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 죄’의 인공적 탄생

 

‘사랑과 죄’의 인공적 탄생

―염상섭 장편소설 『사랑과 죄』다시 읽기



복도훈




연애와 돈


횡보(橫步) 염상섭(1897?1963)의 장편 『사랑과 죄』(1927?1928)는 뛰어난 연애소설이자 풍속소설이다. 『사랑과 죄』에는 작중 인물들의 사랑과 욕망의 갈등, 그리고 그것을 사회적 제도로 편입시키고 교정하려는 풍속의 의미가 매우 풍부하게 표현되어 있다. 염상섭은 『사랑과 죄』를 쓸 무렵인 1925년을 전후로 한 낭만적 사랑, 통칭 ‘연애’로 지칭되는 담론의 확산과 유행 속에서 이른바 현실주의적인 입장을 견지하고 있었다. 그 당시, 염상섭의 고민은 낭만적 사랑의 열병을 어떻게 현존하는 사회질서와 적절히 조화시킬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으며, 그에 대한 해답으로 작가가 내놓은 바는 당대의 연애의 풍속에 대해 최대한의 거리를 두어 그것을 관찰하고 조망하는 일이었다. 그 결과가 바로 『사랑과 죄』였다. 이 글을 시작하면서 던지는 질문은 이러한 것들이다. 작중인물들의 사랑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불쾌와 매혹을 동시에 수반하는 신여성 정마리아의 유혹과 소비적 향유는 어떻게 풍속에 의해 다스려지고 최종적으로는 죄로 처벌되는가, 사랑은 유혹 또는 향유와 양립하기 어려운 반면에 예술과는 보다 친연성이 있는가, 풍속의 관찰자라는 서술자의 시선은 과연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것인가.

일찍이 「개성과 예술」(1922)에서 “독이적(獨異的) 생명”이라는 개성의 발견과 그것의 생생한 표현적 통일체로서의 예술론을 펼친 바 있는 염상섭은 1925년 7월 잡지 《조선문단》의 특집, ‘제가(諸家)의 연애관’란에 「감상(感想)과 기대(期待)」라는 글을 발표한다.1) 이 글은 당대에 “박테리아”처럼 번지던 연애담론, 특히 낭만적 사랑에 관한 담론들이 가진 일정한 허구성을 논파하면서 동시에 신성한 연애의 가치를 현실 속에서 어떻게 실현하고 풍속적으로 교정할 것인가에 관심을 두고 있다.

「개성과 예술」에서 말한 ‘환멸의 비애’를 거치고 난 이후의 염상섭의 냉철한 현실인식은 『만세전』(1924)에서 그 집약적인 성과를 이루며, 연애문제의 경우 『사랑과 죄』이전의 여러 편의 소설, 가령 「해바라기」(1923) 등에서 낭만적 사랑을 현실적인 제도와의 매개를 통해 적절히 종합하고자 한 바 있다. 연애에 관한 한 염상섭의 현실인식은 다소 냉혹하게 제시된다. “현대인의 연애생활은 금전으로 매매되는 것이다.”(8쪽) 이러한 단정은 연애가 자본주의적 교환가치에 의해 교환되는 상품에 지나지 않는다는 인식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러한 현실적인 조건을 염두에 두지 않은 채 연애를 논하는 것은 공염불에 지나지 않는다는 현실주의적인 충고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염상섭은 “아무리 연애의 신성, 자유, 지상(至上)을 역설 강조할지라도, 물질적 조건을 무시하고는 그 이상을 달(達)할 수 없다”(6?7쪽)고 재차 강조한다. 그는 자본주의적 교환가치에 의해 성이 매매되고 교환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으며, 이를 “성의 자본주의화”(8쪽)라고 명명한다. 염상섭은 성이 매매 가능하고 사고팔 수 있는 자본의 현실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면 결혼생활은 한낱 생식의 수단에 불과하고 세상에는 성욕의 타락만이 횡행하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연애의 가치가 중요해지는 까닭은 연애가 바로 모든 것이 상품화되는 비루한 자본주의적 현실의 수평적 타락에 맞서는 수직적 초월, 또는 신성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다는 낭만적 믿음을 주기 때문이다. 바로 염상섭에게 연애는 또한 자신의 노동력을 상품으로 시장에 내놓을 수밖에 없는 개인 주체의 개성을 보존하고 실현할 수 있는 방법이 되기도 한 것이다. 그에게 연애는 바로 자기의 독이성, 즉 개성을 “상대형상(相對形像) 안에서 발견”(12쪽)하는 일이며 만일 그것이 창조적인 생활이라면, 연애는 또한 “예술”(같은 쪽)이다. 연애는 자본주의적 현실 속에서 자신을 창조적 또는 미적 주체로 가꾸어가는 ‘자기의 테크놀로지’의 과정의 일부이자 연속이기도 한 것이다. 그렇지만, 여기서 하나의 딜레마가 발생한다.

연애는 “유일인자(唯一人者)를 구하는 동시에 독점(獨占)을 필요조건으로 한다. 그럼으로 연애에 있어서 창조적 생활을 희구하는 의욕과는 큰 모순을 느끼게 한다.”(12?3쪽) 다시 말해 연애가 실현되는 현실은, 돈과 상품의 교환처럼, 일 대 일의 소유와 독점의 현실이기도 한 것이다. 주체의 독자적 개성은 자칫하면 그러한 교환의 순환구조 내에서 사라져버릴 위험에 놓여 있는 것이기도 하다. 연애에 신성한 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그러한 자본의 교환구조를 초월할 수 있다고 믿는 주체의 환상적 자기동일화 과정의 일부분이다.

여기서 연애, 낭만적 사랑은 이러한 자본제적 현실의 일부를 구성하고 합리화하지만 또는 그것을 벗어나려고 하는 주체의 환상(fantasy)이 되며, 그 환상은 유통되는 상품처럼 소비되며 또한 재생산된다. 사실 이것은 유럽에서는 18세기 말경에 산업자본의 담당자였던 부르주아지들이 낭만적 사랑을 특권화하는 방식과도 유사하다. 자유연애와 그것의 최종적 실현인 결혼이라는 사회적 풍속은 이러한 낭만적 사랑의 환상이 무대화되는 곳이다. 염상섭이 연애의 “유일인자를 구하고 독점을 원하는 데에 조금도 불합리를 발견하지 못”(13쪽)한다고 말할 때, 그는 연애와 그것의 제도적 실현에서 낭만적 사랑의 환상을 크게 의심하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이 상품이라는 염상섭의 냉혹한 언표는 그에게 사회경제적 현실은 또한 욕망이 순환하는 리비도적 경제의 현실이기도 하다는 것을 명확히 한다. 요컨대 염상섭에게 연애, 또는 낭만적 사랑이 무대화되는 장소인 사회적 풍속과 상품에 대한 욕망이 순환하는 리비도적 경제의 현실 사이의 간극을 어떻게 첨예하게 부각시키고 또 해소하는가 하는 것이 관건이었다. 『사랑과 죄』는 이에 대한 염상섭 나름의 소설적 대답이다. 『사랑과 죄』를 읽으면서 독자들은 이 소설에서 사랑의 현상학이라고 불러도 좋을 만큼 밀도 있는 사랑의 과정과 장애, 실현의 이야기를 풍부한 소설적 육체를 통해 음미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소설적 현상학에서 염상섭 특유의 낭만적 사랑의 리얼리즘이 현실의 어떤 구성인자를 배제하고 타자화하는 도정(道程)을 통해 실현되는가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기회를 얻을 것이다.



연애와 제도의 역설


『사랑과 죄』의 주인공들이 맞닥뜨린 현실은 식민지 조선에서 대홍수가 난 1923?4년 무렵의 경성이다. 일상적인 삶의 터전을 파괴한 장마와 괴질, 매독과 같은 질병이나 아편중독자들로 가득 차 있는 경성은 “음험과 살기와 음미의” 공간이면서 동시에 “이렇게 할 수도 없고 저렇게 할 수도 없는” 정체(停滯)와 마비의 도심이기도 하다.2) 나아가 경성은 “무슨 음모”라도 꾸밀 수 있는 “비문명한 조그만 도회”(312쪽)라는 식민지적 주변부의 현실을 표상하는 공간으로 설정되어 있다. 매우 복잡다단하게 방사형으로 끝없이 퍼져나가 종잡을 수 없는 소설의 스토리 역시 주어진 환경만큼이나 마비된 지식인들의 무기력과 수동성으로 가득 채워져 있는 한편으로, 지하운동과 동지 규합 또는 음모와 스캔들, 범죄의 활력으로 플롯이 빠르게 전개된다.

『사랑과 죄』의 스토리 라인(story line)은 크게 세 갈래로 나뉜다. 첫 번째는 흥산주식회사 사장인 류택수가 자신의 부를 이용해서 지순영을 취하려는 음모의 이야기이며, 이 스토리 라인에 그의 하수인인 노태로와 지순영을 팔아넘김으로써 경제적 이득을 취하려는 순영의 오빠 지덕진과 친모 해주집, 정마리아가 각각 참여한다. 두 번째는 변호사 출신의 사회운동가 김호연의 지하운동 이야기로, 그는 상해로 나가 있는 한희와 연락하면서 국내활동을 담당하고 동지들을 규합하지만, 계획은 발각되고 김호연은 체포된다. 세 번째는 이해춘과 지순영, 김호연과 이해정 등을 중심으로 엮어지는 사랑이야기다.『사랑과 죄』는 앞의 두 개의 스토리 라인이 세 번째 스토리 라인에 점차로 얽혀들게 되면서 결말로 이어지는 형식이다. 순영을 팔아넘기려는 음모는 두 번째 스토리 라인에서 류택수의 아들인 류진이 해춘과 호연, 순영과 연합함으로써 방해를 받게 되며, 또한 경찰서에 붙잡혀 간 지순영이 류택수를 거부하고 이해춘을 받아들임으로써 최종적으로 해소된다. 세 번째 스토리 라인은 첫 번째 스토리 라인의 장애물을 극복했지만, 두 번째 스토리 라인에서 김호연이 경찰에 수감됨으로써 절반의 해결책만을 지닌 채 마무리된다. 해춘과 순영, 류진이 동경에 가려던 꿈을 접은 채 봉천행 기차를 타는 것으로 소설은 끝난다. 이 세 개의 스토리 라인 중에서 세 번째의 연애서사는 『사랑과 죄』에 대한 기존의 논의에서 상대적으로 홀대를 받았지만, 사실 연애서사는『사랑과 죄』의 주 서사(main narrative)로 취급해야 마땅하다. 

지금까지 서술한 소설적 공간 안에서 개별 작중인물들 사이의 관계는 ‘전이’(transference) 메커니즘에 용이하게 노출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정신분석의 용어인 전이는, 마치 욕망처럼, 타자의 욕망 또는 정념에 대한 모방 또는 감정이입의 행위로, 그만큼 전파되기 쉽고 따라서 인공적인 상황에서도 얼마든지 만들어지는 것이기도 하다. 염상섭이 ‘박테리아의 번식’이라고 부르는 것은 바로 작중인물들 사이를 오가는 전이 메커니즘을 정확히 일컫는 비유이다. 그것은 소설의 첫머리에서 순영이 길거리에서 매독 환자를 보면서 자신의 친모인 해주댁을 연상할 정도로 감염되기 쉬운 어떤 것이다. 이러한 배경 아래에서 소설 주인공들의 각각의 정체성은 다소 불안정하게 나타난다. 해춘은 자작(子爵)이라는 신분을 유지하고 있지만, 그것은 아버지가 남긴 거추장스러운 유산에 불과하다. 스스로를 ‘야나기 스스무(柳進)’로 부르는 류진은 류택수와 일본인 여자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인으로, 극단적인 냉소주의자이자 허무주의자다. 순영 또한 기구한 인생유전을 겪으면서 지금은 아편쟁이가 된 생모인 해주댁과 건달 덕진의 삶을 책임져야 하는 형편이다. 해춘의 동생 해정은 류진과의 별거 이후 삶의 방향감각을 상실하고 방황한다. 호연만이 다소간 지하운동이라는 대의에 투신하고자 한다는 점에서 이들과 변별되지만, 그 역시 떠돌이 신세인 것은 분명하다. 소설의 작중인물들에게 ‘사랑’과 ‘돈’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 사이에 욕망과 애증을 낳는 가장 확실한 ‘전이’ 메커니즘의 매개이자 교환도구가 된다. 요컨대 그러한 욕망이 승화되면 ‘사랑’이 되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죄’가 된다. 그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라기보다는, 인공적으로 만들어지는 어떤 것이기도 하다.   

『사랑과 죄』의 스토리 2/3 이상은 해춘과 순영이 여러 가지 난관들에 맞닥뜨리면서 사랑을 실현하는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사랑을 실현하기 위해서 그들 앞에는 수많은 장애가 뒤따르는 형국이며, 그 과정에서 말할 수 없는 개별 주체의 고민들을 섬세하게 묘사한 장면들이 소설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이들은 자신들의 사랑의 고민을 사랑의 대상에게 직접 표현하거나 각자의 친밀한 상대에게 털어놓거나 하지 않는다. 즉, 그들은 상대방이나 다른 누구에게도 자신의 이야기를 고백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것이 이광수 소설의 고백하는 주인공들에 비해 염상섭 소설의 주인공들을 성숙한 주체로 판단하는 잣대가 되지는 않는다. 『사랑과 죄』의 해춘과 순영이 다소간 현실주의적인 감각을 소유한 인물들임에는 틀림없지만, 그들의 현실주의가 성숙의 최종적인 기준이 될 수는 없다.

오히려 소설에서 이들은 대단히 수동적인 인물로 그려져 있는데, 그것은 그들이 지나치게 생각이 많다는 특징에서 찾아볼 수 있다. 사랑의 경우, 염상섭 소설의 주인공들은 사랑을 실행에 옮기는 것에서 만족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역설적으로 행동을 제어하고 생각하는 행위 그 자체에서 만족을 누린다고도 볼 수 있다. 그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보증하고 담보할 수 있는 타자가 불확실한 상태, 즉 홍수와 질병으로 가득 찬 식민지 조선의 현실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현재 자신들이 몸담고 있는 제도와 습속의 틀에 맞춰 최소한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보존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들은 개별적이고도 사적인 은밀한 만남이나 주체의 내밀한 고백을 통해서가 아니라, 직업이나 공적인 일, 공공의 장소, 요컨대 사회적 상징체계인 제도를 매개로 해서만 자신들의 정념을 간접적으로 배출한다. 그것이야말로 ‘무기력’이나 질병의 ‘감염’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 자신을 쉽사리 드러낼 수 있는 무정형적인 거리, 정마리아가 자신의 존재를 한껏 노출시키고 류택수 일당이 순영과 그의 동료들을 미행을 하는 장소인 어두운 거리는 주요 작중인물들에게는 위험한 장소이며, 소설에서 이들의 공간 이동은 많은 경우 자동차나 전차 등 인공적인 교통수단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한 공간들 역시 철저하게 구획되어 있다.

그들은 문명과 위생의 상징인 일본인 주택가나 일본식 여관, 온천, 병원 등등을 자주 방문한다. 이에 비해 정마리아는 해주집이 사는 빈민촌의 사초전골에는 범죄를 모의하기 위해 다녀간다. 작중인물들의 욕망과 정념은, 이를테면, 그들이 속한 제도와 공적인 일 그 자체에 부속되어서만 나타나는 어떤 것이다. 그것은, 다른 한편으로 견고한 사회적 상징인 가면을 쓰는 일과도 관련이 있다. 사랑의 경우, 그러한 상징적 가면 배후에 사랑의 비밀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상징적 가면 그 자체가 사랑의 비밀인 셈이 된다. 『사랑과 죄』에서 주인공들이 그들의 파트너를 연인으로 알아보지 못하는 주인공들은 이광수 소설의 주인공들과는 달리 열정의 언어로 말하지 않으며, 오히려 지극히 공적이고도 예의바른 말로 정념을 에둘러 표현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무미건조한 언어 이면에 감춰진 의미를 가정하고 그 의미를 묻고자 하는 경우, 그것은 수수께끼가 되고, 해독되어야 할 기호가 된다. 이 수수께끼가 소설에서 그토록 해춘과 순영이 편지 한 구절이나 그들이 던진 말 한 마디의 결정적인 의미를 붙잡기 위해 환유적으로 미끄러지는 질문을 던지고 온갖 상대방들을 의심하는 이유가 되며, 결코 최종적인 의미가 고정되기 않기 때문에 순환적으로 반복되는 까닭이고, 결국은 소설이 그토록 길게 늘어지게 된 이유이기도 하다. 비평가 서영채는 해춘과 순영이 극복해야 할 장애물이나 온갖 제도적 장치로 인해 사랑의 향유가 지연되며,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이 실현되었을 경우 사랑의 향유는 그만큼 값지다고 말하고 있다.3) 그 반대도 진실이다. 제도는 사랑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아니다. 오히려 제도와 장애물, 또는 그로부터 파생되는 쌍방의 오해야말로 사랑을 낳기도 한다.4) 이러한 경우에 사랑은 자율적?주체적이라기보다는 인공적?기계적이 되며, 낭만적 사랑의 환상은 사랑을 주체의 자율적인 선택의 결과로 만든다. 『사랑과 죄』에서 낭만적 사랑의 환상을 실현하는 도구가 그림과 모델이라는 예술이라는 제도라는 것, 해춘과 순영이 자기 자신을 화가와 모델, 즉 고용주와 피고용자의 관계로 애써 규정하려는 태도도 흥미롭다. 그리고 염상섭에게 ‘낭만적 사랑의 리얼리즘’이란 사랑이라는 환상의 기초를 굳게 다지는 일인지도 모른다.



초상화, 또는 인공적 사랑의 탄생


해춘은 친구 호연의 부탁으로 세브란스 병원의 간호사인 순영의 초상을 그리게 된다. 해춘과 그를 집요히 따라다니는 마리아와 순영이 어색하게 해춘의 화실에서 긴장된 대면을 하던 중, 해주댁의 급작스러운 등장으로 긴장관계는 풀리게 되지만, 해춘은 돈을 구걸하는 해주댁이 순영의 친모라는 것을 알고 그녀를 돕겠다는 자신의 생각을 피력한다. 그런데 해춘은 다음과 같이 순영으로부터 한 통의 편지를 받고 정중한 거절의 내용이 담긴 편지를 낱낱이 뜯어보게 된다. 해춘에게 편지의 한 구절을 읽는 행위가 끝나면, 그 구절은 곧바로 숨겨진 의미를 해독해야 할 수수께끼의 기호로 변한다. 


어제 온밤 새도록 별 생각을 다―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모두 주책없는 어린 마음의 공상이었습니다. 놀라울 만한 공상이었습니다. (중략) 도와주시겠다고 하신 말씀―저는 결코 범연히 들을 수는 없었습니다. (중략) 그러나 저라는 존재가 얼만한 것인가를 생각할 제 어찌 그 도우심을 가만히 받을 수가 있겠습니까?……저는 지금 일종의 위험과 불안을 마음에 느낍니다. 그러나 마음으로 감사할 뿐이요 자칫하면 내어 벌리려는 두 손을 오므라드립니다……(73쪽)


이러한 사적인 편지의 발신과 수신을 가능하게 한 것은 물론 해춘과 순영 사이의 공적인 만남, 즉 화가 대 모델의 만남을 가능하게 한 공적인 배경 덕택이다. 난생 처음으로 받아보는 여성의 편지에 해춘은 “내가 이 여자를 사랑하려는 생각이 있었던가?”라고 반문한다. 그러나 그 반문은 화가라는 공적인 위치를 지닌 해춘의 편에서 보면, 부질없는 질문이 될 수도 있다. 순영이 남자로서가 아닌 화가인 해춘에게 보낸 답례의 편지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해춘은 더욱 확실하고도 보다 내밀해 보이는 사랑의 어떤 증거를 문맥에서 발견하고자 한다. 순영이 말한 ‘위험과 불안’에 대해서도 아래처럼 숨겨진 의미가 있지 않을까 의문을 던지고 그 질문은 계속해서 미끄러져간다.      


위험과 불안을 느낀다는 것은 또 무슨 의미일까?……내게 가까이 오는 것이 그다지도 위험할까? 그렇게 불안을 느낄까? 내가 귀족이라고 해서 그러는 것일까?……내가 만일 다시 결혼을 한다면?……평민의 피 상놈의 피를 끌어들일 것이다. 귀족의 피 양반의 피에는 인제는 싫증이 어지간히 났다! 양반의 피 속에서는 건져낼 것이 아무것도 없다.(74쪽)


난감한 상황은 편지를 보낸 순영의 편에서도 마찬가지다. 순영을 모델로 기꺼이 받아들인 것이 해춘이 자신에게 마음이 있어서인지 아니면 단지 모델이 필요해서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둘 중 어느 것으로 확고히 믿는다 하더라도 그 의미는 곧 결정 불가능하게 되며, 이내 그것은 새로운 의문의 기표로 바뀌게 된다. 요컨대 그들이 처해 있는 상징적 위치―화가와 모델―의 이면은 모두 불확실한 의문의 세계가 된다.5) 그들 각자는 그들의 정체성을 확증해줄 새로운 타자의 불확실성을 견디지 못하는 대신 타자의 흔적들, 증거들에 집착한다.

이러한 상황은 순영이 학질에 걸려 누워 있다가 나은 며칠 동안 순영의 불확실한 행방에 대해 해춘이 계속되는 의심을 갖는 것으로 연장된다. 순영의 안부를 묻자 병원에 있던 호연의 반응에서 자의적으로 읽어낸 냉담함이나 마리아로부터 들은 순영의 혼담 이야기, 호연과 순영과의 옛 동지적 관계, 그리고 동생 해정이 호연 대신에 류진을 선택한 것에 이르기까지 그 모든 것이 해춘에게는 의심과 불확실한 증거가 된다. 결국 이러한 오해로 말미암아 해춘은 평소에 그를 집요하게 따라다니던 정마리아에게 충동적으로 몸을 내맡기게 된다. 순영 역시 마찬가지다. 순영은 해춘의 답신이 없는 것에 초조해하면서 자신이 편지를 쓴 것에 해춘이 화를 냈다고 오해한다. 더군다나 순영이 마리아와 해춘이 모종의 관계에 있다는 가정한 상태에서 해춘이 마리아와 술을 마시게 된 연유를 의도하지 않게 발설했기 때문에 또 다시 오해는 증폭된다. 그렇지만 그들은 자신들이 처해 있는 상황 그 자체가 해답이 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바로 그들이 그렇게 편지를 보내고, 행동을 지연하며 고민하고 괴로워하는 그 자체의 상황 말이다. 그러나 이것을 통합된 관점에서 조망할 수 있는 것은 해춘과 순영이 아니라 저자와 독자들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의 공통된 무지와 오해의 환상은 단지 사랑을 방해하는 장애물이 아니라 나중에 사랑을 이루는 바로 그 조건이라고도 볼 수 있다. 사랑이 그들을 지나쳐가지만, 그들은 알아보지 못하는 것이다.6) 피화자의 입장에서 볼 때 이들의 사랑은 지연되는 향유가 아니다. 오히려 바로 그 지연됨의 행위 그 자체에서 이들은 역설적으로 향유를 얻고 있으며, 그것이 『사랑과 죄』의 풍부한 소설적 육체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

따라서 소설에서 해춘이 화가이며, 순영이 그 모델로 설정된 점은 의미심장하다. 그들은 고용주와 피고용주라는 분업의 상징체계를 통해서만 관계를 맺고 또한 애써 그것을 고집하기에 보다 은밀하고도 내밀한 그들의 욕망은 예술작품을 통해서 실현가능해진다. 예술은 각자의 오해에 바탕을 둔 해춘과 순영의 사랑을 일시에 통합하는 상상적 수단이 된다. 소설은 예술지상주의자 해춘이 순영의 초상화를 완성하는 과정과 그들의 사랑이 실현되는 과정이 동시적으로 진행된다. 초상화는 바로 사랑이 인공적인 창조 과정을 통해 만들어지는 것임을 밝혀준다. 요컨대, 순영은 해춘의 예술작품이며 사랑 또한 그러하다. 낭만적 사랑은 예술작품으로 승화된다. 예술이란 낭만적 사랑의 완성이라는 환상을 최고로 실현할 수 있는 제도인 것이다.

앞에서 인용한 문단에 이어지는 해춘의 상념에는 특기할 만한 구절이 있다. 편지를 읽은 다음 그는 미완성의 순영의 초상이 그려져 있는 캔버스 앞에서 잠시 공상에 잠긴다.


지금 자기 앞에서 순영이가 숨을 쉬고 앉아 있는 것 같았다. 금시로 무슨 말이 그 도톰한 산 입술에서 흘러나올 것 같았다. 해춘이는 또 한 번 혼자 빙그레 웃고 여전히 화면이 뚫어질 것 같이 바라보고 서 있다. 그것은 마치 봄날의 아지랑이를 한참 바라보는 것 같이 그럼 전체에 무슨 영원한 생명의 맑은 샘이 스며나오는 것 같이도 해춘이에게는 보였던 것이다.(75쪽)


해춘에게 순영의 초상화가 담긴 화폭은 자신의 사랑의 열정을 투사하는 고유하고도 내밀한 환상적 스크린이다. 해춘의 화폭에 그려진 초상화는 순영의 편지에 담긴 의미 내용을 해독할 수 없었던 텅 빈 당혹감 대신에 채워질 수 있는 리비도적 투사물로, 그것은 해춘 이외에는 누구도 접근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순영에 대한 판타지로 둘러쳐진 해춘의 삶을 강력하게 위협하는 존재가 있다. 한순간에 순영의 초상화를 망칠 수 있고, 예술지상주의자로서의 그의 삶을 조각낼 수도 있는 오점이자 얼룩. 해춘에게 유혹과 불쾌감을 동시에 가져다주는 정마리아의 존재가 바로 그 오점이자 얼룩이다.



유혹자의 배제, 또는 교정자로서의 풍속 


『사랑과 죄』에서 정마리아는 시종일관 유혹자의 모습으로 등장하고, 나중에는 거의 히스테리와도 같은 질투의 정념에 사로잡혀 순영의 친모인 해주댁을 살해하는 범법자가 된다. 해춘에게 순영이 욕망이 승화된 예술작품의 의미를 띠고 있다면, 정마리아는 그녀의 충동적인 행동과 유혹자로서의 모습으로 인해 쉽사리 재현하기 어려운 인물이기에 다만 스테레오 타입으로만 제시되어 있다. 어떤 연구자들은 정마리아에 대한 서술자(작가)의 초점화 양상이 풍속관찰자의 객관적 시점이 아니라 남성 주체인 서술자가 당대의 신여성에 대해 갖고 있던 무의식적인 반감이 돌출된 왜곡된 재현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왜곡된 재현 이전의 순수한 재현과 같은 것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다.

물론 서사시학에서 서술자의 논평이 서술자 자신의 도덕적 입장, 환언하면 세계관을 드러낸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7) 마리아와의 불유쾌한 첫 만남에서 순영에게 마리아는 “기생퇴물이나 남의 첩 같은 꼬락서니와 말버릇이 더러워”(28쪽) 보이는 여자로 재현되며, 서술자에 의해서는 “살롱의 귀부인으로 자처는 하였지만 입에서 나오는 수작은 칠판 밑에 앉아 있는 여학생”(32쪽)에 지나지 않는 자로 비판되고 있다. 유혹자로서의 그녀의 모습 역시 “마리아의 일거일동은 모두 남자의 정욕을 조하랴는 목적을 가진 것”(110쪽)으로 제시되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정마리아에 대한 이러한 남성 주체 서술자의 재현이 아니다. 그녀가 해춘에게 가져다주는 유혹과 불쾌의 혼합된 정서에 해춘도 모르게 자꾸 이끌리고 있다는 사실이 오히려 더 중요하다. 해춘이 순영과 결합될 때, 그러한 유혹은 더 이상 문제시되지 않지만, 그때부터 마리아는 서사의 종결부에 이르기까지 범법자로 역할이 뒤바뀌어 있다. 서영채의 지적처럼, 소설은 해춘이 순영을 감옥에서 구하고 난 후 두 사람이 함께 기차에 오르고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는 장면(‘귀경’편, 334쪽)에서 실제로 끝난다고 볼 수 있다. 그럼 나머지 부분은 어떻게 되는가? 서사의 여분이 계속 진행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정마리아라는 존재가 소설에서 긍정적 기능을 담당하는 작중인물들에게 가져다주는 불편과 위협을 해소하기 위한 서술자의 고안으로 볼 수 있다.

『사랑과 죄』에서 정마리아는 근대성의 단면이 모조품과 박래품에 지나지 않음을 잘 보여주는 스테레오 타입의 모던 걸이지만, 아래 인용문에서 그녀는 단발과 복장, 복장 사이로 드러난 흰 피부, 온갖 상품들의 소비자이자 체현자이며, 동시에 자신을 소비경제의 상품으로 제시하고 있다. 그녀가 뭇 사람들의 응시의 대상이 되고 스스로 그것을 즐기는 거리는, 상품 구매가 일어날 수 있는 장소가 되기도 한다.


「괜찮지요? 흉 없지 않아요?」하고 흰 파나마 모자를 쓴 채 남자에게 머리를 살짝 돌려 보인다. 아까 아침까지 이 손(해춘의 손)으로 만져보던 여자의 머리가 싹둑 잘려졌다. 순영이는 무심코 상긋하였으나 해춘이는 웃을 수도 없고 웃지 않을 수도 없었다. 이때의 이 남자의 얼굴을 <카메라>에 찍어 두었으면 마리아는 나중에라도 보았겠지만 돌아선 마리아는 다행히 못 보고 말았다.

머리뿐만이 아니다. 들어올 때부터 눈여겨 본 것이지만 상큼한 콧날 위에는 원산과 귀거리를 금으로 한 예쁘장스러운 안경이 걸려 있다……해춘이는 또 한번 실소하였다. 그러나 결코 결코 이뻐 보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노르스름한 팔 없는 양복도 몸에 턱 어울리게 입매가 있거니와 시원스럽게 내어놓은 백설 같은 팔목에는 금시계줄이 팔깍지 대신으로 휘감기었다. 풋대초만 한 <에메랄드>가 어른거리는 손에는 오페라?박스가 하늘거린다.(223?4쪽)


인용문은 파편화된 상품 대상들에 대한 해춘(서술자)의 부분적인 응시로 가득 차 있다. 해춘은 마리아의 이러한 모습에 반감과 조롱을 나타내 보이지만, 사실은 응시의 대상에 무의식적으로 지속적으로 이끌리기도 한다. 해춘이 순영의 존재가 사랑의 대상으로 점차 확실하게 윤곽이 그려지자, 타락한 자신을 자책하다가 마리아의 존재를 타락으로, 순영을 순결한 희생자로 재빠르게 전치시키는 것은 필연적이다. 마리아가 뿜는 매혹과 반감을 감당할 수 있는 힘이 그에게는 없었기 때문이다. 마리아는 그때부터 해춘으로부터 완벽히 타자화된 대상, 악당으로 낙착되며, 종국에는 범죄자로 처벌받게 된다. 그녀는 합리적인 교환경제와 자기절제의 남성적 미덕을 위협하는 저속한 물질주의의 구현자로서 처벌받게 되는 것이다.8)  

『사랑과 죄』는 그 구성상의 느슨함, 특히 해춘과 순영의 결합을 전후로 한 탐정소설적 구성으로 인해 비판받았다. 일리 있는 지적이지만, 해춘과 순영이 결합하게 되는 서사 이외에 정마리아의 파멸을 보여주는 서사의 잉여를 별도로 보여줌으로써 끝을 맺는 작가적 의도를 고려할 필요가 있다. 해춘과 순영의 결합을 사랑과 욕망이 화해하는 층위로 놓고 본다면, 정마리아를 범죄인으로 만드는 것은 그녀가 누리는 향유를 사회적 규범, 법질서라는 제도로 다스리고자 하는 의도에서다. 그녀를 음모의 가담자인 ‘스파이’에서 범법자로 만듦으로써 인륜성의 수호자이자 심판자로서의 풍속이 서사의 나머지 진행 그 자체에 직접 관여하여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9) 요컨대, 그녀의 다스릴 수 없는 욕망은 그녀의 범죄가 된다.

풍속이란 이러한 욕망과 범죄, 사랑이 드러나는 무대이며, 그 사회를 지탱시키는 자아 이상(ego-ideal)이다. 동시에 풍속은 법의 개입으로 말미암아 검열하고 감시하는 초자아의 역할을 담당하기도 하는 한편, 풍속을 제어하는 사법집행기관의 역할을 대신하기도 한다. 풍속은, 헤겔이 말하는 인륜성(Sittlichkeit)의 체계이며, 그 사회를 지탱시키는 자아-이상(ego-ideal)이다.10) 그러면서도 그것은 동시에 검열하고 감시하는 초자아(superego)의 역할을 담당한다. 해춘과 순영의 낭만적 사랑의 실현이 소설의 후반부에서 스캔들 기사로 나타나는 것은 당대의 풍속이 이들의 욕망의 실현을 추문으로 만든 결과다.11) 적어도 식민지적 현실 속에서 낭만적 사랑은 예술이라는 상상적 스크린을 통해서만 실현가능한 것이었으며, 실제적인 그들의 사랑의 실현은, 1920년대 전반의 식민지 조선의 경성이라는 공동체에서는 받아들여질 수 없는 것이었다. 당시의 식민지의 풍속의 체계는, 이들의 사랑의 실현을 위한 무대를 일면 제공하는 듯 보이면서 동시에 그것을 추문으로 만든다. 따라서 그들의 사랑의 실제적인 실현의 무대는, 애초에 계획했던 동경행이 아니라, 봉천행이 됨으로써 미완성으로 끝맺게 된다.

일찍이 「감상과 기대」를 통해 염상섭이 의도했던 예술로서의 낭만적 사랑은, 『사랑과 죄』에 와서는 해춘이 순영의 초상화를 완성시키는 것으로 실현된다. 작가의 표현을 빌면 그것은 욕망을 “승화(昇華)”(346)시킨 결과로, 마리아라는 충동과 타락의 얼룩을 제거하고 난 이후에야 가능했다. 홍수와 전염병이 창궐한 주변부 식민지의 도시에서 소설의 주인공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위협받고 기존의 상징적 제도와 습속을 통해서만 사랑을 간접적으로 표현하지만, 이러한 사랑을 통해 타자와의 새로운 삶을 희망하자마자, 다시 그 제도와 습속에 의해 스캔들이 된다. 염상섭의 낭만적 사랑의 리얼리즘은, 이 모든 과정을 풍속사가처럼 풍부하게 그려내지만, 앞서 살펴본 것처럼, 그 서사적 진행은 정마리아와 같은 불순한 존재를 배제하는 과정을 통해서만 실현가능한 것이었다. 그때 염상섭이 말하는 풍속은 단지 인륜성을 수호하는 모범의 체계에 국한되지 않고 정마리아와 같은 불순한 존재들에 대한 사회적 교정과 처벌을 적극 담당하는 초자아적 감시자가 된다. 식민지적 현실의 이중성은 바로 풍속의 이중성으로 나타나고, 풍속의 이중성 속에서 사랑과 혁명은 잠정적인 국외행이 될 수밖에 없다. 이제 당대 풍속에 대한 중립적 관찰자인 염상섭 소설의 ‘리얼리즘’을 말할 때, 풍속이 작가/서술자의 남성적 응시와 특별한 세계관이 이미 포함된 결과라는 것도 재삼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풍속에 대한 객관적이고도 중립적인 시각이란 엄밀히 말해 존재하지 않는다. 리얼리즘이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그런 시선이라면, 리얼리즘이라는 용어를 애써 고집할 필요는 더더욱 없다.《문장 웹진/ 2007년 8월》

 


 

※후주

1) 이 특집호에 실린 글들은 나중에 염상섭 외,『朝鮮文士의 戀愛觀』(雪華書館, 1926)이라는 단행본으로 출간된다. 앞으로 염상섭의「기대와 감상」은 모두 이 책에서 인용할 것이다. 인용은 본문에 쪽수를 병기한다.

2) 염상섭,『사랑과 죄―염상섭 전집 2』, 민음사, 1987, 123쪽. 이하 인용할 경우 본문에 쪽수를 병기하며 이해의 편의상 현대어 표기로 바꾼다.

3) 서영채,『사랑의 문법: 이광수, 염상섭, 이상』, 민음사, 2004, 205쪽.

4) 이에 대해서는 레나타 살레클,『사랑과 증오의 도착들』(이성민 옮김, 도서출판 b, 2003)의 1장을 참고할 것.

5) 흥미로운 사실은 순영 역시 자신에게 모범적인 존재인 호연과 동일한 문제에 봉착한 적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순영은 호연에게 동지로서 믿음직한 존재이지만, 한편으로는 그 이상이기도 하다. 그러나 지하운동을 벌이며 동지인 환희의 부탁으로 순영을 데리고 있게 된 호연으로서는 순영의 그 이상의 열정은 부담스러운 것이다. 지하운동이라는 대의(Cause)라는 이상에 헌신하는 호연은 철저하게 순영을 밀어낸다. 해춘에 대한 순영의 계속되는 오해 또한 이러한 상처에서 연유한 결과라고 보아도 좋다.   

6) 이와 반대로 상대방을 비로소 알아보지만, 사랑이 너무 늦게 도착한 경우도 있다. 해정과 호연의 관계가 그렇다. 해춘의 여동생 해정은 류진과 호연 사이에 갈등을 하다가 류진을 선택했지만, 스스로 무국적자로 자임하는 냉소적 허무주의자 류진과 해정의 결혼생활은 파탄에 이르고 만다. 해정은 호연이 머무르고 있는 병원에 출입하면서 이혼 이후의 삶의 향방이나 일상적인 고민을 털어놓으며 호연에게 친근함을 느끼며 다가가지만, 해정에게 호연은 이미 때늦은 사랑에 불과한 것이다.  

7) 슐라미스 리몬-캐넌,『소설의 시학』, 최상규 옮김, 문학과지성사, 1985, 146-8쪽.

8) 리타 펠스키,『근대성과 페미니즘』, 김영찬?심진경 옮김, 거름, 1998, 144쪽.

9) 그러한 풍속을 교정하고 관할하는 자는, 실제적으로는 풍속의 위반을 단속하고 감시하는 경찰의 존재가 되어야 할 것이다.『사랑과 죄』에서는 다소 수수께끼 같은 인물인 일본인이자 조선을 잘 이해하는 심초(深草)매부가 경찰의 대리 역할을 떠맡는다고도 가정할 수 있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제국주의자의 모습을 이면에 감추고 있는 관용적인 다문화주의자에 가까운 그는 식민통치에도 간접적으로 관여한 경력이 있는데, 1920년대의 식민지의 문화통치의 모범을 환기하는 인물로 보인다. 소설에서 그는 해춘과 순영의 결정적인 조력자로도 등장하지만, 그들의 숨은 내력(정보)을 해주댁으로부터 전해듣는 경찰적 존재다.

10) 헤겔의 인륜성의 개념은 정신분석의 자아 이상(ego-ideal)과 유사하다. 즉 그 지점에서 보았을 때 주체가 주체 자신의 눈에 좋아할 만한 모습으로 보이는 곳이며, 그로써 상징적 정체성을 획득하는 영역. 인륜성의 체계인 풍속은 한 사회나 국가 공동체의 습속이며, 가치체계의 육체화된 모습이다. 풍속은 공동체를 벗어나는 개별자의 욕망과 범죄를 추문으로 만듦으로써 그 사회의 이상적인 규범을 재수립하거나 재확인한다. 이에 대해서는 레나타 살레클,「악은 보지도, 말하지도 말라」, 앞의 책, 217쪽 참조.

11) 이에 대해서는 이혜령,『한국근대소설과 섹슈얼리티의 서사학』, 소명출판, 2007, 120?24쪽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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