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의 시를 읽다

 

지역의 시를 읽다

―늘어가는 지역 잡지들을 위하여



김남석




1. 범람하는 시 잡지와 지역으로 흩어진 시


한국 문단에는 문학잡지가 참으로 많다. 만나는 사람들마다 문학은 없는데 문학잡지만 늘어난다고 한 마디씩 하기 일쑤이다. 이제 그 이유를 한번 생각해 볼 때가 되었다. 잡지가 늘어나는 이유는? 가장 일상적인 답변은 지면이 부족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이 답변에는 모순이 내재한다. 늘어난 잡지는 대개 시인을 양산해서 다시, 지면의 품귀 현상을 불러왔다. 그렇다면 잡지를 늘릴 이유가 없지 않을까. 도리어 걷잡을 수 없이 늘어나는 시인의 숫자를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다음, 문학하는 사람의 근원적인 욕망 때문이다. 문학하는 사람들은 작품을 발표하고 세상에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싶어 한다. 잡지를 만든다는 것은 단순히 지면을 제공하는 일을 넘어, 한 문학 집단의 목소리를 취합하는 일이다. 그러니 잡지의 생성은 곧 문학 집단의 목소리가 생성됨을 뜻한다.

그렇다면 늘어나는 문학잡지가 과연 그들만의 색깔을 가지고 있을까. 가령 《문학판》이 《문학과사회》와 다르고, 《문학수첩》이 《문예중앙》과 다르다고 할 수 있을까? 견해야 다를 수 있겠지만, 내 생각에는 별다른 차이가 없다. 더 심각한 문제는 《문학과사회》나 《문예중앙》이나 《문학동네》가 별 차이가 없고, 심지어는 《창작과비평》까지도 별 차이가 없으며, 이제는 각 잡지들이 서로 같아지는 것을 꺼려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소설의 경우이기는 하지만, 일례를 들어보자. 이들 문학 집단은 공통적으로 박민규를 모셔가기 바쁘다. 설령 아직 모셔가지 않았다고 해도, 조만간 모셔갈 것으로 보이는데, 그럴 때마다 특정 잡지와 ‘박민규’가 과연 문학적 궁합(?)이 맞는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박민규는 현재 모든 문학잡지의 종파를 하나로 통합시키는 교주 역할을 하고 있다(이러한 나의 발언을 이상하게 비꼬아 문학 편파주의나 막연한 박민규 비판 정도로 받아들이지 않았으면 한다).

지금 내가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바는, 문학잡지의 창건이 실제로는 문학 집단의 차별화된 목소리와 관련이 없다는 점이다. 다만 범박하게 ‘내 맘대로’ 혹은 ‘우리 문학 섹트의 맘대로’ 편집하고 조율하고 싶은 잡지를 만들고 싶다는 욕망일 수는 있어도, 그것이 한국 문학을 위한 차별화된 그리고 개성적인 목소리는 아니라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설득력을 더해 가고 있는 답변을 살펴보자. 출판 주체 그러니까 출판사나 출판인의 이익 때문이다. 이에 대해 우리는 많은 풍문을 접하고 있다. 어떤 출판사는 어떤 책을 번역해서 남들이 평생 노력해도 얻지 못하는 돈을 벌었다더라, 그리고 그 수익으로 문화 사업하는 셈치고 잡지를 만든다더라, 잡지를 만들면 자사 책을 소개할 수도 있고, 사회사업으로 존경받을 수도 있으며, 필요한 경우에는 자신의 출판사를 옹호할 수 있는 ‘문화적 홍위병’도 얻을 수 있다더라 등등. 소문이 사실이라면 이거야말로 일거삼득이 아닐 수 없다.

한 가지 양해를 구해야 할 것은, 내가 소문에 의지했고, 이 사항에 대해 법률 자문을 구한 적이 없으며, 이 문제에 대해 전문가와 상의하거나 인터뷰를 한 적도 없다는 점이다. 그러니 열거한 사안들이 실제 사실을 호도할 수 있음을 기꺼이 인정한다. 그러나 문제는 소문의 사실 여부가 아니다. 현재의 대다수 문학잡지가 출판 주체의 이익을 꾀하는 방향으로만 흘러가고 있다는 점이 문제이다. 많은 잡지들이 보이지 않는 힘으로, 보이지 않는 출판 주체를 둘러싸고, 우리 문학의 물꼬를 자신의 필드로만 끌어들이려고 하고 있다.

이런 힘들에 대한 비판도 이미 제기되어 있었던 것으로 안다. 하지만 그 비판들도 상당 부분 상업화되거나 전략화되었기 때문에, 전적으로 신뢰하기 힘든 형편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 문단은 문학잡지의 확산이라는 전대미문의 호황을 누리고 있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차별화된 개성 하나 제대로 창출하지 못하는 절대 빈곤 속으로 빠져들고 있다. 그래서 ‘박민규’라는 작가의 출현으로 우리 문학은 난데없는 열풍에 시달려야 했고, 그나마 구획이라도 나누고 있던 잡지들의 경계가 한꺼번에 무너지는 현상을 목도해야 했다.

최근 ‘미래파’ 논쟁도 비슷하다. ‘미래파’ 논쟁은 진위 여부를 가리는 논쟁이었다기보다는, 잡지의 색깔과 문학 섹트를 확보하려는 다소 우스운 해프닝에 불과했다. 이것은 비단 이러한 명명법을 시행한 어떤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이 명명법을 도입한 평론가는 나름대로 문제의식을 드러냈다고 할 수 있다. 문제는 이러한 명명과 정의에 대처하는 문단, 즉 문학잡지라는 섹트화된 권력들이었다. 현재의 우리 문단은 하나의 문제 제기를 촉발시켜 고급스러운 방식으로 논쟁할 만한 문화적 인프라를 갖추지 못했다고 결론지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다시 문학잡지 이야기로 돌아가자.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 잡지의 초스피드적 생산과 출판사들의 문어발 식 확장을 방관하기만 할 것인가. 어떤 사람들은 잡지의 통합론을 거론하기도 한다. 그 이야기를 들은 다른 사람들은, 그런 일이 일어날 수는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잡지는 문학하는 이들의 욕망인데, 그 욕망을 쉽사리 꺾을 수 있겠느냐는 논리이다.

잡지의 통합론이 대두될 수밖에 없는 상황도 이해하고, 통합론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주장에도 동감한다. 그 이유가 문학하는 사람들의 기본적 욕망 때문이라는 의견에도 이의가 없다. 그런 측면에서 이 가속도를 멈추거나 이에 대처할 획기적 방안은 거의 없어 보인다. 그렇다고 현재의 문학적 상황을 적자생존이라는 원리에 그냥 맡겨둘 수도 없다.


문학은 생존(노동)의 권역을 벗어나는 영역에서 생성되고 자라난다. 문학을 한다고 현실적인 영화와 이익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며―설령 그런 예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그것이 문학을 하는 진짜 이유는 될 수 없다. 문학은 기본적으로 인간이 노동하고 생존하는 조건들을, 그 조건들의 바깥에서 들여다보는 행위여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실 논리인 적자생존으로 이 문제를 처리하기에는 미흡한 감이 적지 않다.

지금 우리 문단은 이 상황에 대해 대처 방안도 찾지 못했지만, 모른 척할 수도 없는 난처한 입장에 처해 있다. 나뿐만 아니라 많은 비평가들이, 문학하는 사람들이 그러할 것이다. 이러한 문제의식을 인식하면서도, 나는 작은 대안밖에는 제시하지 못하겠다. 이 글은 차라리 대안이기보다는, 작금의 문제에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는 힘없는 평론가가 세상에 돌려주는 ‘작은 미안함’이다.

만들어졌으되 읽히지 않는 잡지들이 책상에 쌓이는 것을 더 이상 지켜보기 민망해서, 그 책들 속의 시들을 뒤적여 미련한 글을 만들어 본 것이다. 이것을 색깔 없는 잡지가 범람하는 이 시대에, 한 비평가가 세상에 내놓을 수 있는 솔직한 고백으로 이해해 주면 좋겠다. 그리고 목소리만 높고 내실은 없는 작금의 잡지 호황을 대항하는 가장 정직한 방안이었다고 이해해 주면 더욱 좋겠다.



2. 따뜻한 마음, 뭉클한 시 : 《시와 사람》 2006년 겨울호에서


심재휘의 시 「춘자 이야기」를 읽다가 이상하게 마음 한 구석이 저려오는 느낌을 받았다. 평론가로서 이러한 체험은 금물이지만, 금물이기 때문에 더욱 신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서울 근방에 살고 있다고 했다 얼른 얼굴을 알아보지는 못하였는데 삼십 년만의 모임에서 만난 그녀는 쓰고 온 커다란 선글라스처럼 진심으로 유쾌했다 선글라스가 짙어서 눈 속에 난 길이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초등학교 때처럼 큰 소리로 웃으며 진심으로 반가워했다 횟집 앞 바다는 저물기 전이어서 여러 갈래 길들이 울렁대며 만났다 흩어졌다


춘자는 키와 눈이 여전히 작았고 얼굴은 가무잡잡했고 잘 차려 입은 검은 블라우스가 꽃 같았는데 알 수 없는 타관의 거친 사투리로 내내 시끄러웠다


굽 높은 빨간 구두를 신을 때에도 쟁쟁거리는 목소리로 오늘 돌아가야 한다고 했다 하나씩 둘씩 승용차를 타고 서울로 고향집으로 뿔뿔이 떠나자 맨 끝에 남아 들꽃 같았던 그녀 직행 버스가 늦게까지 있으니 몇 번 갈아타면 된다고 하였다 어두워진 바다는 잔잔했고 그 안으로 세상의 모든 길들이 깊게 깊게 가라앉고 있었다 어디로나 길이 되는 고향 바다였다

―심재휘, 「춘자 이야기」, 《시와사람》2006년 겨울호, 60면.


시인은 지금 동창회를 회상하고 있다. 시인의 고향이 강릉인 점을 감안하면, 아마도 강릉 어딘가 바다가 보이는 횟집에서 열린 동창회였을 것이다. 유독 눈에 띄는 동창이 있다. 춘자. 삼십년 만에 동창을 만나는 자리에 선글라스를 끼고 나타나 유쾌하게 웃는 여자. 그 여자를 보는 시인과 시인의 동창들의 마음도 한껏 유쾌해졌다.

시인이 춘자에 대해 의아하게 생각하기 시작한 것은 2연이다. 그녀는 여전히 키가 작고 눈이 작았지만, 예전과는 달리 타관의 거친 사투리가 배어나오는 말투를 사용하고 있었다. 잘 차려 입은 블라우스도 마냥 어울린다는 느낌만 들지는 않았던 것 같다. 예전과 변함이 없는 것 같으면서도, 어딘가 달라진 듯한 인상이었다고나 할까.

굽 높은 빨간 구두를 신는 그녀를 보면서 시인은 잠시 엉뚱한 상상을 한 듯하다. 모인 친구들이 달라진 경제력과 신분 상승을 과시라도 하듯 타고 온 승용차를 타고 떠날 때, 정작 화려해 보이던 그녀만은 뒤에 남는다. 자신은 직행 버스를 타고 가면 된다고, 늦게까지 차가 있어 쉽게 갈 수 있다고 변명하듯이 남는다.

시인은 춘자의 처지를 속속들이 그려내지 않았다. 이 시는 어떻게 보면 달라진 춘자와 자신을 비교하는 시인의 내면 풍경을 그린 것 같기도 하고, 어떻게 보면 어딘가 처지는 춘자를 동정어린 눈으로 바라보는 감정을 담은 것 같기도 하다. 시의 마지막 구절대로 하면 세상의 모든 길들이 다 시작되고 또 갈라지는 이 지점에서 어릴 적 친구와의 우연한 만남을 위로하는 것 같기도 하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이 시에서 춘자가, 잘못 끼어든 이방인처럼 느껴졌다. 그녀는 고상하게 모인 시인의 동창들과 다른 세계에 사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시인의 시를 철저하게 오독할 수도 있겠지만, 만일 춘자가 이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 처지였다면 우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자리에 오고 싶어 했던 춘자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다.

춘자는 서울에 살 수도, 다른 타관에 살 수도, 아니면 사는 것이 일정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그녀는 고향을 그리워했고 그 고향의 품을 느낄 수 있는 자리를 그리워했다. 그 그리움을 따라 왔건만 잠시 동안의 회포 이후에는 그들은 그녀를 맞이할 수 없는 자리로 돌아가야 했다.

그런 춘자를 예민한 시선으로 지켜보면서도 끝내 그 차이점을 인정하고 돌아설 수밖에 없었던 시인의 마음은 우리 마음 구석에 부끄럽게 담겨 있는 우월의식과 시혜의식을 일깨워준다. 시인은 점잖게 모든 길들이 고향의 바다 앞에서 평등하다고 말했지만, 내가 만약 그 길을 보았다면 ‘춘자와 같은 친구’와 ‘나’를 갈라놓는 길만 확인할 것 같아 부끄럽기 이를 데 없다.


나종영의 시 「구두닦이 부부」는 평범한 시이다. 형식도 평범하고, 내용도 평범하다. 이전에 어디선가 비슷한 시를 본 것 같기도 하다. 그럼에도 이 시는 마음을 따뜻하게 만드는 구석이 있다.


사무실 구두를 닦던 구두닦이 부부가

며칠째 보이지 않는다

남편이 속병이 있다더니만 큰일이라도 생긴 모양이다

할 말은 아니지만 외팔이에 벙어리인 남편은 찍쇠이고

절름발이에 귀머거리 아내는 닦쇠이다

남편이 오토바이를 타고 노란 플라스틱 바구니에

구두를 몰아오면 아내는 빌딩계단 구석에 앉아

한 줌 햇볕을 등지고 구두코가 반짝이도록 구두를 닦았다

아내가 구두를 반들반들 닦아 놓으면

남편은 쏜살같이 구두를 제 자리에 갖다 놓았다

그 많은 사무실 비슷비슷한 구두들이지만

한 번도 구두짝을 바꿔놓지 않았다

얼마요 하는 말을 듣지 못해도 언제나 웃으며

고개를 꾸벅꾸벅,

나는 미안해서 늘 거스름돈을 받지 못했다

가난도 결핍도 저렇게 행복하고 융숭한 것이거늘

너무나 많은 것을 가지고도

늘 부족해 불안해하는 우리는 어디쯤 내려가서

손 모아 무엇을 닦을 것인가

회화나무 하얀 꽃잎 내리는 가로수길

빨간색 오토바이 뒤에 아내를 태우고

어둔 길도 환하게 돌아나가는

가난하나 가슴 옹골진 사내 모습이 눈에 아리다

―나종영, 「구두닦이 부부」, 《시와사람》2006년 겨울호, 35면


무엇이 이토록 이 시를 따뜻하게 만드는 것일까. 가난에 구애받지 않는 장애인 부부의 사랑일까. 별것 아닌 구두닦이 부부의 일과를 보고 느끼는 삶에 대한 사소한 반성일까. 아니면 가난한 시인과 더 가난한 구두닦이 사이에 주고받는 마음의 교감일까.

이 시는 어렵지 않다. 특별한 기교도 없다. 그냥 읽는 대로 이해된다. 게다가 시인은 그 이해를 돕기 위해 자신의 감회마저 상세하게 적어 두었다. “가난도 결핍도 저렇게 행복하고 융숭한 것이거늘 / 너무나 많은 것을 가지고도 / 늘 부족해 불안해하는 우리”라는 시구는, 시인이 말하려고 하는 바를 가감 없이 보여주고 있다.

그럼에도 이 시는 해석의 잉여가 남는다. 시인이 구두닦이 부부를 바라보는 시선의 양면성 때문이다. 시인은 남편을 찍쇠로, 아내를 닦쇠로 평소 불렀던 것 같다. 꼭 시인이 부르지 않았더라도, 우리 사회에서 허드렛일을 하는 사람들을 함부로 칭하는 일반적인 용어일 수 있다. 그런 면에서 시인은 이들에 대해 어느 정도 우월의식도 품고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그런데 시인은 이 시를 쓰면서 그들에 대해 미안한 마음을 품게 되었다. 평소 ‘찍쇠’와 ‘닦쇠’로 생각 없이 취급했던 자신을 의식하며, ‘할 말은 아니지만’이라는 미안한 마음을 담은 어구를 첨부했다. 평소에는 미안한 마음이 들어 거스름돈을 받지 못했다고 겸양해하기도 했다.

시인은 구두닦이 부부에게 연민을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그 연민은 신분 높은 자가 신분 낮은 자에게 베푸는 시혜의식과는 조금 달라진 형태이다. 이 시대와 이 사회를 같이 살아가야 하는 동료로서의 연민이다. 구두닦이 부부가 힘없는 자라고 해서 가해지는 연민이 아니라, 시인보다 마음이 부유한 사람에 대한 존중과 염려를 담고 있다.

이 시가 따뜻한 것은 시인의 마음이 따뜻하게 변했기 때문이다. 구두닦이 부부의 부재를 보면서 시인은 생각하고 있다. 더 많이 가지고도 불안해하는 현대인의 존재론적 반성도 그 반성에 포함되겠지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이웃을 두고 그들을 진정한 삶의 동료로 받아들이지 못한 마음의 편견을 넘어서려는 반성일 것이다. 시인은 구두닦이 부부의 부재를 통해 마음의 친구를 얻고 있는 셈이다.



3. 소외된 자들을 위한 시 : 《시에》 2006년 겨울호에서


최근 우리 시단에서는 외국인 이주민 노동자들에 대한 시가 간혹 발견되고 있다. 그들의 삶이 우리 삶의 일부가 되고 있는 만큼 이러한 현상은 당연하고 또 시로 조직되어 읽혀져야 마땅하고 생각한다. 그러한 시들을 읽어보자.


내 친구는 직장생활 이십 년

퇴직금 받아 시골에다

이슬람국가로 수출하는

날염 하청공장 차린 지

삼 년도 채 안 되어

이라크전이 터져 망했다


역사 선생 하다 왔다는 파키스탄 청년은

시간외 수당 주지 않으면

잔업하지 않겠다고 늘 버티더니만

저축한 돈 가지고 귀국하면

사장보다 부자라며 빈둥거린다고 했다

대학 다니다가 왔다는 스리랑카 청년은

체류기간 넘어서 함부로 나다니지 못해

사장한테 일자리 알선해 달라며

기숙사에 박혀 지낸다고 했다

막일하다가 왔다는 미얀마 청년은

사장이 손 내젓는데도

날마다 작업대 닦으며

체불임금 달라는 눈치 보낸다고 했다

야크 기르다가 왔다는 네팔 청년은

흙먼지 이는 앞마당에서 먼산바라기하고

벌목하다 왔다는 인도네시아 청년은

소나무 우거진 뒷산 오르내리고

담배농사 짓다 온 필리핀 청년은

열무 심은 텃밭 맨다고 했다

눈치 빨랐던 베트남 청년과

손발 빨랐던 인도 청년은 몸이 아픈지

종일 담벼락에 기대 햇볕 쬔다고 했다


내 친구는 군대 간 아들이

봉급 더 받으려고 자원하여

이라크전에 참전한 뒤

기계 팔고 임대차보증금 빼내어

외국인노동자들에게 퇴직금 주곤

날염 하청공장 문 닫았다.

―하종오, 「국경 없는 공장」, 《시에》2006년 겨울호, 56~57면.


평이한 시이다. 시적 기교를 거의 부리지 않고, 현실의 상황을 줄글로 이어놓고 있다. 1연과 3연은 그런 의미에서 2연의 내용을 부연하거나 반전시키는 역할을 한다. 2연의 내용을 보면 파키스탄, 스리랑카, 필리핀, 미얀마, 베트남 등의 동남아시아 청년들의 이야기가 진행되고 있는데 반해, 1연과 3연은 한국 사람의 이야기이다.

특히 3연은 날염 하청공장 사장이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퇴직금을 준 사연인데, 현재 우리 정서로는 상당히 낯설게 느껴진다. 한국인 악덕 사장들이 외국인 이주민 노동자들을 착취하고 괴롭힌다는 풍문이 이미 낯선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의 나라가 못 살고, 그들의 학력이 낮으며, 그들의 신분이 불안한 것을 이용해서, 그들의 임금을 가로채고 부당 행위를 강요하고 심지어는 성적으로 박해하는 행위를 일삼는다는 기사와 보도가 심심치 않게 등장한 지 오래이다.

이러한 현실에서 공장을 처분하여 퇴직금을 주고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그러나 3연을 꼼꼼히 읽어보면, 그럴만한 사정이 있다. 그 사장의 아들은 다른 나라의 이주민 노동자가 되어 있다. 경제적 이익을 위해 참전한 전쟁에서 그의 아들은 전쟁의 주인(?)인 미국을 위해 일하는 이주민 노동자의 신세로 전락했다. 대한민국이 동남아시아 국가의 사장 행세를 한다면, 미국은 그 사장들 위에서 군림하는 기업총수 역할을 한다고 할까.

우리는 어떤 면에서는 사용자이지만, 더 힘센 누군가에게는 고용된 자에 불과하다. 굳이 포스트콜로니얼 이론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이러한 약육강식의 논리를 깨달은 이에게 약자에 대한 연민은 자연스럽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도 누군가에는 약자이므로, 그들이 당하는 설움과 억울함이 남의 일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종일 지붕에서 운다.

이층 창문, 틈새에 터를 잡고

알콩달콩 살던 비둘기 부부


홀시어미, 비둘기 울음이 귀신울음 같다 하고

며느리, 청승맞은 울음이 말 못할 내 설움 같아

그럭저럭

비둘기 똥 치우기를 삼 년


늙은 시어미

더는 못 참는단다

답답한 그 울음 저승사자처럼 끔찍하고

똥보다 더 독하다고


기어이 아들이 사다리를 타고 오르자

비둘기 울음 빨라졌다

소리와 불안이 뒤섞여

철제 사다리가 휘청거렸다


분홍 발을 가진 새끼 한 마리

퍼덕퍼덕 앞집 베란다 지붕에 내려앉고

나뭇잎쪼가리, 묵은 먼지가

비닐봉지에 담겨 내려오고

오분 만에 집 한 채가 철거되었다


구우국 구우국


비둘기똥보다 독한 울음이

지붕에서 흘러내린다

―마경덕, 「비둘기가 운다」, 《시에》2006년 겨울호, 20~21면.


비둘기와 한 집에서 산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일단 주기적으로 들려오는 그 울음소리에 신경이 곤두서고, 더운 여름날 풍겨오는 냄새와 독한 배설물도 참기 어렵다. 집 안에 비둘기로 인해 벌레들이 들끓는데 이를 마냥 참아내기란 여간 힘들지 않다. 많은 사람들이 비둘기와의 동거에 몸살을 앓고 있다가 결국에는 그들을 내쫓게 되는데, 그럴 때마다 드는 생각이 있다. 비둘기를 평화의 새라고 부르며 하늘 가득 놓아줄 때는 언제이고, 이제는 이렇게 천덕꾸러기로 취급하는가.

위 시의 시인도 일반 사람들과 다를 바 없이, 비둘기와의 동거를 포기했다. 3년이나 버텼다는 것이 대단할 정도인데, 역시 인간의 인내심은 그 정도면 최대한인 것 같다. 시인과 그의 식구들도 미안했던지, 많은 이유들을 댄다. 울음소리가 몰고 왔다는 처량함이 그것인데, 이것 말고도 속사정은 더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냉정하게 생각해야 할 것이 있다. 비둘기와 함께 사는 것은 힘든 일이지만, 그 이유들을 전혀 참을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옛날이야기를 보면 제비와 함께 한 집에 살았지만, 제비가 시끄럽다거나 배설물을 가리지 않는다고 제비집을 철거하지는 않았다. 놀부의 집에도 분명 제비는 있었다. 그런데 왜 요즘 사람들은 그들의 새를, 한 집에 놓아두고 보지 못하는 걸까.

우리는 개와 고양이를 키우는 사람들을 즐겨 본다. 새를 키우는 사람도 적지 않고, 심지어는 쥐나 뱀 혹은 이구아나나 악어 같은 평범하지 않은 애완동물도 키운다. 그러나 인간들이 키우는 이러한 동물들에게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인간의 질서와 명령 혹은 인간 삶의 체제에 적응하고 복종한다는 점이다. 설령 애완동물이 인간의 말을 전적으로 알아듣지 못할지라도, 그들은 인간의 삶에 종속되어야 한다. 그들은 숲을 마음대로 뛰어다녀서는 안 된다. 그들은 ‘자유로운 숲’이 아닌, ‘인간이 통제하는 공원’에 머물러야 한다.

비단 애완동물을 집에서 키우느냐 숲에서 키우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인간은 인간이 통제할 수 있는 문명의 범위 안에 동물들을 가두고 그들의 질서 속에 편입했을 때에만 애정을 쏟는다. 인간의 이기심과 욕망을 실현시키는 도구로 그들을 바라보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대사회에서 비둘기는 인간의 질서를 따르지 않는 존재이다. 인간들은 이러한 비둘기의 삶을 용인하기 힘들다. 김광섭이 「성북동 비둘기」에서 말한 대로, 인간의 도시 문명은 자연의 야성을 파괴한 곳에 내려앉고 있다. 비둘기가 내려앉을 곳을 허용하지 않는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으며, 이는 비둘기에게 인간의 집에 기생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다. 그들은 불법 이주민이고, 노련한 침입자이며, 때로는 박멸해야 할 해충이다.

위의 시는 3년을 살았던 집이 5분 만에 철거되는 아픔을 마냥 지켜보아야 했던 비둘기의 시선을 잠깐 담아내고 있다. 이를 자행하는 인간들의 마음도 마냥 행복하지만은 않았던 듯, 타고 올라갔던 철제 사다리가 ‘흠칫’하고 놀라고, 집을 잃은 이들이 뱉어내는 울음에, 가슴 한 구석이 흘러내리기도 한다. 그럼에도 인간은 인간의 질서와 권위를 거부하는 비둘기의 삶을 용인할 수는 없었다.

현재 우리의 사회는 이러한 차별과 박해 속에 있다. 앞에서 말한 이주민 노동자의 문제도 마찬가지이고, 미국의 이슬람 공격도 마찬가지이다. 비둘기 일가에 대한 우리의 폭력을 보면서, 폭력은 멀고 가까운 곳에 함께 상존하며, 그 크기에 관계없이 우리 사회의 일부로 자리 잡고 있음을 부인할 방법이 없어진다. 게리 스나이더의 지적대로 언제가 되어야 우리 인간도 비둘기에게 우리의 집을 나누어주고도 아깝지 않다고 생각하게 될 것이며, 그들도 우리의 일부임을, 그들이 우리의 말을 듣지 않더라도 그들의 삶을 용납하게 될지 의문스럽지 않을 수 없다.



4. 문명과 자연의 생태 균형을 위하여 : 《문학마당》 2006년 겨울호에서


오랜만에 이하석의 시를 만났다. 해석보다는 그리움이 앞섰지만, 단순한 반가움을 넘어서는 깊이와 명상이 또한 가능해서 더욱 반가웠다.


비슬산에서 살쾡이처럼 살금살금 내려온 바람이

내 방 창문 틈 흰 발톱으로 긁으며 갸르릉댄다


언뜻 댓잎 부딪치는 소리

책상 위 대나무 무늬진 돌이 바람을 머금으면

대나무는 곧게 휘며 검게 잎사귀 떤다


윗목에 살모사처럼 또아리 튼 겨울이 사납게 노려보지만

그러나 이미 돌 속 동풍의 회오리에

봄 예감으로 댓잎들이 부화뇌동, 우레의 뒤안을 흔든다.

―이하석, 「동풍」, 《문학마당》2006년 겨울호, 98면.


‘비슬산’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지만, 시 속의 비슬산은 묘한 감각으로 다른 시어들과 어울리고 있다. 마치 무릉도원인 양, 세외선경인 양, 그곳은 겨울이 깊어가는 시점에서 봄을 예감하게 한다. 내가 이 시를 읽은 시점이 2006년 12월 중순이니, 시인은 적어도 12월 이전에 이 시를 썼을 텐데, 겨울도 제대로 오지 않은 입동의 초입에서 과연 입춘의 간절함을 논할 수 있었을까.

시인의 창문은 어쩌면 창호지 문일 수도 있을 것이다. 시인의 방은 고아한 품격의 책상과 관상죽이 놓인 옛스러운 방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곳에서 시인은 산을 내려오는 바람과 그 바람에 밀려오는 겨울을 느끼면서, ‘동풍’에 대해서 명상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사실 이 시만 가지고는 시인의 처지나 마음의 상황을 제대로 알 수는 없다. 특히 ‘대나무 무늬진 돌’은 이해하기 곤란하다. 대나무 장식을 거느린 수석인지, 대나무 그림자가 드리운 그냥 돌인지, 아니면 대나무처럼 고고한 절개를 상징하는 마음의 비유인지 가늠하기 힘들다. 그러나 그 어떤 것이든, 시인은 자동차와 온풍기와 이메일이 횡행하는 세상에서, 몸으로 날씨를 예감하고 자연의 모습을 마음에 새기며 혹독함과 반가움을 잊지 않는 자연인의 삶을 존중하고 있다는 점에서 특이하고 또 신기하다.

이러한 차별성은 다음 시를 보면 더욱 흥미롭게 전개된다.


송전탑 아래서 에코나비고의 유충을 줍는다. 예쁘다. 아파트 거실 텔레비전 옆에 두니 몇 번인가 허물을 벗은 다음 날개까지 난다. 어두운 구석에 알들을 슬어넣는다. 자주 날려보내고 쓸어낸다. 그러나 이미 바퀴벌레보다 더 교묘하게 집안 구석구석을 그 기계충들이 점령했음을 안다.


편지를 꼭 우체국에 가서 부친다면, 이메일들을 저것들이 먼저 점검하고 소리의 색깔까지 씹어대는 게 기분 나쁘기 때문이리라. 나도 자주 핸드폰 밧데리를 뽑고 컴퓨터를 끈다. 그러나 그걸 끝내 버리지 못하니, 나도 그 기계충들에 사로잡힌 셈이다. 형형색색의 기계충들을 애완으로 기르는 친구들이 많다. 그들은 그런 내게 자주 연락 두절을 투덜댄다. 그 투덜대는 소리의 전파를 야금야금 파먹는 기계충들의 이빨이 가지런하다.

―이하석, 「편지의 꿈」, 《문학마당》겨울호, 99면


먼저 ‘에코나비고’에 대해 알아보자. 시인은 이 시어에 다음과 같은 각주를 달아두었다. “열안테나 주위에 살며 송수신 전파를 먹고사는 기계충(최우람의 작품에서)”이라고. 최우람의 작품을 살펴보면, 유리관 속에서 파란 금속성의 빛깔을 드리운 은색 벌레임을 알 수 있다. 최우람은 폴립(polyp), 수정란(fertilized egg), 유생(larva)의 단계로 변태의 단계를 상정하고 있다.

에코나비고는 상상의 동물이다. 아니 현대식 기계 문명의 상상력이 잉태한 기계 벌레이다. 무선 안테나에 붙어 기생하고 전파를 먹고 자라고 금속의 날개를 가진 개체로 성장하는 일종의 가상 기계 생물인데, 이하석은 이 에코나비고를 마치 현실에서 주운 양, 그리고 그 에코나비고가 집에서 번식하는 양 기술하고 있다.

이러한 관점은 기계식 문명과 현대의 이기에 둘러싸인 우리의 삶을 표상하고 있다. 우리는 붓으로 글자를 써서 인편으로 보내는 시대를 넘어, 우체국을 통해 편지를 신속하게 전달하는 세상에서 한동안 살았었다. 그러나 지금은 이러한 우체국의 속도를 기본적으로 초월하는 동시간대의 이메일의 혜택을 누리고 있다. 시인 역시 이러한 문명의 변화와 속도의 변천을 감지하고 있다.

대신 우리 주변에는 이러한 문명과 속도를 누리기 위한 부수적인 침입자들이 생겨났다. 컴퓨터, 전선, 전파, 그리고 어디선가 이를 지켜보는 시선들. 시인이 무서워하는 것은 우리의 편지를 감시하는 눈길은 아니다. 우리의 주변에서 늘어나는 금속성 도구들의 번식이다.

잘 알려진 대로 이하석은 금속성 물체의 버려짐과 녹슮에 대한 시를 오랫동안 써 왔다. 그가 의도했던 의도하지 않았던 그러한 그의 시세계는 생태시의 중시조 격으로 평가될 수 있다. 금속성 물질이 현대의 대표적인 부산물이라고 한다면, 사이버틱한 색상과 컴퓨터의 푸른 불빛은 최현대의 대표물들이다. 이를 거부하는 그의 시선은 그래서 더욱 생태시의 경계를 확장하는 효과를 거둘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앞의 시와의 비교이다. 이하석이 사는 공간은 현묘한 바람이 지나가는 옛스러운 집 같았지만, 실제로는 기계 문명과 현대적 이기로 가득한 현대식 집이었다. 우리의 삶과 다를 바 없는 곳이다. 그곳에는 핸드폰 충전기가 있고, 컴퓨터가 있고, 그 컴퓨터를 외부로 연결하는 인터넷 선이 있을 것이며, 그러한 이기들의 수준에 맞게 최신식 냉장고, 에어컨, 온풍기, 가습기 등의 가전제품이 즐비할 것이다. 그곳에서 그는 생각한다. 과연 이러한 물건이 우리의 삶을 더욱 안전하게 만들고 있는지.

이하석은 딱히 무엇이라고 단정하지는 않지만, 이러한 삶의 양태에 대해 기본적으로 거부감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기계충들은 그러한 그의 거부감이자 불안함이다. 혼자 있는 시간을 늘리기 위해서 핸드폰을 꺼두면 세상은 그런 그에게 투덜거리지만, 그런 세상과 계속해서 접촉하다 보면 방전된 배터리처럼 우리의 마음도 방전될 수 있다고 경고하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그의 시는, 본래 시가 가지고 있는 문명과 인간 그리고 기계와 자연의 경계에 대한 화두를 연장?변주하고 있다. 두 시를 비교하면 그 화두가 더욱 커지는데, 이 점은 흥미롭지 않을 수 없다.



5. 생각의 화두를 담는 그릇들 : 《문예연구》 2006년 겨울호에서


시의 운명과 미래를 예견하고 걱정하는 목소리가 높다. 영상 문화의 범람 속에서 시는 갈 곳과 설 곳을 잃어가는 듯한 인상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시는 쉽게 멸종하거나 몰락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시가 견지해야 할 본분과 문학의 본질이 다른 것으로 쉽게 대체될 수 없는 측면이 강하기 때문이다.


아버지 산소 근처 절에서 목탁소리가 난다

스님의 목탁소리는 둥글다

覺이 탁탁 스님의 머리를 친다

해는 서산을 붉게 물들이며 스님의 머리에서 빛난다

석양과 스님의 머리 사이에 角이 있다

아무도 그 각의 정체를 모른다


지난 밤 우주를 떠돌던 별들이 저마다 모여

먼 별 지구에서 인간이 붙여준 제 이름을 모른다

둥근 것들은 스스로의 몸에 각이 있는 줄 모른다


나는 어릴 때 마당 가운데 우물 속으로 두레박을 내리다가

순간 끈을 놓쳐 두레박이 우물 속으로 가라앉는 것을 보았다

아버지가 손수 만들어주셨던 네모난 두레박

어쩌면 閣을 거꾸로 뒤집은 모양의 그것,

우물은 수많은 角을 먹고도 여전히 출렁이며 물을 내었고

오랜 세월이 지나 우물을 밑바닥까지 퍼낼 즈음

우물 속에 가라앉아 있던 수많은 각이 발견되었다


“묵은 물을 퍼내야 새물이 되는 거란다”하시던

아버지의 말씀은 둥근 내 머릿속에 네모난 두레박으로

가라앉아 있다가 문득문득 기억의 물을 퍼올려주곤 했다


그 때 어머니의 자궁같이 웅숭깊은 우물을 보면서

내가 어머니의 자궁에서 태어나 집과 거울과 책이라는

사각형에 갇혀서 지금껏 헤어 나오지 못하는 것도

우연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몇 해 전 아버지는 무덤 속 관에 드셨고

무덤은 角을 덮어 둥근 것만 보여주었다

覺이 탁탁 내 머리를 친다 우주를 두드린다

내 머리 위로 삐딱하게 해가 진다

석양과 내 머리 사이에 각이 눈부시다

―박남희, 「둥근 것들은 각을 숨기고 있다」, 《문예연구》2006년 겨울호, 130~131면.


각진 것과 둥근 것에 대한 상념을 모아서, 그 아래 웅숭깊게 가라앉은 시인의 통찰을 보여준 시이다. 우리는 흔히 둥근 것을 생각하라고 하면, 원만한 것, 부드러운 것, 포용적인 것, 무난한 것 등을 떠올린다. 원은 각이 없으므로, 걸리는 것이 없고 부딪치는 것이 적다는 생각일 터이다.

반면 각진 것은 딱딱한 것, 규칙적인 것, 꼿꼿한 것, 충돌하기 쉬운 것, 위험한 것 등으로 인식되곤 한다. 한쪽으로 솟아나온 모퉁이가 세상사의 윤환과 관련지어 위협이 되거나 방해가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즉, 둥근 것과 각진 것은 서로 대척되는 개념으로 사용되며, 대체로 각진 것이 둥근 것을 따라야 한다고 상정되고 있다.

그런데 시인은 둥근 것 속에 숨어 있는 각진 것을 찾아내고 있다. 목탁 소리의 원만함 속에 숨겨진 각진 것이 그 첫 번째이다. 원만함과 버림을 촉구하는 목탁 소리에도 세파의 위험 요소가 스며들어 있다고나 할까. 그러나 시인은 여기서 각진 것에 대한 화두를 멈추지 않는다. 각진 것은 모서리를 세운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깨달음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완성된 것으로 보이는 원만함 속에서, 그 과정을 수없이 침해했을 법한 세파의 혹독함〔角〕을 보기 때문이다.

눈이 트인 시인은 어릴 적 우물 속에 수없이 번져나가던 파랑과 파란을 기억한다. 평화로운 물속에 던져지던 두레박은 고요한 수면에 수없는 잔주름과 상흔을 남겼다. 그러나 물은 쓰다달다 한 마디 말도 없이 항상 흐트러진 수면을 어루만지고, 망가진 물결을 다독거렸다. 부드럽게 출렁이며 각진 물결들을 다듬어서 보기 좋은 물결로 만들어 세상에 내어보냈다. 그 때는 몰랐지만, 시를 쓰게 된 시인은 그 아픔과 인내를 이해하게 되었다.

우물에 대한 명상은 한국 시의 중요한 화두이자 명맥이었다. 시인들은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기 위해서 곧잘 우물 속을 들여다보았다. 윤동주는 대표적이다. 그는 우물의 표면을 맑게 닦아 거울처럼 만들었고, 그 거울에 자신을 비추어 「참회록」과 「자화상」을 썼다. 그들의 자화상은 곧 세파에 어지러워진 우물을 마음으로 닦는 행위였다.

박남희도 비슷하게 말하고 있다. 자궁에서 태어나(우물은 자궁을 연상시킨다), ‘집과 거울과 책이라는 사각형’이라는 각진 곳 속에서 휩쓸려 살아왔다. 원만한 것을 거부하고 규격화된 것을 선호했으며, 무난한 것을 물리치고 위험한 것 속에 있기를 희망했다.

그러나 각진 것은 버릴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집과 거울과 책을 버리고 살기 어렵다. 그것들은 우리를 구속하고 경직되게 만들고 세상과 부딪치게 만들지만, 또한 그것으로 인해 우리는 남들과의 사이에 경계를 긋고 우리 자신의 모습을 똑바로 보며 세상의 지혜와 타자의 마음을 이해하게 된다. 필요하면서도 위험한 것이라고 할까.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둥근 삶과 뾰족한 일부들. 시인은 아버지의 무덤 앞에 있다. 그는 상념의 터널을 돌아, 다시 자신의 눈앞에 놓인 무덤과 그 무덤 속에 뾰족한 것을 덮는 둥근 봉분을 본다. 각진 것들은 둥근 것 속에 있어야 한다. 우리의 마음속에 내재하는 뾰족한 것들도, 우리 삶과 영혼의 둥근 포용력 안에 있어야 하며, 세상을 지배하는 권력과 힘이라는 강한 것들도, 자아와 타자와 집단과 사회를 교류하는 지혜의 반경 내에 있어야 한다. 둥근 것들은 각진 것들을 용인해야 하고, 각진 것들은 둥근 것들 속에서 안식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깨달음(覺)은 시인이 시를 통해 도달할 수 있는 기쁨이자 명상이다.


개를 안고

꽃을 보니

겨울이 떠났다


그릇을 굽고

지붕을 고치니

조금만 더 살고 싶다

―전윤호, 「봄」, 《문예연구》2006년 겨울호, 125면.


이 짧은 시를 보면서, 다시 시란 무엇인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낙서처럼 무성의하게 벌려진 문장들, 아니 시어들. 단 6행의 시행에서 묘한 비약과 역전을 찾았다면 지나친 평가일까.

이 시는 어울리지 않는 것들로 조합되어 있다. 개를 안고 꽃을 보는 것도 이상한 행위이고, 이 겨울에 꽃을 보면서 겨울이 떠났다고 말하는 것도 상식적인 말은 아니다. 시인은 본래 숨겨진 사물의 질서를 꿰뚫어 보는 존재들이니, 상식이라는 말로 시인의 시를 평하는 것은 잘못된 일일 터이지만, 개와 꽃과 떠난 겨울의 조합은 넓고도 비연계적이다.

2연은 더욱 황당하다. 그릇을 굽고 지붕을 고친다? 가마가 있어 그릇을 구울 수도 있고, 손재주가 있어 지붕을 고칠 수도 있다. 이것은 현실에서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그러나 두 행의 조합은 역시 비현실적이다. 마지막 행을 추가하면 더욱 그러하다. 조금만 더 살고 싶다니?

이 시의 제목은 봄이다. 시인이 “겨울이 떠났다”고 큰 소리를 쳤으니, 봄이 오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그 봄은 단순한 계절로서의 봄은 아닐 것이다. 마음의 봄일 터인데, 그 봄을 맞이하는 시인의 자세는 엉뚱하고 또 겸손하다. 조금 과장 섞어 이야기하면 봄을 기다리는 마음과 그 마음을 다독이기 위해서 하는 숱한 행동들 속에서 띄엄띄엄 4가지 일을 기록하고, 그 선택과 기록에 대한 마음의 흔적 두 줄을 남긴 셈이다.

겨울이 떠났다고 의미 부여하거나, 조금만 더 살고 싶다고 간절하게 말하거나. 이 시를 읽으면서 먼저 시가 될 수 있을까를 생각했다. 언어와 문장과 시어 사이의 그 넓은 간격을 시인이 어떻게 좁히고 하나의 의미망으로 귀결시키려고 하고 있는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그 물음을 다 해결하지는 못했지만, 간결함 속에 숨은 간절함이 이 시를 기억할 만한 문구로 만들지 않나 싶다.



6. 각광받지 못하는 잡지와 넘쳐 나는 우리 시를 위하여


이 글은 외형적으로는, 우리 문학의 현재 흐름을 살펴 달라는 요청에 따라 쓰여졌다. 하지만 실제 사정은 약간 다르다. 시에 대한 구체적인 분석 없이 행해지는 인상 비평, 메타 비평을 가장하여 막연한 견해를 드러내는 비평, 기본을 상실한 채 그럴듯한 말을 쏟아내기에 바쁜 비평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실제 텍스트를 포함하는 글을 쓰고자 했다. 보다 거시적이고 심도 있는 시야를 확보하고, 1년 후, 10년 후의 우리 문단과 문학을 살피는 것이 정도일 것이나 나에게는 그러한 안목이 없어 그러한 작업은 훗날로 미루기로 한다. 대신 정작하게 ‘지금―여기’우리 문학의 흐름과 문제를 진단하는 데에 주력했다.

의식적으로 지역의 시를 읽었다. 이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하나는 지역의 시가 늘어가고 있지만, 그 시들에 대한 조명은 아직도 미약하기 때문이다. 지역을 대표하는 시 잡지들은 증가 일로에 있지만, 그곳의 시들은 일회용품처럼 힘없이 폐기되는 게 현실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실은 잡지가 늘어나지만 시의 위기가 가중되는 작금의 현실과 관련이 깊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소박하지만 시를 정직하게 그리고 정확하게 읽어내는 것이다. 우리 시단은 아직 그러한 기본 작업의 중요성을 잘 모르고 있다.

다른 하나는 개인적인 확신 때문이다. 시 잡지를 읽다보면 중앙 문단을 대표하는 시 잡지에 비해, 지방 문단 혹은 지역 잡지의 시 수준이 결코 낮지 않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문제는 우리 시단이 철저히 중앙 중심적이며, 선별된 소수의 작가에 대한 한정된 논의에 갇혀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널리 읽지 않아도 자신들의 시각과 생각이 용인될 수 있다는 안일한 자기 확신 때문일 것이다. 이 점은 널리 경계 받아야 할 우리 시단의 폐단이다.

이러한 현 상황은 궁극적으로 우리 시의 확산, 혹은 시 잡지의 증가를 의미 없는 것으로 만들고 있다. 우리 문학(여기서는 시단)은 넘쳐나는 잡지로 ‘즐거운 비명’을 지르고 있지만, 그러한 잡지들이 정작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고민하지 않기 때문에 그 비명은 ‘반향 없는 메아리’에 그치고 만다.

늘어나는 지면과 기회는 응당 문학인 모두에게 돌아가야 함에도 불구하고, 현재의 상황은 수효는 증가되고 기회는 차단되는 형세이다. 이러한 형세는 잡지의 계속적인 창간만을 유발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우리 시의 균형 잡힌 공급과 생산을 위해서는 ‘지면의 확대’가 아닌 ‘기회의 확대’가 고려되어야 한다. 기회의 균등만이 불필요한 잡지의 범람을 원천적으로 봉쇄할 수 있을 것이다.

기회의 균등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평론가들이나 잡지 편찬자들의 정직한 노력이 요청된다. 제한된 자원을 가지고 잡지의 외형적 확대만을 꾀할 것이 아니라, 내실 있는 시(인)를 고르고 정당하게 시인을 평가하는 잡지를 만들려는 의식이 확산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지역의 시’와 ‘소외된 시’ 그리고 ‘숨겨진 시’를 찾아 읽는 노력이 선행되어야 하며, 이러한 노력을 바탕으로 했을 때에만 우리 시의 새로운 패러다임이 열릴 수 있음을 또한 인정해야 한다. 우리 시의 논쟁이 공허할 수밖에 없었던 까닭도 이러한 노력을 바탕으로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 시의 현재 상황은 ‘풍요 속의 빈곤’이다. 잡지는 늘어났지만 좋은 시가 실릴 공간마저 늘어나지는 않았다. 한 분기에 실리는 시의 숫자는 비약적으로 증대되었지만, 이들을 선별하고 정합하게 평가할 지면(글)은 좀처럼 늘지 않고 있다. 이렇게 되면 무엇이 늘어나고 무엇이 늘지 않았는지 따져보지 않을 수 없는데, 우리 시단은 이러한 오류에 빠져 있다.

범람하는 시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근본적으로 대처가 불가능하다고 여기고 폭넓게 시 읽기를 포기하면, 시(단)의 일부를 확대해서 우리 시의 전체인 양 취급하는 오류에 빠져들게 될 것이다. 이에 대한 문제 제기 역시 범람하는 시 문제에 현명하게 대처하지 않고는 옹색한 자가 당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할 것이다. 결국 우리 시의 현재와 미래는, 시의 범람과 시 수급의 불균형 그리고 시를 취급하는 시각의 오류를 어떻게 시정하는가에 달렸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게 오늘 한국 시(단)의 현실이다.문장 웹진/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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