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을 쏘아 올린 작은 공

 

30년을 쏘아 올린 작은 공



채윤일




나는 무대 위에다가 詩를 쓰려고 했었지,

‘사회주의 선동선전극’을 만들려고 하지 않았었다.

그런데 ‘빨갱이 연극’이라니! 

                         

1976년 당시 30대였던 정하연, 오종우, 문호근(작고), 채윤일 등이 모여 ‘우리는 우리의 이야기를 우리의 목소리로’ 라는 지극히 상식적이고 소박한 명제를 내걸고 ‘창작극 시리즈’를 시작한 지도 벌써 30년이 넘었고, 본인도 지난해 환갑을 넘겼습니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 ‘빨갱이 연극’이라고 내몰려 내 손으로 직접 ‘상연 포기 각서’를 써야 했던 27년 전과 오늘을 비교해 보면 여전히 문제가 많기는 하지만 요원해만 보이던 ‘민주화’가 되기는 되었구나 하는 격세지감을 느낍니다.

 

저희가 ‘창작극 시리즈’라는 깃발을 내걸고 새 출발을 한 1976년, 그 당시만 하여도 우리 한국 연극계는 외국작품의 식민지나 다름없었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연극이 빈사 상태에서 허덕이던 그 때 창작극을 무대에 올린다는 것은 실패를 담보한(우수한 창작희곡을 발굴해 내기가 쉽지 않던 시절이었으므로) 자살행위(관객의 외면)나 다름없었습니다.

“어머니가 볼품없고 못생겼다고 외국인을 어머니로 모셔올 수는 없지 않느냐? 계속해서 창작극을 공연하다 보면 좋은 작품이 생겨나지 않겠느냐”는 소신도 있었지만, 보다 근원적인 이유는 당시 5?16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대통령이 ‘한국식 민주주의’라는 명분을 내걸고 인권은 무시한 채 경제개발에만 역점을 둔 개발독재, 유신독재의 암울한 분위기가 한 몫 하였습니다.

언론도 제소리를 낼 수 없던 시대라서 독자들은 신문의 활자보다는 활자와 활자 사이의 행간을 읽고 사회과학적 인식을 넓혀 가야만 했던 야만과 침묵의 시대이기도 했습니다. 이에 우리는 보이고 있는 현상의 이면에 있는 문제점을 연극으로 형상화하자, 그러려면 우리가 직접 창작 희곡을 쓰고 연출하는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첫 작품을 현실참여보다는 ‘인생과 인간’을 이야기하고 싶다는 극작가 정하연 씨가 각색한〈이상(李箱)의 날개〉를 제가 연출했습니다. 그러나 두 번째 작품이었던〈지하도〉(오종우 작/ 문호근 연출)는 공연 보름 정도를 남겨놓고 공연윤리위원회로부터 ‘부분 삭제’나 ‘부분 수정’이 아닌 ‘상연 불가’라는 판정을 받게 되는 불상사가 발생하였습니다. 그래서 끝내 막을 올리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당시 명예대표로 모셨던 임석규 선생께선 불순세력에게 자금을 대주는 자금책으로 오인 받아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수모를 당하는 곤욕을 치르기도 하였습니다.

이에 회의를 느낀 동지들이 각자 전공분야(정하연 씨는 방송극만 열심히 쓰고, 오종우 씨는 일년 후에 ‘연우무대’를 창단하며 초대 연우무대 대표가 되었고, 문호근 씨는 오페라 연출 공부한다고 독일로 유학을 떠남)로 떠나가고 본인만 남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본의 아니게 본인이 극단 쎄실의 ‘창작극 시리즈’를 주도해 나가야만 하는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각설하고 이제부터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의 무대화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하겠습니다.


『연극(演劇)에 산다』

쎄실극장 〈난장이가…〉출연(出演)팀

‘난장이들의 절규’ 그린 서른 살 안팎의 젊은 무대(舞臺)!


릴리푸트 마을에 가고 싶어라

그 곳엔 죽어 없어진 도도새들 날고

아무도 키 작다 조롱당하지 않지

내 꿈은 단순해

사랑으로 일하고 사랑으로 자라며

사랑으로 바람을 불러

미나리아재비 꽃줄기에 푸른 힘을

솟게 하는 것 

그것뿐

그것뿐이라네


‘릴리푸트’는 「걸리버 여행기」에 나오는 소인국(小人國)의 이름. 난장이와 그의 가족들은 그곳엘 가고 싶다. 집도 작고 나무도 작고 숟가락도 작은 그곳에선 아무도 난장이를 키 작다고 놀리지 않는다.

또 그곳은 날개를 되찾은 도도새가 나는 곳이다. 날 생각을 안 해서 날개가 퇴화(退化)해 모두 잡혀 죽었다는 도도새가 말이다.

지난 3일부터 일주일 간 쎄실극장에서 공연된〈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조세희(趙世熙) 원작, 이언호(李彦鎬) 각색)은 한마디로 젊은 무대였다. 서른 세 살의 연출자가 젊고 스물 안팎 고작 서른까지 열 명의 연기자가 젊고 무대 위의 이야기가 또한 젊다.

행복동(幸福洞) 방죽가에 살던 난장이 가족은 집을 헐리고 갈 곳이 없다. 채권 장수, 칼갈이, 고층건물 유리닦이, 펌프나 수도 고치기로 평생을 일한 난장이는 이제 늙었다. 눈이 어둡고 이는 빠지고 밤새 앓는 소리를 한다. “난…… 벌레야. 마지막 꿈틀대 돈을 모아야 해” 피곤한 작은 몸으로 약장수의 어릿광대가 된 난장이는 높다란 공장굴뚝 위에 앉아 달을 바라보다 발을 헛딛는다.

난장이의 맏아들은 이제 가장(家長)이 됐다. 그들 가족은 공업단지로 옮겨와 식구 모두가 일한다. 큰아들과 작은아들은 자동차공장에서, 딸은 방직공장에서, 어머니는 젖은 뗏목에서 나무껍질을 벗긴다. “네 형이 없을 때를 대비해서 이런 일이라도 하는 거야” 어머니의 걱정은 틀리지 않았다.

아버지처럼 난장이로는 살 수 없었던 아들은 난장이들 위에 군림한 신(神)을 죽였다. “제 몸이 아버지보다도 훨씬 작게 느껴져요. 제 인생은 결국 작은 어릿광대로 끝나고 말거예요. 그게 전 두려워요!” 아들의 절규와 함께 빛과 음악과 움직임이 어우러진 무대는 젊은 열기로 펄펄 끓는다.

 

위의 글은 1979년 5월 17일자 동아일보(東亞日報) 컬러 특집판에 연극담당 지영선 기자가 쓴 기사입니다.


기타 반주와 배우들의 무대 위의 노래로 흘려지는 장덕산(張德山)의 감미로운 주제곡에 원색을 많이 쓴 김의중(金義中)의 조명은 슬프기만 한 이들의 얘기를 곱게 승화시켜주고 채윤일(蔡允一)의 빠른 전개와 다양함 속에서의 일관성 있는 연출 솜씨는 자칫 지루할 수도 있는 2시간 10여 분의 이 극(劇)을 하나의 메시지에 머물지 않는 예술로까지 높여주었다.


이 글은 언론통폐합으로 없어진 신아일보(新亞日報) 1979년 5월 8일자 연극담당 신영철 기자가 쓴 리뷰 기사 중 일부분입니다.


*〈난장이…〉를 보면서 이제야 새로운 한국(韓國)의 리얼리즘 연극(演劇)이 막(幕)을 올리는 것이 아닌가 하는 전율을 느꼈다

-이상일(연극/무용평론가)


*〈난장이…〉의 무대에는 용기와 열기와 시적 상상력이 분수처럼 치솟고 있었다.

-이태주(연극평론가)


* 난장이는 궁핍한 정신과 잠자는 양심에 던져진 하나의 폭탄이다.

-조해일(소설가)


* 광폭한 산업시대의 허구와 병폐를 폭로하면서 사람답게 살아야 할 꿈과 자유에의 열망을 보여주는 문제극이다.

-김병익(문학평론가)


이렇듯 평단과 관객들의 열띤 호응 속에 1차 공연(1979년 5월 3일~9일/연극회관 쎄실극장), 2차 공연(1979년 8월 17일~21/국립극장 소극장)까지 마쳤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은 3차 공연(1980년 7월 10일~16일/연극회관 쎄실극장)을 일주일 앞둔 1980년 7월 3일, 한국공연윤리위원회에 파견 나와 있던 중앙정보부 무관(대령)에 의해 극단 스스로 ‘상연 포기 각서’를 쓰지 않으면 안 될 처지에 내몰렸다. “‘공연신고’를 접수시켜 줄 수 없다”, “원작을 판금 시키겠다”, “차라리 ‘에로’를 해라, 그럼 봐 주겠다”, “신군부와 구군부와의 파워게임이니 나도 어쩔 수 없어서 이러는 거니까 양해하고 ‘상연 포기 각서’만 써주면 3차 공연까지만은 할 수 있게 해 주겠다”는 등 협박, 회유, 사정을 하는 통에 할 수 없이 다음과 같은 포기 각서를 작성했다.


상연 포기 각서


이번 3차 공연(때:1980년 7월 10일~16일(7일간) 곳: 연극회관 쎄실극장)까지만 할 수 있도록 선처하여 주시면 다시는〈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라는 소설을 각색한 연극을 하지 않겠습니다.

                            

극단 쎄실〈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연출자 채윤일


이렇게 백지에다가 자필로 ‘상연 포기 각서’를 쓰고 지장까지 찍고 연극〈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은 3차 공연을 끝으로 막을 내려야만 했었습니다.


28년 전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 연극으로 무대에 올라 그나마 3차 공연까지라도 할 수 있게 된 것은 많은 분들의 암묵적인 도움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중에서도 각색을 맡아 주신 이언호 선배님은 각별합니다. 각색할 당시 이 선배님은 서울예전 극작과 전임강사로 출강하고 있었지만 각색을 마치고 나서는 ‘한국공연윤리위원회’ 영화담당 간사로 옮겨가 있었습니다. 덕분에 1차 공연 당시 ‘공륜’ 희곡 심의를 담당했던 심의위원들이 중앙정보부 쪽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아무 문제가 없는 작품이라고 적극적으로 옹호하도록 만들어 공연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3차 공연 때는 달랐습니다. 공연 일주일 전 시청 민원실 ‘공연신고서’ 접수창구 담당직원이 내가 제출한 ‘공연신고서’를 아무 대응 없이 무조건 반려했습니다. 그 다음날은 문화공보부 공연과에 호출당해 가서 “당신 빨갱이 아냐? 좋은 작품 많은데 하필이면 이 따위 작품을 하는 저의가 뭐야!”라고 사무실이 떠나가라 고래고래 악쓰고 반말 찍찍해대는 공연과장님의 호통을 들어야 했습니다.(이 과장님은 그렇게 여러 번 정권이 바뀌었는데도 불구하고 지금도 문화예술계에서 ‘마당발’, ‘불사조’라 불리며 아직까지 군림하고 계십니다.) 나는 할 수 없이 ‘공륜’ 영화담당 간사로 재직 중이던 이언호 선배께 도움을 청했습니다. 이 선배는 ‘공륜’에 파견 나와 있던 ‘중앙정보부’ 대령에게 이실직고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내몰린 셈입니다. 이언호 선배는 대령을 찾아갔습니다. “사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은 제가 각색한 작품입니다. 공연이 일주일밖에 안 남았는데 어떻게 막을 올릴 수 있게 선처를 좀 해주십시오.” 그러자, 대령은 “극단에서 ‘상연 포기 각서’를 쓰면 3차 공연까지만은 할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해주겠다”고 해서 3차 공연의 막을 올릴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봐도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그 살벌했던 박정희 대통령 생전에도 1,2차 공연을 했는데 ‘신군부’라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집찍부터 그것이 ‘전두환과 그의 일당’임을 알고는 있었지 의해 ‘빨갱이 연극’으로 낙인찍혀 공연을 저지당했다는 점입니다. 왜 그들은 내가 만든 연극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을 ‘빨갱이 연극’으로 봤을까? 지금도 이해가 되지 않는 점입니다.

이제 60이 넘은 나는, 용광로 같았던 30대의 뜨거운 가슴을 끌어안은 채 얼음 같은 차가운 이성을 가지고 이 작품을 다시 무대화하려고 합니다.

1970년대 우리나라의 산업화, 공업화 시대는 20세기와 함께 가버렸습니다. 이제는 21세기 정보화 시대입니다. 정보화 시대에도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은 유효할까요? 소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은 2005년 12월 200쇄를 찍어내는 경이로운 기록을 세웠습니다. 왜 이 작품이 30년이 넘도록 독자들의 끊임없는 사랑을 받고 있는 걸까요?

나는 그 이유를 알고 있습니다.

소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의 200쇄 돌파를 기념하는 인터뷰에서 작가 조세희 선생은 역설적이게도 ‘부끄러운 기록’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부끄러운 기록입니다.

30년 전이나 지금이나 난장이들의 문제는 개선되어진 것이 많지 않기 때문입니다. ‘혁명’이 아닌 ‘사랑’으로 자본주의의 모순을 극복해 보려고 난장이는 30년이 넘도록 하루도 쉬지 않고 매일같이 천국으로 쇠공을 쏘아올리고 있나 봅니다. 《문장 웹진/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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