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름 속으로 외 3편

 

김경인

 

 

 구름 속으로

 물 아래에서

 금요일에서 온 사람

 지워지지 않는 페이지



구름 속으로 외 3편




천천히 사라지고 있군

나는 조금 가벼워진다고 생각해


미끈거리는 꼬리를 싹둑 잘라내고

뒤죽박죽 흩어져볼까

지독한 냄새를 흘리며


나무는 이파리에 숨어 초록을 견디는데

나는 여전히 초록이 두렵고

그건 당신도 마찬가지


복면을 뒤집어쓴 새는 지겹지도 않나 봐

오래 전 목소리를 흉내 낸다네

또 무엇을 고백하려고


(앵무새야, 불룩한 주머니를 뒤지지 말아다오

성대가 잘리기 전에, 어서!)


내가 모르는 곳에서 당신은 자꾸 태어나지

그림자놀이 따윈 다 끝장난 줄 모르고


고백했다고 아무것도 아닌 건 아니야

새끼를 가득 품은 눈먼 주머니쥐처럼


그물 속 새는 변성(變聲)을 거듭하며 새 이야기를 낳고

열 개의 손가락은 각기 다른 방향으로 지워진다네


나는 냄새를 풍기며 부드럽게 스며들지

가장 낯선 얼굴 속으로




물 아래에서




여기는 깊고 끝이 없어 고백해봐 실비아, 너는 뾰족한 목소리를 가졌구나 나는 입을 꼭 다문 채 잠들었고 가끔 깨었지


입을 다물면 세상은 요람보다 안전해 잠들면 악착같이 자라나는 머리카락처럼 이야기는 물 아래에서 시작되지


무궁무진한 이야기가 수면을 흔드는 동안 배우는 코르셋을 벗고 여자들은 변성기를 맞이했어 겨우 살아남은 소프라노들은 젖은 몸 말리며 뻐끔뻐끔 합창하지 엄마, 아빠, 이 사랑하는 개자식들, 다 끝났어* 청중은 검은 악보를 소리 나게 덮는다


물 위로 떠오른 것은 극히 일부야 너무 많은 것이 흘러가는 동안 혀는 퉁퉁 불어 가라앉지 파문에 휩쓸릴까 봐 두려웠어


달팽이를 기억하니 달팽이는 집이 부서진 채 따가운 햇살에 데여 나동그라졌지 집을 부순 건 내가 아니야 비릿하고 끈적끈적한 것들에 나는 취미가 없어


실비아, 집을 떠나면 무엇이 있다고 생각하니 너는 빠른 다리를 가졌지만 나는 두 팔로 기어간다 네가 복화술을 배우는 동안 나는 더듬더듬 내뱉지 흰 얼굴과 검은 얼굴의 실비아, 나는 물에 잠긴 표정만을 기억하지  


물 밖에 있는 자의 목소리를 듣는다 실비아, 온전한 다리를 가진 나의 자매, 물 밖에 있는 자들의 안녕소리 듣는다 내가 내민 손을 보았니 실비아, 물속은 아주 따뜻해




*Sylvia Plath,를 변주함




금요일에서 온 사람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 기억하지는 않아요

나는 절룩거렸고

나는 뒤로 걸었고


어제는 청어를 먹고 드라이브를 떠났어요

가시 많은 고슴도치처럼 껴안았죠

우리에겐 지도가 없었고

난 어제,라는 말을 가장 좋아하지만

설명할 수는 없어요


그건 오른쪽이나 왼쪽일 거예요

흙먼지 속에서

뿌옇게 지워진 내가 걸어왔다면 아마 거길 거예요


사람들은 아주 가끔 신기한 듯 물었죠

너는 참 이상하게 걷는구나, 길을 끌고 다니듯

그건 아마 내 안의 길들이 무릎 아래로 끌어당기기 때문이겠죠


당신이 걷는 길에 내 발자국이 찍혀 있다면

끝나지 않는 골목과 높은 담들

늙어서도 울고 있는 아이를 지나

그렇게 왔을 거예요


그건 긴긴 금요일의 길 위에서였을 거예요




지워지지 않는 페이지




내 안, 만 갈래로 엉킨 20세기가 흐른다 첫 페이지를 열면 동경산보를 마치고 막 돌아온 할아버지가 젊은 아내를 이끌고 경성으로 떠난다 그들이 처음 만났다는 모란봉에도 곧 눈이 내리겠지 바람이 불어오는가, 한번도 펼치지 않은 페이지들이 나부낀다 언뜻 펼쳐진 페이지에선 할아버지가 밤을 새워 글을 쓴다 채 마르지 않는 잉크엔 불온한 빛깔이 스며 있다 국민의 애국세(愛國勢)는 그칠 바 모르게…… 황군(皇軍)에게 대한 감사의 염(念)과 격려의 성(聲)이 격우격(激又激)한 때였다.* 밖에는 사람들이 하나둘씩 죽어 가는데……그만하세요. 내 뼈마디가 일제히 비명을 지르며 달그락거린다 어느 페이지에는 폐 속까지 들어찬 가래를 삼키며 그가 어두운 길을 향해 홀로 누워 있다 젊은 아내는 알감자 같은 아이들을 이끌고 어디쯤 가고 있는가 쓰다만 글자 위로 피가 번졌다 내가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기억의 집 유리창들이 아픈 풍경을 담아내느라 덜컹거렸다 나는 오래도록 활자들을 만지작거리다 검게 검게 봉해버린다


봉인된 심장과 머리를

페이퍼나이프로 북 찢고 

조그만 빛조차 들어설 수 없는

어두운 서고를 돌아서면

나 태어나기 훨씬 전

핏줄마다 새겨진

지워지지 않는 이 페이지




* 매일신보, 1941.3.23~29에서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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