런 자잘한 풍경을 위해서 그때는 커다란 그림이 불완전하지만 그려졌다, 이렇게 그냥 이야기해서 연속시키고 싶은 것이죠. 과연 지금의 현행의 시 세계가 과연 이전의 그런 것을 재해석하고 있는가, 현재화시키고 있는가는 모르겠습니다. 별도의 문제인데, 어쨌든 나는 지금의 풍경을 슬퍼하지 않습니다. 놀다가 견딜 수 없으면 돌이켜서 다른 것을 지향하겠죠. 그래서 나는 자연의 흐름에 맡겨둔다고 생각해요, 문학사라고 하는 것은. 여기에다 하나 덧붙일 것은 나는 시는 문학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궁극적으로. 물론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이라는 것은 근대 개념으로서의 문학을 다 아우르는 것 아닙니까. 무슨 서정시, 서사시, 극시가, 서사시는 소설이 되고 극은 영화가 되고 드라마가 됐는데 나는 이게 다 했다고 생각합니다. 시가 그렇게 분화해서 다른 데 살림 차리고 독립해서 장르를 만들어 줬으니까 이제는 떨어 버리고 자기의 원조로 돌아가고 싶어. 시는, 앞으로 시는, 문학의 한 장르가 아니라 문학에서 떨어져 나와서 오히려 철학과 가깝고 세상의 울음과 가깝고 세상의 꿈과 가깝고 이런 것이었으면 좋겠어. 문학의 양식이 아닌 가지만의 어떤 것을 찾고자 해. 나는 강연도 그렇고 그런 이론을 발표하고 싶습니다. 나는 소설 따위 다른 장르하고 놀고 싶지 않아. 그전에 어떤 상가 집에서 김수영이가 소주 먹고 있을 땐데 저쪽에서 소설가들이 섰다 하고 있었는데 소설가 이 새끼들하고 놀지 말아, 시인끼리 놀자 해. 시인끼리 노니까 또 행복하더라고. 그 생각이 나는데, 시는, 내 이론은, 앞으로 문학으로부터 독립시켜서 온전한 자기 모습, 인간의 본성으로서의 행위로서의 시, 문학 이런 것 아니고, 이야기 이런 것 말고. 나는 그래서 시를 문학에서 독립시켜서 잘 가꾸고 싶어요. 그게 에드워드 사이드가 얘기한 것처럼 후기 생에서 내가 할 일, 시를 시로서 세우고 싶어요, 다른 것에 속해서 하나의 장르가 아니고. 시 자체의 창조적인 존엄성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철학하고 좀 가깝게 하고 싶어요. 철학 쪽에, 문학예술이 아니라.

 


 

시의 존엄성은 어디에서 오는가


김형수  요새 출판 시장에서도 시라는 장르가 상품으로서의 매력이 현저히 줄어서 순전히 소설만으로 출판시장이 구성되고 있는데요.

고  은  출판이라는 것이 부르주아 행위입니다. 부르주아 형식으로서 소설이 독립된 것이니까. 우리가 거기에 가서 구차하게 놀 필요 없어. 김소월처럼. 윤동주 시 읽히는 것도 좋지만 안 읽히는 외딴배도 필요해요. 게토가 필요합니다. 빛은 게토에서 나와요. 타협 불가능한 자기가 만들어 놓은 무서운 수령, 심연, 정신의 경계겠죠. 심연에 담겨 있어야 해요. 그렇지 않고 아무 데나 가서 놀고 그러면 그쪽의 물건이죠. 자기의 본심이 있죠. 인간의 영혼과 정신, 본성은 문학과 또 다르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나는 시를 독립체로, 앞으로 굳이 이론화할지 어떨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생각해요.

김형수  이제 오늘의 이야기를 정돈해 가야 할 시간이 되었습니다. 돌이켜 보면, 선생님은 성을 쌓지 않고 길을 뚫는 자의 영혼을 던져서 혼돈의 미광(微光) 속에 직관과 영감이 가득 흐르는 언어를 세상에 내놓고자 노력하였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것을 맞이했던 우리들의 세계인데, 선생님의 언어가 우리 사회에 닿는 자리에서 ‘기인적’ ‘기행적’ 혹은 ‘파문’ ‘파계’ 같은 경탄의 언어들이 터져 나오곤 했으니, 선생님의 문학적 궤적은 말 그대로 우리 시대의 ‘윤리적 규범에 대한 거부’를 일상화시키는 과정이었던 게 아닌가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근대의 저항자 랭보를 비유하고픈 욕망이 생기는 걸 어찌할 수 없습니다. 지구 전체를 지배했던 유럽 근대의 교양과 근대적 체제, 사회제도 이런 것과의 전면충돌을 서슴지 않으며, 기독교적 생활양식과 가치관이 만들어낸 거대한 체제를 ‘신성모독’적으로 가로질러 버린 랭보가 그러면서 일으켰던 마찰음을 들려 주었던 것처럼 선생님께서도 우리의 답답하고 지난한 체제, 이 답답한 분단 상황 속에서 그러나 계속 일거수일투족이 한 차례도 안정되지 않게 충돌하면서 지나오신 것이 아닙니까? 분단 상황에서 형성된 상식적인 것과 계속 마찰을 일으키면서 지나와서 마찰이 선생님 작품이라고 생각하면 될 것 같은데. 그런 의미에서 랭보 같은 경우는 조금 쉬웠을 것 같은 느낌도 한편으로 있습니다. 유럽에는 문화적 교양 속에 담긴 위선과만 충돌하면 되지만 우리는 수많은 정치적 주류들이 묻혀 있기 때문에 분단의 질곡과 계속 부딪치니까 거기서 겪는 고통 때문에 저희들도 어떨 때는 기형화된 듯이 느껴지고, 그것들을 어떻게 풀어야 될지.

고  은  우선 하나 우리가 개관할 필요가 있네요. 우리가 만세 부르고 해방됐다고 했는데 그게 바로 갈라져 버리는 시점에 있지 않습니까. 이제까지 살아오는 동안에 문학을 해 왔죠. 식민시대의 문학은 그래도 민족의 통합된 정서 안에서 구박을 받으면서 우리 문자로 좀 남겨 놓은 것이 있죠. 한자로 남긴 것도 있고 일본말도 남겨 놓은 것도 있고 그런 것을 합해서 우리 근대문학의 총칭 대상이 되겠는데, 1945년 이후에 우리는 갈라졌습니다. 지금 우리가 하는 문학은 남쪽의 한국의 문학이고 저쪽은 북한 사람들의 문학인데, 우리 문학은 다행스럽게도 작가에게 문학을 맡겨 줬습니다. 전쟁과 강압적인 반공체제가 있었지만 이것을 정면으로 충돌하지 않으면 그냥 놔두는 문학을 해 왔습니다. 그러나 저쪽에서는 놔두는 문학은 안 되죠. 요구하는 문학이었죠. 이쪽은 다양한 문학인데, 저쪽은 이론적인 문학이었다고 한마디로 이야기할 수 있는데요. 요즘은 많이 풀어져서 다원화되긴 했지만, 그러나 참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나중에 우리 민족이 역사가 발전해서 통일된 다음에 문학사를 쓸 때 지금의 분단문학사처럼 풍부하고 다양한 문학 텍스트가 어디에 있을까. 만약에 해방되어서 하나로 살아왔으면 얼마나 심심한 문학일까.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 문학의 가능성, 그때 우리에게 남기는 역사적인 생명이 막 용출할 것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지금 분단시대의 모순에도 불구하고 분단문학은 이 모순을 이미 넘어설 만한 힘이 있다. 북한도 우리가 없는 것을 가지고 있고 우리는 북한이 도저히 허용할 수 없는 것을 풍부하게 가지고 있고 이 두 가지가 얼마나 부잡니까. 문학의 갑부라고 생각하죠. 동북아시아에서. 아마 중국 문학, 일본 문학에서도 20세기 후반 문학에서 이렇게 역동적인 다양성을 못 가질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나는 행복한 시대에 살고 있고요. 그러나 이것을 더 이상 유지해서는 안 되는 것이 정치행위뿐만 아니라 문학에서도 필요하다. 그럼 지독하게 갈라섰으니까 이제는 갈라서는 것은 의미가 없어. 그 점에서 나는 해체주의가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노력 안 해도 해체가 됩니다. 자기 해체가 있습니다. 이것이 만나게 됩니다. 그때 진정 통일의 문학이 된다고 생각하죠. 그러면 우리의 당위는 의도적인 것이기보다는 자연스럽게 될 것이다. 통일도 하나의 점이 아니라 선이다. 어느 점 여기서 통일되고 분단이고 통일이다 이게 아니라 어떤 것이 분단이고 끝나고 어떤 것이 통일인지 모르게 선으로 이어지는 과정, 이렇게 가는 것이라고 생각하죠. 문학도 아마 그런 자연성, 어떤 의미에서는 비역사성 이런 것이 개입되지 않을까. 그럴 때 농익은 문학이 나올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한반도고, 민중문학이라고 해도 좋고 한국문학이라고 해도 좋고 어떤 지역의 문학이라고 해도 좋고 이 문학에 대한 희망은 절망이 거기에 못한다고 생각하죠. 다만 이것이 라틴 아메리카 문학이 20세기 문학을 이끌어 가는 것처럼 뛰어난 가능성이 앞으로 있을 수 있는가. 그건 통합되면 나올 것이라고 생각하죠. 합하면, 그것은 양쪽의 축구팀이 합해서 이긴다는 것이 아니라 양쪽이 합한 사회에서 새로운 에너지가 생긴다고 생각해요. 통합 에너지 말고, 그때 그 시간이다, 나는 그래서 시간에 의미를 많이 부여합니다. 공간보다, 앞으로 우리가 어떤 시간을 사느냐가 중요하지. 아까 유목처럼 난 여기서 살고 난 유럽에 살고 난 심지어 스페인령 대서양 쪽 카나리아 제도에 가서 살고 싶어요. 그러면서 나의 시간에 들어 있는 것, 시간의 진실을 이끌어내는 것, 이런 것을 하고 싶죠. 그래서 내 조국은 시간 속에 있습니다. 내 고향도 공간의 어떤 지역이 아니라 시간 속에 들어 있습니다. 실제로 이젠 아파트만 들어서니까 조국도 공간도 없어요. 다 똑 같아요. 시간 속에 자기가 보존하고 있는 문어로서의 시간, 거기에 아마 근원이 들어 있지 않을까. 중언부언하네.

김형수  차차 또 삶에 대해서, 옛 경험들에 대해서, 미래에 대한 구상들에 대해 듣고 싶습니다.

고  은  아까 기억을 얘기했습니다만 역시 문학이라는 허영은 내일입니다. 내일 없이는 문학할 수가 없어요. 나는 너무 상투적으로 내일을 많이 노래했는데 그런 것 말고 이제 좀 철이 들어서 내일을 노래하는 문학 좀 하고 싶어요. 나는 미래 없이는 못 살겠어. 그래서 나는 지금 살고 있는 현재의 이 생도 사실은 내생이야. 내생으로 살고 싶어. 미래는 최고의 역사야, 최고의 미학이고. 그것이 하루만 남았다고 할지라도. 그 미래는 태양 그 뒤에 있는 어떤 암흑이지.

 


(고은 낭송)


여기 저기


이것에 이름이 붙어 있구나

저것에 이름이 붙어 있구나

또 

저것에 이름이 붙어 있구나

목마르구나


한 사람의 거짓

만 사람에게 퍼져나가

허위단심 참이 되었구나


바람의 똥


여기 


눈빛과 눈빛 사이

숨찬 미움으로

사랑으로 

쌓인 이름들

다 소용 없구나


저기 


꽃 한 송이 외롭다《문장 웹진/2008년 1월호》




고  은  1933년 전북 군산에서 태어났다. 1958년 《현대문학》에 시 「봄밤의 말씀」「눈길」「천은사운」등을 추천받아 등단하였다. 1960년 첫 시집 『피안감성』간행 이후 시ㆍ소설ㆍ수필ㆍ평론 등 100여 권의 저서 간행하였으며 계속해서 1984년 『고은시전집』을 냈고 1986년 『만인보』간행을 시작하였다. 1987~94년 서사시 『백두산』, 1999년 시집 『머나먼 길』을 간행하고, 미국 하바드 대학 하바드 옌칭 연구교수, 버클리대 객원교수 역임하였다. 전세계 10여개 언어로 50여권의 시집, 시선집이 간행되었다.


김형수  1959년 전남 함평에서 태어났다. 1985년 《민중시2》에 시로, 1996년 《문학동네》에 소설로 등단했으며, 1988년 《녹두꽃》을 창간하면서 비평 활동을 시작했다. 작품집으로 시집 『가끔씩 쉬었다 간다는 것』『빗방울에 관한 추억』, 장편소설 『나의 트로트 시대』, 소설집 『이발소에 두고 온 시』, 평론집 『반응할 것인가 저항할 것인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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