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성을 노래하는 새로운 방식

 

생성을 노래하는 새로운 방식

 ―허수경, 「물 좀 가져다주어요」



이경수



1


‘개인’으로서의 ‘나’에 대한 자각은 우리 근대문학의 출발점에서 매우 중요한 인식이었다. 그러나 근대 초기의 우리 시인들에게 ‘개인’은 ‘국가’와 ‘민족’이라는 기반으로부터 온전히 자유롭지 못한 것이기도 했다. 나라를 빼앗긴 시대에 국가와 민족은 ‘개인’으로서의 나를 규정짓는 중요한 인식틀이기도 했던 것이다. 1920년대의 김소월, 한용운 등의 시에 등장하는 ‘님’을 시대적?역사적 상황을 괄호친 채 ‘사랑하는 대상’으로만 읽을 수는 없는 맥락이 거기에 숨어 있고, 1930년대의 정지용, 백석, 임화, 이상 등의 시에 나타나는 시적 주체에게서도 개인으로서의 ‘나’를 넘어선 민족과 국가―그것도 이미 식민화되어 언어와 문화마저도 위협받고 있는 식민지 지식인의 이중성 속에서 사유할 수밖에 없는 민족과 국가―의 역사적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것은 그 때문일 것이다.

해방 이후에도 ‘민족국가 수립’의 이상이 요원해지면서 우리 시는 ‘개인’의 아픔을 그리면서도 사회적?역사적 그림자를 배면에 깔고 있었다. 직접적으로 역사의식이나 분단의 아픔 등을 노래한 시가 아니더라도 김수영의 자유를 향한 갈망에서는 정치적 자유의 실현이 어려웠던 당시의 한국 사회의 현실이 아른거리고 ‘고궁’(「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과 그곳을 불편해하는 자신에게 동시에 느끼는 모멸감에서는 김수영 당대에까지 지속되던 치욕스런 역사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소시민의 불안한 삶에 대한 냉소와 자기모멸이 깔려 있었던 것이다. 이성복의 「어떤 싸움의 기록」에 등장하는 권위를 상실한 고개 숙인 아버지와 아버지를 향해 “개새끼 건방진 자식”이라고 외칠 수 있었던 ‘형’ 역시 한 시인의 가족사로 읽히기보다는 더 큰 상징을 뒤에 숨기고 있었던 것으로 읽히는 까닭은 국가와 민족의 경계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던 우리의 근현대사를 반증하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있겠다.

어쩌면 ‘개인’의 내면을 향한 집요한 탐색을 보여주는 시들조차 그 시대의 문화적 맥락을 떠나서는 온전히 읽을 수 없는 것일지 모른다. 보편 언어에 대한 갈망이 우리에게도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보편성의 추구는 결국 체험을 통한 개별성으로부터 이루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닐까 싶다. 그런 맥락을 완전히 지워버린 보편의 언어라는 것은 추구될 수는 있겠지만, 허공의 말놀이처럼 공허한 언어로 다가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최근에 일각에서 씌어지고 있는 국가와 민족의 경계를 넘나드는 상상력은 언뜻 보면 국가와 민족의 경계를 넘어 우리 시의 시공간을 확장하고 보편의 문제에 대한 탐색을 시도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러한 시 역시 ‘나’의 문제의식으로부터 출발한 구체적인 체험의 실체가 없다면 공허해지기 쉬운 것이 또한 사실이다. 가령 과거와 같은 방식으로 총칼을 앞세운 제국주의가 식민지를 건설하는 방식의 패권주의는 아니라 하더라도 지구의 곳곳에서는 국지전의 형태로 전쟁이 계속되고 있고, 우리의 나날의 삶도 따지고 보면 나날의 전쟁이라고 할 수 있으니 말이다.

허수경의 『청동의 시간 감자의 시간』에 실린 시들은 이러한 맥락 속에서 읽을 필요가 있다. 단 한 편으로 빛나는 시도 있지만, 『청동의 시간 감자의 시간』에 실린 허수경의 시들은 『슬픔만한 거름이 어디 있으랴』와 『혼자 가는 먼 집』, 소설 『모래도시』와 세 번째 시집 『내 영혼은 오래되었으나』를 거쳐 『청동의 시간 감자의 시간』에 이르는 긴 여정에서 보여준 변모의 흐름 속에서 읽을 때 그 의미가 더욱 살아나는 시들이다.



2


자신의 시를 ‘반(反)전쟁시’로 읽어 달라는 시인의 말이 아니더라도 『내 영혼은 오래되었으나』에서부터 그녀의 시는 부쩍 인류를 향한 보편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녀의 첫 번째, 두 번째 시집에 비해 세 번째, 네 번째 시집이 그다지 주목받지 못한 이유는 어쩌면 여기에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녀의 질펀한 듯 농염한 듯 물기 어렸다가도 바스러질 듯 허망하고 마른버짐 피어오를 것 같은 언어의 맛에 길들여진 독자들에게 평화와 반전(反戰)의 메시지를 담은 듯 느껴지는 언어는 생소했던 것이 아닐까.

첫 시집 『슬픔만한 거름이 어디 있으랴』에서 진주말과 남도의 토박이 정서로부터 출발한 허수경의 시는 『혼자 가는 먼 집』에서 서울이라는 대도시에서의 생활과 도시적인 정서를 서울말로 옮겨 적는다. 그것은 “당신”을 부르며 “킥킥”(「혼자 가는 먼 집」)거리는 웃음소리만큼이나 병적이고 자폐적인 상처로 얼룩져 보였다. 그리고 머지않아 그녀는 훌쩍 독일로 날아간다. 아무런 기약도 없이 우리 곁을 떠난 시인에게선 고고학을 공부하고 있다는 소문이 간간이 들려오더니, 『모래도시』라는 사막의 허망함이 가득 묻어나는 장편소설을 불쑥 던져 놓았다. 제목에서 느껴지던 불모의 정서는 소설 곳곳에 스며들어 있었고, 소설은 떠돌 수밖에 없는 그녀의 운명과 외로움을 간접적으로 전해주고 있었다. 간간이 잡지에 시를 발표해 오던 시인은 세 번째 시집 『내 영혼은 오래되었으나』를 독일에 체류한 채 출간한다. 우리 시대에 얼룩진 전쟁의 상흔은 이 무렵부터 허수경의 시에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장갑차를 타고 국경을 지나 천막 수용소로 들어가”는 “아이들”(「내 영혼은 오래되었으나」)의 모습이나, “전쟁이 나고” “제 목을 자르며 차가운 땅속으로 들어가”는 “사람들”(「늙은 새는 날아간다」)의 모습이 그려진다. 그리고 시인은 “혀가 없다 그 어디인가 / 아는 사람 집 그 집에 다 두고 왔다”(「바다가」)고 고백한다. 그것은 떠나버린 고향과 진주말에 대한 자전적 고백처럼 들렸다. 사막과 폐허의 한가운데서 씌어진 듯했던 그녀의 시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상실감 사이에서 흔들리는 것처럼 보여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그리고 『청동의 시간 감자의 시간』에 이르러 그녀는 잃어버린 진주말을 되찾는다. 그것은 먼 길을 돌아 비로소 그녀가 인정한 자신의 얼굴이기도 했을 것이다. 먼 곳에서 자신의 고향과 자신의 언어를 다시 돌아보며 쓴 이 시집에 실린 시편들은, 멀리 떠난 후에야 비로소 자신이 짊어지고 있던 운명의 무게와 자신의 모습을 제대로 들여다볼 수 있게 된 자의 향기를 풍기고 있다. 『내 영혼은 오래되었으나』가 시인의 오랜 방황과 외로움의 흔적을 담고 있었다면, 『청동의 시간 감자의 시간』은 좀더 편안해진 얼굴로 자신의 모습을 들여다볼 수 있게 된 시인이 얻은 깨달음과 안식이 느껴지는 시집이다.


아이들 자라는 시간 청동으로 된 시간

차가운 시간 속 뜨겁게 자라는 군인들


아이들이 앉아 있는 땅속에서 감자는

아직 감자의 시간을 사네


다행이군요,

땅속에서 땅사과가 아직도 열리는 것은

아이들이 쪼그리고 앉아 땀을 역청처럼 흘리네


물 좀 가져다주어요

물은 별보다 멀리 있으므로

별보다 먼 곳에 도달해서

물을 마시기에는

아이들의 다리는 아직 작아요


언젠가 군인이 될 아이들은 스무 해 정도만 살 수 있는 고대인이지요, 옥수수를 심을 걸 그랬어요 그랬더라면 아이들이 그 잎 아래로 절 숨길 수 있을 것을 아이들을 잡아먹느라 매일매일 부지런한 태양을 피할 수도 있을 것을


아이들을 향해 달려가는

저 푸른 마스크를 쓴 이는 누구의 어머니인가,

저 어머니들의 얼굴에 찍혀 있는 청동의 총,

저 아이를 끌고 가는 피곤한 얼굴의 사람들은


아이들의 어머니인가

원숭이 고기를 끓여 아이에게 주는 푸른 마스크의

어머니에게 제발 아이들의 안부 좀 전해주어요

아이들이 자라는 그 청동의 시간도, 그 뜨거운 군인이 될 시간도

―「물 좀 가져다주어요」(『청동의 시간 감자의 시간』)


특히 인용한 시는 허수경의 시적 흐름 속에서 보나 우리 시사에서 보나 문제적인 작품이다. ‘청동의 시간’과 ‘감자의 시간’으로 표현된 대립적 이미지가 이 시를 지탱한다. “청동으로 된 시간”은 “아이들이 자라는 시간”인데, 그것은 아이들이 자라서 “군인들”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언젠가 군인이 될 아이들은 스무 해 정도만 살 수 있는 고대인”이라고 시의 화자는 말한다. 전쟁이 아이들의 목숨을 곧 앗아가 버릴 것이기 때문이기도 하고, 전쟁에 가담하여 군인이 되는 순간 이미 살아 있는 시간이라고 할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전쟁은 누군가를 살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 총칼을 들고 누군가를 죽이기 위한 싸움이므로, 무기를 연상시키는 청동의 시간에 비유한 것이다. 생명이 흐르지 않는 금속성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으므로 ‘청동의 시간’은 차가운 시간이다. 한편으로 그것은 생명을 빼앗는 광기에 사로잡힌 시간이므로 ‘뜨거운 시간’이기도 하다.

미쳐 돌아가는 전쟁의 시대에는 아이들의 성장조차 스스로도 살고 다른 존재도 살리는 ‘생성’의 의미를 지니지 못하고, 생명을 지닌 존재들을 죽음으로 이끄는 ‘죽임’의 광기에 사로잡히게 마련이다. 그런 세상에선 아이들 역시 예비 군인들일 뿐이다. 그러나 이렇게 막막한 상황에서도 시인은 “감자의 시간”에 주목한다. “아이들이 앉아 있는 땅속에서 감자는 / 아직 감자의 시간을” 산다. 그것은 다른 존재를 죽이는 살육의 시간과는 상반된 ‘살림’의 시간이다. 감자의 알이 굵어가는 그 시간은 “땅사과”가 열리는 시간이기도 하다. 죽임이 기승을 부리는 그 시간에도 생명을 키우는 움직임이 진행되고 있다는 것은 화자의 말마따나 “다행”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아이들”은 “쪼그리고 앉아 땀을 역청처럼” 흘린다. 아이들의 땀을 역청에 비유한 것은 아이들이 자라는 시간이 청동의 시간인 것과 무관하지 않다. 아스팔트와 청동은 생명을 지니지 않은 무생물로 ‘감자’와 ‘땅사과’에 대립되는 이미지를 형성한다. 또한 햇빛을 받으면 뜨거워지는 성질을 가지고 있는 아스팔트와 청동은 광기의 시대를 가리키는 상징으로 적합하다.

생명을 지닌 존재는 태양을 쬐면 한층 생명력이 왕성해지면서 성장한다. 나뭇잎만 햇빛을 받으면 광합성을 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도 햇빛을 받으며 자란다. 그런데 전쟁의 광기로 들끓는 세상에서는 아이들이 자란다는 것은 언젠가는 군인이 되어 누군가를 죽인다는 것을 의미한다. 태양은 ‘청동의 시간’을 작동하게 하는 에너지인 셈이다. 따라서 이 시에서 태양은 부정적인 의미를 가질 수밖에 없다. 아이들의 성장을 촉진시키는 태양을 피하기 위해 “옥수수를 심을 걸 그랬”다는 화자의 말이 이어지는 까닭은 바로 여기에 있다. 그것은 후회라는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아주 소극적인 거부이기는 하나, 태양의 부정성을 드러내주는 데 기여한다.

그러면 아이들이 군인이 되는 시간을 속수무책으로 지켜보고만 있어야 하는가? 전쟁의 광기를 막을 힘은 어디에서도 기대할 수 없는 것일까? 시인은 땅속에서 굵어가는 “감자의 시간”에서 실마리를 찾는다. 감자의 시간은 자신이 살기 위해 다른 존재를 해하거나 죽이는 시간이 아니라, 자기 존재에 충실한 시간이다. 그것은 태양이 지닌 공격성마저 긍정적인 힘으로 전이시킨다. 감자가 굵어지기 위해 필요한 또 한 가지는 물이다. 물은 감자알을 굵어지게 만들 뿐만 아니라, 달아오른 청동을 식혀주기도 한다. “감자의 시간”을 지속시키기 위해서도 “청동의 시간”이 진행되는 것을 늦추거나 멈추기 위해서도 물은 필수적이다. “물 좀 가져다주어요”라고 시인이 외치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그런데 “물은 별보다 멀리 있으므로 / 별보다 먼 곳에 도달해서 / 물을 마시기에는” 아이들은 역부족이다. 물을 마시러 “별보다 먼 곳”까지 가기 위해서는 아이들이 더 자라야 하지만, 그것은 곧 군인이 되어야 하는 청동의 시간에 가까워지는 일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시인은 목청 높이 외친다. “물 좀 가져다주어요” 하고 말이다. 세상을 향한 절박한 외침인 것이다.

아이들에게 물을 가져다주는 움직임은 절박한 도움 요청에 응하는 구원의 몸짓이라고 할 수 있다. 아이들에게 물을 가져다주는 발걸음이 하나 둘씩 늘어갈수록 생명이 자라는 ‘감자의 시간’은 무르익을 것이고, 전쟁이 가속화되는 ‘청동의 시간’은 그 광기가 식어갈 것이다. 또한 “역청처럼 흘리”던 아이들의 땀도 차갑게 식어갈 것이다.

“물 좀 가져다주어요”라는 절박한 외침에 “푸른 마스크를 쓴” 어머니들이 “아이들을 향해” 달려간다. “저 푸른 마스크를 쓴 이는 누구의 어머니인가”? 아마도 “아이들의 어머니”일 것이다. 누구 한 아이의 특정의 어머니가 아니라 아이들 모두의 어머니일 것이다. “저 어머니들의 얼굴에”는 “청동의 총”이 찍혀 있다. 전쟁의 낙인이 이미 어머니들의 얼굴에도 찍혀 있는 것이다. 어른의 세계에 속하는 이상 어머니라고 해서 예외일 리는 없다.

그러나 전쟁의 시간에 속해 있어도 어머니는 군인의 모습과는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총은 어머니의 손에 들려 있는 것이 아니라 어머니의 얼굴에 찍혀 있다. 전쟁의 책임으로부터 온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총부리를 들이대며 학살에 참여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구원을 요청하는 아이들에게 누구보다도 먼저 달려가고 지친 아이들을 끌고 가는 역할을 한다. 어머니의 움직임은 아이들에 의해 이루어지는데, 그것은 어머니의 눈과 귀가 아이들을 향해 예민하게 열려 있는 것을 간접적으로 암시한다.

어머니가 군인들과 구별되는 까닭은 어머니가 쓰고 있는 “푸른 마스크” 때문이다. 푸른 마스크는 공격의 의미보다는 방어의 의미를 상징적으로 갖는다. 전쟁의 시간을 살고 있는 한, 어머니들 역시 전쟁의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음을 어머니들의 얼굴에 찍혀 있는 “청동의 낙인”을 통해 시인은 보여주지만, 그래도 어머니와 군인들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살육과 학살의 주체가 되느냐 그렇지 않으냐. 그 책임은 결코 작지 않은 것이다. “푸른 마스크”를 쓴 어머니를 통해 우리는 방어적인 어머니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전장에서 어머니들이 하는 일이라곤 아이들의 부름에 응해 달려가는 것이나 지친 아이들을 끌고 가는 것, 그리고 아이들에게 “원숭이 고기를 끓여” 주는 것이다. 어머니들은 누군가를 죽이는 일이 아니라 아이들을 먹이고 북돋아주고 살리는 일에 자신을 투신한다. 어머니들이 궁금해 하는 것은 오로지 아이들의 안위이다. 아이들이 있는 곳이면 달려가 음식을 끓여 주고 물을 떠다 주고 하는 것도 아이들의 안부를 묻기 위해서이다. 이미 누구의 아이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전쟁은 어머니들의 안타까운 눈물과 한숨을 낳을 수밖에 없다.

물론 이 아이들은 곧 군인이 될 아이들이다. 아이들이 군인이 되는 것을 막을 수 없는 한 어머니들도 전쟁의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다. 그러나 어머니는 아이들이 자라 군인이 되는 시간, 즉 청동의 시간에 속해 있으면서도 또한 벗어나 있다. 총을 들기보다는 푸른 마스크를 쓴 채 들것을 들고 식기를 든 어머니. 이것이 시인이 그리는 어머니의 모습이다. 저 어머니들의 얼굴에도 청동의 총은 찍혀 있지만 그것은 총구에 불을 뿜으며 발사되지는 않는다.

“물 좀 가져다주어요”는 뜨거운 군인이 되어가는 아이들의 절박한 외침이자, 아이들이 역청을 흘리며 청동의 시간을 견디는 모습을 안타깝게 바라보는 시인의 외침이기도 하다. 그것은 타자를 향해 건네는 도움 요청의 말이다. 누군가 그 말에 응답해 손 내밀 때 그것은 한 생명을 살리는 구원의 말이 될 수 있다. 물은 뜨거운 군인의 시간이자 청동의 시간을 식혀주는 차가운 생명수이다. “사탕수수도 목화도 자라지 않는 이 폐허”(「새벽 발굴」)를 구할 수 있는 존재인 것이다. 전쟁의 광기 역시 물 앞에서는 스러진다. 또한 감자를 무럭무럭 자라게 하는 생성의 힘을 지니고 있다.

세상을 향한 시인의 외침은 절박하다. 그것은 세상의 어머니들을 향하고 있기도 하다. 전쟁의 폭력과 광기마저 끌어안는 시인의 생명력은 따지고 보면 연원이 오래다. 폐병쟁이 내 사내를 돌보던 거침없는 손길(「폐병쟁이 내 사내」), “금방 울 것 같은 사내의 아름다움”을 끌어안고 다독이던 외롭고 따뜻한 품(「혼자 가는 먼 집」), 집 나간 아이를 찾아 온 동네 변소를 휘젓고 다니던 어머니의 모습(「두렵지 않다, 그러나 말하자면 두렵다」)이 우리에게는 이미 익숙하다. 시집마다 다른 모습으로 변모한 것 같았지만 허수경 시인의 여성성은 점점 더 그 뿌리가 깊어졌을 뿐이다. 그리고 마침내 「물 좀 가져다주어요」에 와서 세상을 향해 외친다. 이 전쟁과 광기의 시대에 우리에게 제발 물 좀 가져다 달라고.



3

 

단 한 편으로 영혼을 사로잡는 시도 있다. 허수경의 시도 출발은 그런 시에 가까웠다. 그런데 진주에서 서울로, 다시 독일로, 또 어딘가의 발굴 현장으로 고향으로부터 점점 멀어지기만 하는 시인의 행보 속에서 그녀의 시는 커다란 나선형을 그리며 달라져 갔다. 그리고 네 번째 시집에 이르러 끊임없이 멀어질 것만 같았던 그녀의 여정은 돌아오는 길을 찾기 시작한 것 같다. 체질적으로 돌아다니는 것을 싫어함에도 불구하고 멀리 달아날 수밖에 없는 이상한 운명에 사로잡혀 있었던 허수경 시인은, 멀리 달아남으로써 비로소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올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떠나야만 자신을 느끼고 또한 자신에게로 돌아올 수 있는 운명도 있을 것이다.

우리 시는 오랫동안 민족과 국가의 경계에 사로잡혀 있었다. 식민지 조선의 현실을 안고 근대시가 출발했기 때문에 더더욱 그랬고, 해방 이후에도 파란만장한 정치사를 체험하면서 여전히 국가와 민족은 우리를 규정하는 울타리가 되어 왔다. 개인의 정서적 체험을 중시하는 시 역시 이러한 규정으로부터 온전히 자유롭지는 못했다. 개인 언어를 통해 보편 언어에 이르는 훌륭한 사례들을 우리 시사에서 종종 만날 수는 있었지만 좀처럼 국경 바깥을 자유롭게 넘나들지는 못했다. 대개는 일시적인 여행이거나 돌아옴이 전제된 떠남에 불과했다.

허수경의 네 번째 시집 『청동의 시간 감자의 시간』에서도 먼 길을 돌아 자신에게로 되돌아와 비로소 자신을 받아들이게 된 시인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지만, 그에 못지않게 눈여겨보아야 하는 것은 「물 좀 가져다주어요」를 통해 시인이 생성과 희망을 노래하는 방식이다. 여성성은 시인에게 생래적인 것이었지만, 이제 고고학적 시간을 탐색하고 전쟁의 현장을 목격하는 시인의 체험과 역사와 인류의 미래에 대한 시인의 지속적인 문제의식이 만나, 파괴가 아닌 생성의 시간을 그녀의 언어를 통해 조심스럽게 전염시키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어쩌면 그녀는 몸뿐만 아니라 의식도 국경을 훌쩍 뛰어넘어 보편의 언어에 도달하고자 하는 것은 아닐까. 그것은 그녀의 네 번째 시집이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 ‘진주말 혹은 내 말’을 회복한 후에야 비로소 도달할 수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녀가 그리는 풍경은 여전히 쓸쓸하고 황량하고 전쟁의 포연이 가시지 않은 뿌연 곳이지만, 마른 입술을 물로 축이며 아주 조금씩 그리움과 평화와 희망의 언어를 입에 올리기 시작한 듯하다. 《문장 웹진/ 2007년 2월》



주1) 해는 같은 시집에 실린 허수경의 다른 작품 「새벽 발굴」에서도 “발굴지를 덥석 집어 제 식민지를 건설”하고 “관리하는” “우주의 소작인”이라는 부정적인 상징으로 그려진다. 「물 좀 가져다주어요」에서도 “아이들을 잡아먹느라 매일매일 부지런한 태양”이라는 구절이 등장하는데, 허수경의 시에서 태양은 이처럼 “덥석 집”어 올리거나 “잡아먹는” 역동적이고 능동적인 행위를 동반한다. 그것은 건설하고 관리하고 집어삼키는, 인류의 전쟁과 식민의 역사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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